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 재일한인 2세 고찬유의 구술생애사 -
 
이토히로코·야마토유미코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인문사회연구소
도서출판 책과세계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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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한반도를 떠나 타지역에서 생활의 터전을 형성하고 거주하는 한
인 디아스포라는 현재 약 750만 명에 이른다. 재일한인은 그 가운
데 대표적인 한 집단으로, 이들은 크게 식민지 과거에 기인한 올드
커머(old comer)와 1980년대 이후 노동력 이동에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뉴커머(new comer)’로 구성된다. 특히 올드커머는 일본
의 식민지 정책하에 자발/비자발적으로 일본으로 이주하였고 해방 
이후에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여 일본에 그대로 정착한 조선인 
및 그 후손들이다. 식민지 시대에 기인한 올드커머 재일한인들은 
현재 고령화, 국제결혼 증가 및 일본 국적 취득 등으로 인해 그 
수가 줄어들고 있으나 한국/조선 국적 및 일본 국적 취득자까지를 
포함하면 아직도 80만 명 이상이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다.
  올드커머 재일한인들은 일본 사회의 민족차별과 편견으로 인해 
한때 힘든 생활이 강요되었다. 특히 1세는 태어나 자란 고향·한반
도를 떠나 ‘조선인’임에도 ‘일본인’으로서 생활해야 했고 해방 이후
에도 심한 차별과 제한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2세는 1세의 등을 보면서 차별과 빈곤 속에서도 민족성 확립에 대
한 고민을 하며 살아온 세대이다. 그러나 2세들은 개인의 특성을 
기반으로 각고의 노력을 다하여 점차 일본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였다. “재일 2세의 삶은 만화경으로 보는 것처럼 다양성과 
개별성이 넘친다(姜尙中, 2016)”라는 표현이 있듯이 2세들은 각인
각색의 삶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에서는 2011년부터 SSK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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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디아스포라 연구단의 사업을 통해 일본을 비롯한 중국, 러시
아, 중앙아시아 재외한인들의 삶을 단행본 『재외한인 구술사 총서』
로 출간해 왔다. 2019년에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에 선정된 이후
에는 지역별로 다양한 재외한인의 삶을 기록하고자 기존 총서 작업
을 더욱 발전시켜 수행하고 있다. 
  재외한인 총서 가운데 재일한인을 주제로 한 총서는 『일본 가나
가와 지역 재일한인의 생활사』, 『자갈투성이의 신작로: 재일한인 
2세 배중도의 생애와 민족』, 『일본 오사카 지역 재일한인의 구술생
활사』, 『자이니치, 민족과 조국』, 『오사카 사랑방, 재일한인 1세 
할머니』,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에 이어 7권째이다. 
특히 재일한인 개인 구술생애사로서는 가나가와 가와사키에서 재
일한인 및 재일외국인의 인권문제를 위해 시민활동가로 활동해온 
배중도씨, 규슈 후쿠오카현에서 재일한인의 역사와 강제연행의 역
사를 카타리베 활동을 통해 일본 사회에 알리고 있는 배동록씨에 
이어서 세 번째이다. 
  본 총서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는 논픽션 작가, 영화감독, 
저널리스트 그리고 대학교 강사 등으로 다양한 문화 활동을 통해 
재일한인 문제를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재일한인 2세 고찬유씨가 
주인공이다. 고찬유씨는 1947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일본학교에 
다니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에는 재일한인이라는 민족
성에 대해 고민하며 ‘민족허무주의자’로 살아왔다. 그러나 같은 재
일한인 선배와의 만남을 통해 총련 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조선
대학교로 진학, 졸업 후에는 총련 내부 문학예술가동맹에 취직하여 
다양한 문화 활동을 진행해 왔다. 시나리오, 소설, 시, 연극,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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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에 적극 참여해왔고, 총련을 그만둔 후에는 그 활동 범위를 
더욱 넓혔다. 
  특히 재일한인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책 발간과 더불어 영상기록 
회사를 설립하여 개인적으로도 재일한인들의 삶을 기록해왔다. 이
러한 활동은 영화제작으로 이어졌으며, 재일한인의 교육 문제를 
다루는 『아이들의 학교』를 제작, 개봉하게 되었다. 재일한인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재일외국인, 그리고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
한인에 대한 관심도 많아 연구 활동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재일외국인 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으며, 매일 일본 각지
에서 취재 활동을 하고 있다.
  본 총서는 크게 4부로 나눠진다. 제1부에서는 고찬유씨의 가족이
주사, 일본학교에서 보낸 어린 시절, 조선학교 진학 후 학생 생활, 
결혼과 자녀교육, 그리고 한국 국적 취득과 관련된 개인사를 정리하
였다. 제2부부터 제4부까지는 다양한 문화 활동을 시기와 내용에 
따라 정리하였다. 제2부는 연극 활동, 북한 방문과 문학, 재일한인
을 위한 잡지 발간 등 문학 활동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였다. 제3부
에서는 대학교 강사 시절을 중심으로 이전부터 몰두하던 재일한인 
문제에 더불어 재일외국인 문제, 재외한인 문제까지 확장한 연구 
내용을 정리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4부에서는 기억과 기
록을 주제로 하여 재일한인 및 재외한인의 삶의 기록과 관련된 활동
을 담고 있다. 특히 2019년에 개봉된 『아이들의 학교』의 제작 계기 
및 과정, 상영, 그리고 영화제작물의 사회적 효과 등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이와 같은 고찬유씨의 문화 활동은 재일한인에 머무르
지 않고 재일외국인, 재외한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제기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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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줄어들고 있는 ‘역사의 산증인’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데에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본 연구소에서는 직접 연구대상자와 만나 인터뷰 조사 
및 현장조사를 통해 총서작업을 진행해 왔다. 그러나 2020년 갑작
스럽게 코로나19가 확산되었고 현재까지 상황이 수습되지 않아 연
구원에서 직접 조사를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 
총서는 일본 규슈쿄리츠대학교 야마토 유미코 교수와 연계하여 조
사를 진행해 온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인문사회연구소지업사업에서는 지
속적인 재외한인 구술사 단행본 출간 작업을 통해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삶을 보내고 있는 이들의 ‘숨어있는 역사’를 기록하고 ‘아래
로부터의 역사’를 수집, 보관하고자 한다. 따라서 향후 본 연구원의 
재외한인 구술사 집필 노력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
하는 바이다.
2021년 6월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인문사회연구소
- v -
プロローグ
 
在日朝鮮人であってよかったと思うのは、やっぱあるんですよ。やっ
ぱり自分の生き方に迷う必要がないというかね。もう、まっしぐらで
すわ。ほとんどね。テーマによってはね、ある問題が起こったら、これ
は正しいか間違っているのか、判断迷うの、いっぱいあるじゃないで
すか?在日朝鮮人の差別なくすってのは、迷いようがない(本書、
94頁)。
本叢書が発刊に至ったのは、髙賛侑さんとの出会いによる。髙賛侑さ
んのご活動は知っていたものの、直接の面識はなかった。髙さんを紹介し
てくださったのは、本書にも登場する金静媛さんである。どなたかこの企
画に応じてくれそうな方をご紹介いただけないかと頼んだところ、髙賛
侑さんのお名前が挙げられた。
金静媛さんと髙賛侑さんの出会いは、金静媛さんが大学生だった40
年ほど前に遡る。在日コリアンの大学生らが演じ、金静媛さんも出演し
た「我が魂を炎に照らし」の脚本を書き、演技の指導を担当したのが髙賛
侑さんだった。
「髙賛侑さんのライフヒストリーが聞けるなんて」と胸は踊ったが、
「著名な作家で映画監督の方なんて正直難しいと思う」という伊藤浩子さ
んの考えに私も同感だった。いったん手紙で趣旨を説明したのち、大阪行
きの新幹線に乗った。髙賛侑さんが綴られた『コリアタウンに生きる─
─洪呂杓ライフヒストリー』(エンタイトル出版、2007年。2021年に満
天堂より改訂版が出版される)に登場する班家食工房でビビンパを食
べ、待合場所の鶴橋駅に向かい、髙賛侑さんとお会いした。「イン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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ビューは自宅で」とおっしゃる。本当に同意してくださるのだ、と驚きと
ともに嬉しさが込み上げた。
本書では、「在日朝鮮人の差別をなくす」という揺らぎない信念が、問
題関心と方法の双方で広がりを見せていく過程を知ることができる。在
日外国人の境遇にも関心が向けられながらも、一方で朝鮮学校の無償化
問題を扱ったドキュメンタリー映画「アイたちの学校」の制作など、表現
方法も多様化していく。「演劇で培われた技術が、映画制作に活かされ
た」と髙賛侑さんは本書で語っている。これまでのいかなる経験がどの
ようにつながっていくのか、読者の方々には、その結びつきをぜひ読み
解いていただければと思う。
インタビューは合計4回行った。髙さんはどの出来事や活動も時系列
に沿って、丁寧にお話してくださり、聞いていると当時の状況がありあ
りと浮かぶようであった。本書には、日本社会において在日コリアンが抱
えさせられている諸問題に向き合い、そして、さまざまなかたちで表現し
訴えかける、髙賛侑さんの姿が写し出されている。そこからは、その活動
のいわば「舞台裏」というべき、その裏にある考えや信念を見て取ること
ができるだろう。本書を読んだうえで、あらためて髙賛侑さんの作品を
読み返したり、観なおしてみたりするという味わい方もまた、オツでは
なかろうか。
4回目のインタビューは、大阪府と福岡県の両方に緊急事態宣言が
発令されたことから、Zoomでの実施となり、大邱に住む伊藤さんと、下
関の金静媛さんも参加された。最後のインタビューで直接お会いできな
かったのはとても残念だったが、初めて全員が一堂に「会する」ことがで
きた。
本書の出版にあたって、本プロジェクトにご同意くださり、インタ
- vii -
ビューはもとより、その後の校正作業にもお時間を割いてくださった髙
賛侑さんにあらためまして深く感謝するとともに、今後一層のご活躍を
心より祈念いたします。髙賛侑さんとの出会いを繋いでくださった金静
媛さんのおかげで本書は出版に至りました。感謝の念に耐えません。そし
て、伊藤浩子さんをはじめ、慶北大学社会科学研究院の先生方に、このよ
うな機会を与えていただきましたことをこの場を借りて感謝申しあげ
ます。
2021年6月
 大和裕美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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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제1부 가족, 학교, 결혼 ·······················································1
제1장 민족성을 고민하던 어린 시절·········································3
▮ 가난한 생활 속에서 유지해 온 전통문화·······························4
▮ ‘민족허무주의자’였던 일본학교 학생 시절·····························7
▮ 한일조약 반대운동 속에서 생긴 국제주의적 정체성············9
제2장 조선대학교 학생 시절····················································13
▮ 조선대학교 진학 결정 계기···················································14
▮ 조선대학교에서 겪은 딜레마··················································16
▮ 시나리오와의 만남···································································19
▮ 육체노동을 하면서 다녔던 시나리오 학교···························21
제3장 결혼과 자녀교육····························································29
▮ 중앙예술단 가수 이명옥과의 결혼········································30
▮ 조선학교에 맡긴 자녀교육·····················································31
▮ 딸 고설화(高雪華)와 아들 고유사(高悠史)·····························33
▮ 한국 국적 취득········································································35
제2부 문학 활동·································································37
제4장 문학 활동을 통한 민족성의 강화··································39
▮ 문학예술가동맹 배치와 창작 공연 활동·······························40
- ix -
▮ 북한 귀국사업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 『항로』 집필············42
▮ 재일본조선유학생동맹의 의뢰로 공연한 첫 연극 「침묵」···44
▮ 한국 사회를 다루는 연극 제작과 재일한인 청년들의 참여··49
제5장 북한 방문 이후의 조국을 위한 활동····························57
▮ 문학예술일꾼대표단으로 북한 첫 방문·································58
▮ 북한 재방문, 북한 귀국사업에 대한 생각···························59
▮ 조국 통일을 기원하며 남북 공동응원단 참가·····················61
▮ 조선인 피폭자 조사단 참가···················································64
제6장 재일한인을 위한 정보 잡지 발간··································67
▮ 오사카 재이주와 『상봉』 발간, 총련 해고····························68
▮ 저널리스트 활동의 본격화·····················································71
▮ 『미래』의 발간과 폐간·····························································73
제3부 교육과 연구 활동······················································77
제7장 대학교 강사와 연구 활동··············································79
▮ 대학교에서의 강사 생활·························································80
▮ 일본 내 외국인학교의 문제점················································85
▮ 효고현 외국인학교협의회의 설립, ‘외국인학교 안의 조선학교’
··································································································89
▮ 재일외국인 차별을 없애기 위한 집필활동···························94
제8장 재외한인 연구로의 관심 확장·····································101
- x -
▮ 민족성을 유지하며 중국인과 공생하는 조선족·················102
▮ 자본주의국가 미국의 코리아타운········································105
▮ 재일한인보다 심한 차별을 겪은 고려사람들·····················109
▮ 재외한인 조사를 통해 재일한인 차별의 심각성 자각······114
제4부 기억과 기록, 영화 활동··········································119
제9장 재일한인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활동························121
▮ 재일한인의 기억을 책으로 발간··········································122
▮ 비디오와의 만남, 기록으로 남기고 선물하기····················127
▮ 재일한인 할머니를 영상으로 기록하기······························133
▮ 라이프 영상 워크 설립과 고려사람 취재··························135
제10장 재일한인의 교육권 투쟁, 영화 『아이들의 학교』 제작   
·······················································································141
▮ 흑인 문제를 통해 깨달은 재일한인 차별의 ‘이상함’·······142
▮ 고교무상화 재판 패소를 계기로 영화 제작 결심·············144
▮ 스태프 및 비용 마련····························································150
▮ 축적된 문화 활동의 발현·····················································155
▮ 영화에 대한 내부 평가·························································158
제11장 『아이들의 학교』 상영 운동의 확대·························161
▮ 일본 국내 상영 운동····························································162
▮ 일본 영화계의 인정······························································166
▮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아이들의 학교』 상영 운동············168
- xi -
제12장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향후의 활동··························175
▮ 활동의 근간인 민족교육 문제·············································176
▮ 조선학교의 미래····································································177
▮ 재일외국인을 다루는 새로운 영화 준비 중·······················178
◆ 찾아보기············································································181
- xii -
고찬유 감독 
- xiii -
고찬유 연보
1947년
:
오사카시 미야코지마구(都島区)에서 출생
1954년
:
오사카시립 요도가와(淀川) 초등학교 입학
1960년
:
오사카시립 요도가와 중학교 입학
1963년
:
오사카부립 시미즈타니(淸水谷)고등학교 입학
1966년
:
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입학 
1970년
:
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부 졸업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도쿄지부 근무
1974년
: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중앙본부 근무
1977년
: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도쿄지부 근무
1981년
: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오사카지부 근무
1981년
:
이명옥과 결혼
1982년
:
장녀 고설화 출생
1983년
:
상봉사(相逢舎)설립
조선관련정보지 『상봉』 창간(편집장)
1984년
:
장남 고유사 출생
1986년
:
오사카 이쿠노구로 이사
1988년
:
조선관계 월간잡지 『미래(未來)』 창간(편집장)
1989년
:
㈜パン・パブリシティー 설립에 참가
1997년
:
㈜パン・パブリシティー 퇴사
이후, 논픽션작가로서 활동
1994년
:
일본 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근무
2014년
:
리츠메이칸대학교 코리아연구센터에서 
객원연구원으로 활동
라이프・히스토리 영상기록회 설립(대표)
2015년
:
라이프영상워크 설립(대표)
현재
:
논픽션작가, 영화감독, 라이프영상워크 대표, 
자유저널리스트클럽 이사 등 
제1부 가족, 학교, 결혼 
제1장 민족성을 고민하던 어린 시절 
가난한 생활 속에서 유지해 온 전통문화
‘민족허무주의자’였던 일본학교 학생 시절  
한일조약 반대운동 속에서 생긴 국제주의적 정체성
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1)
 일본어로 진행된 인터뷰 조사에서 고찬유 감독은 ‘재일한국인’, ‘재일조선
인’, ‘재일코리안’ 및 ‘재일한국·조선인’ 등 다양한 호칭을 사용하였다. 그러
나 본고에서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감독과 의논 하에 해방 이전에 일본에 
잔류한 사람들은 ‘조선인’, 해방 이후에는 ‘재일한인’으로 통일하였다. 다만 
조직이나 법률 등 고유명사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조선인’이라는 용어를 그
대로 사용한다. 
▮ 가난한 생활 속에서 유지해 온 전통문화
  1930년대 후반 할아버지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 같아요. 
그때 부모님 형제도 다 같이 건너온 것 같고요. 그래서 그 세대까지
는 1세이고, 그 아래는 다 2세이죠. 당시 많은 재일한인1)들은 누군
가가 먼저 일본으로 건너와 먹고 살 길을 찾고 나서 가족이나 친척
을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우리 집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부모님(아버지 고중선, 어머니 양희정)도 일본 식민지 시대
에 건너왔는데 학식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전형적인 조선인 1세
의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도장업을 중심으로 다양한 
잡역을 하셨고 어머니는 우산을 수선하는 일을 하셨어요. 하여간 
가난한 생활을 했어요.
  나는 1947년 6월 26일, 오사카시 미야코지마(都島)구에서 태어
났어요. 우리 집 근처는 오사카 시내라서 인근에 재일한인이 전혀 
없진 않았지만 산재하여 거주하고 있는 동네였어요. 당시는 모두 
가난했죠.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제1장 민족성을 고민하던 어린 시절   
5
2)
 고찬유 감독은 계간지 『계론21(季論21)』 안에서 학생 시절 민족적 콤플렉
스에 대해 “1950년대, 60년대 때는 뿌리 깊은 차별의식이 일본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었고, 나도 조선인이라는 것을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하던 전형적인 
민족허무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참조: http://www.k
iron21.org)
따로 사셨어요. 돼지를 키우시고. 당시 조선인들은 그런 일 많이 
했었죠. 가끔 얼굴을 뵈러 가긴 했지만 일본으로 이주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언제 어떻게 건너오셨는지 전혀 몰라
요. 
  나는 일본학교를 다니면서 굉장히 심한 민족적 콤플렉스2)... 내
가 재일한인이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
에 집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전혀 없었어요. 우선 조선과 엮이
는 것을 싫어해서 전혀 접촉하지 않았어요. 
  형제는 형 3명(찬세, 찬남, 찬명), 누나가 1명(경순) 있는데 큰형
과 누나는 비교적 일찍부터 집을 나가 일했기 때문에 거의 집에 
없었어요. 큰형과 누나와 같이 생활했다는 기억은 없고 가끔 놀러 
가서 만나는 정도였죠. 결국 집에는 부모님과 둘째 형, 셋째 형 그리
고 내가 같이 살고 있었어요. 둘째와 셋째 형들은 신문 배달을 했었
고 나도 가끔 그걸 도와주기도 했어요. 
  그 당시 어린 마음에 안타까웠었던 것은 낮에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셨고 밤늦게 들어오시니 내가 저녁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었어요. 
몇 살 때부터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초등학생 때 오랜 기간 내가 
저녁을 만드는 역할을 맡아야 했어요. 옛날이라 전기밥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솥에 불을 지펴서 밥 지어야 했었죠. 가장 괴로웠던 
것은 친구들과 밖에서 놀고 있어도 저녁 5시쯤 되면 혼자 빠져서 
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3)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는 ‘조총련’이라 번역되지만 
‘총련(総聯)’이라는 약식이 일반적인 표현이라는 고 감독의 인식에 따라 본 
고에서는 ‘총련’이라고 표기한다.
장을 보러 가야 했었던 것이에요. 
  아버지는 장남이셨고 아버지의 남동생이 2명 계시는데, 그 삼촌
들도 오사카에 사셨어요. 제사를 지낼 때는 거기 가서 뵙긴 했어요. 
우리 집 근처에 조선학교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 세계와 전혀 
관계없이 살았었죠. 특히 우리 집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총련3))와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일본의 공립
학교로 진학하게 된 거죠. 
오사카 이쿠노시 
  츠루하시(鶴橋)에 살던 삼촌 집 아이들은 조선학교를 다녔었어
제1장 민족성을 고민하던 어린 시절   
7
4)
 일반적으로 통명(通名)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름이나 설명하는 말을 
뜻하지만, 일본에서는 재일한인을 비롯한 재일외국인들이 사용하는 일본풍
의 인명을 뜻하기도 한다.
요. 아들 둘, 딸 하나였는데 제사 때문에 그 집에 가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었죠. 그러나 조선학교가 어떤 곳인지, 그런 이야기를 
해 본 적은 없었죠. 사촌이고 같은 또래였으니까 친하게 지냈었지만 
조선학교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안 했던 것 같아요. 
  제사는 보통 장남 집에서 지내지만 우리 집은 비좁아서 둘째 삼촌 
집이나 셋째 삼촌 집에서 지냈어요. 삼촌들이 다 돌아가신 뒤에는 
우리 큰형 집에서 하게 됐어요. 제사 문화는 지금까지 전통 그대로 
계승되어 있긴 해요. 집마다 지역마다 형식이 다른 것 같지만 우리 
집에서는 일단 전통적으로 계속되어 있어요. 옛날에는 누군가의 
명일(命日), 구정, 추석 등등 연간 10번 정도 올렸어요. 여성분들만 
힘들고 큰 부담이 되었었죠. 그래서 점차 정리해서 지금은 연간 
2번 정도. 구정과 추석은 가족, 친척들이 모아서 올리고, 그때 누군
가의 명일 제사도 같이 올리는 식으로 바꿨어요. 우리 집뿐만 아니
라 최근엔 그런 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아졌다고 하네요. 
▮ ‘민족허무주의자’였던 일본학교 학생 시절
  나는 일본의 공립초등학교인 요도가와(淀川) 초등학교를 다녔어
요. 사회에서 ‘조선인 차별’이라는 게 만연해 있던 시대였기 때문에 
통명(일본명)4)으로 다녔고, 재일한인이라는 사실은 일체 숨기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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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녔어요. 민족적 콤플렉스가 너무 심했어요. 그래도 다행히 학교 시
험 성적은 좋았기 때문에 매 학년 반장을 했었고, 그래서 그런지 
‘조선인 이지메’라는 것이 나한테는 없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때는 학구가 좁으니까 왜인지 모르게 알려지게 
되는 거예요. 내가 한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낌새를 채고 알아차린 
애들도 있었죠. 하지만 나는 일본인과 싸우거나 그런 일은 없었어
요. 왜냐하면 나는 싸우는 편이 아니라 싸우는 애들을 말리는 편이
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반 여자애와 말싸움을 했었는데 그때 
딱 한 번 “조선놈”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그건 지금도 귀에 남아 
있어요.
  집 주변에 재일한인 집이 몇 집 있었긴 하지만 총련이나 민단(재
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현·재일본대한민국민단)과 관계가 없었고, 
민족적인 것과 접촉할 기회도 전혀 없었죠. 그래서 당연하게 일본학
교에 다니게 되었고, 조선학교를 다니겠다는 선택지는 전혀 없었
죠. 그래서 민족적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했다는 것이 정말 고통스러
운 일이었어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대로 일본의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나 스
스로 재일한인이라는 것이 더욱더 심각하게 여겨졌어요. 수업 중에 
교과서 안에 ‘조선’과 같은 단어가 나오면 뜨끔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건 재일한인이라면 거의 모두가 경험한 일이 아닐까 해요. 
  서서히 자아에 눈뜸에 따라 민족적 콤플렉스가 더 심각한 상태가 
되었어요.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요시다(吉田)라는 선생님이 
담임이 되었는데 정말 좋은 분이었어요. 향후 삶에 좋은 영향을 
많이 주셨던 것 같아요. 
제1장 민족성을 고민하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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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쯤이었는지, 어느 날 친하게 지냈던 일본인 친구 2명을 학교 
근처의 요도가와강 제방으로 불렀어요. 그리고 그 친구들한테 나는 
재일한인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어요. 친구들은 놀랐지만 “그런 건 
아무 관계없다”는 반응이었어요. 이후 뭔가 그 2명과의 관계는 다
른 사람들과 전혀 달라졌죠. 가장 숨겼던 것을 밝혔기 때문에 그들
에게만은 이젠 어떤 이야기든 다 할 수 있게 됐죠. 
  그리고 요시다 선생님 소개로 강영휴(姜影休)라는 선배를 만나게 
된 것도 중학교 3학년 때쯤이었어요. 강영휴 선배는 재일한인이라
고 선생님이 알려주신 거예요. 그 선배가 한 번 나를 보러 와줬는데 
그분도 역시 일본명으로 다니고 있었긴 한데 나와 달리 콤플렉스 
같은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강 선배는 성적이 아주 좋은 분이었어요. 당시 우리 학구에서는 
오테마에(大手前) 고등학교가 가장 머리 좋은 학교였고, 그다음이 
시미즈타니(清水谷) 고등학교였어요. 당연히 선배는 오테마에 고등
학교로 갈 수 있는 실력이 있었는데 시미즈타니로 간 거예요. 나도 
고등학교 진학할 때 성적 상으로는 오테마에에 갈 수 있는 수준이었
지만 선배한테 상담하러 갔죠. 그랬더니 오테마에는 차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시미즈타니라면 차별도 없고 자기도 다니고 있다고 
하니, 시미즈타니로 진학하게 됐어요. 
▮ 한일조약 반대운동 속에서 생긴 국제주의적 정체성 
  시미즈타니 고등학교는 당시 치고는 드물게 좌익계의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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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비교적 많았는데 그것이 나한테는 하나의 큰 플러스 요인이 되었어
요. 특히 영어 담당 기쿠이(菊井)라는 선생님은 좌익 운동을 하시는 
분은 아니었지만 수업 중에도 여러 가지 인간의 권리라든가, 사회 
안의 모순이라든가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나한테는 흥미로운 
내용이었어요. 
  그러던 중 나한테 큰 전환점이 된 것은 1965년, 고3 때였어요. 
1965년 6월에 한일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일본에서 커다란 반대운
동이 벌어졌죠. 전국적으로 학생시위가 일어났고 시미지타니 고등
학교 학생들도 사회주의연구회(사연, 社研)를 구성하여 시위에 참
가했고. 그런 사회적 분위기였지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민족적 
콤플렉스가 강했고 ‘조선’이나 ‘한국’이나 그런 것들과 거리를 두고 
관련 책도 절대 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일조약 반대운동이 고조되면서 나도 조금씩 자아에 눈
뜨기 시작했고 여러 가지 한일조약에 관한 것들, 신문이나 주간지나 
닥치는 대로 읽어봤어요. 그랬더니 재일한인이 차별을 당할 근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점차 느끼기 시작한 거예요.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것은 일본이고, 식민지가 됨으로써 피해를 받은 게 조선인이
고. 그 연장선에서 일본으로 건너와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는 게 
재일한인. 그러니까 재일한인이 차별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어요. 나쁜 것은 일본 측이 아니겠냐! 이러한 
의식을 가지게 됐어요. 
  사실 나도 한 번 한일조약 반대시위에 참가해 본 적이 있어요. 
오사카에 미도스지(御堂筋)라는 넓은 도로가 있는데 거기서 ‘미도스
지 시위’라는 게 벌어졌어요. 많은 시민들이 참가했는데 그중에는 
제1장 민족성을 고민하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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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도 꽤 많이 참가해서 도로에 가득히 퍼져서 행진한 거예
요. 나도 거기에 한 번 참가해봤는데 경찰 기동대가 시위대 사람들
을 둘러싼 거예요. 그래서 방패 같은 것으로 주변에 안 보이게 한 
다음 시위대 사람들을 다리로 막 걷어차고 있었던 거예요. 경찰관들
이 이런 식으로 탄압하는 광경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남아있어요. 
  그런 경험을 하면서 고등학교 졸업 후 어떻게 할까라는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집은 가난했고, 형제 중 누구도 대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죠. 그런데 형들, 특히 둘째 형이 열심히 도와줘서 대학교 
학비를 마련해주겠다고 하니 다음은 어디 대학교로 갈까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하여튼 미래에 대한 전망 같은 것이 전혀 없잖아요. 
보통 어릴 때는 장래 뭐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나는 
그런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었죠.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뭘 하면 되는지 몰랐는데 점점 나는 국적
과 같은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국제주의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한인이라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그 고민에
서 벗어나기 위한 구실로 ‘국제주의’란 고운 말에 피신하려고 한 
거죠. 그래서 나보다 고통스러운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일을 평생 하고 싶다는 의식이 강해졌어요. 
  그래서 한 번은 친구와 둘이서 사가(滋賀)현에 있는 지적 장애인 
복지시설에 가서 1주일 동안 봉사활동을 해봤어요. 꽤 유명한 시설
이고, 가봤더니 시설도 어느 정도 정비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당시 
원장이 아이들을 자주 때렸었죠. 아이들은 지적 장애가 있기 때문에 
작은 실수나 실패를 하잖아요. 그걸 가지고 때리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쓰는 비누가 떨어지면 장애인 아이의 가족한테 이야기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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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비누를 보내라고. 아이가 쓰는 게 아니라 자기가 쓰는 것인데. 그런 
더러운 현상을 직접 보니까 이제 복지 분야에서 일하겠다는 마음이 
사라졌죠.
  그다음 청년 해외 협력대라는 건데요. 아시아 나라 어딘가로 가
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오사카부청으로 가봤어요. 혼자 거기 가서 청년 해외 협력
대 참가를 생각하고 있다고 했더니 추천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추천 이유가 2년 동안 청년 해외 협력대를 다녀오면 평가가 높아진
다고. 나중에 일본에서 일할 때 유리하다고 그런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나는 봉사 정신으로 관심이 있었는데 그 직원은 다녀오면 
출세할 수 있다는 이야기만 하니까 환멸을 느꼈어요.
제2장 조선대학교 학생 시절
조선대학교 진학 결정 계기 
조선대학교에서 겪은 딜레마 
시나리오와의 만남
육체노동을 하면서 다녔던 시나리오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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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 조선대학교 진학 결정 계기
  강영휴 선배는 도쿄대학교나 교토대학교로 확실하게 진학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교토대학교에 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조선대학교로 진학한 거예요. 나는 조선대학교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죠. 1965년의 일이었어요. 한일기본조약 협정은 6월에 있었
고, 8월에 선배가 오사카로 돌아왔고 나는 만나러 갔죠. 
  그때 나의 진로에 대해서 상담하려고 갔는데 결국 재일한인의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듣게 됐어요. 식민지 시대 이야기 
그리고 재일한인이 일본에서 차별을 당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선배가 설명해줬고. 그리고 조국분단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1, 
2시간 계속해 준 거예요. 그걸 듣고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조선대
학교 진학을 결심했어요. 인간의 일생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로 그때 나의 인생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어요.
