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박경용·박신규·이채문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인문사회연구소
도서출판 책과세계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29
- i -
서 문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로 정부 차원에서 노동인력을 송출한 사례
가 파독광부와 간호사이다. 따라서 파독인력의 주체인 광부와 간호
사는 한국의 해외인력진출사와 이민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며 
당시 외화획득을 통해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국가의 
의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와 같이 해외인력진출사와 이민사에서 한 축을 구성하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는 한인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보면 기존 구소련권
의 고려인과 중국의 조선족, 하와이와 멕시코의 한인 노동자의 이주 
역사와는 차이를 보이며, 일제강점기의 재일한인과 한국 전쟁 이후 
미주대륙으로 이주한 한인들과도 성격을 달리한다. 
이들은 1962년 한국정부가 해외이주법을 수립하고 국가 차원에
서 인력을 송출한 것으로 남미지역의 농업이민 추진과 같은 맥락에
서 진행되었다. 또한 파독광부와 간호사의 계약노동, 그리고 이로 
인한 외화송금은 1960년대 한국 근대화를 위한 경제개발에 마중물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와 함께 이들은 당시 가난한 
한국의 상황에서 해외로 이주하여 노동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
서 특별한 조국애와 민족정신을 가진 인물들로도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파독광부와 간호사의 이주 및 인생 여정에 대한 고찰은 
1960년과 70년대의 국제정세, 한국과 독일의 정치·경제적인 이해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개인적 삶의 추구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따라서 본 서에서는 대구·경북지역에 거주하면서 독일에 광부와 
- ii -
간호사로 파견되었던 5인의 생애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특히 지역
에 거주하면서 광부와 간호사로 지원하게 된 동기, 그리고 이주 
경험이 이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동안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에서는 2011년부터 SSK 다
문화와 디아스포라 연구단의 사업으로 일본과 중국, 중앙아시아 
및 러시아 등에 거주하는 재외한인들의 삶을 기록하여 왔고 연구의 
성과물은 『재외한인 구술사 총서』로 출간하였다. 이번 총서는 경북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이 2019년 인문사회연구소 지원사업에 선
정되면서 기존 『재외한인 구술사 총서』 작업을 지속해서 수행하기 
위하여 기획된 두 번째 총서이다.
본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총서는 대구
와 경북 지역 출신으로 독일 광부와 간호사의 경험을 가진 분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1964년부터 1974년까지 독일로 파견된 
5인의 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삶의 기록이고 3년 단기계약노동자로 
독일 사회를 경험한 이들의 삶과 여정을 정리한 것이다. 
본서는 크게 5장으로 나눠진다. 제1장에서는 일본 강점기 시절 
부모님의 만주개척단 경험으로 초기 이주 경험이 있으며 이후 성장
기를 대구에서 보내다 여고 서무과 재직 중 파독 광부 모집을 보고 
지원한 조충래 씨의 삶이 소개된다. 제2장에서는 메디컬센터(현 국
립의료원)에서 수간호사로 재직하다 1966년 1월에 독일 간호사로 
파독한 정동옥 씨의 사례이다. 정동옥씨는 현재 대구·경북 파독광
부·간호사·간호조무사 협회의 회장 역할을 맡아서 모임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대학교 2학년 시절 학교를 그만두고 
미래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 속에서 광부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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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섭 씨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버하우젠 스타그리드 광산에
서 근무하였고 성실 근무자로 계약 기간을 연장하여 만 4년을 체류
하다 귀국한 사례이기도 하다. 제4장에서는 구미 출신으로 결혼하
여 경향신문 지사 일을 하다 집안의 경제적 안정을 위해 파독에 
지원한 김태익 씨의 사례이다. 굴진, 채탄 등의 일을 한 다른 사례들
과 달리 운반 일을 담당한 것이 특징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해외광
부 경험은 국가관에도 영향을 끼쳐 귀국 후 지역의 봉사생활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제5장에서는 자영업 등 일을 하다가 광부모
집에 응시한 김홍규 씨의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특히 김홍규씨의 
사례에서는 광부모집 및 채용절차, 사전교육 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
히 기술되고 있다. 이와 같이 1960~70년 중반까지 진행된 독일로
의 해외인력 파견특징을 대구, 경북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광부와 
간호사들의 구술생애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동안 파독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기록과 논문 등은 산발적으로 
연구되었지만 지역의 공간에 거주하는 파독광부와 간호사의 삶과 
여정에 대한 기록은 미비하였기에 이 총서를 통해 이들의 역사와 
기억을 전달할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 속에서 한국 근대화의 주춧돌 역할을 한 것이라고 평가받는 
파독광부와 간호사에 대한 지원과 예우가 한국 정부에서 2014년에 
본격적 대두되었고 결국 2020년 5월에 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
사에 대한 지원 및 기념사업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어 제정되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기록과 자료를 구축한 본 총서는 한인디아스포
라에 있어서 소홀이 다루어 온 해외인력 송출 관련 이주사의 토대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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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인문사회연구소 지원사업은 이
와 같이 재외한인의 구술사 단행본 출간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
여 한인디아스포라 관련 DB를 구축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따라서 
향후 본 연구원의 재외한인의 구술사 집필 노력에 대한 독자 여러분
의 많은 관심을 기대하는 바이다. 
2021년 3월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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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제1장 조충래 ··············································································1
▮ 어린 시절 만주개척단 경험과 귀환·····················································2
▮ 고입 검정고시 합격과 여고 서무과 근무·············································4
▮ 파독광부 권유와 갈등········································································8
▮ 파독광부 시험 절차와 독일 입국······················································10
▮ 독일 광부 생활과 작업 과정····························································15
▮ 박정희 대통령 독일방문과 송금 관리 ··············································24
▮ 귀국과 계명대 직원으로 정년퇴직·····················································28
▮ 파독광부회 모임 결성과 현재 삶의 의미 ··········································33
제2장 정동옥··············································································45
▮ 기독교와 의료계 집안에서 출생························································46
▮ 간호전문학교·수간호사 생활, 파독간호사 지원 ·································52
▮ 독일입국과 파독간호사로 임무 수행··················································56
▮ 귀국 후 홀트양자회·제일모직 의무실 근무 ·······································67
▮ 전업주부와 학부모 활동 참가···························································69
▮ 다양한 사회활동으로 풍족한 노년 생활 영위·····································72
▮ 대구·경북지역 파독모임 회장으로 모임 운영······································75
제3장 문종섭··············································································85
▮ 의성 출신, 대학 중퇴 후 광부지원 ··················································86
▮ 파독광부 사전 교육 참가 ·······························································87
▮ 독일입국과 오버하우젠에서 파독광부 생활 ·······································90
▮ 독일 일상생활과 미래를 위한 예금적립·············································98
▮ 귀국 및 파독광부 모임 참가와 자긍심············································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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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김태익············································································113
▮ 구미 인동과 부산에서 보낸 성장기·················································114
▮ 독일 광부지원과 합격 ··································································116
▮ 뒤스부르크 광산 배치와 탄광 생활·················································118
▮ 독일에서의 일상생활과 송금···························································127
▮ 귀국 후 파독생활 경험으로 지역 봉사생활 참여·······························135
▮ 노년기의 대구지역 파독모임 참가 ·················································138
제5장 김홍규············································································145
▮ 일본 출생, 예천에서 성장······························································146
▮ 파독광부 지원··············································································147
▮ 독일입국 및 광부생활····································································152
▮ 독일의 일상생활과 송금·································································163
▮ 귀국과 파독광부 모임 참가····························································169
부록 : 파독광부 관련 논문······················································175
찾아보기···················································································245
제1장 조충래 
어린 시절 만주개척단 경험과 귀환
고입 검정고시 합격과 여고 서무과 근무
파독광부 권유와 갈등
파독광부 시험 절차와 독일 입국
독일 광부 생활과 작업과정
박정희 대통령 독일방문과 송금관리
귀국과 계명대 직원으로 정년퇴직
파독광부회 모임 결성과 현재 삶의 의미 
파독광부 감사서한 전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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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 어린 시절 만주개척단 경험과 귀환
1937년 4월 2일생입니다. 지금 만으로 치면 80입니다. 저는 2차 
대전 이전에 아버지 따라서 만주 가서 살다 왔어요. 만주에 아버지 
따라서 살면서 농사짓고 이래 살다가, 그때는 뭐 들어갈 때 한 네 
살밖에 안 됐으니까요. 그래서 이제 해방되던 해 9살에 나왔으니까. 