  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 주변에 재일한인이 있고, 그 대부
분은 나보다 많이 고생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
인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할 수 있다면 그 길로 가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막 떠오르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조선대학교 
진학을 결심했어요. 그러니까 1965년 8월 10일이라는 날을 꼭 기
억하고 있는 거죠. 그날을 내가 새로 태어난 날, 참된 ‘생일’이라고 
제2장 조선대학교 학생 시절   
15
5)
 1965년 일본의 출판사인 미래사(未来社)에서 발간된, 강제연행되어 학살당
한 조선인들의 피와 고발의 기록. 
인식하고 있으니 잊지 않고 지금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는 거죠.
  그때 선배한테 몇 가지 책을 소개받았는데 그중에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朝鮮人強制連行の記録)』5)이라는 책이 있어요. 박경식
(朴慶植) 선생님이 쓰신 책인데 처음으로 ‘강제연행’이라는 표현이 
쓰여서 큰 화제가 됐어요. 전쟁 중에 조선인들이 일본 각지에서 
강제노동·연행을 당했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끔찍한 사건
들이 많이 서술돼 있어서 강렬한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알고 있었
던 ‘조선인 차별’ 같은 것들은 전혀 비교가 안 될 만큼, 홋카이도, 
규슈, 나가노(長野)라든가 그런 곳에서 심한 학대나 학살이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읽게 되어서 더욱 조선대학교를 가서 공부하고 싶다
는 마음이 굳어졌어요.
  조선대학교 진학을 결심했으니 그때부터 동네에 있는 총련의 아
사히미야코(あさひみやこ)지부에 다니게 됐어요. 조선어교실이라
는 게 열려 있어서 글씨 정도는 배워놓고 싶다 해서 머리를 내밀었
어요. 그 지부에는 조직부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이 동포를 
위해 아주 열심히 활동하셨어요. 위원장도 계시고. 당시는 ‘청년학
’라고 했었나? 조선어를 가르치는 수업을 담당하는 여성분도 있
었어요. 그리고 기타 청년들이 왔다 갔다 했어요. 20대 청년들이 
지부에 드나들면서 즐겁게 이야기하거나 장난치고 있었는데 그렇
게 재일한인들끼리 모여서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처음 본 
거죠. 나는 고등학생이었으니까 다들 귀여워 해주셨고. 아주 즐거
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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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나는 조선대학교로 가서 향후 총련의 활동가로서 살아가겠다, 
재일한인 차별을 없애기 위한 활동에 평생 바치겠다는 결의가 견고
해졌어요. 그 일념만은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아요.
▮ 조선대학교에서 겪은 딜레마
  조선대학교에서는 정치경제학부로 갔는데 왜 그 학부로 갔냐면 
총련 활동가로서 동포를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
이에요. 내가 생각하는 활동을 직접 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학부가 
적절하다고 생각해서 서슴없이 선택했어요. 
  그런데 나는 일본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하여간 조선어를 모르잖
아요. 조선대학교에서는 나처럼 일본학교에서 진학해온 사람들만 
모여서 매년 ‘국어습득 70일간 운동’이라는 걸 해요. 쉽게 말하자면 
70일 동안에 조선어를 마스터하는 운동이에요. 강영휴 선배한테 
이야기로는 들었는데 불과 70일로 한 나라의 언어를 습득한다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죠. 당시 여러 학부에 일본학교에서 
진학해 온 사람이 40~50명 있었어요. 그래서 1학기 동안은 일본어
로 수업을 해줘요. 그런데 2학기 이후에는 모두 조선어 수업이 돼
요. 1학기 중에 조선어를 마스터하지 못하면 수업을 듣지 못할 거라
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1학기에는 각자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 
일본학교에서 온 ‘일고생(日高生)’만 모여서 조선어를 배우는 수업
을 하루 2~3시간씩 들어요. 
  조선대학교는 전원 기숙사 입사제였으니까 수업 마치면 방에 들
제2장 조선대학교 학생 시절   
17
어가서 시간이 있는 만큼 조선어 공부를 해요. 그런데 기숙사니까 
11시에는 일체 소등해야 했었죠. 불을 켜지 못하니까 방에서는 공
부를 못하잖아요. 그렇지만 옆 화장실은 유일하게 불을 켤 수가 
있었으니 소등된 후에 혼자 화장실에 가서 또 2~3시간 공부했어요. 
그렇게 하는 건 전통이 되어 있어서 나도 안 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
죠. 1학년생과 3학년생 8명 정도가 같은 방을 쓰는 시스템이었는데 
조선고급학교에서 온 친구나 선배들이 힘내라, 힘내라고 부채질하
니까 안 할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계속 조선어 공부를 했더니 재미
있게도 4월 입학 시에는 횡설수설하는 수준이었는데 5월, 6월쯤 
되니 점점 조선말이 들리기 시작해요. 조금씩 단어를 알아듣게 됐구
나 싶더니 그때부터 급속히 확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6월 하순, 딱 70일이 지난 날에 강당에 전교생이 모두 모이고 
그 앞에서 ‘일고생’들이 문화공연을 했어요. 옛날이야기를 하거나 
시 낭독을 하거나. 나는 연극에 단역으로 나왔는데 그 시점에서 
거의 읽기, 쓰기는 할 수 있게 돼요. 그리고 여름방학에는 ‘일고생’
만 모아서 10일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조선어 공부를 했어요. 낮에 
공부하고 밤이 되면 ‘총괄’이라는 반성회를 했어요. 그때부터 띄엄
띄엄 조선어로 말하기 시작해요. 가장 잘하는 학생은 15분 정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이 10일 동안 합숙을 통해 말하기
도 대충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2학기 이후에는 조선어로 
된 수업을 들어도 모두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었던 거죠. 저 자신도 
놀랐을 정도의 일이었죠. 
  나는 정경학부였으니까 ‘마르크스-레닌주의’ 공부도 했어요. 사
회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1년 정도 했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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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시점이 달라졌어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세계관 같은 것은 인도주
의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중요한 것을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생각해요.
조선대학교 학생 시절
  그런데 그쯤부터 북한에서 점차 김일성 수령을 찬양하는 정책이 
강화되었어요. 수업에서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하는 것보다 
이른바 주체사상을 배우는 것으로 중점이 옮겨져 갔어요. 
  그쯤부터 나는 점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당시 북한은 
급속도로 사회주의 건설을 진행했고, 한편 한국은 군사 독재 정권으
로 경제적으로 아주 힘든 시대였는데 일본의 대중매체는 하여튼 
북한에 대해서 개인숭배라고 맹렬히 비판했어요. 그런 보도를 보면
서 고등학생 때부터 그런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영향을 받았어요. 
제2장 조선대학교 학생 시절   
19
6)
 1966년에 일본 후지TV(フジテレビ)에서 방송된 연속드라마. 지바현(千葉
県)의 해안에 사는, 부모를 잃은 5인 형제가 우정·연애·갈등 등을 겪으면서
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청춘 드라마. 1967년에는 국단 하이유쟈(俳優座) 주
도로 제작한 영화가 1968년에 개봉되었다. 
  특히 대학교 2학년 때부터인가 ‘위대한 장군’이라는 것을 계속 
가르치니까 저항감이 생겼어요. 이전에 일본학교 다녔을 때 일본의 
천황제에 반발심이 있었는데 그때 이미지와 겹쳐져서 따라가지 못
한 거죠. 일본학교에서 옳다고 배웠던 민주주의와 조선대학교에서 
옳다고 배우는 내용이 어긋나는 부분이 점차 나타나니까 큰 딜레마
에 빠졌어요. 
  그렇지만 처음에는 내가 일본학교에서 왔으니까 조선학교 졸업
생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더욱 그쪽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름 노력을 했는데 좀처럼 해결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우리 말을 배웠다 해도 역시 한도가 있죠. 교과서를 봐도 
바로바로 안돼요. 그러니 공부라는 측면에서도 따라가기 힘들지요.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성적이 최상위권에 있었는데 조선대학교로 
오니까 최하위권으로 떨어진 셈이니까. 그래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어요. 
▮ 시나리오와의 만남
  감수성이 강하던 그 무렵, 『젊은이(若者たち)』6)이라는 영화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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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고 큰 영향을 받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어요. 야마모토 
케이(山本圭)나 다나카 쿠니에(田中邦衛)와 같은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인데 청년 형제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주제로, 여러 가지 고민
하고 싸우면서 성장해가는 이야기예요. 야마노우치 히사시(山内久)
가 각본을 쓰고, 모리카와 도키히사(森川時久) 감독이 만든 건데 
내가 조선대학교에 들어가서 고민이 많을 때 이 영화를 보고 아주 
감동한 거예요. 여러 가지 고민을 하면서도 본인들이 살아갈 길을 
찾아가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어요. 
  대학교 1학년 동안 그럭저럭 보내다가 겨울방학 때, 집으로 돌아
갔어요. 신정 때 집 갔다가 다시 1월에 조선대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데 안 돌아갔어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지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안 나와서. 형들이나 지부 사람들도 걱정해주
셨는데 본인 마음에 맡기겠다고. 결국 한 달 정도 쉰 후에 다시 
해보자고 대학교로 돌아갔던 일도 있었어요.
  총련 활동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어요. 그런데 총련 
지부의 활동가가 되고 동포를 위해 여러 가지 봉사하는 것도 좋지만 
뭔가 하나 더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
죠. 그때 생각이 난 게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거였어요. 재일한
인 차별의 실태를 알리는 수단으로 영화, 음악, 소설 등 다양하게 
있겠지만 가장 좋은 것은 영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 거죠. 나도 
젊었고 세상을 모르니까 영화가 터무니없이 어렵다는 것도 모르고 
영화제작을 통해 재일한인이 놓여있는 상황을 알릴 수 있으면 좋다
고 생각한 거였어요. 
  어느 날, 사회파 거장이라고 불리는 야마모토 사츠오(山本薩夫) 
제2장 조선대학교 학생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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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회파로서 반체제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오락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기술
과 균형 감각을 가진 영화감독. 전쟁 이후 ‘일본영화 독립프로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소련, 중국을 비롯한 각국 영화인들과 깊게 교류하며, 
베트남 인민 지원, 칠레 인민 연합, 반핵 활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에도 헌신
적으로 참가한 인물. 
감독7)의 사무소를 찾아갔어요. 이분은 일본의 다양한 문제점이나 
모순을 날카롭게 그리고, 『전쟁과 인간(戦争と人間, 1970-1973)』, 
『하얀거탑(白い巨塔, 1966)』과 같은 명작을 만든 사람이에요. 그분
을 찾아가서 상담하고 싶었는데 가봤더니 감독은 안 계시고 항상 
같이 일하는 여성분이 계셨어요. 여성분한테 나는 조선대학교 학생
인데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했더니 “영화감독이 된다는 것은 하
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평생 조감독으로 지내다 한 편도 찍지도 
못하고 끝난 사람이 산처럼 수다하다”고 하셨어요. “더구나 총련 
활동을 하면서 영화를 만든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그러면
서 “그러나 시나리오 공부는 할 수 있다. 열심히 하면 여러 가지 
바쁜 일을 하면서도 시나리오는 쓸 수 있다”고 하신 거예요. 그때 
아차 싶었어요. 오락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주장을 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쓰면 나의 의도
의 70%는 달성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그날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 육체노동을 하면서 다녔던 시나리오 학교
  조선대학교는 기숙사 입사제라 일요일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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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유롭게 외출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나는 의도적으
로 좋은 영화를 보러 다녔었고 그 과정에서 시나리오라는 것이 내 
안에서 점차 커져서 제대로 배우고 싶어졌어요. 그때는 시나리오
는 단어가 세상에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시대였는데 도쿄 아오야
마(青山)에 아마 당시 일본에서 유일한 시나리오 학교가 있었고 다
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기숙사 입사제라서 그런 
게 쉽게 허가되지 않아요. 밤에 시나리오 학교 다니고 싶다고 해도 
허락 해주는 환경이 아니었죠. 그런데도 혹시나 싶어서 담임선생님
한테 시나리오를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터무니없다고 일축되었어요. 
  그래서 나는 여름방학 때 오사카 집으로 안 돌아가고 시나리오 
학교에 다니기로 했어요. 이 학교에서 수강하기 위해 10만 엔 정도
의 돈이 필요했는데 그런 돈이 전혀 없죠. 입학금부터 벌어야 한다
고 해서 뭘 했냐 하면 여러 가지 신문광고를 보고, 기숙사가 있고 
밤에 시나리오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그런 일이 없을까 찾아봤어요. 
그랬더니 하나 있었던 거예요. 우유배달을 하는 가게인데 기숙사가 
있다고 나와 있는 거예요. 이거 좋다고 바로 연락하고 면접을 봤고 
채용되었는데, 가봤더니 잠자리는 침대가 아니라 해먹인 거예요. 
해먹이 2단 정도 있었고 지방에서 온 젊은 남자들이 여기서 숙식하
면서 일하고 있었죠.
  나는 거기서 배달하러 나가는 게 아니라 점포 안에서 잡일을 했는
데 시나리오 학교 신청 마감이 다가와서 점장한테 이야기했어요. 
이미 한 달 가까이 일했으니까 월급 다가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일한 
만큼 가불 혹은 빌릴 수 없냐고. 시나리오 학교 다니고 싶은데 입학
제2장 조선대학교 학생 시절   
23
금이 필요하다고 부탁했더니 그 자리에서 야단맞았어요. “나가”라
고. 그래서 바로 나가버렸어요. 그런데 갈 데도 없고... 어슬렁어슬
렁 걷다가 도쿄 고탄다(五反田)역 근처까지 왔는데 마침 도로공사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공사 책임자 같은 아저씨가 있었기에 고용해 
주면 안 되겠냐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바로 승낙해주어서 기숙사에
서 숙식하면서 육체노동을 했어요. 이른바 노가다죠. 지하철 공사
였는데 도로를 삽으로 뜨고, 구멍을 깊이 파 들어가는 그런 일이었
어요. 기숙사는 지방 농촌에서 온 젊은 사람들이나 아저씨들이 숙식
하면서 살았던 목조건물이었어요. 아침이 되면 밥과 국물을 먹고 
일하러 나가고, 밤이 되면 시나리오 학교를 다니는 생활을 했어요. 
젊어서 그랬는지 불안감은 전혀 없었어요. 
  재미있었던 것은 기숙사에 작은 TV가 있었는데 젊은 가수가 노
래를 부르고 춤추는 가요 프로그램 같은 걸 보게 되면 동경심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그전까지는 일본 가수의 노래 따위는 무시했
었는데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면서 보니까 저런 세계로 가고 싶어지
고 동경심을 느꼈어요. 그리고 농촌에서 온 사람들의 대단한 체력. 
나는 삽으로 흙을 파면 곧 허리가 아프고 지쳐서 곤죽이 되어버리는
데 그 사람들은 잠자코 일하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몸이 다르죠. 
그런 것들을 여러 가지 보면서 세상을 보는 참고가 된 것 같아요.
  이렇게 시나리오 학교에 다녔는데 수업은 영화감독이나 시나리
오 라이터, 프로듀서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교대로 와서 강의를 
해줘요. 그중에 주 1번은 아라이 하지메(新井一)라는 시나리오 라이
터가 와서 순수히 시나리오 창작 기술을 알려주는 수업이 있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하코가키(ハコ書き)8)’라는 것을 배웠어요. 기승전
2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8)
 소설, 연극, 영화 등의 줄거리인 플롯(plot)을 구성하는 방법으로, 각본을 
새로 쓰는 데 보조적 역할을 한다. 
결을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 
 하코가키(ハコ書き)에 대해 설명하는 고찬유 감독
  시나리오 학교에서 배웠던 경험은 아주 귀중했어요. 영화 해설 
수업 같은 것도 있었지만 순수하게 시나리오 창작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는 건 참으로 유익했어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경험이 나의 인생을 변화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경험은 나의 향후 문예 활동에도 굉장히 플러스가 됐어요. 
  학교를 다니는 동시에 고금동서의 좋은 영화를 닥치는 대로 보러 
제2장 조선대학교 학생 시절   
25
9)
 1962년에 개봉된 영국·미국 합작 영화. 실재했던 영국정보국 소속 장교인 
로렌스(T.E. Lawrence)가 이끄는 오스만제국에서의 아랍 독립투쟁을 다룬 
역사영화.
10)
 1954년에 개봉된 일본의 시대극 영화. 전국시대 전란이 만들어낸 노부시
(野武士)의 약탈로 고생하던 마을 주민들에게 고용된 7명의 사무라이가 신분 
차이로 인한 알력을 극복하면서 협력해 노부시의 습격으로부터 마을을 지키
는 이야기.
11)
 주로 구작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
다녔어요. 그 시간이 유일한 휴식이라면 휴식이었는데 지금도 영화
는 그저 오락으로만 볼 수 없고 공부라는 시각에서 보게 돼요. 대사, 
이야기, 줄거리 전개 같은 것을 생각하면서 보는 습관이 생겼어요. 
내가 보기에 명작 중의 명작은 단연 『아라비아의 로렌스
(Lawrence of Arabia, 1962)』9)죠! 그리고 일본 영화 중에서는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 1954)』10)가 진짜 명작이죠. 
  당시는 도쿄에 살고 있었으니까 ‘명화 상영관(名画座)11)’이 많이 
있었고 월간잡지 『피아(ぴあ)』가 발간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어
요. 『피아』를 보면 어디서 어떤 영화, 연극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어요. 이걸 매달 구입했죠. 영화 관련 책은 여러 가지 공부했으
니 명작 제목은 기억하고 있죠. 잡지를 보면서 그런 영화를 상영하
는 곳을 찾아내서 꼭 보러 갔죠. 기승전결의 전개, 인물 배치, 대사 
같은 걸 주의 깊게 보면 그런 작품이 왜 좋은지 나쁜지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서 재미났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숙사에 조선대학교 선생님과 셋째 형이 
찾아온 거예요. 당시 나의 영향으로 둘째 형과 셋째 형이 총련 활동
에 참가하게 되었고 셋째 형은 도쿄에 있었어요. 담임 선생님한테 
시나리오 학교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는 했었으니까 언젠가 찾아올 
2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일찍 온 거예요. 당시에는 조선
대학교를 그만두려는 학생이 나타나면 선생님들이 찾아가서 그만
두지 말라고 설득하는 게 보통이었으니까 나도 억지로 끌려가듯이 
조선대학교로 돌아가게 됐어요.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했지요. 결국 다시 여기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되었어요. 총련 활동가가 되겠다는 생각 자체는 변함이 없었
으니까 이대로 피할 게 아니라 다시 한번 해보자. 그래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겠다고. 그런 마음으로 조선대학교 복귀를 결심했어요.
  아까 말한 개인숭배 같은 것들에 대해서 저항감이 없는 건 아니었
지만 진지하게 한반도와 북한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의식이 변화해
갔어요. 식민지 지배를 당한 후에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해냈고 이걸 
개인숭배로 볼까 말까의 문제인데, 약소국이 나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런 게 정치적 수완으로서는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
으로 바뀌어 갔어요. 일본은 오로지 개인숭배 구실로만 공격했었는
데 배우면 배울수록 북한에 대한 저항감이 조금씩 스러져 갔어요. 
  한편으로 시나리오 공부는 계속 가고 싶었는데 어느 날 도서관에
서 신문을 읽다가 오사카 시나리오 학교라는 곳에서 통신제 학생을 
모집하고 있다는 작은 기사를 봤어요. 곧 신청했더니 통신교육이라 
여러 가지 자료를 보내와요. 그걸 보면서 몰래몰래 공부를 했었죠. 
그 학교는 매년 수강생 중에서 작품 모집을 한다고 하니 난생처음 
눈동냥으로 시나리오를 써봤어요. 일본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벽 안의 등불(壁の中の灯)』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응
모했더니 1위 3편 중 하나로 뽑혔어요. 정말 놀랐죠. 물론 대단한 
상이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쓴 작품이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 
제2장 조선대학교 학생 시절   
27
자체가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자극이자 격려가 됐어요.
  한편 내가 다녔던 도쿄의 시나리오 학교에서는 월간 『시나리오
(シナリオ)』라는 잡지를 내고 있는데, 일본의 시나리오 관련 책 중에
서 가장 권위가 있는 잡지죠. 이 잡지에서도 매년 작품을 모집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망향의 저편(望郷の彼方)』이라는 시나리오를 써
서 응모해봤어요. 그랬더니 응모한 작품이 520편 정도 있었다던데 
최종 12편에까지 남았어요. 서점에서 『시나리오』를 구입했을 때 
내 이름이 나와있어서 정말 기뻤어요. 잡지 『시나리오』에서 최종예
선까지 올라갔다는 것은 상당한 가치가 있죠.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시나리오를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했었죠. 기숙사 안에서는 그런 공부를 하기 
어려웠으니까 일요일에 교실에 가서 했죠. 그러다가 『시나리오』에
서 평가를 받고 나서는 시나리오 공부를 하고 있다고 주변 사람들한
테 조금씩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보통 조선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면 총련 지방 본부나 지부
에 배정을 받아요. 그러니까 나도 어딘가 지방 본부에 배정될 것이
라고 생각했었죠. 결코 그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가능하다
면 동포들의 생활을 영상화하고 집회가 있을 때마다 상영하는 영화
제작소에 배정되면 좋겠다는 희망은 있었어요. 그래서 4학년쯤부
터는 주변 사람들한테 조금씩 시나리오 공부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기 시작한 건데 그것이 어딘가에 전달되었나 봐요.
28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조선대학교 졸업 기념사진 
  
  최종적으로는 나는 1970년에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동시에 재일
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在日本朝鮮文学芸術家同盟), 줄여서 문예동
(文芸同) 도쿄지부에 배정되었어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주 
기뻤어요. 희망했던 영화제작소는 아니었지만 문학·예술 분야에 배
정되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정말 기쁜 일이었어요. 
제3장 결혼과 자녀교육
중앙예술단 가수 이명옥과의 결혼 
조선학교에 맡긴 자녀교육 
딸 고설화(高雪華)와 아들 고유사(高悠史)
한국 국적 취득
3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12)
 1955년 6월 재일조선중앙예술단 창립. 1964년 5월에는 악기 편성을 
양악기에서 민족악기로 개편하여 성악·무용·기악·무대부의 4가지 전문분야
를 설치한 종합민족예술단으로 발전하였다. 1974년 8월에 현재의 금강산가
극단으로 개칭하였다. (참조: 金剛山歌劇団, https://www.kongozan-o
t.com/)
▮ 중앙예술단 가수 이명옥과의 결혼
  문예동 사업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도쿄에서 10
년간 일하다가 1981년에 오사카에 돌아왔고 같은 해에 이명옥과 
결혼했어요. 아내와는 문예동 도쿄지부에 있었을 때 만났어요. ‘금
강산가극단’12)에서 가수로 일하고 있었어요.
  아내와는 사귀기 시작한 당시부터 조선어로 대화를 했었고, 지금
도 집에서 조선어로 말을 걸어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 총련 활동을 했을 때 활동가끼리는 보통 우리말로 이야기했
었으니까 오사카에 와서도 그대로 조선어를 썼죠. 이젠 조선어 사용
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하네요. 아내도 처음에는 조선어를 썼다가 
지금은 일본어를 쓰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그래서 최근에는 나는 
조선어로 말하지만 아내는 일본어로 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우리 집은 딸(설화) 하나, 아들(유사) 하나인데 특별히 집에서 조
선어를 가르치거나 따로 민족교육을 하지는 않았어요. 어릴 적엔 
집 근처에 있던 일본의 어린이집으로 보냈지만 초등학교부터는 둘 
다 조선학교를 보냈기 때문이에요. 
제3장 결혼과 자녀교육   
31
1981년 결혼식 기념사진
▮ 조선학교에 맡긴 자녀교육
  나는 고등학교까지 일본학교를 다녔다가 조선대학교를 다녔고 
아내는 고등학교까지 일본학교를 다녔어요. 우리 집에서 아이들을 
조선학교로 보내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어요. 내 시대에도 그랬지
만 1990년대에도 계속 ‘이지메(집단 따돌림)’ 문제가 있었고, 일본
학교 자체에 문제가 많기도 했으니 일본학교로 보낼 생각은 하나도 
없었어요. 물론 한인이니까 당연히 조선학교로 보낸다는 생각도 
있었고.
  결혼 당시에는 오사카부 히라카타(枚方)시에 살고 있었는데 아이
3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들이 생기고 나서는 조선학교로 다닐 수 있는 곳에 집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사했어요. 히라카타에서는 조선학교가 좀 멀었
어요. 통학이 편한 곳을 여러 군데 찾아본 결과 역시 이쿠노구가 
좋다는 결론이 난 거예요. 그래서 이쿠노구 가츠야마기타(勝山北)에
서 집을 구했는데 거기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5분, 10분 정도 거리
였어요. 
  아이들은 둘 다 조선학교를 다녔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주 순하게 
자랐어요. 정직하게 도담도담 자랐기 때문에 아이들 문제로 걱정할 
일은 거의 없었어요. “공부하라”라고 해 본 적도 없었고.
  조선학교로 보냈기 때문에 우리의 부담, 그러니까 부모로서의 
부담도 가볍고 정말 편했어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조금씩 
조선어를 알아듣기 시작했으니 집에서 조선어를 쓸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힘들다고 하는 거예요. 초등학교 3, 4학년쯤
이었는데 학교에서 조선어를 쓰고 집에 와서도 계속 쓰는 것이 힘들
다고 하는 거예요. 그걸 듣고 그랬구나 싶어서 그때부터는 집에서 
아이한테는 일본어를 쓰기로 했어요. 
  이는 조선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죠. 나는 재일
브라질인을 취재한 적이 있어요. 아이를 일본학교에 보내는 경우는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면 될수록 포르투갈어로 이야기하려고 한다
던데 그것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죠. 그 결과 부모와 
아이 사이에서 대화가 성립이 안 되게 돼요. 그러니까 집에서 모국
어를 가르치려고 부모들이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거죠. 나 같은 
경우는 아이들이 조선학교에 다녔으니까 언어적 문제는 학교에서 
해결해 줬으니 굳이 집에서 할 필요가 없었죠. 역시 일본어보다 
제3장 결혼과 자녀교육   
33
조선어로 말하는 게 힘드니까, 집에서까지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 조선어는 학교에 맡기고 집에서는 일본어로 해도 
되겠다고 판단한 거죠. 
  그렇지만 조선학교로 보내지 않는 가정은 그렇게는 못하죠. 가정
교육을 통해 민족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정신적 부담이 클 것 같아
요. 일본학교에 보내면 경제적 부분에서는 좋을 수도 있겠지만 아이
를 한인으로 키우고 싶으면 역시 조선학교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
해요. 
▮ 딸 고설화(高雪華)와 아들 고유사(高悠史)
  아이는 1982년에 딸 고설화, 1984년에 아들 고유사가 태어났어
요. 지금 둘 다 30대 후반이에요.
  딸은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어요. 초급학교, 중급학교까지
는 근처에 있는 조선학교를 다녔는데 조선학교 고급부에서는 피아
노를 전문적으로 배우기가 어려워서 일본학교로 진학했어요. 집에
서 가까운 곳에 오사카부립 유희가오카(夕陽丘) 고등학교라는 학교
가 있는데 거기 음악과로 갔어요. 졸업하고 나서는 오사카예술대학
교로 진학했어요.
  대학교 졸업 후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독일로 유학을 가서 그대로 
10년 가까이 독일에서 살고 있어요. 솔로 피아니스트를 목표로 하
는 게 아니라 반주자로 활동 중이에요. 유럽에서는 그런 직업이 
중요시된다고 하네요. 젊은 가수들이 무대에서 제대로 부르지 못하
3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13)
 대학교입학시험검정(대검, 大検)이란 2004년도 이전까지 대학교 입학시
험 응시 자격이 없는 자에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와 동등한 학력을 인정해
주기 위해 실시한 국가시험을 말한다. 합격자에게는 고등학교 졸업자와 동등
한 자격이 부여되며, 대학교, 2년제 단기대학교 및 전문학교의 수험자격이 
생길 뿐만 아니라 취직, 자격시험 등에도 활용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학교 
등 일조교(一条校)에 속하지 않는 외국인학교 졸업자들은 일본 학교교육법
상 고등학교 졸업자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일본 대학교 진학이나 취직을 
염두에 둔 경우 따로 대검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대검은 2004년도 말에 
폐지되었고, 2005년도 이후 고등학교졸업정도인정시험(고인, 高認)으로 이
행하였다.
면 피아노 반주자가 적절히 조언을 주거나 해서. 그리고 학교에서 
강사로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도 하고 있어요. 독일은 일본에 비해서 
음악이나 예술에 관한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서 일본에 돌아올 생각
은 없다고 해요. 
  아들은 딸과 같은 조선학교에서 초·중급부뿐만 아니라 고급부까
지 다녔어요. 고3 때 학원에서 주최한 여름 강좌가 있어서 참가를 
했는데 그 강좌가 교토에서 있었나 봐요. 집에 돌아오자마자 “교토
대학교 가겠다”고 하니 제정신인가? 싶었어요. 그런데 1년 재수한 
후에 진짜 교토대학교로 입학했어요. 그때만 해도 조선학교 졸업생
들은 대학교입학시험검정13)에 합격해야만 일본 국립대학교 수험자
격을 받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어요. 
  아들은 고3 때 잠깐 학원에 다녔지만 거의 혼자 공부했었죠. 조선
학교에서 일본학교 수험대책 같은 것을 세워준 것인지 모르겠지만 
1년 재수는 어쩔 수 없었죠. 조선학교에서 일본 역사 같은 과목은 
많이 못 배우니까 불리하긴 했죠. 수험 교과목 상 불리한 부분이 
있어서 재수는 어쩔 수 없었는데 정말 잘 합격했다 싶어요. 그쯤부
터 조선학교 고급부 졸업하고 교토대학교, 오사카대학교, 도쿄대학
제3장 결혼과 자녀교육   
35
교 등등 국립대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데 
대단한 것 같아요.
  아들은 대학교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던 시기에 한국에서 온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더니 훗날에 같이 컴퓨터 관련 회사를 설립했
어요. 본사는 서울에 있고 한국 사람이 사장을 맡고 있어요. 직원이 
5, 6명이었고 아들 빼고 다 한국 사람이에요. 아들은 교토대학교에
서 전기전자공학부를 다녔고 컴퓨터가 전문이었으니 회사에서는 
기술 부문을 담당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컴퓨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아들한테 물어보고 도움을 받고 있어요.
▮ 한국 국적 취득
  우리 가족은 2008년에 한국 국적으로 바꿨어요. 그 이전에는 
한국에 가는 것도 어려웠지만 변경하고 나서는 겨우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게 됐어요. 
  이전에 군사독재정권이 계속되던 시대에는 아무리 불리함이 많
더라도 조선 국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조선 국적이라는 것은 굉장히... 일본 정부는 한일
조약 체결 당시 조선 국적은 ‘부호(符號)’에 불과하다, 정식 국적이 
아니라고 했죠.
  그런데 나도 저널리스트의 한 명으로서 외국에 취재하러 나갈 
때 결정적으로 불리한 거예요. 조금씩 개선되었지만 그래도 불편함
이 남아있었죠. 그래서 1998년 김대중 정권이 수립되고 나서 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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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어 한국은 민주화를 실현했죠. 그때쯤부터 국적 변경을 생각하기 
시작했고, 다음 노무현 정권이 됐을 때 이제 한국 국적으로 바꿔도 
되지 않을까 해서 변경했어요. 물론 일본 국적으로 바꿀 생각은 
하나도 없었지만 조선 국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변경하는 것에 대해
서는 같은 ‘통일조선’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별 지장이 없다고 생각
해서 바꿨어요. 지금은 아내와 아이들도 다 한국 국적이에요. 
제2부 문학 활동
제4장 문학 활동을 통한 민족성의 강화
문학예술가동맹 배치와 창작 공연 활동
북한 귀국사업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 『항로』 집필
재일본조선유학생동맹의 의뢰로 공연한 첫 연극 「침묵」
한국 사회를 다루는 연극 제작과 재일한인 청년들의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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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 문학예술가동맹 배치와 창작 공연 활동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4월
부터 문예동 도쿄지부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 정말 ‘산다’
는 게 이렇게나 좋은 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체험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니에요. 어렸을 때도, 조선대학교를 다녔을 때도 힘들고, 어둡
고 그리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으니까. 그래서 문예동에 배정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인생의 전환기가 됐어요. 
  당시 재일한인 사회에서도 젊은 화가, 음악가, 사진가, 영화 관계
자 등이 점차 성장하고 있는 시기였어요. 나는 그런 사람들이 일을 
편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후원하는 일을 했었어요. 미술전
이나 콘서트를 기획하고 출연시켜주거나. 그들은 꿈이나 목표는 
있는데 아직 젊으니까 힘이 없어서 우리가 후원해주는 거죠. 매우 
보람이 있는 일이었어요. 
  그런 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나도 문예동에서 전종(専従)으
로 일하니까 자기 자질을 높이는 것이 요구된 거예요. 원래 영화를 
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걸 알고 있었으니까 문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동포들의 문화생활을 돕기 위한 사업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용부와 음악부인데요. 학교 교실을 빌려서 애호가들이 매주 한 
번씩 연습할 수 있는 장(場)을 만들었어요. 그걸 계속하다가 1972
년쯤 예술발표회를 개최했어요. 총련이 가진 출판회관 안에 작은 
제4장 문학 활동을 통한 민족성의 강화   
41
14)
 북한을 대표하는 서사시적인 작품. 1972년 체코 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제18회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강당이 있는데, 거기서 발표회를 하니까 상당한 호평을 얻었어요. 
그때 내가 도모한 것은 문예동에서 창작한 작품만으로 하겠다는 
것이었어요. 원래 총련에서는 콘서트를 활발히 열었는데 조국에서 
창작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 주류를 이루었지요. 우리가 
스스로 작사·작곡하는 건 거의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처음으로 
제안했죠. 자기들의 창작 작품만으로 해보자고. 다행히 시를 짓거
나 작곡을 할 수 있는 사람, 조선고급학교에서 일본 대학교로 진학
한 후 성악가로서 상당한 수준에 오른 사람 등이 있었으니까. 그렇
게 해봤더니 아주 신선한 느낌을 자아냈던 거예요.
  내가 시나리오를 공부했던 것은 여러 가지 면으로 플러스가 됐어
요. 시나리오라는 것은 0부터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라 나는 
0부터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죠. 그러니까 과거에 총련에서 거의 
하지 않았던 일을 내가 처음으로 했던 일이 여러 가지 있어요. 그중
의 하나가 언론과의 사업이었죠. 
  총련은 일본 대중매체를 그다지 이용하지 않았거든요. 나는 영화
를 좋아하니까 아사히(朝日)신문의 영화 담당 기자와 접촉해서 친해
졌어요. 그쯤 북한의 『꽃파는 처녀(花を売る乙女)』14)라는 영화가 
도쿄의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상영됐는데 그 시사회 때 아사히신문 
기자를 초대했어요. 그걸 보고 감동한 그 기자가 아사히신문에 영화 
소개 기사를 써준 거예요. 할리우드 영화가 개봉되면 신문기사로 
소개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북한 영화가 신문에 나온 것은 처음이
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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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다른 사람들의 문예 활동을 지원하면서 나는 문학교실이라는 것
을 열고 시나 에세이를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도 했었어요. 당시
는 조선어로 문학을 하자는 게 목표였어요. 그러니까 나도 조선어로 
시나 수필을 썼었죠. 소설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문학교실을 
통해서 수강생들의 많은 작품이 발표됐어요.
▮ 북한 귀국사업을 주제로 한 단편소설 『항로』 집필
  문예동에서는 젊은 예술가들과 접촉하면서 같이 활동했었는데 
상대방도 기뻐하고 나도 굉장히 자극을 받아서 좋았어요. 그 과정에
서 나 스스로가 자질을 높이기 위한 공부도 했었고. 그러니까 상당
히 바쁜 날을 보냈죠. 1년에 쉬는 날이 4~5일밖에 안 돼요. 신정을 
포함해서. 문예동 활동은 없더라도 일요일에는 시나리오를 쓰거나 
자질을 높이기 위한 공부를 해야 했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1972년, 처음으로 『뱃길』이라는 단편소설을 썼어
요. 귀국사업을 주제로 한 작품이에요. 귀국사업은 1959년에 시작
해서 한 번 중단된 다음 1971년에 재개되었어요. 그때 귀국사업이 
화제로 떠올랐어요. 일본 정부 및 사회에서는 이 사업에 대한 비판
이 있었죠. 재일한인들은 ‘지상의 낙원’으로 갔는데 실제로 간 사람
들은 굉장히 고생하고 있다는 선전 문구도 많이 들었었죠. 나는 
귀국사업이 재개되었을 때 니이가타(新潟)까지 보러 갔는데 귀국선
을 타고 돌아가는 사람, 그리고 보내는 사람 사이에 벌어진 감동적
인 장면을 보고 소설을 쓰고 싶어졌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소설은 
제4장 문학 활동을 통한 민족성의 강화   
43
써본 적이 없었어요.
  그랬더니 아주 평가가 좋은 거예요. 문예동 중앙에서 재일한인들
이 쓴 시나 소설을 싣고 비정기적으로 발행하는 기관지가 있는데 
거기에 『뱃길』이 게재됐어요. 그러고 나서 놀랍게도 북한 조선작가
동맹의 기관지 『조선문학』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에도 게재된 거예
요. 전례가 거의 없었던 일이죠. 이전에 재일한인 1세 작가인 박종
상 선생님께서 쓰신 소설이 게재된 바가 있었지만 말하자면 재일 
2세가 쓴 글로는 그 작품이 처음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1974년에
는 조선고급학교 2학년 교과서에도 『뱃길』이 실렸어요. 재일동포
의 작품이 조선학교 교과서에 게재되었던 것도 아마 그 작품이 처음
이었을 거예요. 
조선학교 고2 국어 교과서 표지 및 『배길(뱃길)』
4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1974년에는 문예동 중앙본부로 전근을 갔는데 기관지 『문학예
술』에 시나리오 「여기가 우리학교(ここがウリハッキョ)」를 발표했
어요. 『문학예술』에 시나리오가 실린 것은 그게 처음이었고 총련의 
창작상을 받았어요.
▮ 재일본조선유학생동맹의 의뢰로 공연한 첫 연극 「침묵
  문예동 활동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게 됐어요. 일본 사
회에서는 ‘북한 배싱(北朝鮮バッシング, 북한에 대한 맹비난)’은 있
었지만 반대로 민주적인 생각을 가진 문화인을 비롯하여 폭넓은 
사람들이 총련 활동을 지지해줬으며 나도 다양한 일본인 문화인, 
예술가들과 많이 접촉했지요. 영화제작소와 직접 같이 일하진 않았
지만 거기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게 됐어요. 문예동에도 영화부가 
있었는데, 일본 영화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동포들과 만나면서 나도 
언젠가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같은 희망은 있었어요. 
  영화부에 조선고급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早稲田)대학교를 다
니던 학생이 있었어요. 그는 재일본조선유학생동맹(이하, 유학동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멤버였어요. 1976년의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와서 유학동에서 연극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내가 시나리오 
공부를 하고 있던 걸 아니까 대본을 써달라고 부탁하러 온 거죠. 
나는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힘은 없지만 연극이면 할 수 있지 않을
까 했죠. 
  그가 제안한 것은 당시 화제가 됐던 재일한국인정치범 문제를 
제4장 문학 활동을 통한 민족성의 강화   
45
15)
 서승·서준식 형제는 교토에서 태어나 일본학교에 다닌 후 한국으로 유학하
였다. 그러나 1971년 4월 한국 국군보안사령부(KCIC)에 체포되었고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의 리더라고 대대적으로 발표되었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한국에 잠입하여 학생운동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수감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두 형제의 투쟁과 사상은 재일한인 청년층에 큰 충격을 초래함과 
동시에 한국의 인권상황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참조: 
国際高麗学会 日本支部 「在日コリアン辞典」編纂委員会 編(2010), 『在日
コリアン辞典』)
16)
 야마모토 시게미(山本茂実)의 논픽션소설 『아아 노무기고개(あゝ野麦
峠)』. 메이지(明治)시대부터 타이쇼(大正)시대에 걸쳐 기후(岐阜)현 히다(飛
騨)지방의 10대 여성들이 눈보라가 치는 위험한 노무기고개를 넘어 나가노
(長野)현의 수와(諏訪), 오카야(岡谷)의 제사공장에 가서 취업한다. 대일본제
국의 부국강병이라는 국책 하에서 유력한 수출품목이었던 생실의 생산을 
지탱한 여성들의 모습을 그린 내용. 
주제로 한 연극이었어요. 1971년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学園浸透
スパイ団事件)’으로 서승(徐勝)·서준식(徐俊植) 형제15)가 체포되었
고, 특히 서승 씨는 가혹한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엄청나게 큰 문제
가 됐었어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큰 문제가 되었는데 이걸 주제
로 하고 싶다고 한 거죠. 
  나는 그전부터 연극에 대한 관심도 있었어요. 정식으로 배워본 
적은 없었지만 연극도 좋아해서 자주 봤어요.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면 배울 게 많아요. 연극을 보면서 왜 감동하는가를 생각하면 
역시 구성이 중요해요. 대본 자체가 잘되어 있어야 해요. 특히 하야
카와 쇼지(早川昭二)라는 뛰어난 연출가가 있는 극단민예(劇団民藝)
에서 했던 「아아 노무기고개(あゝ野麦峠)」16)라는 연극을 봤을 때 
받은 충격은 대단했어요. 문예동에 가서 얼마 안 되었을 때였지만 
연극이 이렇게나 감동적인 것이구나 느꼈어요. 눈보라가 치는 장면
이 있었는데 무대라는 공간 속에서 표현할 수 있다니 감탄했죠. 
4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내용은, 여공들이 착취에 항의해서 투쟁했는데 끝내 자본가들에게 
져요. 그런 투쟁의 역사를 담아 형상화한 작품을 보면서 연극을 
통해 우리가 호소하고 싶은 것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요. 그래서 그 이후 하야카와 씨와 접촉하고 여러 가지 지도를 받기
도 했어요.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유학동에서 연극 이야기가 
왔을 땐 기꺼이 맡게 됐어요. 
  나는 한국의 정세에 아주 관심이 많았고, 민주화 운동에 대한 
심퍼시(sympathy)가 강했어요. 특히 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반정부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했었죠. 그러다가 민족 정체성을 
찾아 조국으로 유학한 재일한인 청년들이 체포를 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뒤이어 서승 씨처럼 일본에서 한국으로 유학
하다가 KCIA에 체포되는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났어요. 
  서승·서준식 형제를 구제하려는 단체가 일본 도처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세계적으로도 화제가 됐어요. 그러니까 단편적이지만 다양
한 자료가 들어오는 거예요. 본인들이 가족한테 보낸 편지와 같은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어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연극 대본을 썼는
데 불과 2, 3일로 완성했어요. 제목은 「침묵(沈黙)」이에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이건 많은 일본 사람들이 보게 해야 하는데 
한편으로 나도 유학동도 할 수 있다면 우리말로 하고 싶었어요. 
그렇다고 모두 우리말로 하면 일본인은 볼 수 없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은 일본어 장면과 우리말 장면을 번갈아 넣는 방법. 즉 주인공
이 일본에 있는 장면은 일본어로, 한국으로 간 후는 한국어로 했죠.
제4장 문학 활동을 통한 민족성의 강화   
47
연극 「침묵」의 한 장면
 
  그리고 체포당하고 나서 KCIA에게 고문이나 단속을 받을 때는 
어색한 한국어로 억울함을 호소해요. 그랬더니 KCIA 남자는 처음
에는 한국어로 이야기하다가 도중에서 갑자기 태도를 바꿔 일본어
로 말하라고 해요. 어색한 한국어를 쓰지 말고 일본어로 말하라고 
했는데 본인은 어떻게든 한국어로 말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런 장면
을 일부러 넣은 결과 KCIA 사람들이 일본 식민지 시대 영향을 이어
가면서 지금도 민중들에게 단속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효과
를 나타낼 수 있었어요.
  「침묵」은 높은 평가를 받았어요. 유학동은 동원력이 있으니까 
48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1,00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홀을 빌려서 했는데 그래도 입석 
자리도 없을 만큼 회장은 꽉 차서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끝나자마
자 박수가 터졌는데 그때 박수는 지금도 귀에 남아있어요. 
  처음에는 한 번만 공연할 예정이었는데 앙코르 공연도 했어요. 
조선대학교에서도 하고 그 뒤에 재연, 재연. 오사카 유학동에서도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직접 오사카로 가서 한 달 동안 새로운 학생
들로 연습하고 상연했어요.
연극 「침묵」 공연일정
1976.12.02. 
도쿄·全電通ホール
1976.12.12.
도교·朝鮮大学校
1977.05.12.〜05.13.
도교·豊島公会堂
1977.11.07.
사이타마·埼玉県朝霞市民会館
1977.12.02.
오사카·守口市民会館
1978.01.19.
오사카·中之島中央公会堂
  재연 과정에서 자막을 이용해보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머릿속
에 떠올랐어요. 여러 가지 연극을 봤지만 연극 무대에서 자막을 
이용한 것은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도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재연
할 때 무대 왼쪽에 크고 하얀 스크린을 배치하고 슬라이드로 자막을 
비춰 봤어요. 그랬더니 의외로 좋은 거예요. 이걸로 언어라는 큰 
문제가 해결됐죠. 그러니까 「침묵」 이후 한국을 주제로 한 연극을 
할 때마다 대사는 모두 한국어로 하면서 자막을 표시하는 형식이 
확립됐어요. 
제4장 문학 활동을 통한 민족성의 강화   
49
17)
 한국의 종교정치학자이자 평론가인 지명관(池明観)이 ‘T·K생’이라는 필
명으로 1973년부터 1988년까지 잡지 『세계』에서 연재한 내용. 1972년 
10월 비상계엄령이 실행된 이후 긴박한 한국의 정정, 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식인들의 언동, 그리고 민중의 목소리를 전달하여 일본 국내에서 큰 반향
을 일으켰다. 
▮ 한국 사회를 다루는 연극 제작과 재일한인 청년들의 참여
  문예동 대외사업으로 일본 문화인들과의 교류도 계속 이루어졌
어요. 그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분은 극단민예의 요네쿠라 마사카네
(米倉斉加年)라는 유명한 배우예요. 요네쿠라 씨는 한국 문제에 아
주 관심이 높은 분이었으니 어느 날 찾아가서 한국을 주제로 하는 
연극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기해봤어요. 그랬더니 바로 승낙해줬어
요. 어떤 주제를 다룰까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해서 일단 
헤어졌는데 며칠 후에 문예동 도쿄지부 위원장과 함께 찾아가서 
「한국에서의 통신(韓国からの通信)」17)을 하고 싶다고 제안했어요.
  당시 잡지 『세계(世界)』에서 「한국에서의 통신」이라는 연재 르포
가 있었어요. ‘T·K생(T·K生)’이라고 하는 사람이 한국에서 일어나
는 사건에 대해 매호 보고하고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학생운동이 
많이 일어났고 그 외에도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이 있었죠. 일본에서
도 어느 정도 보도되어 있었지만 아직 부족했어요. 일본 기자가 한국
에 가서 취재하기가 곤란한 상황이었으니까 보도가 불충분했죠. 그
러니까 한국의 상황을 알고 싶은 사람들은 잡지 『세계』를 매달 구매
했죠. 특히 지식인들은 거의 대부분 「한국에서의 통신」을 보고 싶어
5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18)
 쇼와시대 후기부터 헤이세이시대의 극작가.
서 그 잡지를 구매했어요. 나도 그중에 한 명이었어요. 오하시 키이
치(大橋喜一)18) 작, 요네쿠라 마사카네 연출로 된 연극의 제목은 
「제비야, 당신은 왜 오지 않느냐(燕よ、お前はなぜ来ないのだ)」. 연
습이 시작되면 나도 조수로 참가하게 되었는데 전문 연극인들이 작
품을 만들어가는 광경을 보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완성된 무대는 
일본 전국에서 백수십 번 상영돼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어요. 
  한국에서는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 부장 김
재규(金載圭) 씨에게 사살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걸 계기
로 한국에서는 군사독재정권이 없어지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커졌
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어요. 그러나 사살사건 직후
에 육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전면에 등장하였고 
군사 반란을 일으켰어요. 이에 대한 불안감도 있긴 했지만 1980년
에 들어서 ‘서울의 봄’이라는 말이 많이 보도되기 시작했고 일시적
인 혼란은 있더라도 한국도 드디어 민주화 시대를 맞이할 수 있다는 
큰 기대가 생겼어요. 나도 큰 기대를 품고 있었는데 5월에 충격적인 
‘광주사건’이 일어났어요. 지금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표현을 
쓰죠. 
  한창 광주사건이 벌어져 있을 때 나는 도쿄에서 서승·서준식 형
제의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작은 연극의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들을 구원하는 활동의 하나인 가족·교포회(家族·僑胞の会)가 주
최하는 집회의 2부에서 소공연을 하자고 해서 준비했었어요. 마침 
연습을 하는 시간에 광주사건에 관한 뉴스가 TV에서 방송되는 거
예요. 연습을 중단하고 다 같이 TV를 봤는데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
제4장 문학 활동을 통한 민족성의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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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955년에 결성된 총련 산하의 청년단체. (참고: 재일본조선청년동맹, htt
ps://www.chochong.info/)
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마음이 생겼
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뭔가 해야 한다는 마음이 
부풀었죠. 그럴 때 마침 재일본조선청년동맹(在日本朝鮮青年同盟, 
이하 조청(朝青))19) 도쿄도 본부에서 광주사건을 주제로 한 연극을 
할 수 없겠냐는 상담이 왔으니 바로 하겠다고 하고, 각본과 연출을 
맡게 됐어요.
  박정희 사살사건부터 광주투쟁까지의 반년이라는 건 한국 근대
사에서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니까 
이 반년을 그대로 연극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국
에서의 통신」을 원작으로 주인공을 ‘T·K생’으로 설정하는 대본을 
쓰자고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한국에서의 통신」을 원작으로 하려면 『세계』의 양해를 
얻어야 했죠. 『세계』 편집장은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씨라고 일
본의 저널리스트를 대표할만한 분이었는데 옛날 「한국에서의 통
신」의 독자로서 만난 적이 있었으니 내가 문예동의 활동가라는 것
도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전화해서 T·K생을 모델로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상담을 했어요.
  T·K생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을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잠시만”
이라고 하신 거예요. T·K생의 원고를 잡지에 싣는 것은 철저히 
비밀을 지키면서 하고 있었더라고요. 한국 정부에서는 T·K생이 
누군지 혈안이 되어 찾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절대 들키면 안 되었
던 거죠. 그러니까 야스에 편집장이 직접 「한국에서의 통신」을 담당
5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하고, 직원이라 해도 질문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비밀을 
지키고 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내가 T·K생을 주인공으로 연극화
하고 싶다고 하니 난처하신 거죠. 「한국에서의 통신」을 총련의 활동
가가 직접 연극화하고 T·K생이라는 이름을 낸다는 건 상당히 고민
거리였던 것 같아요. T·K생과 상담해보겠다고 하셨죠. 
연극 「광명이여! 소생하라」의 포스터와 희곡집
  그런데 1주일 지나도 연락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전화했더니 
아직까지 고민하고 있다고 하신 거예요. T·K생과 직접 상담하셨는
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고민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T·K생이라
는 이름은 안 쓰고 주인공 이름을 ‘민주(ミンジュ)’로 바꾸면 어떤가
라고 제안했더니 “그렇다면 된다”고 바로 승낙해주셨어요. 그것이 
「광명이여! 소생하라(光よ!甦れ)」예요. 조청의 청년들이 모여서 밤
제4장 문학 활동을 통한 민족성의 강화   
53
마다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어요. 유학동과 마찬가지로 연극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발성 연습부터 했죠. 청년들에게
도 광주사건이라는 건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까 모두가 열심히 참
가했던 것 같아요. 
  이 무대는 극단민예와 요네쿠라 씨의 협력 하에 민예의 음향 담당
자가 전면적으로 효과음이나 음악을 맡아줬죠. 민예의 음향 담당자
라 하면 일본에서 최고급 수준이었죠. BGM도 그렇지만 광주사건
에서 군인들이 총격하는 소리, 헬리콥터가 날아다니는 폭음, 이런 
소리를 모두 만들어줬죠. 공연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도쿄에서
도 앙코르 공연, 그리고 오사카에서도 오사카 유학동 주최로 상연했
어요. 
연극 「광명이여! 소생하라」 공연일정
1980.10.24.
도쿄·荒川区民会館
1980.10.29.
도쿄·東京都勤労福祉会館
1980.12.05.
오사카·守口市民会館
  「침묵」, 「광명이여! 소생하라」가 계기가 돼서 이후 유학동이나 
조청을 중심으로 연극을 통해 우리 주장을 어필한다는 게 붐이 됐어
요. 그래서 도쿄나 오사카에서 매년과 같이 연극을 하게 됐고, 그럴 
때마다 꼭 나한테 의뢰가 왔어요. 당시는 연극을 연출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 이후는 매년 한 편 이상 연극
을 했었던 것 같아요. 
5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20)
 1982년 3월 18일, 부산에 있던 미국홍보문화교류국 미국문화원에 반미주
의자의 대학생들이 불을 지른, 반미운동의 성격을 띠는 방화 사건. 화재로 
인해 문화원 1층은 전소하고, 문화원 실내에 있던 대학원생들이 사망·부상
하였다. 또한 화재 직후에는 문화원 주변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탄압한 
전두환 정권의 타도와 전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을 제국주의자로 단정하고 
내쫓기 위한 반미투쟁을 호소하는 전단지가 살포되었다.
21)
 이 단락은 고찬유 감독이 1983년에 발표한 논문 “素人演劇から民衆演劇
へ”, 『同時代戯曲集「光よ!甦れ」』 139쪽에서 번역 인용함. 
  1983년에는 「내 넋을 불빛에 비치여(我が魂を炎に照らし)」라는 
연극도 했어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20)이라는 일이 있었죠. 
이 사건은 한국인들이 미국은 우호국이 아니라 한반도의 통일을 
방해하는 세력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에요. 그것을 
연극으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이 대본 집필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은 글을 쓴 적이 있어요21)
“집필에 있어서는 오해가 많았던 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광주의 
영령과 함께 투쟁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되도록 정확히 전달하는 
것에 전력을 다했다. 그것을 위해 구성상 불충분한 점도 있었지만 
본인들의 말을 그대로 대사로 인용했다. 숭고한 그들의 투쟁을 두고 
‘예술’이라는 핑계로 진실을 왜곡하는 것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연극 공연을 할 때마다 그런 의식으로 연출해왔어요. 한 
번만 상연한 것도 있고, 2~3번 앙코르 공연을 한 것도 있어요. 그리
고 내가 조선대학교 다녔을 때는 연극부가 없었는데 그 후에 생겼어
요. 한 번은 연극부가 공연할 때 나한테 연출 부탁이 와서 매일 
밤마다 조선대학교에 가서 연습을 지도한 적도 있었어요. 현재 조선
대학교 연극부는 알차게 활동하고 있고 졸업생들의 극단이 만들어
제4장 문학 활동을 통한 민족성의 강화   
55
지기도 했어요.
  내가 창작한 연극은 연기를 배운 전문가가 나오는 게 아니라 일반 
대학생들이나 청년이 많이 출연하니까 매번 멤버가 달라지죠. 유학
동 경우 연극을 통해 사회 문제를 제기하고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지
만 학생 자체를 키우고 싶다는 의도가 있었어요. 그래서 항상 “되도
록 많은 학생을 출연시켜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다수가 무대에 올
라가는 장면을 일부러 설정했어요. 작은 극단이라면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예를 들면 광주사건의 학살 장면에서는 30, 40명이 무대로 
올라가 싸우고 쓰러지는 장면을 재현하니까 대박이죠.
1982년 가시마야리가다케(鹿島槍ヶ岳)에서 찍은 사진 
  연극이라는 건 출연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요. 광주사건의 
5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경우는 한국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전달한다는 가장 큰 
목표가 있는 동시에 학생들 속에서 의식혁명이 일어나게 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었죠. 한 달 동안 매일 밤마다 연습을 하고. 마지막 
1주일 동안은 숙박하면서 연습도 하고 토론도 했으니까 출연하는 
학생들의 사상 의식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아요.
김정원(재일한인 2세 여성, 대학생 때 연극 「내 넋을 불빛에 
비치여 참가)
“옆에서 보면 그렇겠지만 영혼이 들어오는 느낌, 뭔가 신 지핀 
표현이지만. 고 감독님에게 지도를 받고 제가 각성이라든가, 단
련이 되는 그런 큰일이었어요. 재일로서, 대학생으로서, 일본인
과 조선인 사이에 흔들리는 제가 한국의 정치범,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연기한다는 것은 지금 
뒤돌아봐도 정말로, 원체험(原体験)이라고 해야 할지, 저의 기
반이 되어있다고 느껴요. 그런 기회를 고 감독님은 저희한테 
주신 거죠.”
제5장 북한 방문 이후의 조국을 위한 활동
문학예술일꾼대표단으로 북한 첫 방문
북한 재방문, 북한 귀국사업에 대한 생각
조국 통일을 기원하며 남북 공동응원단 참가
조선인 피폭자 조사단 참가
58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 문학예술일꾼대표단으로 북한 첫 방문
  1979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어요. 문예동을 중심으로 문학예
술관계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선정되어서 간 거예요. 
2월 13일부터 4월 17일까지 ‘총련 문학예술 일꾼대표단(総聯文学
芸術イルクン代表団)’이라는 형태로. 이것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북한의 각 분야의 선생님 밑에서 지도를 받으러 간 거예요. 무용을 
하고 있는 사람은 무용 선생님 밑에서. 미술도 그렇고. 나는 당시 
시를 조금씩 쓰고 있었으니까 시인 선생님 밑에서 공부했어요. 관광
도 조금 있었긴 한데 가끔 북한 각지를 보러 다니기도 하면서 주로 
호텔 안에서 계속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쓰고 보여드리고, 다시 
고치고 보여드리고. 이렇게 두 달 정도 지도를 받고 왔어요. 
  북한 방문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당시 일본에서는 북한 비난 보도
가 많이 있었기도 해서 진실은 무엇인지 이번 기회에 그 진위를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여러 가지 생각해본 결과 최종적으로 
내가 선택한 판단 방식은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겠다는 것이었어
요. 그 사회가 정상적인지 아닌지는 사람들 얼굴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니까 버스를 타거나 어딘가 방문할 때마다 계속 길가
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했어요. 그랬더니 다들 정말 좋은 표정
을 짓고 있었죠. 시골에서 편안하고 한가롭게 생활하고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할까. 일본에서 사람들 얼굴을 보면 어딘지 험상궂은 
데가 있죠. 그런데 북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런 게 안 보였어요. 
제5장 북한 방문 이후의 조국을 위한 활동   
59
  일본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힘들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런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스스로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지 
않은가라고 생각해요. 타인이 이렇다 저렇다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이 들었어요. 물론 나라가 곤란에 빠지면 굉장히 힘들지요. 예를 
들어 난민처럼 힘들게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역시 비참하
죠. 그런데 북한은 그렇지 않았어요. 일본에서는 개인숭배라고 비
판하고 있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실제로 정권을 지지하고 그런 표정
을 지을 수 있는 사회주의국가가 형성되었다면 그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요. 첫 북한 방문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었어요. 항상 마음에 걸렸던 문제가 많이 사라
졌어요. 
▮ 북한 재방문, 북한 귀국사업에 대한 생각
  1985년에 다시 북한을 방문하게 됐어요. 10월 15일부터 12월 
16일까지 ‘제3차 총련창작일꾼대표단(第3次総聯創作イルクン代表
団)’으로. 이때도 문학예술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조국으로 가
서 그쪽 작가나 예술가 선생님들한테 직접 지도를 받는 거였어요. 
나는 1983년 문예동에서 해임되었었지만 그래도 문학부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으니 같이 갈 수 있었어요. 
  오랜만에 방문한 북한은 자본주의적 요소가 꽤 많이 늘어나 있었
어요. 예를 들면 다방이나 외화만으로 쇼핑할 수 있는 백화점 같은 
곳이 생겼어요.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워왔던 북한도 변화가 일어
6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나고 있다고 느껴졌어요. 
1985년 평양에서 만난 강영휴 선배
  북한 방문 중 몇 번이나 강영휴 선배를 만났어요. 귀국사업이 
재개된 시기 총련에서 우수한 청년들을 조국으로 보낸 일이 있었는
데 선배는 뽑혀서 귀국한 거예요. 선배는 평양에 있는 금성출판사에
서 기자가 돼서 훌륭한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귀국사업 50주년을 맞이한 2009년을 전후해서 일본 보수파 속
에서 귀국사업에 대한 중상 비판이 되살아난 것 같아요. 북한이 
‘지상의 낙원’이라는 거짓 선전을 했다거나 총련과 일본 좌익이 동
조했다거나... 그런 주장엔 화가 나네요. 그 당시 재일한인들이 온갖 
차별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이국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이 조국에 가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제5장 북한 방문 이후의 조국을 위한 활동   
61
22)
 정식 명칭은 제13회 하계 유니버시아드. ‘우호와 평화’를 주제로 1985년 
8월 24일부터 9월 4일까지 효고현 고베시에서 개최되었다. 
일이죠. 더구나 당시 북한은 빠른 속도로 경제적 성장을 이루고 
있었고. 