일학년, 일본 1학년 입학해서 그해 해방됐으니까 거기에서 아버지
는 농사지었죠. 우리 식구는 우리 4형제하고, 누님 한 분은 여기 
있을 때 결혼해 가서 들어가셨고, 또 누님 한 분은 거기서 결혼했고. 
결혼해 가서 살다가 한국에 왔지요. 와서 캐나다 갔는데, 캐나다 
가셔서 지금은 작고하셨어요.
아버지는 그러니까 거기가 그 당시 뭐 개척단이라 하더라고요. 
개척단이라 하는 것 말만 들었는데 개척단이 뭐 하는지 그것도 모르
는데 가보니까 다른 거 아니고 뭐 농사짓는 곳이라 하더라고요.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그 마을에 이래 뭐 아주 성같이 높이 쌓아서, 
때로 두껍게 이래 쌓아서 구멍을 요렇게 내가 가지고 목총을 이래 
그거 전부 다 걸어놓고, 몇 시에 농사지으러 나가면 몇 시까지는 
들어와야 하고 이런 게 되어 있었어요. 
거기에 마적단들이 많아서 밤에 어두운 데 못 다니게 하고 또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 말하자면 성같이 그래 해 놓고 살았
어요. 마을 이름도 기억 안 납니다. 1학년 입학했던 곳은 학교가,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는 학교가 있거든요.
제1장 조충래   
3
중국도 일본 사람들 통치 하에 있는 거기 이제 살았으니까요. 
일본 학교에 일학년에 들어가서 스스메, 스스메 이렇게 하면서 모모
다로상, 모모는 복숭아를 가지고 모모라 하는데요. 다로상은 장사 
뭐 이런 거예요. 그래서 그만 거는 인제 들어가서 바로 뭐 이래 
국어 같은 거 좀 외우고 하니까, 단상에 오르다가 마 이래 책 들고 
읽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도 많이 했고, 그 그렇게 해서 그해 
해방되어서 음력으로 한 11월쯤 돼서 한국에 도착했는데 추웠어요. 
여기는 감 이파리 다 떨어지고, 감만 요렇게 있고. 그때 뭐 콩을 
이렇게 해서 다 털고. 콩깍지 세우는 그걸 이래 피 놓아두고 이래 
타작하고 그런.
흑룡강성 훨씬 지나선가 하여튼 저는 그 당시 거의 2차 대전 끝날 
때쯤 9살이었는데, 4살에 선친 따라 들어가서 선친이 거기서 농사
를 5년간 짓고 해방되어서 나왔거든요. 그래 그해 제가 1학년에 
입학해서 얼마 안 있었는데 해방됐다. 그래가 거기서 한국으로 나왔
어요. 개척단에 가면 농사를 지어도 대량으로 지을 수 있고, 사는 
거는 잘 산다 이래서 결국 식구들이 떠났던 것 같아요. 윗대도 농업
인데, 윗대는 우리 할아버지 혼자만 남겨두시고 우리가 떠나갔어
요. 갔는데 내 위에 형이 둘이 있었고, 내 밑에 동생이 하나 있어서 
그게 네 사람이 다 따로 붙이고요. 또, 우리 누님 한 분은 만주 
거기 가셔서 결혼했고, 한 분은 여기 청송에서 일찍이 우리 그 이전
에 아마 결혼해 가지고 갔었고요.
6남매이고 남자 형제 중에 세 번째입니다. 생활은 그대로 괜찮죠. 
왜 그렇냐면은 농사지어서 자급자족했고 거기는 너무 추운 곳이어
서 벼농사는 안 되고 주로 밀, 보리, 감자, 옥수수 농사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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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갔다 와서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갔다 와서는 그보다 더 했으면 했
죠. 왜 그러냐면 가서 돈 벌었으면 모르겠는데 돈도 못 벌고 그냥 
거기에서 자급자족하면서 먹고 살다가 겨우 명만 이어 나온 택인데. 