  테사 모리스 스즈키(Tessa Morris-Suzuki)라는 저명한 학자가 
쓴 『북한행 엑서더스(北朝鮮へのエクソダス)』라는 책이 있는데 모
두 읽어주면 좋겠어요. 이 책에는 귀국사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라는 진상이 역사적 사료에 의거해서 명백히 밝혀져 있어요. 당시 
일본 정부는 일본에 조선인들이 있으면 곤란하니까 빨리 쫓아내고 
싶다. 그런데 일본 정부가 쫓아내는 형태를 취하고 싶지 않아서 
국제적십자사에 제기해서 국제적십자사 알선으로 귀국이 실현된 
것처럼 해달라고 한 거죠. 양자 간에서 서간을 주고받고 했던 증거
가 있었어요. 그걸 테사 모리스 스즈키 씨가 조사해서 진상을 책으
로 밝힌 거예요. 이런 본질을 무시하는 주장은 역사의 진실을 왜곡
하는 것이니 용서할 수 없어요.
▮ 조국 통일을 기원하며 남북 공동응원단 참가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22)라는 국제 스포츠 대회가 있었어
요. 그때 도쿄에 있는 지인이 나한테 상담을 했는데... 남북 모두 
응원하자는 내용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국제스포츠대회에서 북한과 한국의 선수가 등
장하면 총련은 북한팀을, 민단은 한국팀을 응원했죠. 한국과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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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23)
 재일한인 1세. 1941년 3월, 9살 때 전라남도에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와 (유)기초데이터 연구소 소장, (주)사쿠라그룹 전 사장, 조선요리 모란
봉류 종가, 모란봉 조리사 전문학교 이사장, 국제태권도연맹 수석부총재를 
역임하였다. 
이 붙으면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성원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지인
은 “남북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는 묵과할 수 없다”고 하면서 남북 
양쪽을 함께 응원하는 운동을 하자고 한 거예요. 아주 좋은 아이디
어라 나는 바로 찬성했어요. 그런데 그 제안을 한 사람은 도쿄에 
살고 있고 대회는 고베에서 열리니까 직접 준비할 수 없다고 해서 
나한테 해달라고 한 거예요. 기꺼이 하겠다고 해서 바로 오사카에서 
남북공동응원단이라는 것을 발족시켰어요. 축구를 하고 있던 대학
생을 대표로 하고 10명 정도의 스태프를 구성했어요. 
  고베 유니버시아드 대회가 시작되고는 도쿄에서 응원단이 버스
를 타고 왔고. 당시 재일 청년들을 위해 재정적으로 잘 협력해준 
‘모란봉’ 회사 사장인 전진식(全鎭植)23) 씨가 비용적으로 많이 후원
해주신 것 같아요. 
  그리고 응원하려면 깃발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내 친구 중에 디자
이너가 있는데, 공동응원기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요. 정말 훌륭
한 디자인이죠? 이걸 몇천 개 만들어서 스태프들이 바지저고리를 
입고 응원석으로 가서 이걸 무료로 배포했어요. 당시 총련과 민단은 
자리가 완전히 따로따로 있었으니까 양측으로 가서 배포했어요. 
그랬더니 당연히 매스컴이 덤벼들었죠. 바지저고리를 입고 ‘장고
(장구)’를 치면서 응원하고 있는 청년들이 TV나 신문에서도 많이 
나왔어요.
제5장 북한 방문 이후의 조국을 위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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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991년 지바현에서 개최된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당시 국제탁
고베 유니버시아드 남북 공동응원기 
(ZOOM 인터뷰, 2021년)
  그런데 실제로 현장에 가서 배포해보면 기꺼이 받아주는 사람도 
있지만 조직적으로 한 게 아니라는 이유로 어쩐지 수상쩍은 눈으로 
보고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더 
많은 동포들이 받아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네요. 
그래도 이 활동을 통해 문제 제기는 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싶어요.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도 좋은 일을 해냈다고 기뻐했고요. 
  중앙에 한반도 지도가 있는, 현재 흔히 쓰이는 남북 공동응원기
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올림픽이나 국제대회에 나갈 때 자주 보이지
만 그것은 1991년부터 쓰인 거예요. 1991년 지바(千葉)현에서 세
계탁구선수권대회24)가 있었는데 이때 북한과 한국의 통일팀이 구
6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구연맹회장인 오기무라 이치로(荻村伊智朗)의 권유로 한국과 북한 대표가 
‘통일 코리아’팀을 결성하였고 그때 처음으로 ‘코리아’ 대표기로서 통일기가 
공식적으로 게양되었다. 
성됐어요. 획기적인 일이었죠. 나라가 남북 통일팀을 만드니까 당
연히 재일한인 사회에서도 총련과 민단이라는 두 조직이 의논을 
하고 공동응원단을 만들었어요. 큰 화제가 됐죠! 감격, 감동이죠. 
나도 지바에서 열린 대회를 보러 갔는데 너무 흥분했죠. 이 대회에
서 처음으로 그 통일기가 정식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스포
츠 대회가 있을 때마다 그 통일기가 사용되고 있어요. 
  그 통일기를 볼 때마다 우리가 고베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했던 
일이 생각나요. 큰 성과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통일응원단
을 만들자’, ‘공동응원을 하자’라는 발상이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의 행위가 조금이라도 그 
이후의 공동응원으로 연결되었다면 기쁜 일이죠.
▮ 조선인 피폭자 조사단 참가
  1979년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조선인 피폭자 실태조사단’에 참
가했어요. 이것도 나한테 소중한 경험의 하나가 되었어요. 
  재일한인 중에서도 원폭 피해자는 많이 계시는데 그 실태에 대해
서 일본에서는 거의 보도되거나 기록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 상황에 
대해 나도 좀 불만은 있었는데 총련 입장에서도 조선인 피폭자 문제
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었어요. 
제5장 북한 방문 이후의 조국을 위한 활동   
65
25)
 재일한인 2세. 원폭투하의 다음 날인 1945년 8월 7일 고베시에서 나가사
키현으로 가는 와중 히로시마에서 입시피폭(入市被爆, 원폭이 투하된 직후
에 원심지 근처에 들어가 잔류되어 있던 방사성 물질에서 나온 방사선의 
영향을 받아 피폭함)했다. 1975년에 재일한인 최초의 피폭자 단체인 히로시
마현 조선인 피폭자 협의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또한 1980년에는 
전국조직인 ‘재일본 조선인 피폭자 연락협의회(在日本朝鮮人被爆者連絡協
議会)’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아 일본, 한국뿐만 아니라 북한 거주 피폭자의 
구제도 호소하였다. 
  히로시마에서는 이실근(李実根)25) 씨가 ‘히로시마조선인피폭자
협의회(広島県朝鮮人被爆者協議会)’라는 조직을 만들고 회장을 맡
고 계셨어요. 조직 활동을 하면서 피폭자 문제는 더 크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 큰 움직임이 쉽게 일어나지 않아 안타까워하
셨어요. 옛날에 한 번 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 총련이 더욱 진지하게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러한 경과를 거쳐 총련 사회국이 중심이 되어 1979년 처음으
로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조선인 피폭자 실태조사가 진행되었는데 
그때 나는 먼저 나가사키로 파견되었어요. 사전에 가서 준비하라는 
임무를 받아 혼자 나가사키로 갔다가 총련 나가사키현 본부의 위원
장과 함께 피폭자 집을 방문했어요. 다음에 조사단이 찾아올 테니 
그때 협력을 잘 부탁한다고 하면서 사전 협의를 했어요.
  그 이후 정식으로 조사단이 찾아갔는데, 동포들과 일본인 변호사
나 지식인, 작가를 비롯한 열 몇 명이 조사단을 구성했어요. 피폭 
동포들을 한 집 한 집 찾아다니기도 하고 사무실에 와달라고 부탁하
기도 해서 그들의 체험담을 들었어요. 동포들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경험을 말씀하셨는데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들을 할 기회가 없었다
고 해요. 내용은 생생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였지만 이야기할 수 
6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26)
 吉留路樹 編著 『アイゴ!ムルダルラ:広島・長崎被爆朝鮮人の35 年』 
(1980年)、二月社: 東京.
있는 장이 있어서 다들 좋아하셨어요. 그때 나가사키의 일본의 대중
매체는 다 왔어요. TV나 라디오, 신문까지. 지방신문이었지만 큰 
화제가 됐어요. 
  그 후에 히로시마에서도 조사가 진행되었어요. 나도 참가했죠. 
히로시마는 원폭자료관도 있고, 일본인 피폭자에 대한 조사는 상당
히 진전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인 피폭자에 대해서는 전혀 눈길이 
가지 않았었던 거죠. 
  이실근 씨는 그 부분을 강조하신 거죠. 같은 피폭자인데도 불구
하고 일본인 피폭자 조사는 진전되어 있는데 한인 피폭자에 대해서
는 조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큰 불만을 가지고 계셨어
요. 그런데 이때, 조사단을 통해 일본인 피폭자 문제를 다루는 사람
들과 한인 측이 같이 조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서로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믿고 있어요. 
  이 조사 결과는 『아이고! 물 달라(アイゴ!ムルダルラ)』26)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이 조사단을 계기로 나가
사키에도 ‘나가사키현 피폭자 협의회(長崎県朝鮮人被爆者協議会)’
가 새로 발족했어요.
제6장 재일한인을 위한 정보 잡지 발간
오사카 재이주와 『상봉』 발간, 총련 해고
저널리스트 활동의 본격화
『미래』의 발간과 폐간
68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 오사카 재이주와 『상봉』 발간, 총련 해고
  나한테 다음의 큰 전환기라는 건 역시 1980년대에 정보 잡지를 
만들었다는 것이에요. 
  조선대학교 졸업 후 문예동 도쿄지부와 문예동 중앙에서 일했는
데 1981년에 오사카로 돌아왔어요. 1978, 79년쯤부터 앞으로도 
계속 도쿄에서 일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도쿄에서 20대를 
보내면서 만났던 친구들은 친한 사이가 되었고. 다른 활동에서 알게 
된, 예술을 지향하는 청년들도 있었고. 다들 매우 친하게 지냈으니 
도쿄를 떠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괴로웠어요. 그렇다고 평생 도쿄
에 있을까, 라고 하면 참을 수 없는 뭔가가 있었어요. 도쿄의 기질이
라고 할까? 도쿄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높이거나 학습한다
는 면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장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
지 도쿄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역시 그건 못하겠다는 결론
에 이르렀어요. 
  오사카는 태어난 곳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재일한인
이 가장 많은 지역이니까 거기로 돌아가서 향후 재일한인의 권리와 
차별 해소를 위한 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지면서 최종적으로 
돌아가겠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오사카에도 문예동 오사카지부가 
있었으니까 거기로 전근 희망을 냈고 허락을 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1981년에 오사카로 돌아오게 됐어요. 
  나는 여기서도 예술미술전이나 음악회를 조직하는 일을 했죠. 
제6장 재일한인을 위한 정보 잡지 발간   
69
27)
 『상봉』은 2018년 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에서 『「상봉」: 현대 재일
코리안 자료집』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오사카로 돌아오니까 역시 오사카! 여러 곳에서 총련과 관련된, 혹
은 총련과는 선을 긋는 다양한 그룹이 있는데 각자 다양한 민족운동
을 전개하고 있었어요. 집회를 하거나 공연을 하거나. 그리고 일본
인 중에서도 재일한인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도 
다양한 행사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매스컴에서는 이런 활동들에
는 거의 주목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쿠노구에서 연 이벤트 
같은 것에 대해서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이걸 
어떻게 해야겠다 싶어서 생각한 게 정보 잡지였어요. 당시 총련에서
도 『조선신보(朝鮮新報)』나 『조선화보(朝鮮画報)』 같은 걸 출판하고 
있었고 민단도 기관지를 내고 있었죠. 그런데 그 외, 말하자면 제3
자의 입장에서 만든 정보 잡지는 거의 없었죠. 지식인들이 가끔 
잡지를 만들긴 했었지만 정상적으로 정보 잡지를 만드는 건 없었으
니까 내가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나는 돈도 없고... 매달 발행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니 
두 달에 한 번씩 내기로 했어요. 오사카를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해
서 16쪽밖에 안 되는 정보 잡지를 만들었어요. 이름은 『상봉(サンボ
ン)』27)이라고 한자로는 ‘相逢’, ‘만남’이라는 뜻이에요. 이걸 냈더니 
환영을 받은 거예요. “재일사회에서 이렇게 활발하게 다양한 활동
이 전개되고 있다는 건 몰랐다”고. 언론에서도 소개를 해줬고. 
  『상봉』은 평가가 높았는데 이건 내가 문예동 사업을 하면서 했었
으니까 맹렬히 바쁜 거예요. 연중무휴이죠. 그런 상황에서 만들었
는데 총련 내부에는 아직도 완고한 사람이 있는 거예요. 윗사람 
7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중 그런 사람이 있으면 곤란해요. 제대로 대화가 안 된다고 해야 
하나... 당시 문화부에 있던 사람이 트집을 잡은 거예요. 가장 큰 
이유가 일본어로 발간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원래 『상봉』을 발간한 것은 총련 내부 사람들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어요. 그들은 『조선신보』 같은 걸 보면 되는 거니까. 『상봉』
은 총련 내부보다는 총련에서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나 일본인을 
대상으로 재일한인들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알리는 것을 
목표로 했었으니까 당연히 일본어로 내야죠. 당시 나는 문예동에 
있었으니까 자기 작품을 쓸 때는 꼭 조선어로 썼어요. 그런데 이건 
목적이 목적이니까 일본어로 쓰고 만들었는데 그 부분에 비판한 
거죠. 결과적으로 나는 해임을 당했어요. 반(反)총련적인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그런데 문예동 맹원(盟員)들은 내 일을 지지해 주었
죠. 특히 문학부 사람들하고는 지금도 달마다 같이 문학교실을 계속
하고 있어요.
  나름 좋다고 생각해서 했던 활동 때문에 해임이 되었는데 문제는 
사무소를 못 쓰게 된다는 거였어요. 난처했지만 도와준 사람이 있었
어요. 총련 안에 상공회라는 게 있는데, 주로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단체예요. 거기가 내 활동을 평가해주고 상공회 사무소의 
한 방을 빌려준다고 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2, 3평 정도의 좁은 
방이었지만 제공해줬어요. 거기서 계속 활동을 했는데 당연히 직원
은 한 명도 없었죠. 봉사로 도와주는 사람의 협력을 얻으면서 유지
해 왔어요. 그런데 수입은 거의 없었으니 사실 1주일에 한 번 육체
노동, 노가다 같은 걸 하면서 겨우 생활을 유지했었어요.
제6장 재일한인을 위한 정보 잡지 발간   
71
28)
 동년 12월 3일 명칭을 자유저널리스트클럽(自由ジャーナリストクラブ, 
JCL)으로 변경하여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29)
 대학교 졸업 후 NHK 도쿄방송국에 방송기자·사회보도프로그램 디렉터로 
취직하였고, 이후 TV 드라마 연출가로 활동하였다. 특히 태평양전쟁 중 포로 
학대 및 살해 용의로 전범이 된 육군 중위 출신 가토 테츠타로(加藤哲太郎)
의 옥중 수기를 바탕으로 창작한 드라마 「나는 조개가 되고 싶다(私は貝にな
りたい)」가 유명하다. 1970년대에는 재일한인을 주제로 한 영화도 제작하
였다. 그 후 오사카경제법과대학교 교수로 교편을 잡았다.
▮ 저널리스트 활동의 본격화
  『상봉』을 하면서 내가 다루는 주제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것뿐이며, 일반 매스컴에 비하면 어림도 없지만 그나마 저널리스트
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는 1988년 3월에 일본인을 중심
으로 ‘간사이 저널리스트 클럽(関西ジャーナリストクラブ)’28)이 설
립됐어요.
  1987년 테러리스트가 아사히신문 고베지국을 습격하여 기자 1
명이 사살되는 큰 사건이 일어났어요. 범인은 지금도 잡지 못하고 
있는데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매스컴 계에서는 심각한 문제로 여겨
졌어요. 그때 오사카경제법과대학교 교수였던 오카모토 요시히코
(岡本愛彦)29) 선생님이 제안한 거예요. 매스컴은 신문사도 TV 방송
국도 각자 독립된 활동을 하고 있지만, 회사 입장을 넘어 같은 저널
리스트로서 이 사회를 바꿔가는 장이 있으면 좋겠다는 발상으로 
제기하셨어요.
  나는 『상봉』을 하면서 일본인 저널리스트나 신문 기자들과 어느 
7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30)
 재일한인 3세의 경제학자. 오사카시립대학교 경제학부/경제학연구과 교수. 
정도 친하게 지냈는데 그런 훌륭한 사람들이 모두 그 제안에 찬동해
서 같이 간사이 저널리스트 클럽을 차렸어요. 모임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는데 매스컴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더
니 역시 수준이 대단했어요. 내가 재일한인이라는 작은 세계만 자잘
하게 취재하고 다녔던 것과 비교가 안 돼요. 그런 사람들과 만나는 
건 매우 자극이 됐고 공부가 됐어요. 이런 장이 있었던 덕분에 그 
이후 아사히, 마이니치, 요미우리(読売), NHK와 같은 매스컴 각사
의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그분들보다 재일에 대해서는 선행하고 있었죠. 『상
봉』을 하면서 재일 관련 정보는 모두 나한테 들어왔어요. 나는 별로 
특종을 노리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 무슨 행사가 있거나 사건이 일어
났거나, 매스컴에서 다룰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런 정보를 
일본인 기자들에게 알려줬죠. 그랬더니 기자들이 기꺼이 취재하러 
가거나 기사로 내준 일도 자주 있었어요, 
  당시 오사카에서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한인 저널리스트는 거
의 없었어요. 아직까지 지식인, 그러니까 대학교수나 준교수와 같
은 직업에 한인들이 올라가는 것도 어려운 시대였고. 지금이라면 
박일(朴一)30)선생님 같은 분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그때는 아직 젊
으셨으니까 사회에서 그렇게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어
요. 그러니까 오사카에서 어느 정도 지적 활동을 하는 재일한인 
중에는 내가 주목을 받았어요. TV나 신문이나 뭔가 한국, 북한, 
한반도 문제, 그리고 재일한인 관련 사건이 일어나면 자주 나한테 
연락이 왔었어요. 
제6장 재일한인을 위한 정보 잡지 발간   
73
  그 관계로 취재도 많이 받았는데 TV 방송에도 나왔어요. NHK에
서 방송된 아시아의 각종 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인 ‘아시아 맨슬리
(アジア·マンスリー)’와 같은 것도 자주 출연했어요. 그리고 간사이
TV(関西テレビ)에서 했던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요리인(ニュース
料理人)’. 이건 비교적 주부들이 보는 가벼운 관점에서 사회적 뉴스
를 보도하는 건데 이 프로그램의 해설사로 지명됐어요. 매번 출연하
는 것이 아니라 재일한인 문제, 북한 문제나 한국 문제가 다루어질 
때만 내가 방송국에 가서 코멘트를 했었어요.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1년 정도 만에 종료가 돼서 결국 내가 해설사로 출연하고 발언한 
것은 그저 몇 번만. 그래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 『미래』의 발간과 폐간
  다양한 활동이나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1988년의 어느 날, 조청 
오사카 본부의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나를 찾아온 거예요. 원래 조청
은 재일한인 청년들의 민족성을 키우는 활동이 중심인데 그걸 앞으
로 잘하기 위해서는 기존 방법으로는 어려워진 거죠. 사회주의 조국
을 찬양하는 활동만으로는 일반 청년들은 망라할 수 없다는 문제의
식을 가진 사람들도 역시 존재했었죠. 그래서 조청 오사카 본부에서
는 더욱 대담히 많은 청년들을 망라하기 위한 활동으로 전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아요. 
  그 방법으로 『상봉』과 협조해서 더 크게 발전시키고 싶다는 상담
이었던 거예요. 내 입장에서도 『상봉』을 그런 취지로 시작한 일이고 
7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아무 후원도 없이 혼자 해왔으니 마침 딱 좋은 기회였어요. 그래서 
바로 동의했고 1988년 6월에 조선 관련 정보 잡지 형태로 『미래(ミ
レ)』를 창간했어요. 
  당초는 두 달에 한 번 발간하는 거로 시작했는데 1991년 1월부
터는 월간지가 됐으며 동시에 ‘팬 퍼블리시티(パン・パブリシ
ティー)’라는 회사를 설립했어요. 조청 부위원장이었던 친구가 사
장을 했고 나는 편집장이라는 직함을 받았어요. 직원도 7, 8명이 
있었고 『미래』를 직접 담당하는 스태프도 3명 정도 있었죠. 나머지 
영업이나 광고를 모으는 일도 다른 직원들이 다 해줬으니 나한테는 
너무 고마운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나는 작은 월급이었지만 기본적
으로 취재비 걱정 없이 활동할 수 있었어요. 간사이를 중심으로 
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도쿄나 홋카이도 같은 곳에도 출장을 갈 수 
있는 체계가 만들어졌어요. 
  그 이후 다양한 주제로 취재하고 기사를 썼는데 나의 근간에는 
항상 재일한인에 대한 차별 문제라는 게 있었죠. 이건 내가 정보지
를 처음 만든 계기이기도 하지만 『상봉』에서 『미래』로 달라지면서
도 그 부분은 계속 기본으로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새로운 
도전으로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기사로 쓰고 
싶다는 구상이 떠올랐어요. 이를 통해 재일한인들이 놓여있는 상황
이 얼마나 혹심한 건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당시 거의 아무도 
관심을 돌리지 않던 재외한인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을 가지게 된 거죠. 
제6장 재일한인을 위한 정보 잡지 발간   
75
1993년 1월 발간 정보 잡지 『미래』 
제40호 표지
  나는 원래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으니까 『미래』 편집장으
로 여러 문제를 취재하거나 각계각층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걸 배웠는지 몰라요. 쉬는 날은 거의 없고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었지만 보람찬 나날이었어요. 그런데 『미래』는 1997
년에 폐간했어요. 그쯤부터 세계적으로 인터넷 보급이 확대되기도 
했고, 매달 잡지를 발간하는 수고도 경제적 부담도 아주 컸어요. 
  그래서 이제는 인쇄 매체가 아니라 인터넷 매체로 정보를 발신하
자고 방향 전환하기로 해서 1998년부터 ‘아시안 아이즈(エイジア
ンアイズ)’라는 이름을 붙여서 시작했어요. 이 활동은 아직 다른 
데도 많이 안 했던 것이라 주목을 받고 신문에서도 소개해 줬지만 
7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결국 1년 만에 그만두었어요. 이 활동 자체는 헛된 건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매스컴에서도 재일한인 문제가 많이 다루어지게 돼 
있었고 나도 『상봉』부터 약 10년 동안 재일한인에 관한 주된 문제
를 거의 다 다루었기 때문에 이젠 내가 해야 하는 그런 사명은 끝났
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미래』도 폐간시키고 아시안 아이즈도 
그만둔 거예요.
제3부 교육과 연구 활동
제7장 대학교 강사와 연구 활동
대학교에서의 강사 생활
일본 내 외국인학교의 문제점
외국인학교협의회의 설립, ‘외국인학교 안의 조선학교’
재일외국인 차별을 없애기 위한 집필활동
8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31)
 일본의 17음(5·7·5의 3구)으로 된 짧은 시.
▮ 대학교에서의 강사 생활
  1999년 이후에는 몇 군데 대학교에서 주로 비상근 강사로 일하
는 생활로 바뀌었어요. 강사를 하면서 내가 원하는 주제에 대해서 
취재하고 글 쓰는 논픽션 작가로서도 조금씩 활동했어요. 대학들에
서는 주로 한국어,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나 문화 관련 교과목을 
담당했어요. 
  먼저 1999년부터 고난(甲南)대학교의 비상근 강사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어요. 그다음 2002년부터는 긴키(近畿)대학
교, 2004년부터는 교토 노트르담 여자(京都ノートルダム女子)대학
교에서도 수업을 담당하게 됐어요. 
  긴키대학교에서는 한국어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 역사 그리고 
글쓰기 수업을 담당했어요. 긴키대학교는 잘 아는 교수가 있었는데 
그분은 내가 연극 활동을 하거나 책을 쓰고 있다는 걸을 아셨으니 
그런 수업도 맡겨준 거죠. 학생들은 글쓰기 수업은 기피하기 십상인
데 그래도 글을 쓰는 건 중요하니 여러 가지 궁리를 했어요. 처음에
는 짧은 센류(川柳)31)를 쓰고 그다음은 상품 광고 문구를 쓰거나 
짧은 것부터 시작하고요. 그리고 점차 본인의 주변에 있는 이야깃거
리를 시나리오로 써 보도록 했어요. 시나리오는 작성법이 있기 때문
에 그 기술을 알려주고 나서 쓰라고 했는데 이 수업이 꽤 인기가 
제7장 대학교 강사와 연구 활동   
81
32)
 기독교를 덕육(德育)의 기본으로 하는 도시샤대학교에서는 각자의 세계관, 
가치관이 풍부하게 형성되는 것을 목표로 학생뿐만 아니라 교직원, 지역 
주민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참고: 同志社大学 キリスト
教文化センター, http://www.christian-center.jp/)
많았어요. 2004년부터는 교토 노트르담 여자대학교에서도 강의를 
했는데 주로 조선어 수업과 조선의 역사, 문화를 가르쳤어요. 
대학교 한국어 수업
  또 하나 2001년부터 도시샤(同志社)대학교에서도 가르치기 시작
했는데 여기서는 학생 대상이 아니었어요. 그 대학교 안에는 기독교
문화센터(キリスト教文化センター)32)라는 곳이 있어요. 평생교육
의 일환으로 지역 주민들이 배우러 오는 곳인데 거기에서 강사로 
8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33)
 1979년에 개봉된 임권택 감독의 작품. 식민지 시대 조선에서 유년기를 
보낸 일본인 작가 가지야마 토시유키(梶山季之)의 단편소설 『족보(族譜)』를 
원작으로 한다. 
34)
 1994년 9월에 개봉된 임권택 감독의 작품. 조정래의 장편소설 『태백산맥』
을 원작으로 제작되었다. 
일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한반도의 역사나 문화 같은 것을 가르쳤는데 상당히 
힘들었어요. 조선의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으니까. 일본학교 
다녔을 때는 그런 것들을 안 배웠고 조선대학교에서 학습한 것도 
1년에 불과했죠. 그다지 재미있는 수업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죠. 
스스로 지식을 축적해가려 했지만 역시 학교 교육에서 제대로 배운 
것과 독학에는 큰 차이가 있죠. 책을 읽어봤자 지식이 그리 간단히 
정착되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도저히 남한테 가르쳐줄 만한 힘은 
없었죠. 
  그러다가 한국의 역사나 현실을 알리기 위해서는 내가 강의하는 
것보다 영화를 보여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영화는 지금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주고 있지만 이전에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어
요. 그래도 제대로 역사를 그리는 몇 가지 작품이 있어요. 예를 들면 
식민지 시대의 창씨개명을 주제로 한 『족보』33), 해방 이후에 일어
난 여수·순천 10·19사건을 다룬 『태백산맥』34)이라든가. 그리고 
군사독재정권 시대에는 자유롭게 작품을 만들 수 없었지만 그 와중
에서도 시대적 배경을 날카롭게 형상한 작품이 있었고, 1990년대 
후반부터는 명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작품을 보여주면 
꽤 많은 수강생들이 말로 듣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흥미를 가졌
어요. 그런데 한국영화 가운데 역사를 제대로 그린 작품이라 하면 
제7장 대학교 강사와 연구 활동   
83
한계가 있어서... 수적으로 많이 없으니까. 그래서 주제의 범위를 
세계로 확대시켰어요. 세계 영화 안에서 인권, 평화,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명작을 찾아서 수업 시간에 상영하기로 한 거죠.
도시샤대학교 기독교문화센터 강의 모습 
  영화 길이는 주로 2시간 이상이라 90분 수업 한 번에 소화할 
수 없으니까 첫 번째 수업에서는 30분 동안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영화 전반부를 보여줘요. 그리고 그다음 수업에 후반부를 
보여주고 추가적인 해설을 하거나 토론하는 형태로 진행했어요. 
이런 수업 스타일이 확립되니 꽤 호평을 얻었어요. 
  나는 지금까지 계속 세계 명작을 봐왔는데 그것이 도움이 될 줄이
야. 이런 수업을 하니 나 자신에게도 안성맞춤이었어요. 옛날에 봐
서 감동한 작품이라 해도 자세한 것은 잘 기억나지 않죠. 그래서 
수강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다시 보니까 그 영화가 만들어진 
배경이나 주제를 공부하게 되고 더 깊은 해석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나한테도 공부가 되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해요. 캄보디
아 내전을 다루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35), 베트남 전쟁
8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35)
 1984년에 제작된 영미합작 영화. 뉴욕타임스(NYT) 특파원으로 캄보디아 
내전의 참상을 취재하고 세상에 알린 시드니 쉔버그(Sydney Schanberg)
의 경험을 토대로 제작되었다. 
36)
 1978년에 개봉된, 베트남 전쟁을 다룬 미국 영화.
을 다루는 『디어 헌터(The Deer Hunter)』36)라든가. 이런 영화를 
교재로 수업을 했었어요. 
  흑인 문제를 다루는 영화도 많이 상영했어요. 나는 이전부터 재
일한인 차별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흑인 문제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차별의 근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역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노예 문제부터 흑인 문제에 이르는 
과정과 문제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었고. 그래서 스스로 
흑인 관련 영화나 책도 많이 봤는데 흑인에 관한 영화 상영은 수강
생들 속에서 호평이었어요.
  대부분 사람들은 흑인 노예 문제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는 있는
데 어떤 과정으로 노예가 되었고 어떤 취급을 당해 왔는지, 그리고 
왜 노예 해방이 된 후에도 100년 이상 계속 흑인차별이 이어지고 
있는지, 그런 실태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는 거죠. 나도 마찬가지
였죠. 노예 해방이 된 19세기 후반부터 1953, 54년쯤까지 흑인들
이 놓여있었던 차별 상황은 재일한인들이 겪고 있던 차별 상황과 
거의 같았어요. 미국에서는 흑인이 백인 말을 안 듣거나 저항하면 
린치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했죠. 참혹한 사건이 많이 일어났어요. 
재일한인 경우는 그 정도까지 폭력적으로 차별을 당하지는 않았지
만 둘 다 공통적으로 법률·제도에 의해 차별을 당하고 있죠. 그러니
까 재일한인 문제를 생각할 때는 재일한인의 입장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세계 역사 속에서 차별 문제를 생각하면 시야가 더욱 넓어지
제7장 대학교 강사와 연구 활동   
85
37)
 1970년에 제작된 미국 영화.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복싱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지만 백인 여성과 사랑에 빠지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게 된 잭 존슨
(Jack Johnson)을 모델로 한 연극 「위대한 백인의 희망」을 영화화하였다. 