그래 한국에 돌아올 때는 주로 옥수수 해서 우리 엄마가 엿으로 
고아서 고아서, 그래가 고걸 또 요렇게 만들어가 가루에 묻혀서 
몇 개월 정도 먹을 수 있는 분량으로 만들었어요.
만주에서 돌아와서 청송 안덕. 마을 이름은 감은리 안덕면. 안덕
초등학교에 들어갔지요, 청송에서 이제 초등학교 다니면서 초등학
교 졸업을 했는데, 그때 다른 학생들 보다가 한 해 정도 늦게 들어갔
지 싶습니다. 그게 왜 그렇냐면, 거기서 이제 1학년 때 나와서 바로 
또 못 들어가고 그 이듬해에 1학년에 들어갔으니까. 다른 학생들보
다는 아마 한 살에서 두 살 정도 안 많았겠나 싶습니다. 제가 54년도 
졸업했지 싶은데 54년도 졸업하고 바로 대구로 혼자 나왔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보겠다고 했는데, 고등학교밖에 졸업 못 했으니
까. 부끄럽습니다.
▮ 고입 검정고시 합격과 여고 서무과 근무
초등학교는 겨우 졸업을 했는데 졸업한 뒤에는 저가 이제 딴 데 
갈 데도 없고 해가,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시장에 갔다가 팔아서 
그 다음에는 보리쌀 한 되씩 사서 가져와서 먹고 했어요. 제가 교회
에 봉사를 많이 했어요. 그 당시 이북에서 내려오셨던 목사님 이름
도 아직 안 잊어버렸는데, 서OO 목사님이라고 그분이 그 당시만 
제1장 조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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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아마 고등학교 정도는 졸업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중등구락부
라는 부를 교회에다가 만들고 자기 설교 안 하는 요일은 또 그 마을
에 우물을 하나 파게 되는데 그다음에 인제 거기서 생활을 이래 
주로 먹고 자고는 안 했지마는 거기에서 미리 중학교 과정을 우리가 
많이 배웠어요. 
부모는 종교를 안 가지고 있고 저 혼자만 청년 시절 때부터 가졌
는데, 우리 아버지가 모를 심으려고 다 준비해 놓으면 내가 집에 
있으면 저 못줄이라도 잡아줘야 할 건데 그러지 못했ᅌᅥ요. 
일할 때 피해 가는 건 아니지마는 교회에서 그때는 부흥회라 안 
하고 사경회라 했는데, 사경회 어느 교회에서 일주일간 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멀었어요. 거리도 한 70, 80리 되는데 그거 가서 일주일 
있다가 오는 거예요. 오면 아버지 있는데 싸리 회초리 가지고 매도 
많이 맞았어요. 이놈의 자식, 집에 있었으면 못줄이라도 잡아줘야 
할 거 아니냐, 모심는 줄도 알면서 그래갔나 이래가 많이 혼났어요.
우리 형은 그때만 해도 이제 사범학교 졸업해서 교사로 나갔어요. 
나가서 우리 형이 교사를 안 한다고 상부에 상신을 해서 올렸고 
그게 안 됐어요. 이래서 다시 선생을 하게 됐는데, 자기 가 선생을 
하면서 영장이 나오니까 안 갈 수도 없고 이래서 결국은 늦게 갔어
요. 영감이 다 되어서 군에 갔더니 거기 있는 일행들이 “너 고문관이
다, 고문관, 너 저쪽 가 있어라.” 그랬다고 해요. 이래 영감 따로 
두지도 않고 겨우 마치고 나오긴 나왔는데,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안 되겠고 나도 공부를 좀 하고 싶은데 방법
이 없나 이래 가 부모 몰래 가만히 대구 나왔어요. 