지 않을까 생각해요. 
  『위대한 희망(The Great White Hope)』37)을 비롯하여 흑인을 
주제로 한 할리우드 영화 작품은 수업에서도 많이 다루었어요. 인권
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보여주는 힘이 역시 대단
하죠. 미국 할리우드는 돈을 많이 투자해서 만드는 것도 있지만 
기술 자체가 훌륭해요. 주제를 파고들어 보여주는 방법이라든가 
기승전결에 따라 관객들을 감동시키는 방법이라든가 배울만한 부
분이 많이 있죠. 수업에서는 일본 영화는 거의 다루지 못했죠. 안 
하려고 한 건 아니고.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의 영화 같은 
건 다루었지만 일본 영화에는 시대적 배경을 제대로 그려낸 명작이 
그리 없어요. 
  흑인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이런 영화들을 수업에서 많이 다루었더
니 수강생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죠. 이런 경험을 통해서 영화가 
가진 힘... 영화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나 사상 등을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수단이 된다고 재인식하게 됐어요. 
▮ 일본 내 외국인학교의 문제점
  나는 메이저리티가 마이너리티를 차별하는 건 절대적으로 반대
하지만 더구나 아이들의 민족교육을 억압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8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38)
 일본의 <교육기본법> 제1조에서 규정되어 있는 교육시설의 종류 및 그 
통칭.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중등교육학교, 특별지원학교, 
대학교(2년제 단기대학교 및 대학원 포함) 및 고등전문학교를 말한다. 한편 
전수학교 및 각종학교는 각각 제124조, 제134조에 규정되어 있기에 일조교
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안된다고 확신해요. 그래서 『미래』 편집장을 하던 1994년부터 1년
간 “국제화 시대의 민족교육”이란 르포를 연재했어요. 세계의 국제
화가 아무리 진행되어도 민족교육은 곧 필요하다는 시각에 서면서 
조선학교 이외의 외국인학교를 취재하려고 한 거예요.
  당시까지만 해도 조선학교의 문제라 하면 연구자가 적지 않게 
있었지만 다른 외국인학교에 주목한 사람은 별로 없었어요. 한국학
교를 취재한 책도 없었고요. 나는 조선학교 차별이라는 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 다른 외국인학교나 한국학교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알아
보고 비교해 보려고 한 거예요.
  먼저 한국학교부터 보면, 일본 국내에는 한국학교가 네 군데 있
었고, 그중 2개가 일조교(一条校)38)였어요. 그 2학교는 사립학교니
까 일단은 일본 정부에서 예산은 내려오고, 대학교 수험도 가능하고 
기본적으로 차별은 없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일조교가 되면 문부과학성(이하, 문과성) 검정교과서를 쓰고 문과
성의 학습지도요령 그대로 수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 결과 
문과성의 학습지도요령 중에 한국어 수업이라는 과목은 없으니까, 
한국학교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어 수업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원칙대로 하면 그런 거죠. 그래도 일단 주 1번, 2번 정도 한국어를 
하긴 하는데. 또 모든 교과서는 일본학교와 같은 것을 사용하기 
제7장 대학교 강사와 연구 활동   
87
때문에 모두 다 일본어. 교과서가 일본어니까 수업도 다 일본어가 
되어버리잖아요.
  그래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은 낮고. 한국 역사나 지리 같은 수업
은 학년에 따라 하는 경우도 있고, 안 하는 경우도 있고. 그러니까 
일조교 한국학교에 12년 동안 다녀도 한국어를 제대로 쓸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어요. 한 선생님을 취재해보았더니 일본학교 제도가 
있으니까 그것에 따라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외국인학교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융통성 없이 딱딱하게 할 필요가 있겠냐는 불만
을 토로하셨어요. 
  내가 한국학교를 취재한 시기에는 그랬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어느 한국학교 선생님한테 물어봤더니 현재 한류 붐도 있고 해서, 
민족교육에 대한 시선도 몹시 달라졌나 봐요. 한국어 수업은 알차게 
하게 되었다고. 수업 시간이 많아지고 졸업 후에 한국에 유학하는 
학생들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교 측의 
자립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지,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아니겠죠. 
  그리고 외국인학교 중 국제학교(International School)는 고베
에 많이 있는데요. 1995년 무렵 효고현에는 조선학교가 13군데, 
다른 외국인학교는 중화 학교도 포함해서 일곱 군데 존재했어요. 
그런 학교들은 각종학교이기 때문에 조선학교와 똑같은 차별을 당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문과성에서 재정지원은 전혀 없고, 대학교 수험 자격이 제한된다
라든가. 스포츠나 문화 분야의 공식 대회에 나가지도 못하거나. 그
런 것들 다 그래요. 흥미로웠던 것은 마리스트 국제학교(マリスト国
際学校, MBIS)라는 학교예요. 여기는 학생 수가 300명 정도였던 
88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것 같은데 그중 100명 정도가 보통 일본인 아이들이었어요. 그러니
까 일본인인데도 불구하고 그 아이들도 똑같이 차별을 받고 있는 
거죠. 그뿐 아니라 행정기관에서는 학부모들에게 일본학교에 보내
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부모가 의무교육을 안 시키고 있다, 그러니
까 범죄행위라는 거죠. 
  국제학교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일본 정부의 재정적 원조가 
한 푼도 없는 거예요. 그 탓으로 연간 학비가 150만 엔이나 200만 
엔이나 해요. 무슨 행사가 있으면 추가로 내기도 하고. 내가 만난 
분 중에 무역 사업에서 크게 성공한 인도분이 있었는데 자녀를 국제
학교에 보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분조차 아이들을 국제학교로 
보내면 연간 200만 엔이나 걸리니까 너무 부담이 크다고 했어요. 
혹시 아이가 2명, 3명이 되면 더 힘들 테니까 “이런 제도는 이상하
다”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어요. 
  한편 일본인의 경우, 내가 몇 번 취재로 나가서 우연히 학부모들
을 만난 적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물어봤죠. 아들이나 딸이 대학교 
수험 자격 등 여러 가지 차별을 받을 건데 왜 국제학교로 보내냐고. 
그랬더니 답은 명확했어요. “일본의 대학교로 보낼 생각이 없다”, 
“유학을 보낸다”고 했어요. “‘수험지옥’이라고 불리는, 그런 경험을 
아이들한테 시키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듣고 그렇구나 납득됐어요.
  조선학교를 차별하기 위해 만든 차별적인 법 제도가 일본인의 
목까지 조르고 있는 이런 모순. 그리고 또 하나. 외국회사에는 일본
지점이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데 사원한테 일본으로 파견한다
고 하면 거절하는 사람이 많대요. 우수한 사람일수록 그렇대요. 결
국 자녀 문제. 단신 부임이라면 몰라도 자녀를 데리고 오면, 보낼 
제7장 대학교 강사와 연구 활동   
89
수 있는 학교가 없다. 그래서 일본 파견을 거절하는 사람이 많다는 
거예요.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라 하면 기뻐한다고 하지만. 그러니
까 일본은 우수한 인재를 획득하는 측면에서도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죠.
▮ 효고현 외국인학교협의회의 설립, ‘외국인학교 안의 
조선학교
  1995년에 한신·아와지(阪神·淡路)대지진이 일어났어요. 그때 외
국인학교가 큼직한 피해를 입었어요. 조선학교만 보아도 다 합치면 
20억 엔이라 할 정도로 무지무지한 큰 피해를 입었죠. 그런데 조선
학교는 지진이 일어난 직후에 문호를 열고 피난자들을 받아들였어
요. 조선학교에는 다음날부터 오사카를 비롯한 각지 동포들로부터 
많은 지원 물자가 왔어요. 학교에서는 그것을 피해 동포들뿐만 아니
라 일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어요. 또 각지에서 온 동포들이 
밥을 지어 드리고 따끈한 음식을 만들어서 모두에게 나누어 먹게 
했어요. 그래서 많은 감사를 받았죠.
  그런데 그 이후 부흥을 위한 시민회의가 열렸을 때 문과성에서 
사람이 와서, 일본 공립학교에는 전액, 사립학교에는 1/3인가 국가
가 보장해주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회의에 참가했던 일본 사람들이 
조선학교를 차별하지 말라고 강력한 비판을 했대요. 그래서 조선학
교나 외국인학교에도 지원 제도를 적용하게 됐어요. 일본에 극심재
9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39)
 극심 재해에 대처하기 위한 특별 재정 원조 등에 관한 법률(1962년 9월 
6일, 법률 제150호)은 발생한 재해 가운데 규모가 특히 심대하고 국민생활
에 현저한 영향을 준 경우, 지자체 및 피재자에 대한 부흥지원을 위해 국가가 
특별한 재정 원조 혹은 조성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법률. 일반적으로는 
격심재해법이라고 불린다. 
해법39)이라는 법률이 있어요. 지진을 비롯한 큰 피해를 입은 경우
에는 특별예산이 편성되고 적용된다는 것. 그것이 적용되었어요. 
  한신대지진 이후 획기적인 일이 있었어요. 조선학교가 나서서 
다른 외국인학교에 같이 협의회를 만들자고 권했어요. 그랬더니 
다른 외국인학교 모두 향후 참가하겠다고. 그 결과 효고현 외국인학
교협의회라는 게 결성되었어요. 그 이전에는 학교 간 교류는 없었어
요. 그러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공동의 장(場)에 모이게 되었죠. 그런
데 서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국제학교들은 조선학교가 효고현과 고
베시로부터 조성금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놀랐어요. 조선학
교는 오랜 기간 투쟁을 벌여 왔으니까 액수는 적어도 현과 시에서 
조성금을 받아 왔죠. 그런데 다른 국제학교는 지원금을 행정에 요청
한다는 발상조차 없었던 거죠. 
  외국인학교협의회는 7월에 가이바라(貝原) 지사에게 보고하러 
갔어요. 그때 나는 취재 중이어서 같이 따라갔어요. 외국인학교협
의회의 회장은 중화 학교 측 분이 맡았는데, 외국인학교에 대한 
부흥지원을 부탁한 거예요. 중화 학교의 톱은 화교 사회의 중진이니
까 지사와도 친해요. 가이바라 지사는 “효고현과 고베시에 있어서 
외국인학교는 보물입니다”고 대답하셨어요. 그때부터 외국인학교
정책이 싹 달라졌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조성금이 0엔이었던 외국
인학교에도 조성금이 나오기 시작했고요.
<보충자료>
효고현 외국인학교협의회
1995년 1월 17일에 일어난 한신·아와지대지진의 피해에 대
한 부흥지원시책을 논의하기 위해 효고현 주최로 외국인 현
민 부흥 회의가 개최되었다. 외국인학교 관계자가 한자리에 
모인 것을 계기로 ‘함께 손을 마주 잡고 부흥하자’는 의견이 
일치하여 협의회 발족 준비가 진행되었다.
대지진으로 인해 고베조선초중급학교와 마리스트 국제학교
는 전괴되었고, 인근 외국인학교 또한 적어도 13교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각 외국인학교 교내에는 긴급피난소가 설치
되어 있어 지역 외국인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 시민의 피난처
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조선학교에서는 지진 
직후부터 총련 각 본부·지부에서 모아진 구원물자로 이재민
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복구작업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일본 행정은 일본학
교와 똑같이 피해를 입고 피난소로서 큰 역할을 했던 조선학
교를 비롯한 외국인학교에 대한 재건 보조 비용을 일본학교
의 절반으로 제한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외국인에 대한 교육 
진흥의 보조를 비롯하여 학교 환경의 개선이나 권리 향상을 
위해 함께 호소할 필요가 있다 하여 1995년 7월 26일 ‘효고
현 외국인학교협의회’를 결성하였다. 
현재 외국인학교협의회에는 효고현 하에 있는 국제학교 5
교, 조선학교 6교 그리고 중화 학교 1교가 가입되어 있다.
* 자료출처: 兵庫県外国人学校協議会,
korea-np.co.jp/sinboj2000/sinboj2000-11/1122/71.htm
9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40)
 총련의 기관지 부문인 조선신보사가 발간하는 월간 일본어 잡지.
41)
 朴三石(2008), 『外国人学校 インターナショナル·スクールから民族学
校まで (中公新書)』, 東京: 中央公論新社. 
  그전까지 조선학교 조성금은 금액이 적었어요. 그런데 구미계 
학교도 조성금 대상이 되자 외국인학교에 대한 조성금 금액이 상당
히 올라갔어요. 그에 따라서 조선학교 조성금도 늘어나게 된 셈이
죠. 그런 변화를 보면서 나는 역시 조선학교는 조선학교 단독의 
투쟁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외국인학교와 협력해서 
투쟁해야만 더 쉽게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이전에는 우리 민족교육을 하는데 왜 일본 정부에서 돈을 받아야 
하냐는 의식이 상당히 강했나 봐요. 특히 1세들은 자력으로 조선학
교를 만들어 유지해 왔다는 게 긍지였으니까. 일본 정부에 부탁하고 
돈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한다고. 이제 그런 
의식부터 바꿔가야 해요. 권리로서 받아야 한다. 조성금을 확보하
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이 점차 생기면서 많이 달라졌겠지만 
아직 불충분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외국인학교를 직접 취재해봤더
니 그런 게 많이 느껴지더라고요. 
  『국제화시대의 민족교육(国際化時代の民族教育)』이란 책은 그때 
냈던 건데요. 1996년. 이 책은 한국학교나 국제학교, 민족학급 등 
외국인 자녀들의 민족교육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다룬 거예요. 조선
학교의 권리만을 쓴 책은 몇 권이 있었지만 이런 책은 없었으니까 
상당히 화제가 되었어요. 이 책 이후, 잡지 『이어(イオ)』40)에서도 
외국인학교 관련 내용을 장기연재하거나 박삼석(朴三石)이라는 분
이 외국인학교 관련 책41)을 출판하거나, 그런 일이 생겼죠. 
제7장 대학교 강사와 연구 활동   
93
『국제화시대의 민족교육』 표지
  이 책을 집필했을 때,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았어요. 예를 들면 
해외일본인학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시책. 문과성이 매년 발표하는 
보고서 같은 걸 보면 해외에 있는 일본인 학교에 대해 일본 정부가 
어떤 시책을 마련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교재를 무료로 배포하
거나 교원, 파견을 하거나. 그런 일본인 학교는 현지에 사는 일본인
들이 만든 것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지원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보고서의 맨 앞부분에 해외에 있는 일본인 학교의 역할에 대해서 
일본인 교육을 하는 것이다고 명백히 쓰고 있어요. 자기들은 해외에
서 민족교육을 중요시하면서 재일한인들이 일본에서 민족교육을 
하는 것은 억압한다니 어이가 없어요. 모순되기 짝이 없어!!
  다른 나라에서는 외국인학교나 일본인 학교에 대해서 어떤 형태
로든 지원, 원조를 하고 있는 데가 많아요. 몇 가지 형태가 있지만 
9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그 나라의 초등학교, 중학교와 같은 자격을 부여하는 곳도 있고. 
국가가 지원금을 주는 데도 있어요. 독일의 한 지역에선 일본인 
학교가 있는 토지의 연간 대금이 1달러 정도라고 해요. 연간이에요. 
▮ 재일외국인 차별을 없애기 위한 집필활동
  겉보기엔 나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근본은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지금은 조선인 차별만 아니라 좀 더 넓게 재일외국인 차별까지 
관심을 돌리고 있는데 가장 기본은 역시 조선인 차별을 없애고 싶다
는 거예요. 그러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어필하는 수단으로서 소설
이 좋으면 소설을 쓰고, 연극이 좋으면 연극을... 그렇게 활동해 
왔을 뿐이죠. 
  난 가끔 재일한인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자기 삶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할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주제에 따라 그게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재일한인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것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거죠. 목적을 향해 오로지 맥진하면 된다. 우리
학교 학부모들도 그래요. 취재하고 있으면 느껴져요. 학교를 지키
려는 일념으로 모두 다 막 맥진. 그러니까 다들 생생하게, 생기가 
넘치죠. 힘든 일이 있으면서도 밝고. 우리학교 학부모들은 대단하
다고 생각해요.
제7장 대학교 강사와 연구 활동   
95
마이니치신문 ‘이향의 인간미’ (ZOOM 인터뷰, 2021년)
  내가 혹시 일본 사람이었다면 무엇을 목표로 살았을까라는 생각
이 들어요. 그 부분에서는 오히려 일본인을 동정해요. 본인의 작은 
행복, 가정을 지키는 것을 최대 목표로 해서 살고 있잖아요? 그런데 
좀 실례일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아요. 좀 더 눈을 
돌려보면 세상에는 불행한 처지의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의미에
서 마이니치신문사에서 13년에 걸쳐 계속 칼럼을 쓰는 기회를 얻었
다는 게 매우 뜻깊은 일이었어요. 
  1999년부터 마이니치신문사의 한신(阪神)지국에 내가 아는 우수
한 기자가 지국장으로 부임했어요. 그 사람이 나한테 효고판에 있던 
‘효고수상(兵庫随想)’이라는 칸에 한 달에 한 번씩 뭔가 쓰지 않겠냐
는 이야기를 해줬어요.
  그래서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외국인학교 취재를 하기로 했어요. 
9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당시 효고에는 조선학교가 13개교 있었고, 그 외 독일계 학교, 캐나
디안 아카데미와 같은 국제학교나, 중화 학교 등 8개교 외국인학교
가 있었어요. 거기를 모두 취재하고 다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
는 조선학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다른 외국인학교, 
중화 학교나, 국제학교의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어요. 항간에
서도 알려져 있지 않았어요. “국제학교라는 학교 압니까?”라고 물
어보면 대부분 사람이 “그냥 알고 있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실태
는 전혀 모른다”라든가. 취재 과정에서 국제학교도, 중화 학교 같은 
민족학교도 모두 각종학교이기 때문에 조선학교와 같은 차별 조건
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조선학교의 문제는 조선학교
만의 문제가 아니라 외국인학교 전체에 공통된 것이라고 하는 문제
의식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이 칸을 담당하는 사이에, 그 지국장이 효고에서 오사카 본사의 
사회부로 이동하게 되었어요. 이에 따라 나도 오사카의 사회부 관련 
칸에도 르포를 쓰게 되었어요. 상당히 큰 지면이었고요. 
  처음에는 ‘타향살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어로 번역하면 ‘이향
(異鄕)살이’라고 되지만. 여기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재
일한인들을 소개하기로 했어요. 2주에 1번씩 특히 문화계, 영화, 
음악, 미술에는 많아요. 그런 분야에서 활약하는 사람들을 취재하
는 가운데 재일한인이라 하면 사회 안에서도 고생하고 있다는 측면
만 클로즈업되기 쉽지만, 2세가 되면서 새로운 싹이 잇따라 돋아 
나와 있다, 일본 사회에서도 떳떳하게 활약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제7장 대학교 강사와 연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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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살이 제44회 기사 (출처: 毎日新聞, 2002.10.20. 大阪 24面) 
2003년 『타향살이』 출판기념 축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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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처음에는 재일한인 중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는 사람을 소개하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100명이 넘은 후 재일한인뿐만 아니라 재일외
국인 전체를 취재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편집부 
사람들과 상담하여, 대상을 재일외국인 전체로 넓혔어요. 재일외국
인 중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 취재를 시작해봤더니 
있네, 있네, 대단한 사람이 많이 있어요.
  구미계뿐만 아니라 아시아,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중국이라든가, 
세계 각지에서 일본으로 와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특히 
문화 분야. 음악계라든가. 무용계. 그러한 엔터테인먼트적인 분야
에서 전문가로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전엔 조국에서 
했던 문화활동을 일본에서 와서 하고 있는 사람들. 동포들을 모아서 
가르치거나 같이 발표회를 하거나. 혹은 일본인들을 모아서 가르쳐
주거나. 그리고 각지에 국제교류센터 같은 곳이 많이 생겼는데 거기
서 강사를 하거나. 이렇듯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았어요. 
  그 가운데 특히 인상 깊은 사람이 몇 명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응웬티후이(グウェン·ティ·フィ)라는 베트남 사람이에요. 이분은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나서 베트남에서 살기 힘든 상황에 빠져서 
난민으로 일본에 온 사람이에요. 이분의 체험담은 충격적이었어요. 
  당시 이른바 ‘보트 피플(boat people)’이라는 존재가 세계적으
로 화제가 되었었고, 일본은 좀처럼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다는 비판
을 받고 있었는데... 점차 조금씩 문호를 열기 시작한 시기였어요. 
우리는 난민에 대해서 그냥 베트남을 떠나 일본에 다다른 사람이라 
인식하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베트남을 떠날 때는 어디로 
제7장 대학교 강사와 연구 활동   
99
갈 수 있는지 모른다, 하여간 작은 배에 사람들이 꽉 차게 타고 
베트남을 탈출한다고. 국경을 넘으면 일단 자유로운 몸이 된다. 나
머지는 그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는 배가 발견해주면 구제될 것이고, 
못 찾아주면 그대로 바다에서 죽어버린다. 그것을 각오해서 베트남
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어요. 그분 같은 경우는 실제로 
폭풍우를 만났대요. 배는 흔들리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고... 식량
도 없어지고, 물도 없고,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겨우 발견되었다고 
해요. 그리고 홍콩으로 갔다가 거기서 어느 나라로 가고 싶냐는 
조사를 받고. 이분은 일본으로 가고 싶다고 해서 무사히 일본에 
도착했다는 경험인 거예요. 
  난민 문제라는 것은 조금 알고 있었지만 그야말로 목숨을 건다
는 것을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분은 일본에 와서 
난민 신청이 허가되어서 생활 자체는 일단 큰 문제가 없어졌는데. 
사는 보람도 아무것도 없는 거죠. 난민도 이것저것 차별 상황이 
있으니까. 
  그때 재일한인의 모습을 보고 아주 격려를 받았다고 해요. 한인
들은 스스로 학교를 운영하거나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다양한 활동
을 하고 있다. 그런 모습에 아주 자극을 받았다고. 당시 간사이 지역
만 해도 베트남 사람이 600명 정도 있었다고 해요. 그들을 하나로 
모으는 단체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분이 애를 써서 베트남인협
회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재일한인이 여러 
가지 고생을 하면서도 단체를 만들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다른 외국인에게 큰 격려를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러한 축적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재일한인의 문제만을 생각했던 
10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내 시야가 ‘재일외국인’까지 점차 넓어졌다고 할 수 있어요.
  재일외국인을 오래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어떠한 형태로든 
후원이나 지지를 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존재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일본 각지에 다양한 NGO나 NPO가 생기기 시작하던 시대
였으니까 그런 데에 속한 일본 사람들이 매우 보람을 느끼면서 활동
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재일외국인이나, 혹은 외국
과의 교류를 지원하고 있는 NPO나 NGO까지 범위를 넓혀서 취재
하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면 외국인 관련 대외 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 단체라든가.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일본인을 새삼스럽게 다시 
보게 되었고. NGO, NPO 활동을 하고 있는 일본인 중에 아주 존경
할 만한 사람이 많이 있으니까요. 
  타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삶이 생생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본인들이 외국인을 도와주는 것은 오히려 본인들이 도움을 받는다
고. 교토에 70대가 넘는 할머니들 그룹이 있는데 그분들은 캄보디
아 여성들에게 재봉 일을 가르쳐줘요. 할머니들은 “이 나이가 되어
서 이런 활동할 수 있는 게 그분들 덕분이다”라고 했어요. 해외 
취재나 외국인 취재를 함으로써 국적이나 민족을 넘는, 공생의 훌륭
함이라든가 다양한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제8장 재외한인 연구로의 관심 확
민족성을 유지하며 중국인과 공생하는 조선족
자본주의국가 미국의 코리아타운
재일한인보다 심한 차별을 겪은 고려사람들
재외한인 조사를 통해 재일한인 차별의 심각성 자각
10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재일한인들은 모진 차별 제도 속에서도 옛날과 달리 넓은 분야에
서 활약하게 됐어요. 그런 사람들을 계속 취재하러 다니면서 항상 
머릿속에 있었던 생각은 재일한인 차별은 어떻게 생각해봐도 너무 
심하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 심한 건지, 좀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알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걸 비교하면 재일이 놓여있는 
상황이 더욱 잘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상봉』과 『미래』 편집장을 
하던 시기에 재외한인 조사를 나가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중국, 그다음 미국으로, 그리고 구소련을 다녀왔어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 역사, 그리고 현상을 앎으로써 
재일의 모습이 더 잘 보이지 않을까 해서요. 
▮ 민족성을 유지하며 중국인과 공생하는 조선족
  처음에는 1988년에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갔어요. 실제로는 
취재는 아니었어요. 세계 각국에서 ‘조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중심으로 국제고려학회라는 게 있어서, 2년에 1번씩 해외에서 학회
를 여는데 88년에는 북경대학교에서 하게 됐어요. 나는 학자가 아
니니까 학회 자체에는 매력을 못 느꼈지만 학회가 끝난 후 희망자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간다고 하니 참가하게 됐어요.
  처음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갔을 땐 큰 문화충격을 받았어요. 연변
조선족자치구란 문자 그대로 조선족자치주로, 주장(州長)은 꼭 조
선족이 맡아요. 여러 가지 제한이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민족문화가 
제8장 재외한인 연구로의 관심 확장   
103
보장되어 있죠. 조선족은 조선어로 대화하고, 조선족의 음악이 있
고, 문화가 있고, 식당도 조선족의 식당이 있고. TV나 라디오에서
는 매일 조선어로 방송이 나와요. 이와 같이 마치 자기 나라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을 보고 ‘이 세상에 이런 사회가 있다
고? 믿을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1988년 중국 연변조선족자치구 조사 사진
  학교를 보면 조선족의 자녀들은 모두 조선족 학교에 다녀요. 중국
은 소수민족 보호 정책을 실시하고 있어서. 그러니까 소수민족은 차
별은커녕 오히려 조금 우대를 받는다는 측면도 있어서 매우 놀랐어
요. 중국인과 조선족이 생활의 공동체로서 같이 살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재일 입장에서 보면 하늘과 땅처럼 커다란 차이였던 것이죠.
  1999년에는 두 번째로 중국 방문을 했는데 그때는 연변뿐만 아
니라 심양(沈阳)이라는, 조선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도 견학했
어요. 심양에는 서탑(西塔)이라는 지역이 있어요. 조선족이 모여서 
거주하고 있는 지역인데, 거기에 작은 동네가 형성되었고 매우 활발
한 경제활동이 전개되어 있어요. 이에 대해 지역 행정에서는 일정한 
10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지원을 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어요. 
1999년 중국 심양 서탑구 조사 
 
1999년 백두산 천지 방문
제8장 재외한인 연구로의 관심 확장   
105
▮ 자본주의국가 미국의 코리아타운
  처음에 연변에 갔을 때 나는 조선족의 삶에 놀라면서 이런 건 
사회주의국가니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일본과 같은 자본주의국
가라면 어떨까. 다음엔 미국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991년과 1992년에 미국에 가게 되었어요. 
  당시 나는 조선 국적이어서 미국에 가는 것이 극히 어려운 상황이
었어요. 그런데 1991년에 한 달로 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변경됐어
요. 이 기회에 가야겠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세계 최대라고 하는 
코리아타운을 한번 보고 싶어서 로스앤젤레스 관광 투어로 갔다 
왔어요. 
1991년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풍경
10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42)
 조국통일북미주협회의 약칭. 1987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
스에서 미주 최초의 통일 운동 전문 단체를 표방하면서 결성된 사회단체. 
43)
 1992년 4월 말부터 5월 초에 걸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동. 미국에서 이(異)인종 간 대립이라는 관계 속에서 나타난 ‘인종 폭동(ra
ce riot)’의 전형적인 사건이다. 이 폭동은 단순한 흑인과 백인 간 대립에 
머물지 않고, 로스앤젤레스라는 다인종 도시에서 다양한 인종·민족을 말려
들게 함으로써 그 규모가 확대되어 더없이 큰 피해를 입혔다.
  그랬더니 우연히 내 지인분이 미국에 있어서, 안내원으로 한국 
유학생을 한 명 소개해줬어요. 그가 차로 여러 군데 안내해주고 
설명해주고.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로스앤젤레스에서 민족운동을 
하고 있는 몇 가지 단체의 사람들을 소개해줬던 것. 통협42)이라든
가. 통일 운동이나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어서 굉장히 도움이 되었어요. 
  연변도 그렇지만 재미한인의 정보 따위도 전혀 없었던 시기였으
니 미국에서 이런 운동들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
도 하고 감동도 했죠. 불과 1주일 정도의 관광여행 같은 것이었지만 
그런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는 건 의의 깊은 일이었어요. 
  다음 해 1992년 4월 29일에 로스앤젤레스 폭동(Los Angeles 
Riot)43)이 일어났어요. 흑인이 코리아타운을 습격했다는 보도가 
세계적으로 확 퍼졌어요. 일본에서도 연일 코리아타운이 불타거나 
약탈을 당하는 광경이 보도되었고. 그것을 보면서 나는 강한 위화감
을 느끼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그 전해에 현장에 다녀왔기 때문이에
요. 그 경험이 없었으면 나도 그 영상을 보고 그대로 믿었을 수도 
있었죠.
  로스앤젤레스 폭동이란 원래 1991년에 백인 경찰관이 속도위반
을 한 흑인 청년을 잡아 때리고 치는 격한 폭행을 가했다는 것에서 
제8장 재외한인 연구로의 관심 확장   
107
44)
 미국 서부 지역의 한인과 흑인 빈민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 1980, 1990
년대에 사업적으로 성공한 한인 자영업자들 속에는 미국 출신 흑인들을 상대
시작됐어요. 처음 계기는 백인이 흑인을 차별했다는 것이죠. 그로
부터 약 1년 후, 1992년 4월 29일에 재판에서 폭행을 가한 백인 
경찰관들에게 무죄 평결이 나왔기 때문에 흑인들이 분노해서 폭동
을 일으킨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한인들은 관계가 없었어요. 흑
인의 분노는 백인사회를 향한 것이지 한인을 향해 분노를 돌릴 필요
는 없었던 거죠.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 시 크게 불탄 한인 운영 점포
  그런데 코리아타운이 흑인한테 습격을 당했다는 식으로 보도되
었기 때문에 나는 위화감을 느꼈던 거예요. 그 전해에 다녀갔을 
때 한인과 흑인 간에 다양한 갈등이 있다는 것은 들었었죠. 한국의 
한(韓)과 흑인의 흑(黑)으로 ‘한흑 갈등44)이라는 말이 있는데, 민족
108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로 돈을 벌면서도 무례한 태도를 취했거나 흑인을 점원으로 채용하지 않는 
등 이익을 흑인 공동체에 환원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 관계 속에서 
흑인들의 비판이 솟아났고 한인 상인들과의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 다르니까 이런 갈등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흑인
들이 코리아타운을 습격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진상을 알기 위해 꼭 현장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
도 쉽게 갈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었는데 9월에 한 달 동안 
다녀오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한인이나 흑인을 비롯한 여러 사람
들을 만나고 취재를 해봤더니 진상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흑인이 
코리아타운을 습격했다는, 그 현실 자체를 다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
만 진상이 크게 왜곡되어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1992년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1992년 뉴욕 코리아 로드
  사실 폭동의 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도를 살필 필요가 있어
요. 코리아타운은 백인 거주 지역과 흑인 거주 지역에 둘러싸인 
위치에 존재해요. 처음 흑인 거주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경찰은 곧 백인 거주 지역을 방어했지만 코리아타운은 내버려 뒀어
제8장 재외한인 연구로의 관심 확장   
109
45)
 1992년 4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폭동이 발생하여 코리스탄이 습격되
었다. 그 현지를 직접 방문하여 왜곡된 보도의 진상을 밝히면서 동시에 100
년에 걸친 재미한인의 역사와 실상을 그려낸 책. (참조: 高賛侑, 李秀(199
3), 『アメリカ·コリアタウン: マイノリティの中の在米コリアン』, 東京: 
社会評論社.)