대구 나와서 여기 역 앞에서 만경관을 끼고 그 부근에서 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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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살 안쪽이니까 그때는 거리 멀어도 먼 거 생각 안 하고 이 담배통을 
옆에 끼고 담배와 이거 일본 은단인데 그거하고, 미국 담밴데 그거
하고 이렇게 옆에 끼고 막 뛰어다니면서 그거 팔러 다니는 거예요. 
어디로 가서 파는가 하면 다방에 가 파는 겁니다. 주로 다방에 뛰어
들어갔다가 나와서 또 저쪽 다방 가고 그랬어요. 그렇게 벌어서 
그 당시만 해도 이게 공납금이라고 안 하고 월사금이라 했는데, 
월로 내는 것이다 보니까 월사금을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제가 안 
가져가면 돌아가라 그랬어요. 당시 선생은 그거 받아야 적어도 먹고 
사는데. 그래서 중학교 못 들어가서 검정고시 시험 쳐서 합격 안 
했습니까. 이 봐라. 이거예요.
월사금은 이제 고등학교 들어가 내가 벌어서요. 그때만 해도 머리 
다 컸어요. 왜 그러냐면은 고등학교 입학해서 1학년 지나고 내 영장
이 나왔더라고요. 62년도에 고등학교 졸업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
까. 내가 지금 83살인데. 몇 살에 졸업했는지 계산해 보세요. 스물
다섯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지요.
제가 검정고시 공부를 해서 합격을 딱 했는데, 이게 도에서 쳤거
든요. 근데 검정고시 공부한 사람은 다 여기 와서 쳤던 것이지요. 
이틀간 쳤는데, 이거는 지금 고등고시 합격하는 것보다 더 어려웠어
요. 내가 이거 참 자랑삼아서 내놓지마는, 이때 이걸 합격하면은 
대구에서는 그때가 어디가 젤 좋았냐 하면 사대부고, 그 다음 두 
번째로 좋은 데는 경북고등학교였어요. 경고나 사대부고를 가라 
하는데 돈이 어딨습니까. 부모가 좀 대줬으면 이거 가서 벌~써 저는 
옛날에 성공했어요. 우리나라 유명한 학자가 됐든지. 뭐 됐어요. 
거짓말 아닙니다. 저 동서도 이OO 씨라고 지금 작고했습니다마는, 
제1장 조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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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도 육사의 장조카인데 내 바로 위에 손위에 동서거든요. 나하고 
동서지간이에요. 그 사람 부산대학교 계시다가 정년퇴직했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신명여고 서무과에서 일했는데 많이는 
못 있었어요. 거기는 어떻게 갈 수 있었냐하면은 고등학교 다닐 
때 거기서 공납금 받아주고 급사를 했기 때문에 거기 교장 같은 
사람들이 나를 잘 봤어요. ‘조군, 군에 갔다 오면 우리 학교 와서 
서무과에서 일해라’ 그래가 뭐 거기 가서 일은 하는 듯 마는 듯 
<사진 1> 조충래 씨의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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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얼마 안 했는데, 당시 교장이 독일 가라고 했어요. 그때 당시 월급을 
4천 원을 받았는데, 4천 원 받으면 어떻게 되냐 하면은 지금 국가공
무원 9급 받는 월급하고 똑같아요. 그래 받으면은 쌀 한 가마니 
사고 식구들 주고 집에 용돈 정도 쓰고 이 정도 할 금액이 됐어요. 
이렇게 월급을 4천 원 받았는데, 그 당시에 김태묵 교장께서 여기 
사람도 아니고 서울 사람인데 저보고 독일을 생각 있으면은 갔다 
오면 안 좋겠나 하셨어요. 뭐 여기 있어 봐야 잘하면 서무과장인데, 
서무과장까지 해도 별 뭐 저게 도움이 안 되고 이럴 것이니 독일은 
한 번 지금 갔다 오면, 3년만 거기서 계약대로 있게 되면은 우리나
라에서 여학교에서 30년 근무한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다고 했
어요.