46)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에 살고 있는 재외한
인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고려인’을 쓰지만 본 고에서는 ‘고려사람’이라고 
표기한다. 이는 고 감독이 직접 러시아 지역에서 한인 조사 및 연구를 진행하
는 과정에서 당사자 스스로가 ‘고려사람’이라고 하였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고려사람’이라고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요. 그 때문에 흑인들은 백인 거주 지역에 항의하러 갈 수 없게 
된 결과 저들의 분노를 코리아타운을 향해 폭발시킨 거예요.
  나는 이듬해에 폭동의 진상과 재미한인의 삶을 주제로 한 『아메
리카 코리아타운(アメリカ·コリアタウン)』45)을 출판했는데 많은 신
문, 잡지에서 소개가 되었으며 TV에 출연하기도 했어요.
  나는 폭동의 취재를 계기로 흑인들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서 공부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향후 재일한인 문제를 생각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되었어요.
▮ 재일한인보다 심한 차별을 겪은 고려사람
  사회주의국가 중국, 자본주의국가 미국을 다녀오고 그다음 1993
년에 구소련을 다녀오게 되었어요. 구소련이라는 곳은 간단히는 
갈 수 없었죠. 러시아어도 전혀 모르고. 그런데 모스크바대학교를 
졸업하고, 구소련 고려사람46)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본 영
11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화인이 카자흐스탄에서 구소련 고려사람에 관한 심포지엄을 계획
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린 신문기사를 우연히 보게 됐어요. 참가하고 
싶다고 바로 신청했죠.
  당시 일본에서는 구소련 고려사람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으니
까 가기 전에 도쿄의 다카야나기(高柳) 선생님이 중심으로 되어 출
판한 고려사람 관련 책을 읽었어요. 그 안에 강제이주라는 사실이 
적혀 있어서 충격을 받았어요. 일본 식민지 시대에 연해주로 건너간 
약 16만 명의 고려사람들이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적으로 
이주당했다는 사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비통한 사건
이었죠. 재일한인에 대한 차별도 참혹했지만 그것을 웃도는 지독한 
차별.
  강제이주당한 사람들은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으로 끌려
갔어요. 카자흐스탄에선 그들이 농장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그 농장
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학문적으로 
깊이 추구하거나 공부하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강제
이주를 겪었던 사람들의 체험담을 들어서 아주 충격을 받았어요. 
  그건 단순한 충격이라기보다 우리가 고려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 자체에 자책감을 느꼈던 거죠. 재일한인들은 
일본인한테 조선인의 과거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자주 지적하지만 
그렇다면 우리는 고려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고려사람에 대한 차별이란 강제이주뿐
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몇십 년간 계속됐죠.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못하거나 일상적인 차별이 있거나. 고려사람은 군인이 될 수도 
없었다고 해요. 그러한 상태에 놓여있다가 간신히 명예 회복이 된 
제8장 재외한인 연구로의 관심 확장   
111
것은 1980년대 말,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였어요. 페레스트로이
카라는 정책이 실시되었고, 이후 정부가 고려사람에 대해 강제이주
를 시켰던 과거를 사죄했어요. 그 이후는 많이 개선되었죠. 
  이와 비교해도 일본은 아직까지 제대로 사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역시 일본의 차별은 너무하다는 것을 재확인했다고 할 
수 있어요. 나는 고려사람의 문제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은 생겼지만 취재를 하려 해도 러시아어를 할 줄도 모르고, 
한 달,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년 단위의 장기적 취재가 필요하기 때문에 도저히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했었어요. 
  1990년에 한국과 러시아(당시 소련)가 국교를 회복했는데 그쯤
부터 한국인이 고려사람에 대해 관심을 보여주기 시작했죠. 대중매
체가 찾아가거나 다양한 사람들이 취재하러 가거나 이런 일들이 
왕성하게 이루어졌어요. 
  그중에 정동주라는 작가가 있어요. 이분은 백정이나 일본의 피차
별부락 문제를 계속 연구하고 소설을 쓰거나 하는 사람인데, 이분이 
한국의 신문사와 제휴해서 장기간에 걸쳐 고려사람 조사를 하였고, 
그 내용을 가지고 책을 내셨어요. 『까레이스키, 또 하나의 민족사』
라는 책인데 나는 그걸 입수해서 읽어봤더니 참으로 치밀하게 역사
적 경위가 나와있었어요. 게다가 작가이기 때문에 단순히 숫자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경험담을 진실하게 묘사하셨
어요. 이를 통해 진실을 부각할 것 같은 책을 내신 거지요. 그걸 
읽고 번역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때마침 정동주 선생님이 오사
카 부락해방운동의 집회에 강연하러 오신다는 정보를 듣고 만나러 
11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47)
 정동주 원저, 고찬유 번역으로 1998년 동방출반(東方出版)에서 출판되었
다. 일본 번역서 제목은 『까레이스키: 구소련의 고려인(カレイスキー: 旧ソ
連の高麗人)』. 
갔어요. 그리고 일본어로 번역해서 출판하고 싶다고 제의했어요. 
선생님한테 흔쾌히 허락을 받아 번역해서 1998년에 출판하게 됐어
47). 내가 어중간한 취재를 하는 것보다 이 책을 번역해서 출판하
는 게 훨씬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까레이스키』 표지 
제8장 재외한인 연구로의 관심 확장   
113
1993년 카자흐스탄 고려사람 취재 
  나는 그다음에 1996년에는 러시아 연해주의 하바롭스크를 방문
했어요. 
 
1996년 하바롭스크 고려사람 취재
11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48)
 부락해방동맹이 1974년에 창설한 문학상. 부락해방동맹 중앙본부와 부락
해방·인권연구소 실행위원회 주최로, 피차별부락 내외에서 작품을 모집하여 
반차별 관점에서 선정한다문해, 기록문학, 소설, 시, 아동문학, 희곡, 평론
의 7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찬유는 “구소련에 사는 조선민족(旧ソ連
に生きる朝鮮民族)”으로 제25회 부락해방문학상(기록문학부문, 1999년
도)을 수상하였다. 
  1999년에는 고려사람의 역사와 현실을 기록한 글을 부락해방문
학상48)에 응모했고, 부락해방문학상(기록문학부문)을 수상하게 되
었어요. 
▮ 재외한인 조사를 통해 재일한인 차별의 심각성 자각
  세계에서 한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 미국, 일본, 
그리고 구소련. 이런 순서로 되어있어요. 그 4곳을 돌아다님으로써 
재일한인 문제를 보는 시각에 변화가 일어났어요. 어느 국가·지역
에서도 문화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면 민족적 편견이나 차별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법적인 차별까지는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일본에 존재하는 법, 제도적인 차별은 “심하다”는 
단계가 아니라 “이상하다”고 확신했어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일본
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죠. 중국, 미국 그리고 구소련
에는 그 이후에도 2, 3번씩 방문하기도 했는데 각 지역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점점 차별 개선이 진전되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일본은 21세기에 들어서 더욱더 악화되어가고 있다니. 
제8장 재외한인 연구로의 관심 확장   
115
  특히 교육 문제. 2015년에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다녀왔는데 그
때 러시아인 학교를 견학했어요. 약 1,000명 규모의 비교적 큰 중
학교였는데 그 학교에 고려사람 자녀들이 100명 정도 다니고 있었
어요. 그 아이들을 위해 한 주에 1번씩 학년을 나누어 한국 문화나 
문자 같은 것을 가르치는 수업이 있었는데 이 수업이 오전 중의 
교육과정 안에 정식 과목으로 되어있는 거예요. 고려사람 부부가 
그 수업을 분담하면서 가르치고 있었죠. 일본에선 그런 게 거의 
없죠. 오사카에서는 공립학교 내에 ‘민족학급’이란 것이 존재하는 
데도 있지만 그것조차 아직까지도 방과 후의 과외수업으로, 말하자
면 동아리 활동과 같은 것으로 자리매김되어 있을 뿐이에요. 러시아
에서 실시되고 있던 그 수업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죠.
  구소련의 지역들은 구소련이 붕괴된 이후 경제적으로도 아주 힘
들게 살아왔죠. 나라가 붕괴된다는 것이 이렇게나 참혹한 것인가라
는 것을 실감했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도 소수민족 자녀의 교육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볼 수 있었어요. 
일본에서는 1948년의 한신교육투쟁 이후 70년이 지나도 민족교육
이 아직까지 억압받고 있다는 현실을 또다시 생각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어요.
  해외여행에서 한 가지 덧붙인다면 1997년 9월 12일부터 24일까
지 ‘일조 합동 캐나다 다문화주의 조사단’에 참가한 일을 잊을 수 
없어요. 캐나다는 1971년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다문화주의 국가를 
선포한 나라인데 그 실정을 보러 가는 조사단에는 일본 국회의원, 
변호사들과 재일한인 교육관계자, 문화인 등이 10여 명 참가했어
요. 12일간에 걸쳐서 정부기관, 초·중·고·대학교 등을 견학하면서 
11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나는 “세계에는 이런 나라가 있구나”라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어요. 
어디 가나 피부색이 다른 여러 민족 사람들이 같이 일하거나 공부하
거나 했었으니까요. 재일한인으로 살다가 캐나다에 온 가족으로 
이민 간 사람을 만났는데 “이 나라는 참으로 차별이 없어요”라고 
했더라고요. 민족차별뿐 아니라 성, 장애, 학력, 연령 등 오만 가지 
구실로 인한 차별이 남아 있는 나라에서 나서 자란 내 눈에는 부럽
기 짝이 없었어요. 그러면서 세계에는 언젠가 이런 세상이 올 것이
라는 희망 같은 걸 느끼기도 했어요.
제8장 재외한인 연구로의 관심 확장   
117
<보충자료>
4.24 한신교육투쟁
1945년 조국해방과 동시에 일본에 거주하던 재일한인들은 
자녀교육을 위해 일본 각지에 자발적으로 국어강습소를 설
립하였고, 이후 조선인학교로 개조(改組)하였다. 그 규모는 
전국에 500여 교, 학생 수는 약 6만 명을 넘었다.
1947년 10월 당시 일본에서 점령정책을 실시하던 GHQ(연
합국최고사령부)는 일본 정부로 하여금 재일한인을 일본의 
교육기본법, 학교교육법에 따르도록 지령하였다. 다음 해 1
월 일본 정부 문부성은 GHQ의 지시하에 재일한인 자녀를 
일본학교에 취학·편입시키도록 각 도도부현 지사에 통달을 
냈으며, 민족학교의 강제폐쇄를 명령하는 ‘조선학교폐쇄령’
을 내렸다. 
이에 대해 재일한인들은 전국에서 민족교육을 지키는 투쟁
을 전개하였다. 특히 오사카부와 효고현에서는 격한 저항투
쟁이 벌어졌다. 오사카에서는 4월 23일과 26일에 조선학교 
탄압 반대 집회가 개최되었고 오사카부청 앞에는 2~3만 명
의 한인들이 모였다. 그 과정에서 당시 16세 소년 김태일이 
경찰의 사격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한편 4월 24일 고베에서
는 조선학교 폐쇄에 항의하는 재일한인들이 효고현 현청에 
결집하여 ‘학교폐쇄명령 철회’ 등을 현지사에게 요구하였다. 
그때 현지사는 재일한인의 요구를 수용하였으나 그날 밤 바
로 효고현 군정부가 ‘비상사태선언’을 발령함으로써 지사가 
서약한 모든 사항을 무효화시켰다. 
이처럼 1948년 4월에 오사카와 고베에서 발생한 조선학교 
탄압에 대한 저항운동을 한신교육투쟁이라 부른다. 
* 자료출처: 在日韓人歴史資料館 http://www.j-koreans.org/
제4부 기억과 기록, 영화 활동
제9장 재일한인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활동
재일한인 기억을 책으로 발간
비디오와의 만남, 기록으로 남기고 선물하기
재일한인 할머니를 영상으로 기록하기
라이프 영상 워크 설립과 고려사람 취재
12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49)
 2003년 가을부터 시작된 재일한인 1세의 경험을 기록한 프로젝트의 결과
물로, 민족단체 활동가, 문학자, 한글 소프트웨어 개발자, 사할린 인양자(引
揚者), 피폭자, 역사학자, 음악가, 화가, 해녀, 고깃집 사장, 교회 관계자 
등 유명무명의 재일한인 1세 52명의 증언을 기록한 증언집. 
▮ 재일한인의 기억을 책으로 발간
  2008년에 『재일 1세의 기억(在日1世の記憶)』49)이라는 책이 발
간됐어요. 나는 당초 그 작업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기 멤버로 참가했던 고수미(高秀美) 씨라는 옛 친구가 오사카에 
왔을 때 처음으로 책 출판 이야기를 들었어요. 슈에이샤신서(集英社
新書)에서 재일한인 1세들의 체험담을 수록한 책을 준비하고 있다
고. 나한테도 멤버로 들어오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들어서 “기꺼
이 참가하겠다”고 했고, 멤버로 들어갔어요. 슈에이샤는 아마 일본 
최대의 출판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회사인데, 거기에서 
재일한인 1세들의 체험담을 수록한 책을 출판하겠다고 하니 이건 
대단히 훌륭한 일이다 해서 참가하기로 했어요. 
  도쿄에서 모임이 있을 때 나도 참가하고 다른 멤버들도 다 모여서 
여러 가지 의논을 했어요. 그 당시 편집담당자로 오치아이(落合)라
는 아주 뛰어난 편집자가 있었는데, 한국·조선이나 재일한인 문제
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은 분이었어요. 그리고 오구라 에이지(小熊英
二) 씨라는 이름난 학자를 비롯해서 우수한 멤버들이 모였어요. 그
런데 그 사람들이 의논하는 것을 듣고 있었더니 너무나 신중하게 
제9장 재일한인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활동   
123
50)
 1997년 산고관(三五館)에서 발행한,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재일
한인 100명을 다룬 책.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과 재일한인들이 더욱 
잘 ‘공생’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하려 하는 것 같았어요. 한 사람의 체험담을 듣기 위해 멤버들 몇 
명이 모여서 하고 한 번에 끝나지 않아 두세 번 듣게 되고. 이런 
식으로 하니까 전혀 진전이 안 됐더라고요. 
  사실 나는 그전에 마이니치신문 일로 재일 1세, 2세를 취재했던 
경험도 있었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재일한인들의 책을 
출판하는 기획이 있었을 때 실질적으로 편집을 담당해서 『100명의 
재일코리안(100人の在日コリアン)』50)이라는 책을 내본 적도 있었
어요. 재일한인 100명의 모습을 담으려고 20명 정도 멤버를 모아 
확 흩어져 취재를 부탁했는데 아주 힘든 작업이었죠. 우선 멤버를 
모으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 멤버들이 각자 취재한 내용을 원고로 
보내주면 그걸 검토하고 완벽한 것으로 마무리해나가는 것도 시간
이 걸렸어요. 
  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슈에이샤 모임에서 이대로 하면 10년이 
걸려도 완성하지 못할 거라고 했죠. 그리고 내가 경험했던 것을 
이야기했어요. 취재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책이라는 구체적인 형태
로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이전에 했던 
것처럼 20명 정도 멤버를 모아 일정 기간 내에 집중적으로 취재
고, 그 내용을 모아서 책을 만드는 방법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10년, 
20년이 지나도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 했죠. 그랬더니 다들 내 의견
에 찬성하였고, 그 자리에서 나보고 사무국장을 하라고 하셔서... 
솔직히 예상외의 일이었지만 아주 보람이 있는 일이니까 기꺼이 
12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맡겠다고 했죠.
  그러고 나서 『100명의 재일코리안』을 만들었을 때 도와준 동포
들과 일본인 집필자들에게 연락했고, 그들을 통해 훌륭한 집필자 
몇 명도 소개받아 결국 간사이와 간토(関東)에서 집필자를 20명가
량 모았어요. 그 당시 재일한인 중 전문적인 작가라고 하면 몇 명 
없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글을 쓰고 있는 뜻있는 사람들이 와줬어
요. 단기간 내에 각자 취재하고 원고를 쓰고, 나는 그걸 점검하고 
정리하고 비교적 단기간 내에 완성시킬 수 있었어요.
『재일 1세의 기억』 발간 당시의 고찬유 감독
제9장 재일한인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활동   
125
  내가 그때 사무국장을 하면서 제안한 것은, 재일한인 1세의 강제
연행 체험을 담은 책은 이미 몇 권 있으니 해방 후의 1세의 다양한 
삶을 중심으로 게재하자는 것이었어요. 결국 『재일 1세의 기억』에
서는 총 52명의 1세들이 해방 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다루었고, 
매우 다양한 이야기가 실렸어요. 김치를 만들어 팔았던 이야기, 민
족학교를 만들었을 때 고생한 이야기, 현재까지 수용되어 있는 한센
병 환자 이야기 등등. 그리고 문화, 경제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의 체험담을 수록했어요. 
『코리아타운에 산다』 표지
12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51)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의 중심적 존재였던 홍여표 씨에 대한 인터뷰
를 중심으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룬 코리아타운의 역사와 현재 모습을 
그려낸 책. (참조: 高賛侑 著, 打越保 編集(2007), 『コリアタウンに生きる: 
洪呂杓ライフヒストリー』, 大阪: エンタイトル出版)
  그 안에 내가 쓴 『코리안타운에 산다(コリアタウンに生きる)』51)
의 주인공 홍여표(洪呂杓) 씨 이야기도 넣었어요. 옛날에는 ‘조선시
장’이라 불렸던 곳이 1993년부터 ‘코리아타운’이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한 후 눈부시게 발전했어요. 이 역사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죠. 그래서 이것은 어떻게든 남겨야 한다 싶어서 코리아타운의 
중심인물이었던, 한국계 식품회사인 도쿠야마(徳山)물산의 홍여표 
사장을 취재해서 게재했어요. 
  『재일 1세의 기억』은 해방 후 재일한인 1세들의 다방면에 걸친 
모습을 망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성과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놀랍게도 초판 1만 1,000부가 팔렸어요. 보통 재일
한인 1세의 체험담 같은 책은 팔려봤자 고작 2,000부, 3,000부 
정도예요. 그 외 재일한인 문제를 다루는 책도 3,000부 정도가 한
계죠. 느닷없이 초판 1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하니 놀랐어요. 이쪽
저쪽에서 소개가 되었고 계속 증쇄되었어요. 결국 5판, 6판까지 
갔고 모두 2만 부 정도 팔린 것 같아요. 지금도 큰 서점에는 『재일 
1세의 기억』이 있어요. 
  나는 그 흐름 속에서 재일한인 2세를 다루는 책도 출판해야 한다
는 생각이 커졌어요. 그래서 2세의 체험담을 모은 책도 필요하지 
않겠냐고 오치아이 편집자에게 제안했어요. 조금 시간은 걸렸지만 
내 제안이 채택되었고 내가 간사이지역의 사무국장, 고수미 씨가 
간토지역의 사무국장을 맡았어요. 결국 이 책, 『재일 2세의 기억(在
제9장 재일한인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활동   
127
52)
 재일한인 1세보다 극적인 운명과 정체성 문제로 인해 번롱(翻弄)된 2세들
은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자로서 살아왔다. 야구선수, 철학자, 사업가, 의사, 
사회운동가, 음악가, 스님, 격투가 등 다양한 재일한인 2세 50명의 생애구술
사를 정리한 책. (참조: 小熊英二·高賛侑·高秀美 編集(2016), 『在日二世の
記憶』, 東京: 集英社新書)
日二世の記憶)』52)도 8,000부인가 1만 부 정도 팔렸던 것 같아요.
  내가 오치아이 씨에게 제안했을 가장 강조한 것은 재일한인 1세
의 체험은 거시적 시각에서 보면 비슷하다고. 식민지 시대에 강제연
행 혹은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빠찡코를 하거나 넝마주이를 하거나, 음식점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패턴은 대충 같아요. 
  그런데 2세는 전혀 달라요. 다양화된 거예요. 영화, 음악, 미술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류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잇따라 나타나
고 있죠. 2세들은 어린 시절, 특히 10대까지는 고생했지만 20대, 
30대가 되면서 자력으로 삶의 길을 개척한 사람들이 현재 각 분야
에서 선구자적인 활약을 하고 있어요. 이런 내용은 드라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어떤 의미에선 2세가 1세 이상으로 
드라마틱한 체험을 해 왔다고 설명했더니 편집자도 지지해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실제로 『재일 2세의 기억』에서는 다양성 있는 
사람들을 다루었고 『재일 1세의 기억』만큼 가치 있는 책이 아닐까 
싶어요. 
▮ 비디오와의 만남, 기록으로 남기고 선물하기
128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53)
 구찌터널(Địa đạo Củ Chi, 地道枸枝)은 베트남 호치민시 구찌를 중심으
로 한 전장 200km의 지하터널 네트워크로 베트남 전쟁 중에 남베트남 민족
해방전선에 의해 게릴라전의 근거지로 만들어졌다. 현재는 전쟁 사적 공원으
로 보존되어 있다. 
  나는 집필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비디오를 통한 기록에 대한 관심
이 점차 생겼어요. 내가 비디오 촬영을 시작한 계기는... 나는 시나
리오를 공부하던 시기부터 영화를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공부의 
재료로 보고 있었으니까 시나리오 구성이나 카메라 워크 같은 것도 
의식적으로 보고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8밀리 영화도 찍어본 적이 있었는데 본격적으로 하
려는 마음은 전혀 없었죠. 영화를 만들려면 너무나 큰 설비나 돈이 
필요하죠. 그래서 영상 세계는 나하고 전혀 인연이 없는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10년 전쯤 친한 영화감독한테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은 카메라를 몇만 엔부터 10만 엔 사이에 살 수 있고, 
편집 소프트웨어도 10만 엔 정도로 살 수 있다고 한 거예요. 20만 
엔 정도 있으면 기자재는 모두 마련할 수 있다고. 그리고 컴퓨터가 
있으면 집에서 편집까지 다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놀랐
어요.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였죠. 나는 돈이 없다 해도 10만 엔 
정도라면 어떻게 할 수 있으니까 비디오카메라를 사서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2010년 9월에 친구와 베트남으로 관광여행을 갔어요. 옛날 베트
남 전쟁이 일어났을 때 베트남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니 한 번쯤 
현장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호치민으로 갔는데 
관광코스 안에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이 싸웠던 구찌(Củ Chi)53)
는 곳이 있었어요. 그 현장이 관광지화되어있고 구경할 수 있다고 
제9장 재일한인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활동   
129
54)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에서 촬영한, LA 폭동으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라틴계와 한인의 교류를 그린 작품 「민족을 넘은 KIWA 코리아타운 노동
연대의 투쟁(民族を超えた連帯 KIWAコ リアタウン労働連帯の闘い)」으
로 관객상을 수상하였다. (참조: “韓国の「移住民テレビ」代表、当事者によ
る発信の大切さをアピール:第8回「レイバーフェスタOSAKA」”, http://
www.labornetjp.org/news/2011/1204osaka)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코스를 선택해서 갔는데 그때 지인한테 
작은 비디오카메라를 빌렸어요. 그걸로 촬영해 봤더니 제대로 찍힌 
거예요. 비디오는 돈을 많이 투자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걸을 
알게 되었죠.
  베트남 여행을 다녀와서 바로 카메라와 편집 소프트웨어를 구매
했고 조금씩 촬영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가족여행을 갔을 때 찍거
나 주변 풍경을 찍거나 연습을 했어요. 
  2011년에는 비디오 편집을 가르쳐주는 작은 그룹이 있다고 들어
서 잠시 다녔어요. 거기서 3분짜리 비디오를 만든다는 과제가 있어
서, 옛날에 다녀온 로스앤젤레스에서 찍은 영상을 이용해서 만들어
냈더니 상을 받았어요. ‘제8회 레이버 페스타(レイバーフェスタ) 
OSAKA’라는 데에서 ‘레이버 페스타 3분 비디오상(관객상)’54)을. 
이것은 아마추어가 만든 것이라, 상을 받았다고 해도 그다지 가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뻤어요. 
  그 이후 비디오는 부탁을 받으면 찍어주었어요. 무슨 행사가 있
으면 찍어주고 연습 삼아 여러 가지 해봤어요. 그런데 점점 찍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문제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할지... 그냥 
기념적인 것을 찍을 뿐만 아니라 뭔가에 값있게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13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오사카에 나카오사카(中大阪) 조선중급학교가 있는데 거기를 방
문해서 간단히 학교의 역사, 현황, 그리고 아이들의 표정을 찍고 
동영상을 만들어본 적이 있어요. 30분 정도의 DVD로 만들어서 
학교에 기증했어요. 어느 날 내가 일이 있어서 학교를 방문했는데 
마침 일본학교 선생님들 50명 정도가 학교 방문으로 왔었어요. 그
분들이 학교를 견학한 후 교실에서 내가 제공한 영상을 아주 진지하
게 보고 있었던 거예요. 그 광경을 보면서 이 정도 작품이라도 학교
를 보러 온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된다는 게 느껴져서 더욱 비디오로 
뭔가 해보고 싶다는 심정이 강해졌어요. 
민족교육사 증언, 오사카 
니시이마자토중학교 박종명씨 
DVD(2013년 제작) 
제9장 재일한인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활동   
131
55)
 필리핀 마닐라시 북부에 위치한 빈민가. 산처럼 쌓여진 쓰레기에서 자연 
발화되어 올라가는 연기에서 유래하여 스모키 마운틴이라는 명칭이 지어졌
다. 원래 해안선에 면한 어촌이었으나 1954년에 소각되지 않는 쓰레기들의 
투기장이 됨으로써 그 이후 마닐라시에서 나온 쓰레기가 대량 반입되었다. 
그리고 이 안에서 폐품 수거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빈민(scavenger)들
이 정착하여 급속히 슬럼화되었다. 
  재일한인 관련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DVD 제
작을 했어요. 2012년 8월 5일부터 필리핀에 가서 스모키 마운틴
(Smokey Mountain)55)을 방문했어요. 쓰레기장과 소각장 바로 
옆에서 봉사활동으로 ‘파라알랑(Paaralang Pantao)’이라는 프리
스쿨을 운영하는 시인이 있었어요. 그분이 여름에 거기 간다고 하기
에 따라가고 싶다고 부탁했더니 승낙해줘서 1주일 정도 다녀왔어
요. 
2012년 스모키 마운틴 
13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56)
 중국 산서성 대동(大同)시에서 풀뿌리 녹화 협력의 활동을 하는 NGO 
단체. (참조: 緑の地球ネットワーク, https://gen-tree.org/)
  그때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모습이나 가난한 생활 상
황을 찍었어요. 이전에는 스모키 마운틴 안으로 들어가서 찍을 수 
있었다고 하던데 이제는 전혀 들어가지 못한다 하니 밖에서만 찍었
어요. 그다지 내용이 깊은 작품은 아니지만 20~30분짜리로 정리해
서 유튜브에 업로드했고 DVD를 만들어서 그 단체에 기증했어요. 
그랬더니 그 단체는 작은 규모의 집회를 할 때 그 영상을 상영했다
고 하더라고요. 아이들이 무료로 배움터에 다닐 수 있다는 활동에 
감동하는 사람들이 있고, 결과적으로 기부가 늘어났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영상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이런 경험이 조금씩 
축적되어 온 것 같아요. 
  필리핀에 다녀와서 며칠 후인 2012년 8월 13일부터는 NGO단
체 ‘녹색 지구 네트워크(緑の地球ネットワーク, GEN)’56)의 스터디
투어에 참가해서 중국을 방문했어요. 이 단체는 내가 이전에 마이니
치신문의 연재로 취재한 적이 있었어요. 다카미(高見) 씨라는 분이 
20여 년 전부터 중국에 가서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식림 사업을 
시작했어요. 옛날 사진을 보니 나무도 풀도 하나도 없는 곳이었는데 
2012년에 내가 갔을 때엔 녹색으로 가득한 숲이었고, 20년 동안 
식림 활동을 하면 이런 큰 성과를 초래하는구나 해서 감동했어요.
  내가 갔을 때가 마침 그 단체가 식림 활동을 시작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였어요. 버스를 타고 그 동네 입구에 도착했는데 동네 사람
들이 줄줄이 서서 축제날을 맞은 듯이 들떠서 북적이고 있었어요. 
마당에는 가설무대를 만들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우리를 환영해 준 
제9장 재일한인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활동   
133
거예요. 나는 그 모습을 촬영하고 30~40분짜리로 편집해서 유튜브
에 업로드했고, DVD를 제작했어요. 다카미 씨와 상의해서 참가했
던 회원들에게 배송해주었더니 다들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이런 경험들을 통해 영상이 가진 힘이라 할까... 물론 사진도 중요
하지만. 다들 지금까지 사진만으로 기록을 남겼지, 영상으로 남겨
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별로 없었죠.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영상을 
찍고 DVD로 남겨준 것을 아주 좋아했었어요. 
▮ 재일한인 할머니를 영상으로 기록하기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영상기록을 무엇인가 더 유익하게 활용할 
수 없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2013년에 우연히 이쿠노의 재일한
인 1세 할머니가 100살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 사람의 
인생 경험을 찍고 선물하면 좋은 100살 기념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
요. 본인도 좋다 하셔서 그분 집으로 찾아갔어요. 
  1세의 경험담이라 당연히 재미있죠. 이분은 오랫동안 밤에 노점
상(이하, 밤장)을 해왔다고 하신 거예요. 듣자마자 아!! 싶었어요. 
나도 어렸을 때 밤장 가서 즐겁게 놀았거든요. 근데 그런 가게들은 
대부분 조선인이 영업했던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밤장
을 했던 사람들은 제대로 된 일을 못 하니까 밤이 되면 나와서 밤장 
하면서 돈을 벌었던 것 아니었을까... 그분 이야기로는 본인이 직접 
도구 같은 것을 가져가서 일하는 게 아니라 우두머리가 다 준비를 
해준다. 본인은 가서 매점 관리만 하면 된다고. 그러니까 중노동도 
13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57)
 오사카 인권 박물관은 오사카시 나니와(浪速)구에 있는 박물관으로, ‘리버
티 오사카’라고도 불린다. 운영은 공익재단법인 오사카 인권 박물관으로, 
1985년에 개관하였으나 2020년 5월에 임시 폐관되었고, 2022년부터는 
이전하여 재개관할 예정이다. (참조: リバティおおさか 大阪人権博物館, 
http://www.liberty.or.jp/)
아무것도 없었다고. 매점 관리만 하니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하신 
거예요. 우두머리도 조선인이었다고 하네요. 뜻밖의 이야기였지만 
재일한인의 밤장 이야기는 지금까지 누구도 연구해본 적이 없는 
주제가 아닐까, 관련 책이나 글도 본 적이 없어서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재미있는 경험이 됐어요. 
  이를 통해 재일한인의 체험담을 기록한다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한신교육투쟁
을 직접 체험했던 분을 비롯해서, 재일한인 안에서도 역사적인 사건
의 증언자들을 찾아가서 영상으로 남기기 시작했어요. 
  영상은 찍으면 본인한테 선물하기도 했지만 귀중한 내용을 담은 
것은 제대로 된 곳에 기증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적절한 곳이 없더
라고요. 총련 관련으로는 이런 기록물을 다루는 곳이 별로 없을 
거 같고요. 일본 사회에서 공적인 곳을 찾아봤어요. 오사카시립도
서관에 지인이 있어서 알아봤더니 좋다고 해줘서 기증했어요. 여태
까지는 책이 중심이었고 영상으로 기록을 보존한다는 생각에 눈이 
가진 않았는데 매우 재미있는 시도라고 해서 받아주었어요. 
  그리고 그 지인이 국립국회도서관으로 보내면 어떻겠냐고 조언
을 해줬어요. 기증 절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보내면 저쪽에
서 알아서 보관해준다고 하더라고요. 보내봤더니 보관하겠다고 감
사 편지가 왔어요. 그리고 ‘리버티 오사카(リバティおおさか)57)’라
제9장 재일한인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활동   
135
는 일본 최초의 인권 박물관이 있어서 거기에도 기증했어요. 
  나중에 조선대학교 안에 조선문제연구센터라는 곳이 있고, 거기
서 재일한인의 여러 가지 역사적 문헌이나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고 
들어서 거기에도 보내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2013년 이후 사람들
의 체험담을 촬영하기 시작했고 특히 중요하고 귀중한 증언을 담은 
것은 국회도서관, 오사카시립도서관, 리버티 오사카,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센터 재일조선인관계자료실 등에 DVD를 기증하고 
있어요. 
▮ 라이프 영상 워크 설립과 고려사람 취재
  2014년 6월에 ‘라이프 히스토리 영상 기록회(ライフヒストリー
映像記録会)’라는 명칭을 만들었어요. 내가 혼자 활동하는 건데 기
증할 때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것보다 뭔가 회 이름으로 된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리고 다음 해 2015년 4월 1일 자로 ‘라이
프 영상 워크(ライフ映像ワーク)’라는 이름으로 바꿨어요. 일단은 
개인기업의 형태로 해서 세무서에도 신고를 했어요. 
13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라이프 영상 워크 홈페이지 (출처: http://life-eizo.com/works/)
  영상을 더욱 잘 살릴 수 없을까, 해서 여러 가지 주제를 생각해보
긴 했는데 마침 2015년 9월에 러시아에 갈 기회가 생겼어요. 구소
련 시대부터 사업가로서 대규모로 무역을 하고 있는 일본 사람이 
있는데, 그분은 내가 고려사람을 주제로 책 번역을 하거나 연구하고 
있는 걸 알고 같이 가자고 권유해준 거예요. 다음에 연해주, 블라디
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다녀올 기회가 있으니까 같이 가자고. 러시아
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는데 이분은 러시아어가 유창하지요. 
게다가 여비도 좀 보태준다고 하니 고마운 제안이었죠. 그분은 사회
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은 사람이었고 고려사람의 역사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나와 같이 가면서 인터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으셨나 봐요. 
  블라디보스토크 옆에 상당히 시골인 우수리스크라는 곳이 있는
제9장 재일한인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활동   
137
데 거기로 갔어요. 가봤더니 큼직한 고려인문화센터가 있었어요. 
2015년에 방문한 고려인문화센터
  현지 고려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정부의 원조를 받으면서 
훌륭한 건물을 지었고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한국 관련 다양
한 도서 자료가 있고, 교실에서는 한국어나 한국 노래, 무용 같은 
것을 배울 수 있었어요. 1층에는 역사자료관이 있고 강제이주 당시 
사진이나 유명한 고려사람들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그 
방에는 좋은 영상기록도 있어서 봤더니 고려사람의 역사와 현재 
활약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다큐 영화도 볼 수 있어서 
너무 감격했어요. 그리고 또 하나 감동한 것은 매년 9월에 건물 
앞 넓은 광장에서 축제를 한다는 거예요. 그날에는 고려사람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다양한 민족적 마이너리티들이 다 모여
서 성대한 축제를 연다고 해요. 고려사람을 중심으로 마이너리티의 
138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공생의 장(場)을 만들고 있다는 거죠. 
  우수리스크를 방문하게 됐을 때 강제이주를 직접 체험했던 사람
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전혀 없었고, 고려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서 조금이라도 찍을 수 있으면, 그 정도였어요. 그런데 뜻밖에도 
센터에서 일하는 분이 강제이주 체험자가 3명 있다고 말해줬어요. 
그래서 1명씩 만나서 옛날 체험담을 듣게 됐어요. 10살 전후에 시
베리아 철도를 타고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가게 된 분은 그때 
같은 차량에 탔던 사람이 죽어서 밖으로 옮겨지는 모습을 직접 목격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갔는데 집
이 없어서 땅을 파서 생활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후에도 계속 
고통스러운 차별을 당했다는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이들의 이야기는 역사적 가치가 높죠. 러시아에도 영상작가가 
없는 것은 아니죠. 내가 처음으로 카자흐스탄으로 갔을 때 라브렌티 
손(Lavrenti Son)이란 영상작가가 계셨어요. 그분은 다큐멘터리 
형태로 고려사람의 문제를 작품화하고 계셨지만 강제이주에 그렇
게 중점을 두고 촬영한 건 아니었나 봐요. 내가 만난 3명도 이런 
식으로 체험담을 들으려고 온 사람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귀한 체험담을 듣고 찍었으니 어떻게나 보존하는 수가 없을까 
생각했는데 그 무렵에 국사편찬위원회라는 곳을 알게 됐어요. 몇백 
년 전부터 현재까지 이르는 한반도의 사료(史料)를 모아서 보관하고 
있는 국가기관이에요. 거기가 ‘2016년도 구술자료 조사 수집 지원
사업’이라고 해서 역사적 체험담을 글이나 영상으로 기록하는 일을 
모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나도 바로 응모해봤죠. 여기에 
제9장 재일한인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활동   
139
영상을 보낸다는 건 내가 찍은 영상이 국가적으로 영구 보존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나는 재일한인 1세와 2세의 체험담을 영상화해서 
DVD로 기록하는 것을 신청했는데 다행히 선정이 되었고 재일한인 
6명의 증언을 수록해서 DVD를 보냈어요. 
  그런데 나 같은 경우는 주로 일본어로 취재를 하니 한국어로 번역
을 해야 했어요. 한국에서 보존하기 위해서는 한국어 번역본을 
DVD와 같이 보내야 하니까. 1명이라면 몰라도 6명이잖아요. 시간
이 오래 걸려요. 눈코 뜰 새 없이 작업했죠. 그다음 해도 신청했는데 
선정이 안 됐어요. 그 후 2번 정도 떨어지고 ‘2019년도 구술자료 
조사 수집 지원사업’에서 다시 선정돼서 5명 취재하고 DVD로 만들
어 보냈어요. 
  나는 2019년에 조선학교의 현재와 역사를 그린 장편 다큐 『아이
들의 학교』를 제작했어요. 그래서 5월에는 부산평화영화제에서 개
막 상영을 해줬어요. 그때 재일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는 한국
인 카메라맨을 만났어요. 안해롱(安海龍) 씨라고 사진도 영상도 잘 
찍는 유명한 분이에요. 내가 국사편찬위원회에 DVD를 보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안 그분이 부산에도 국가기록원이라는 곳이 있다고 
알려줬어요. 한국의 오래된 역사 관련 자료를 보존하고 있는 기관이
에요. 그분이 데려가 준 곳은 부산에 있는 국가기록원이었는데 서울
을 비롯한 전국 5~6곳에도 각각 국가기록원이 있다고 하네요. 
  부산 국가기록원에 같이 가서 내가 하고 있는 활동 내용과 국사편
찬위원회에 DVD를 제공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가능하면 
국가기록원에도 제공하고 싶다고 했죠. 그랬더니 아주 반응이 좋았
어요. 특히 러시아 고려사람의 강제이주 영상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
14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서 꼭 갖고 싶다고 했어요. 나는 제공할 수 있는 건 다 제공하겠다고 
했는데 조금 후에 국가기록원 직원이 일본의 우리 집까지 찾아온 
거예요. 내 컴퓨터에 저장된 영상 목록을 보면서 특히 중요한 것들
을 달라고 했어요. 재일한인과 고려사람의 영상기록은 국가기록원
에서 그리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귀중한 사료라고 해서 기꺼이 
받아 주었어요. 
  국사편찬위원회와 국가기록원하고 연결되었다는 건 나한테 대단
히 중요한 인연이 됐다고 생각해요. 
제10장 재일한인의 교육권 투쟁,         
영화 『아이들의 학교』 제작
흑인 문제를 통해 깨달은 재일한인 차별의 ‘이상함’
고교무상화 재판 패소를 계기로 영화 제작 결심
스태프 및 비용 마련
축적된 문화 활동의 발현
영화에 대한 내부 평가
14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 흑인 문제를 통해 깨달은 재일한인 차별의 ‘이상함’
  나는 1992년에 미국에 가서 로스앤젤레스 폭동에 관한 취재를 
한 뒤 흑인 문제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나의 세계
관, 특히 인권문제나 차별 문제를 생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세계 각지에 여러 가지 차별이 있지만 그 근본은 모두 공통
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차별구조는 이렇죠. 차별하는 사람들은 우선 피차별 사람들 스스
로가 긍지를 상실하게 만들어요. 흑인 같은 경우는 가난하고 학식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
지게 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흑인 스스로 백인을 추종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의식을 가지게 해요. 그런데 만약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흑인이 나타나면 두 번째 단계, 폭력으로 철저히 
공격하죠. 린치를 하거나 죽이거나. 그래도 점차 흑인들의 저항이 
확대돼 가면 세 번째 단계로 법률을 이용하는 거죠. 흑인을 차별하
는 법률을 만든다. 예컨대 법률로 흑인과 백인은 같은 공공시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요. 레스토랑도 화장실도 해변도 도서관도. 그
러니까 흑인이 식당 같은 데에 들어오면 법률 위반이라 해서 체포하
지요. 국가권력을 이용해 당당하게 잡아요. 
  그런데 1954년 흑인 차별 문제는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했죠. 
‘브라운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58)이 나온 거예요. 
브라운 씨 딸은 집 근처에 있는 백인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멀리 
제10장 재일한인의 교육권 투쟁, 영화 『아이들의 학교』 제작   
143
58)
 정식 명칭으로는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 판결’ 혹은 ‘인종격리위헌판
결’이라고 한다. 1954년 5월 미국 연방 최고재판소가 내린 흑인·백인 분리 
문제에 관한 역사적 판결. 분리된 교육 시설 이용은 본질적으로 불평등이라
는 판결을 내렸고, ‘분리를 해도 평등’이라는 법리를 명확히 기각했다. 본 
판결은 향후 미국의 민족·인종 관계 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판결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공민권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떨어져 있는 흑인학교로 가야 했죠. 물론 시설은 초라한 거예요. 
이에 대해 브라운 씨가 차별이 아니겠냐고 소송을 일으켰어요. 당시 
백인이 만들어낸 시스템에 항의한다는 건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죠. 그 결과 1954년 연방 최고재판소에서 승소한 거예
요. 흑인이 백인을 대상으로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한 일이었고, 미국 흑인의 역사를 바꾼 큰 판결이었어요.
  이 승리는 1955년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지도하는 ‘몽고메
리 버스 보이콧(Montgomery bus boycott)’운동으로 이어졌어
요. 이 운동도 약 1년 정도 걸렸는데 흑인 측이 재판에서 이겼죠. 
그 과정에서 미국에서 공민권 운동이 크게 확대됐어요. 백인 중에서
도 흑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많은 흑인과 
백인들이 억센 투쟁을 벌인 끝에 1964년 드디어 미국 민권법 제정
이라는 역사적 성과를 거뒀어요. 민권법이 제정됨에 따라 일단 흑인 
차별을 규정했던 법률들이 개선되었죠. 그렇다고 바로 흑인 차별이 
다 없어지는 건 아니죠. 아직도 흑인 차별은 있지만 그래도 차별적
인 법률이 철폐되었다는 것은 큰 영향력을 가지죠. 흑인이 백인과 
같은 레스토랑을 이용해도 체포를 당하지 않고, 같은 버스를 타고 
어디에 앉아도 체포를 당하지 않는 시대가 됐어요. 이러면서 서서히 
흑인의 권리가 확대되어 갔어요. 
14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이런 흑인 차별과 권리 획득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재일한인으로 
치환해 생각해봤죠. 재일한인들도 오랫동안 투쟁을 해왔지만 아직
까지 법·제도로 인한 차별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현재 일본은 미국에 비해 반세기 늦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나는 이전에는 재일한인은 차별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슬프고 
유감스러운 입장이라 생각했었어요. 근데 흑인 문제를 공부하고 
나서는 의식에 변화가 일어났어요. 일본 정부는 얼마나 시대착오적
인 짓을 하고 있는가! 라고 비웃게 됐어요. 미국에 비해서 반세기나 
옛날 시대에 머물고 있으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나라인가. 이런 의식
을 가지게 됐어요. 
▮ 고교무상화 재판 패소를 계기로 영화 제작 결심
  민족운동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민족교육이죠. 왜냐면 민족
교육은 대(代)를 이어서 민족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니까. 재일한인
들은 모진 곤란을 이겨내면서 조선학교를 짓고 지켜왔죠.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일관해서 조선학교에 대한 억압, 탄압 정책
을 일삼아 왔어요. 특히 2010년에 고교무상화 제도가 개시되었을 
때 조선학교가 제외되었기 때문에 동포들의 피눈물이 나는 투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조선학교의 역사와 현상을 
그린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했어요. 
  2009년에 고교무상화 논의가 시작됐을 때 일본 정부는 민주당 
정권이었는데 처음에는 조선학교를 비롯한 외국인학교도 고교무상
제10장 재일한인의 교육권 투쟁, 영화 『아이들의 학교』 제작   
145
59)
 2010년 11월 23일, 북한군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대연평도를 향해 
갑자기 포탄 약 170발을 발사, 90발이 해상에 낙하하고 80발이 연평도에 
떨어졌다. 
화의 대상으로 하겠다고 명언했었죠. 그런데 문제가 많던 납치문제
담당대신이 조선학교는 포함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때부
터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어요. 2010년 4월부터 고교무상화가 시작
되었는데 국제학교나 한국학교를 비롯한 외국인학교는 모두 대상
으로 포함되었지만 유일하게 조선학교만 대상 외로 했어요. 매스컴
에서도 모두 조선학교만 배제하는 것은 도리가 안 맞는다는 비판이 
속출되었죠. 물론 조선학교 관계자들도 반대운동을 했지만 정부는 
조선학교에 대한 처우를 검토하는 심의회를 만들고 심의 결과에 
따라 정하겠다고 했어요. 
  8월에 심의회가 실시되었는데 아이들의 교육 문제에 외교 문제
를 엮으면 안 된다는 견해를 냈어요. 사실상 조선학교도 고교무상화 
대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월에 
북한이 한국의 연평도를 향해 발포하는 사건59)이 일어나자 바로 
다음날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가 조선학교에 대한 심사를 정지하라
고 지시했어요. 
  그리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니 대지진 대책으로 바쁘
니까 조선학교 심의회를 할 여유가 없다는 구실로 심의회를 재개하
지 않았죠. 그해 가을, 간 나오토 총리는 관련 심의를 재개한다는 
말을 남기고 총리를 그만두었어요. 그런데 그 뒤에도 유야무야 상태
가 계속되다가 중의원(衆議院) 총선거를 하게 돼서 자민당이 압승한 
거예요.
14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2012년 12월 제2차 아베(安倍)정권이 출범했고 시모무라 하쿠
분(下村博文)이 문과대신으로 취임했어요. 시모무라는 취임하자마
자 고교무상화 제도에서 조선학교는 배제하겠다고 단언했어요. 사
실상 심의도 개선도 불가능해졌죠. 국가가 재일한인 차별을 노골적
으로 하니 보수적 지자체도 차별을 노골화했어요. 오사카나 도쿄와 
같이 우익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지사가 있는 곳에서는 몇십 년 
동안 계속해오던 보조금을 자르는 현상이 일어났어요. 
  이에 격분한 재일한인들은 재판 투쟁에 나섰어요. 맨 처음은 오
사카조선학원이 보조금 정지에 대해서 2012년에 오사카부와 오사
카시를 대상으로 소송을 했어요. 그 이후 잇따라 전국 다섯 군데 
조선학교에서도 일본 국가에 대해서 고교무상화 문제로 소송을 제
기했어요. 
  일련의 재판에서 맨 먼저 판결이 내려진 건 2017년 1월 오사카 
보조금 재판에 대한 지재(地裁)였는데, 패소였어요. 판결이 나왔을 
때 나도 그 지재 앞에 있었어요. 나는 일본 재판에 대해서 그다지 
기대도 없었지만 민족교육권이라는 건 세계에서 공인하는, 절대적
으로 옳은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니 혹시나 하는 기대도 있었어요. 
흑인들의 운동을 보면 1954년 브라운 판결로 흑인이 승소했고 그 
이후 흑인들의 상황이 크게 달라졌죠. 그러니까 우리도 재판에서 
이기면 재일 차별에 대한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기대가 없는 건 아니었어요. 그러나 패소가 됐으니까 억울하고 
화가 나기도 했죠. 
  나는 이전에 재일한인 차별에 대해서 ‘심한 차별’이라고 말했었
지만 그때부터는 ‘이상한 차별’이라는 표현으로 바꿨어요. 인간의 
제10장 재일한인의 교육권 투쟁, 영화 『아이들의 학교』 제작   
147
이성을 벗어난 이상한 단계로 들어가 있다고. 세계 역사에는 인권을 
유린하는 법률, 제도 그리고 민족 차별도 많이 있지만 그중에 아이
들의 교육의 권리를 앗아가는 악법은 얼마나 있었을까? 히틀러도 
유태인 차별을 한 결과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어려워진 예는 있었
지만 아이들의 학교 교육에 초점을 맞추어 차별하는 법률까진 아마 
만들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 일본은 세계 역사 그리고 현재 세계 
속에서도 거의 유례가 없는 짓을 하고 있으니 ‘이상한 차별’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재판소 앞에 모였던 동포나 일본인들도 분노와 슬픔으로 울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내 나름대로 뭔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움텄어요. 그전부터 조선학교 문제는 나의 라이프워크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고교무상화 문제에 대해서도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긴 했죠. 책으로 쓸까 생각도 해봤지만 팔려봤자 2,000~3,000부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니까 아무런 영향력도 가지지 못하죠. 
  그래서 몹시 고민하는 중에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온 
거예요. 그런데 나는 정식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본 적이 없죠. 
막대한 비용도 필요하고, 스태프도 필요하니 나 혼자만으로는 도저
히 완성시킬 수 있는 힘이 없죠. 구체적인 방법이나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아 그냥 몹시 괴롭게 지냈어요.
148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보충자료>
고교무상화제도
일반적으로 ‘고교무상화’라고 불리는 ‘고등학교 등 취학 지
원금제도’는 소득 등의 요건을 충족하는 가구에 대해 고등학
교 수업료를 지원하는 일본의 국가 제도로, 전국에서 약 
80%의 학생이 이용하고 있다. 현재 국공립뿐만 아니라 사립
고등학교나 학교교육법 제1조에 해당하지 않는 ‘각종학교’ 
혹은 ‘단체’ 취급을 받는 고등학교에서도 취학지원금이 지급
되고 있다.
고교무상화는 2010년 4월부터 도입되었다. 그러나 조선학
교만은 그 대상에 포함할지 말지에 대해 따로 심사하기로 
하였다. 그러다가 2012년 12월 당시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
과학대신은 조선학교를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납치 문제에 진전이 보이지 않고, 조선학교는 
총련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무상화를 적용하기엔 국민
들로부터 이해를 받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일본과 
북한의 관계가 긴장 상태에 있는 한 북한과 관련이 깊은 학교
의 수업료를 무상화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전국에 있는 조선학교 5개교의 학교법인 혹은 졸
업생이 조선학교가 무상화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부당
하다고 호소하였고, 나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각 
지방재판소마다 판결은 달라졌지만 2017년 7월 오사카 지
방재판소에서는 ‘교육의 기회균등 확보를 주장한 무상화법
의 취지에 위반한다’는 판단을 내림으로써 오사카 조선학원
이 승소하였다. 
제10장 재일한인의 교육권 투쟁, 영화 『아이들의 학교』 제작   
149
그러나 이어서 열린 고등재판소 판결에서는, 조선학교는 북
이나 총련에서 ‘교육의 자주성을 비뚤어지게 할 것 같은 
‘부당한 지배’를 받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있어 
적정한 학교운영이라는 무상화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고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조선학교 차별에 대해 소송한 오사
카, 도쿄, 나고야, 히로시마, 후쿠오카 다섯 군데에서 모두 
항소심에서 패소하였다. 이후 상고한 최고재판소에서도 무상
화 대상 외로 한 것은 ‘적법’이라는 판결이 계속되었다.
오사카 지재 승소 판결의 순간
* 자료출처: “朝鮮学校はなぜ高校授業料無償化の対象から除外
されたのか?”, https://imidas.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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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 스태프 및 비용 마련
  내가 옛날부터 친하게 지냈던 ‘영화기록’이라는 집단이 있어요. 
몇십 년 동안 다큐멘터리 영화나 기업 소개 영상, 다양한 작품을 
만들고 있는 집단이에요.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도 높은 사람들이에
요. 그런데 이 집단이 지금 비즈니스가 아니라 자기들의 기획으로 
영화 제작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주제는 2가지, 하나는 전쟁 시 고생하고 살아남은 병사를 주제로 
하여 이 병사를 통해 전쟁을 생각해 보겠다는 내용. 또 하나는 조선
학교를 주제로 뭔가 할 수 없을까 생각하고 있대요. 그래서 나한테 
조선학교에 대해서 좀 알려달라고 부탁이 와서 5시간 정도 이야기
를 했어요. 조선학교의 연혁부터 현재까지다. 그들은 진지하게 들
어줬어요. 이분들이 나한테 조선학교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고 부
탁할 정도니까 반대로 내가 영화 제작 제안을 하면 협력해주지 않을
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협력을 부탁했더니 쾌히 승낙해 
주었어요. 그리고 나와 친한 NHK 카메라맨이었던 고야마 오사히
토(小山帥人) 씨, 영상 대학교에서 영상을 가르치는 구로세 마사오
(黒瀬政男) 씨도 협력을 약속해줬어요. 
  스태프 문제가 해결된 다음은 제작비 문제죠. 나는 자비로 100만 
엔까지는 어떻게든 내야겠다고. 그 시점에선 교토 노트르담 여자대
학교에서 정년퇴직하기 직전이었으니 생활 불안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것을 걱정할 시기가 아니라고 마음먹었죠. 
제10장 재일한인의 교육권 투쟁, 영화 『아이들의 학교』 제작   
151
60)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고교무상화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위법이라 
하여, 히로시마 조선학교의 운영법인 ‘히로시마 조선학원’과 졸업생들을 중
심으로 처분 취소와 재학 중의 수급 상당액에 해당하는 총 5,600만 엔의 
손해배상 등을 요구하는 소송에 대한 판결. 2017년 7월 20일 히로시마 
지재는 원고(히로시마 조선학원) 측의 전면 패소를 선고하였다. (참고: 日本
経済新聞(2017.07.20.), “朝鮮学校の無償化認めず”)
61)
 2017년 7월 28일 오사카 지재는 원고(오사카 조선학원) 측의 전면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전쟁 후 처음으로 사법이 양심과 법의 지배에 
따라 일본 정부의 차별행정을 규명하고, 정부에 대해 조선학교의 무상화 
대상 지정을 의무화하며, 학생들에게 취학지원금을 지급하라고 명령한 획기
적인 판결이었다. 또한 민족교육의 중요한 의의와 총련의 민족교육에 대한 
역할을 판시한 역사적인 승소 판결이었다. (참고: 現代の理論, “歴史的な大
阪朝鮮学校への無償化勝訴判決”, http://gendainoriron.jp/vol.14/rost
rum/ro01.php)
  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얼마나 돈이 들지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100만 엔밖에 돈이 없으니 그 범위 내에서 제작할 
수 있는 걸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이렇게 해서 영화 제작이 시작되었어요. 오사카 지재에서의 보조
금 재판에서 진 다음, 7월에는 히로시마 지재에서 고교무상화 문제 
관련 첫 번째 재판에서도 졌어요.60) 그러나 2017년 7월 28일 오사
카 지재에서는 역사적인 승소를 얻었어요!61) 나는 이때 현장에는 
가지 못했는데 영상기록의 마츠바야시 노부야(松林展也) 씨가 가주
었어요. 그때 그가 찍어준 영상이 영화 속에서 아주 감동적인 장면
으로 나와있어요. 그날 밤, 보고집회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나도 참
가해서 찍을 수 있었어요. 회장은 굉장히 열이 올랐죠. 
  제작비 문제에서는 스태프와 상의했더니 크라우드 펀딩을 해보
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아직 크라우드 펀딩이라는 제도는 일반화
되지 않아서 나도 잘 몰랐는데 해봤더니 120만 엔 정도 모였어요. 
15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62)
 정치 운동 등의 활동 자금 모금을 위해 대중에게 호소하는 모금 운동 및 
그 기부금을 말하는 일본 조어(造語).
그 외에도 ‘간파(カンパ)62)’로 현금으로 모금을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상상을 훨씬 넘은 200만 엔 정도나 모였어
요. 그중 70% 정도는 일본인이 내준 것 같았어요. 
크라우드 펀딩 지원 광고 (고찬유 블로그에서 인용)
  영화 제작 작업은 시간과 다투면서 매우 긴장된 스케줄로 추진해
제10장 재일한인의 교육권 투쟁, 영화 『아이들의 학교』 제작   
153
갔어요. 취재 갈 때마다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셨지요. 
생기발랄한 아이들의 모습이나 우리 학교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하
시는 선생님들, 학부모들의 모습에는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제목
은 오래 고민한 끝에 『아이들의 학교』로 정했어요. 
  최종적으로 영화 제작과 상영 관련 비용을 합치면 300만 엔 정도 
들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도 크라우드 펀딩과 ‘간파’로 모았던 돈 
및 상영 활동을 통해 모은 돈까지 포함해서 일체 적자가 나지 않았
어요. 물론 취재비 같은 것은 가능한 한 절약했죠. 도쿄에 니시나카
(西中) 씨라는 저널리스트가 있는데 그분한테 부탁해서 이미 찍어놓
았던 도쿄 집회 영상 등을 얻었고. 도쿄 지재에서 졌을 때 일본 
여성이 “일본의 사법은 죽었다!”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니시나카 씨가 찍어준 장면이에요. 
  그 대신에 돈을 들여야 하는 데엔 아낌없이 경비를 쓸 수 있었어
요. 특히 BGM이나 편집 과정에서 하는 청음(清音)이라는 작업이나 
소리를 조정하는 작업. 이런 것들은 완전히 전문적인 단계라 돈이 
없으면 못 하거든요. 그런데 오사카에서 가장 훌륭한 스튜디오에 
부탁할 수가 있었어요. 제작에 협조해 준 사람들은 다들 아주 싼값
에 일해줬어요. 
  음악에 관해서는 오사카에 박수현(朴守賢) 씨라는 훌륭한 음악가
가 있는데... 그분은 일본 TV 프로그램의 음악을 만들거나 작곡을 
하면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분한테 BGM을 부탁했더니 
곧 승낙해줬어요. 그런데 영화 촬영과 편집은 2018년 9월쯤에 대
부분 끝났는데 그때부터 음악을 만들려면 시간이 엄청 걸리겠죠. 
이 영화는 어떻게 해서든 재판에서 승리를 얻기 위한 운동에 도움을 
15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주려는 목적으로 만들었잖아요. 재판이 다 끝난 후 완성하면 그 
가치가 반감되죠. 아주 초조해졌었죠. 
『아이들의 학교』 내레이션 녹음 작업
  그래서 원래는 박수현 씨에게 모든 음악을 부탁하려 했었는데 
그분이 연주가들을 모아서 새로 연주하고 녹음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앞부분과 가장 중심이 되는 한신교육투쟁 
부분, 마지막 부분의 세 군데만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나머지 부분
은 스튜디오에 부탁해서 선곡을 하기로 했어요. 그 결과 진짜 마음
에 드는 BGM이 완성되었어요.
제10장 재일한인의 교육권 투쟁, 영화 『아이들의 학교』 제작   
155
▮ 축적된 문화 활동의 발현
  나는 젊은 시절부터 시나리오, 연극 등 문화 활동을 여러 가지 
해왔는데 이런 경험들이 영화 『아이들의 학교』를 제작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어요. 연극도 영화도 기승전결이 있고 감동이 있어야 
해요. 이건 하나의 기술이죠. 내가 지금까지 배워온 기술들이 도움
이 되었어요.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은 감독의 계산은 보이지 않겠
지만 역시나 이모저모로 계산해서 제작하고 있죠. 그러니까 감동하
는 거죠. 보통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면 내용이나 상황을 이해할 
수는 있는데 그다지 감동하진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나는 
이해를 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감동이 필요하다고 생
각해요. 
  『아이들의 학교』에서도 몇 가지 계산해서 넣은 장면들이 있었죠. 
예를 들면 오사카부·시의 보조금 재판에서 패소했을 때 여성 변호
사가 등장해서 유감스럽다고 이야기를 하죠. 그다음에 오사카 지재
에서 이겼을 때 같은 변호사가 막 기뻐하는 장면을 넣었죠. 이건 
계산이에요. 먼저 패소 내용을 보여주고 나서 이긴 내용을 넣는 
것. 그리고 이 작품에선 강하나란 여학생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승소했을 때 그가 한 어필. 그 장면을 어디에 넣을까 고민한 끝에 
클라이맥스에 가져갔어요. 
  그리고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찍으려고 했어요. 특히 오사카 조
선고급학교와 오사카 조선제4초급학교의 아이들 모습을 몇 번이나 
15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취재하러 갔어요. 역경 속에서도 밝고 활기찬 아이들의 모습은 감동
할 수밖에 없죠. 취재를 통해 나도 많이 격려를 받았고 촬영하면서 
보람도 느꼈어요.
  
2018년 영화를 촬영하고 있는 고찬유 감독
  그리고 이 영화는 단순히 ‘조선학교 차별을 하지마’라고 호소하
는 것만 아니라 실증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역사
적 검증이라는 부분도 중요시했어요. 특히 한신교육투쟁에 대해서
는 나도 1948년, 1949년에 조선학교 탄압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고, 김태일(金太一) 소년이 사살당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그
런데 그 이상으로 자세한 것은 몰랐죠. 
  일반적으로는 경찰이 위협사격을 한 결과 무슨 까닭인지 우연히 
소년이 맞았다는 인식이었죠. 그런데 이번에 조사하는 과정에서 
제10장 재일한인의 교육권 투쟁, 영화 『아이들의 학교』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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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도 등장한 정우종 씨라는 젊은 역사학자가 한신교육투쟁 관
련 사료(史料)를 아낌없이 제공해줬어요. 당시의 사료 중 GHQ의 
이인자인 아이첼버거(Robert Lawrence Eichelberger)의 일기에 
오사카부청 앞에서 총격 시에 경찰관이 20발 쐈다고 명기되고 있었
어요. 이 확실한 증거를 보았을 때 전율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또 
취재하는 과정에서 그날 투쟁을 촬영한 영상을 입수했어요. 약 1분
간의 짧은 필름이었는데 소방차가 살수를 하고 경관들이 경찰봉으
로 구타하는 장면이 찍혀있었어요. 이것은 국보급 영상 아닐까 싶었
어요. 
1948년 4월 26일 오사카부청 앞 살수
158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이런 자료들은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할 뿐만 아니라 한신교육투
이 무엇이었는지 증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이 영화가 한신교육투쟁에 대한 역사적 인식
을 변화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아요. 
  이런 역사적 사료, 그리고 조선학교 아이들 모습, 재판 투쟁을 
영화 속에서 다룰 수 있었으니 상상 이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생각해요.
▮ 영화에 대한 내부 평가
  2018년 11월쯤, 거의 완성된 단계에서 무슨 문제가 있으면 안 
되니까 관계자만 20명 가까이 모아서 TV의 작은 화면으로 보여줬
어요. 아직까지 BGM도 없었고 내레이션도 충분하지 않은 단계이
긴 했지만. 평가가 좋지 않았어요. 
  어떤 사람은 “교과서적이다”라고 하고. “뭐 이 정도”. 이런 반응
이었어요. 젊은 여성은 “여러 가지 공부가 됐다”라고 긍정적이었지
만 전체적으로는 “아마추어가 만든 정도”라는 반응이었어요.  
  그리고 내레이션의 틀린 부분에 대한 지적도 받았고요. 그 후에 
최종적으로 수정하고 내레이션과 BGM도 넣고 12월에 홀을 빌려
서 큰 스크린으로 시사회를 했어요. 그때 앞에서 이야기한 구성원이
나, 학교 선생님들, 내가 아는 영상 관계자들, 그런 사람들을 수십 
명 모아서 상영했어요. 그랬더니 끝나자마자 어마어마한 반향이 
일어났어요. 
제10장 재일한인의 교육권 투쟁, 영화 『아이들의 학교』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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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기록의 대표격인 우메모토 쇼헤이(梅本承平) 씨도 와주셨는
데 “이것은 역사에 남을 작품이다”라고 감상을 말씀해주셨어요. 그
리고 다른 영상 관계자나 학교 선생님들도 아주 높은 평가를 해줬
고. 그 전에 작은 TV로 상영했을 때 “교과서적이다”라고 한 사람도 
“굉장히 감동적이다”라고 해줬어요. 
제11장 『아이들의 학교』 상영 운동의 확대
일본 국내 상영 운동
일본 영화계의 인정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아이들의 학교』 상영 운동
16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 일본 국내 상영 운동
  영화를 완성한 다음에 향후 상영을 어떻게 진행할까가 문제죠. 
‘오사카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모임’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협력해주
겠다고 했지만 영화란 건 역시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게 바람직하죠. 
영화관에서 상영해야 영화로서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할까. 
매스컴도 기사를 쓰기 쉽고. 그래서 간사이에서 독립계 영화관으로 
가장 유명한 ‘제7예술극장(나나게이, 第七藝術劇場)’에 가봤어요. 
1주 만이라도 상영해 주지 않겠냐고 DVD를 건네줬어요. 훗날에 
다시 갔더니 적극적이진 않았지만 1월 신춘상영이라는 형태로 개봉
하자고 해줬어요. 
2019년 1월 12일 『아이들의 학교』 상영 첫날
  영화 자체는 2018년 말에 완성했지만 2019년 1월 12일에 개봉
제11장 『아이들의 학교』 상영 운동의 확대   
163
했기 때문에 이 작품의 제작연도는 2019년으로 되어있어요. 
  하루에 1번만 하는데, 상영회 첫날에는 나의 토크가 있다고 해서 
가봤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더니 사람들이 줄줄이 서 있는 거예
요. 무슨 일인가 싶었죠. 그리고 바로 만석이 됐는데 아직도 사람들
이 줄줄이 서 있는 상황이었고. 그 회장은 수용력이 95명 정도였고 
서서 봐도 백몇십 명이 한계였기 때문에 결국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
을 몇십 명이나 돌려보내게 되었어요.
2019년 1월 12일 『아이들의 학교』 상영 첫날 
토크쇼
16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그래서 상영이 끝나자마자 어마어마한 박수가 터졌어요. 영화관
에서 박수가 일어난 건 그렇게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니까 놀랐죠. 
그 후에 무대로 올라가서 토크를 했는데 그때도 서서 보는 사람도 
있었고. 그런 좋은 분위기 속에서 상영 활동이 출항했죠. 
  그 이후도 1주일 동안 계속 입석 관객이 나왔죠. 그래서 처음엔 
1주일간 상영 예정이었는데 2주로 연장되었고, 3주가 되었고. 결국 
5주로 연장됐어요. 
  이러한 가운데 교토시네마라는 곳에서 한 달 동안 상영하고 싶다
는 전화가 왔어요. 그 외에도 각지 영화관에서 직접 문의 연락이 
오거나 사람들이 소개해주거나 해서 최종적으로는 히로시마, 나고
야(名古屋), 도쿄, 군마(群馬) 등 아홉 군데 영화관에서 상영했어요. 
  그리고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일본 도처에서 자주상영(自主上
映)을 하고 싶다는 요청도 많이 왔어요. 어디서 본 관객들이 다음에
는 스스로 자주상영을 기획해 주는 거예요. 도쿄 같은 경우는 ‘조선
학교를 지원하는 모임’ 멤버가 3월쯤에 자주상영회를 열었는데, 
300명 정도 모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상당히 큰 이익이 생겼다고 
해서 조선학교에 기부하기도 해줬죠. 
  2019년 11월에는 도쿄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개막 작품으로 상
영을 해줬어요. 이 영화제가 끝난 직후 배급회사 사람이 찾아왔어
요. 히라노 히로야스(平野博靖) 씨라고, 이전에 큰 배급회사에서 몇
십 년 동안 일했었고 수년 전에 독립한 분. 이분이 나한테 와서 
배급회사 입장에서 협력하고 싶다고 말해줬어요. 다음날에 보자고 
해서 만났더니 이분은 일본 전국의 이른바 독립계 영화관은 모두 
다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이후 이분이 많은 일을 해주었어
제11장 『아이들의 학교』 상영 운동의 확대   
165
요. 
  먼저 그분이 해준 것은 와세다대학교에서의 상영회. 그리고 간토
에는 포레포레 히가시나카노(ポレポレ東中野)라는 유명한 독립계 
영화관이 있는데, 여기서 상영에 성공하면 확 퍼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곳이에요. 여기서 2020년 5월까지 해주겠다고 되었어요. 그
런데 2020년에는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유행했기 때문에 결국 상영
을 못 하게 되고 말았어요. 그리고 몇 군데 대학교에서도, 도쿄외대
나 죠치(上智)대, 그런 데에서도 상영회를 하겠다는 의향이었는데 
다 코로나 때문에 무산되었어요. 
  코로나 때문에 독립계 영화관 자체가 경영이 어려운 상황에 빠졌
기 때문에 히라노 씨 등 몇 가지 배급회사가 협력한 형태로 ‘리빙룸 
시어터(LIVING ROOM THEATER)’라는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보고 싶은 사람은 인터넷으로 신청해서 집에서 보는 시스템인데 
여기에 『아이들의 학교』도 명단에 넣어줬어요.
  그리고 ‘오데사 엔터테이먼트(オデッサ・エンタテイメント)’라
고 해서 영상을 제조·판매하거나 츠타야(TSUTAYA)에 도매하거나 
하는 대형 회사가 있는데, 히라노 씨는 거기에도 이야기를 해줘서 
12월부터 DVD 판매를 시작했어요. 아마존이나, 라쿠텐(楽天)과 
같은 인터넷 사이트, 그리고 기노쿠니야(紀ノ国屋)와 같은 서점에
서도 주문할 수 있어요. 2021년 2월부터는 츠타야와 게오(GEO)에
서 대여도 시작했어요. 이런 것들은 모두 히라노 씨가 해준 거예요. 
16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63)
 “조선학교의 역사와 현상을 그린 나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 『아이들의 
학교』가 2019년 제93회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문화영화 부문의 10위에 
선정되었습니다. 키네마 준보는 1924년부터 시작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상으로, 매년 일본 영화, 외국영화, 문화영화 등 부문별로 전년도의 우수
한 작품을 선정합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권위 있는 영화상 
중 하나인 본 상에서 베스트 텐에 선정된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고찬유 감독 블로그에서 번역 인용, http://blog.livedoor.jp/k
o_chanyu/)
▮ 일본 영화계의 인정
  2020년 2월, 제93회 키네마 준보 문화영화 부문에서 베스트 텐
에 뽑혔어요.63) 키네마 준보는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영화잡지
로, 100년의 역사가 있는데 거기서 베스트 텐으로 뽑힌 것은 영광
스러운 일이죠. 키네마 준보는 매년 베스트 텐을 뽑는데, 일본 영화 
부문, 외국영화 부문 그리고 또 하나 문화영화 부문이라는 게 있어
서. 다큐멘터리는 문화영화 부문에 포함돼요. 그 부문에서 베스트 
텐에 들어간 거예요. 문화영화 부문에서 베스트 텐에 들어간 다른 
영화를 보면, NHK와 일본 KBS TV, TV 이와테(岩手)라든가 그런 
대단한 곳에서 만든 것들이니까 10위에 들어간 건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11장 『아이들의 학교』 상영 운동의 확대   
167
64)
 장려상 수상에 대해 “이번 수상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고, 조선학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상영 활동에도 큰 격려가 됩니다. 일본영상부흥회 및 
지원을 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립니다”고 블로그에 
심정을 밝혔다. (고찬유 감독 블로그에서 번역 인용, http://blog.livedoor.j
p/ko_chanyu/)
제93회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문화영화 선정 
  그리고 또 하나.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제37회 일본영화부흥상의 
장려상을 받았어요.64) 이것은 일본영화계에서 유명한 거장이었던 
故 야마모토 사츠오 감독이 시작한 것인데 이 상은 소위 사회파 
작품이 대상이 돼요.
  다큐멘터리, 극장 영화를 불문하고 작품을 뽑아요. 역대 이 상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배우로는 나카다이 다츠야(仲代達也), 미쿠니 
168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렌타로(三國連太郎), 감독으로는 이마이 다다시(今井正), 쿠마이 케
이(熊井啓), 그리고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그야말로 일본 영화계의 
톱에 있는 사람들이 수상하고 있는데 여기서 장려상을 받았다는 
것은 더없이 영예로운 일이라고 느끼고 있어요. 
일본영화부흥 장려상의 상장과 상패
▮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아이들의 학교』 상영 운동
  일본 국내에서 정부에 대해 아무리 항의를 해봐도 정부는 받아들
이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든 국제적인 여론을 높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 처음부터 이 영화는 한국어판과 영어판을 만들려고 정하고 
있었어요. 
  한국어판과 영어판을 만들기 위해 전문 회사에 부탁하면 너무 
많은 돈이 드니까 머리가 아팠어요. 처음에는 어떤 사람 소개로 
제11장 『아이들의 학교』 상영 운동의 확대   
169
65)
 1994년 2월에 재일조선인(국적을 불문한 한반도 출신자의 총칭)의 변호
사, 법무사, 세무사, 공인회계사, 행정사 등의 유자격자와 인권 분야의 연구
자 및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재일동포의 권리 옹호와 생활 향상에 공헌하
고자 하는 목적으로 결성된 조직. (참조: 在日本朝鮮人人権協会, http://k-
jinken.net/) 
적당한 곳을 찾아서 도쿄까지 상담하러 가기로 했어요. 전날에 도쿄
에 가서 재일본조선인인권협회(在日本朝鮮人人権協会/ 이하, 인권
협회)65)를 방문했어요. 향후 도쿄에서 상영 활동을 할 때 도와달라
고 부탁했고. 그런데 다음날에 자막을 만드는 작업을 위해 일본회사
에 가겠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인권협회 사람이 조선대학교 졸업생 
중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고 하잖아요. 사장으로 한국영
화나 한국드라마에 자막을 넣는 일을 하고 있고, 영어도 하고 있다
고. 즉시 보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연락을 해줘서 다음날 만나기로 
했어요. 
  다음날, 먼저 오전 중에 약속했던 일본회사에 가고 오후에 그 
소개받은 조선대학교 졸업생이 하는 주식회사 INJESTAR로 갔어
요. 상담했더니 나중에 견적서를 보내겠다고 한 거예요. 나중에 보
내온 견적서를 봤더니 놀랄 만큼 초저가인 거예요. 전혀 이익이 
없을 것 같은... 나는 일본어 시나리오를 건네주기만 하면 돼요. 
그럼 그쪽에서 영어로 번역하고 자막을 영상에 넣어줘요. 한국어도 
번역까지 다 해줘요. TV 드라마 번역도 하고 있으니까 한국과 연결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한국 스태프에게 시켜서 번역해요. 내가 
번역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죠. 자막도 넣어주고. 이런 것들
을 다 통틀어서 청구서를 줬는데 너무 싸서 놀랐어요. 한국어판은 
INJESTAR가 소개해 준 한국의 우수한 내레이터가 맡아주고 녹음
17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은 서울 강남의 스튜디오에서 했어요. 영어는 내레이션을 영어로 
하기가 아주 어려워요. 그래서 일본어판에다가 영어 자막이 나오게 
하는 형태로 만들어 달라 했고. 그것까지 다 해줬었어요.
  2019년 5월 부산평화영화제와 인천시가 주최하는 디아스포라영
화제에서 초청 상영해 주었어요. 
  부산평화영화제는 주최 단체가 원래 북한의 아이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계속 해왔던 것이에요. 그 활동의 일환으로 부산평화영화제
를 운영하면서 좋은 영화에 대해 평가를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 주최 단체 입장에서 『아이들의 학교』는 딱 맞는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열심히 힘을 써줬어요. 초청 상영 후에 토크쇼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날에는 주요 시민단체, 대학교수 등 30명 정도
를 모아줘서 간담회를 하는 자리까지 마련해줬어요. 
2019년 5월 부산평화영화제 토크쇼 
제11장 『아이들의 학교』 상영 운동의 확대   
171
  9월에는 영어판도 완성됐어요. 내가 이전에 로스앤젤레스 가서 
취재했을 때 도움을 많이 받은, 그쪽에서 민족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단체가 있었는데, 그 중심인물인 하용진이라는 친구에게 영상
을 보냈어요. 미국에서 상영 활동을 해달라고. 그랬더니 바로 연락
이 와서 거기서 2번 정도 상영해줬어요. 적극적으로 홍보해주기도 
하고.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민족단체에서도 처음 한 번 하다가 그 
뒤에도 몇 번 해주고... 이런 식으로 미국에서는 로스앤젤레스, 샌프
란시스코, 버클리. 이런 데에서 7, 8번 상영회를 해줬어요. 
부산평화영화제 개막작 포스터
  그런데 2020년에 들어서 코로나 때문에 상영회가 많이 무산되고 
17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말았어요. 한국에서도 서른 군데 정도 상영회가 기획되고 있었는
데... 부산평화영화제 스태프가 상영회에 협력하고 싶다고 해줬고. 
그리고 조선학교 지원을 10년 이상 계속하고 있는 ‘조선학교와 함
께하는 시민모임’이라는 단체도 전국 각지에서 상영회 개최를 기획
해 주었는데 다 무산됐어요. ‘몽당연필’도 여러 가지 협력해 줄 것 
같았는데 무산됐고. 
KBS ‘다큐 인사이트’ 방송선전용 포스터
(고찬유 블로그에서 인용)
제11장 『아이들의 학교』 상영 운동의 확대   
173
제24회 YWCA가 뽑은 좋은 미디어콘텐츠상 
‘정의·평화 부문’ 우수상의  상패 및 상장 
  아까 말한 도쿄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이 끝났을 때 한국 
KBS의 도쿄 특파원 이호경 씨가 나를 찾아와서 뭔가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냥 인터뷰라도 해주는가 생각해서 며칠 후에 다시 만났어
요. 근데 그때 나온 제안은... KBS 프로그램 중 매주 목요일에 밤 
10시부터 55분간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서 방송하는 ‘다큐 인사이트
’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거기서 이 영화를 축약해서 방송하고 싶
다는 내용이었어요. 한국에서의 상영이 점점 어렵게 되어가는 시기
였던 2020년 3월에 KBS가 전국 방송을 해준 건 아주 고마운 일이
었어요. 
제12장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향후의 활동
활동의 근간인 민족교육 문제
조선학교의 미래
재일외국인을 다루는 새로운 영화 준비 중
176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 활동의 근간인 민족교육 문제
  나의 사고방식의 기저에는 항상 재일한인에 대한 차별정책 문제
를 두고 있어요. 참정권 문제나 취직 문제, 강제연행 문제 등 물론 
모두 관심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 문제가 아닐까 해요. 
  교육 문제는 다른 차별 문제와는 질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주거 문제나 취직 문제 같은 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개선되어 가요. 이런 차별을 개선해나가는 건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
를 갖는 것을 목표로 하는 거니까. 해결되면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가지게 되고. 잘못하면 동화로 이어질 위험성도 있죠. 
  한편 민족교육이라는 것은 일본인화하는 것과는 명확히 다른 길
을 간다는 것이죠. 조선학교는 일본인이 아닌 아이들을 키우는 교육
이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절대로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은 개선하지 
않죠! 그러니까 조선학교의 권리나 민족교육권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일본 정부는 단적으로 말하면 민족말
살정책을 하고 있고, 그것이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교육 
분야이죠. 그러니까 향후에도 교육 문제를 주제로 계속 활동해갈 
생각이에요. 
  조선학교는 취재하면 할수록 느끼는 게 많아요. 동포들은 아이들
의 민족교육권을 지키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면서 싸워왔죠. 그러니
까 취재하는 측도 감동하는 거죠. 그렇게까지 해서 자녀교육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모습에 감동할 수밖에 없죠.
제12장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향후의 활동   
177
  나는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다는 의식을 가지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미국, 중국, 구소련을 다녀오면서 
느낀 것은 한민족은 자녀교육에 굉장히 힘을 쏟는다는 것. 부모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시기에도 먼저 민족학교를 만들었던 역사가 
있어요. 재일동포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가난해도, 탄압이 심해도 
조선학교를 만들고, 지키고, 훌륭한 역사를 다듬어 왔다고 생각해
요. 그런 의미로는 우리 민족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느껴요. 
▮ 조선학교의 미래
  무책임한 말은 못 하지만... 혹시 언젠가 민족교육 차별이 없어지
고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학교가 자립된 상태가 되면 나는 외국인 
학생을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고베에 있는 중화 동문(中華同文) 학교에서는 일본인 입학 희망자
가 상당히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몇 년 전에 일본인 학생 비율은 
몇 %까지란 기준을 정해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요. 조선학교는 
지금은 동포 아이들의 민족성을 지키는 교육을 하고 있지만, 더 
넓게 한국·조선에 호감을 가지는 일본인을 키워간다는 것도 중요하
다고 생각해요. 나는 장기적으로 보면 언젠가 일본인에 한정하지 
않고 외국인들을 모두 받아들이는 학교로 변해가지 않을까라고 느
끼고 있어요. 
  조선학교 경우는 특히 럭비 같은 걸 하고 있는 일본인 중에, 조선
학교 고급부에서 럭비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178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않죠. 지금은 일본인 학생은 거절할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는 그런 
아이들도 받아들이면서 국제적인 교육도 할 수 있는 학교가 된다면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 재일외국인을 다루는 새로운 영화 준비 중
  나는 민족교육 문제의 메인으로 조선학교를 생각하고 있지만 그
것은 다른 재일외국인 아이들의 교육권 전체에 통하는 것이라 생각
해요. 그런 뜻에서 조선학교만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재일외국인 아이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교육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고 싶어요. 
  지금은 다음 영화의 주제를 모색하고 있는 단계인데 재일외국인 
차별 문제를 생각하고 있어요. 재일외국인 문제라는 것은 스케일이 
너무 커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점차 마음을 굳혀가고 있는 상황이에요. 
  옛날엔 재일한인들에 대한 극단적인 차별제도가 만들어졌는데, 
1980년, 90년대 이후 다른 외국인들이 일본으로 들어오면서 이전
에 재일한인을 차별하기 위해 만든 제도가 그대로 적용되어버렸어
요. 그래서 아주 비참한 피차별 상황에 놓여있어요. 그러니까 다음 
작품에서는 재일한인 차별의 연장선에 재일외국인 차별 문제가 있
으니 일본의 차별정책을 전반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작
품을 만들 수 있으면 해요.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그래서 점차 취재를 해가고 있는데 결코 쉽진 않네요. 어제도 
제12장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향후의 활동   
179
한군데 다녀왔는데, 난민을 지원하고 있는 단체예요. 이야기를 들
으면서 꼭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어요. 그런데 이 
주제의 어려움은 실제로 기능실습생이나 난민, 그리고 불법체류자 
같은 피해를 받고 있는 당사자들을 직접 취재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점이죠. 얼굴을 찍는 게... 잘못하면 영화에 얼굴이 나옴으로써 강제
퇴거가 될 위험성도 있어서... 그래도 너무나 심각한 문제이니까 
어떻게든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지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조선학교 관계자들에게도 자주 이야기하는데 조선
학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외국인학교의 권리를 지키는 
운동도 조선학교가 이끌어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면 
다른 외국인도 우리 학교를 지키는 운동에 참여해 주겠지요. 교육 
문제뿐만 아니라... 그러니까 조선학교에서 자선바자회나 공개수업
을 할 때 일본인은 자주 찾아오지만 외국인, 특히 외국인학교 관계
자가 와서 조선학교 차별을 그만두라고 목소리를 내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 여론을 만들어가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요. 
  한편으로 재일외국인들은 인구도 적고 힘이 너무 약해요. 일본 
국내에 큰 조직을 가지고 있는 외국인은 재일한인이나 중국인 정도
지요. 다른 외국인들 중에는 그만큼 견고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데가 없어요. 그러니까 소수민족이 일본 정부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그럴 때 재일한인이 선배로서 손길을 
내밀고 공동투쟁을 해주면, 거대한 국제 여론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쉽게 할 수는 없겠지만 재일한인이 다른 외국인을 도와주
면 재일한인들도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
18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니까 앞으로는 재일한인을 비롯해서 재일외국인 전체의 권리를 지
키는 데 도움이 될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찾아보기
(ᄀ)
가족 / 4, 35
강사 / 80, 98
강영휴 / 9, 14, 60
검정교과서 / 86
결혼 / 30, 31
경험 / 8, 11, 24, 46, 64, 73, 
85, 114, 133
고교무상화 / 144, 148, 151
고등학교 / 9, 11
고려사람 / 109, 114, 115, 136, 
137
고베 / 117
고수미 / 122
공연 / 40, 44, 48, 53
광명이여! 소생하라 / 52, 53
광주민주화운동 / 50, 54
광주사건 / 50, 55
교과서 / 8, 43, 86
교육 문제 / 176
구소련 / 109, 115
국가기록원 / 139, 140
국사편찬위원회 / 138
국어습득 70일간 운동 / 16
국제주의 / 11
국제학교 / 87, 91, 96
권리 / 68, 92, 147, 176, 180
극단민예 / 45, 49
글쓰기 수업 / 80
기록 / 114, 126, 127, 133
기억 / 122
김일성 / 18
김정원 / 56
(ᄂ)
난민 / 98, 179
남북 공동응원단 / 61
남북 통일 / 62
내 넋을 불빛에 비치여 / 54, 56
노점상 / 133
(ᄃ)
다큐 / 137, 139
다큐 인사이트 / 173
다큐멘터리 / 166, 178
다큐멘터리 영화 / 151, 166
대학교 / 80
대학교입학시험검정 / 34
도쿄다큐멘터리영화제 / 164
동포 / 40, 43, 65
디아스포라영화제 / 170
딸 / 33
(ᄅ)
라이프 영상 워크 / 135
러시아 / 113, 115
182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로스앤젤레스 / 105, 129, 171
로스앤젤레스 폭동 / 106, 142
(ᄆ)
마이너리티 / 85, 137
문예동 / 28, 40, 49, 59, 69
문학 / 40
문화 생활 / 40
문화 활동 / 155
문화영화 / 166
문화활동 / 98
미국 / 105, 142, 171
미래 / 73, 74, 75
민단 / 8
민족교육 / 85, 87, 92, 117, 
144, 176, 178
민족교육권 / 176
민족운동 / 144, 171
민족차별 / 116
민주주의 / 83
민주화 / 36, 46, 55
(ᄇ)
박수현 / 153
뱃길 / 42, 43
베트남 / 98, 128
부락해방문학상 / 114
부산평화영화제 / 170, 172
북한 / 18, 41, 42, 58, 59, 
145, 149
북한 방문 / 58, 60
북한 배싱 / 44
불법체류자 / 179
비디오 / 128, 129
(ᄉ)
사회 문제 / 131
상봉 / 68, 69, 71
상영 / 162, 168
상영회 / 171, 172
서승·서준식 / 45
스모키 마운틴 / 131
시나리오 / 21, 22, 26, 41, 155
시나리오 학교 / 22, 23, 24, 27
시민운동 / 42, 44
(ᄋ)
아내 / 30, 31, 36
아들 / 33, 34
아버지 / 4, 6
아시안 아이즈 / 75
아이들의 학교 / 139, 153, 155, 
168
어머니 / 4
연극 / 45, 48, 55, 155
연변 / 102
영상 / 136
영상기록 / 159
영화 / 19, 25, 41, 82, 83, 
150, 158, 162, 178
영화감독 / 21
오구라 에이지 / 122
찾아보기   
183
오사카 / 30, 68, 117, 130, 134
외국인학교 / 85, 87, 89, 95
요네쿠라 마사카네 / 49, 50
유학동 / 44
육체노동 / 21, 23
이실근 / 65
이쿠노 / 6, 32
인권 / 83
인권협회 / 169
일고생 / 16, 17
일본영화부흥상 / 167
일본학교 / 5, 31, 82
일조교 / 34, 86, 87
(ᄌ)
자녀교육 / 31, 176
자주상영 / 164
재외한인 / 114
재일 1세의 기억 / 122, 126
재일 2세의 기억 / 126, 127
재일외국인 / 94, 98, 100, 178, 
179
재일외국인 문제 / 178
재일외국인 차별 / 178
재일한인 / 4, 102, 117, 123, 
179
재일한인 차별 / 114, 146
재판 투쟁 / 146
저널리스트 / 35, 71, 153
전환 / 10
전환기 / 68, 142
정동주 / 111
정보 잡지 / 69, 74
정치경제학부 / 16
제사 / 7
조국 / 59
조국 통일 / 61
조선 / 8
조선대학교 / 14, 16, 26, 27, 
40, 54, 82
조선어 / 16, 30, 81
조선인 / 4, 7, 9, 14, 16, 21
조선인 차별 / 7, 15, 94
조선족 / 102
조선학교 / 7, 31, 32, 33, 86, 
89, 91, 96, 139, 144, 
148, 164, 176, 177
조선학교 차별 / 156
조성금 / 92
조청 / 51, 52, 73
중국 / 102, 132
(ᄎ)
차별 / 85, 88, 94, 144, 176
청년 / 52, 62
청년학교 / 15
체험 / 138
총련 / 6, 15, 40, 44, 65, 69, 
134, 149
취재 / 95, 102, 109, 123, 176, 
178
츠루하시 / 6
184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침묵 / 44, 46, 47
(ᄏ)
코로나 / 171
코리아타운 / 105, 107, 129
콤플렉스 / 5, 8
키네마 준보 / 166
(ᄐ)
타향살이 / 96
통명 / 7
통일기 / 64
(ᄑ)
팬 퍼블리시티 / 74
평생교육 / 81
평화 / 83
피폭자 / 64, 65
(ᄒ)
하코가키 / 23
한국 국적 / 35
한국어 / 80
한국에서의 통신 / 49
한국학교 / 86
한신교육투쟁 / 117, 158
한일조약 / 10, 35
한흑 갈등 / 107
할아버지 / 4
해외일본인학교 / 93
해임 / 70
홍여표 / 126
활동 / 176
활동가 / 16, 20
효고수상 / 95
효고현 외국인학교협의회 / 89, 91
흑인 / 107, 108
흑인 문제 / 84, 85, 142
Incorporating Ethnicity into Cultural Activities. The Life History of Ko 
Chan Yu, Second Generation Korean Residents in Japan.
by Hiroko ITO, Yumiko YAMATO
Copyright ⓒ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Published by BookandWorld. Daegu, Korea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30
문화활동에 민족을 담다 -재일한인 2세 고찬유의 구술생애사-
2021년 6월 20일 초판 발행
지은이 이토히로코 야마토유미코 
펴낸이 김영모
펴낸곳 도서출판 책과 세계   등록 | 2007년 2월 2일, 제2010-000004호
주소 | 41565 대구광역시 북구 경대로 95(복현동)
전화 | 053-953-2417   전자우편 | bookandworld@naver.com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인문사회연구소 
 
ISBN 978-89-91341-10-2  94330   ₩12,000
ISBN 978-89-94255-28-6  94330(세트)
*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책과 
세계 양측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 이 저서는 2019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9S1A5C2A0208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