▮ 파독광부 권유와 갈등
결혼은 스물다섯 살에 했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에 했나 잘 
모르겠습니다. 스물다섯에 확실하게 날짜를 동짓달 초, 동짓달 열
엿새인가 그 정도로, 그때는 사진 한 장 없었어요. 내 아내는 자기 
큰 언니가 우리한테 시집와가 있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 
일족인데, 그러니까 우리 여기 처형 남편 되는 사람이 저희한테 
할아버지뻘인 셈이지요. 우리 살던 곳에서 고개를 넘으면은 초등학
교가 있는데 왔다 갔다 하니까 우리 처형 되는 분이 저를 봐 둔 
것이지요. 그래서 나중에 이제 제가 장성해서는 자기 뭐, 나도 여동
생 하나 있다. 이렇게 우리 큰형님하고 이야기 주고받고 이렇게 
제1장 조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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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소개해서 결혼하게 되었어요. 
그래 독일 가는 것을 이야기 들었을 때 이미 결혼하고 아이도 
둘이 있어서 가라, 가지 마라 할 그런 생각도 안 들었는데 당시, 
너무 살기가 어려우니까 거기 갔다 오면은 그래도 한국에 있는 것보
다는 안 낫겠나 하고 권유를 받았죠. 그래도 갈 때 조금 갈등은 
있었어요. 왜냐면은, 내가 급사로 있던 학교에 간신히 들어갔는데, 
독일 가는 것도 시험 쳐서 안 되면은 어떻게 하느냐 이런 갈등도 
좀 생기더라고요. 갈 때 영어하고 사회, 일반 상식하고 광산에 대한 
상식 등 몇 가지 정도 시험을 쳤어요. 그때 영어가 좀 어렵더라고요. 
영어 뭐 그때 많이 못 했을 때니까. 그래 해서 대학 졸업한 사람도 
많이 떨어졌는데 저는 또 어떻게 붙었어요. 대구 협성상고에서 시험
을 쳐서 그렇게 갔었어요.
당시 저에게 권유한 교장 선생님, 그 사람은 계산을 정확하게 
하드만요. 거기에 대우가 우리나라하고 다르니까 여기보다 훨씬 
좋을 거다 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뭐 갔더니 첫 달 월급이 6만 
원 받았으니까요. 제가 정확하게 4천 원에 대한 열다섯 배를 받았
습니다. 근데 그때 아들은 둘이나 놓고, 그러니까 이제 세 식구를 
여기 처가에다가 맡겨두고 저는 떠났던 것이지요. 그때 맏이가 5
살, 뭐 한 3살에서 4살 터울이었는가 정확하게 잘 모르겠습니다마
는, 5살 미만이었지 싶네요. 맏이는 지금 초등학교 교편을 잡고 
있는데, 올해에 쉰다섯입니다. 만 쉰다섯이요. 장천초등학교에 현
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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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 파독광부 시험 절차와 독일 입국
광부 시험은 여기 대구 협성상고에서 쳤는데 사회, 일반 상식하고 
영어, 그다음에 광산 상식 등 4가지인가를 아마 쳤던 거로 그래 
알고 있는데, 그때는 대학을 졸업했던 사람들이 주로 많이 떨어졌으
니까요.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이 머리를 싸매고 지원을 했느냐
면은요. 자기네들 생각으론, 이제 해외 지금 말하자면 나가는 거를 
시험 보는데 자꾸 떨어지고 이러니까 파독 광부로 해서 가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유학 가는 길이 그만큼 어려웠으니까요. 그래서 계명대학교 졸업
했고 저보다 1년 늦게 독일 저 있는 곳으로 온 분인 김정환 씨가 
여기 주소록에 나와 있는데, 이분은 여기에서 공대를 나왔어요. 그
리고 도시공학 연구해서 평교수가 됐어요. 이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잘해서 부총장까지 올라갔다가 정년퇴직해서 나갔어요. 나갔는데 
나보고 형님이라 이렇게 부르고 나는 아우같이 생각하고 이래 지내
다가 자기는 독일에서 간호사하고 결혼했는데, 간호사가 자기 공부
할 때 내조를 잘하고 이래서 자기는 거기에서 3년을 마치고 공부를 
했대요.
광부 시험 경쟁률은 저는 뭐 확실하게는 몰랐어요. 몇 대 얼마였
는데 됐다는 것에 대해 잘 몰랐죠. 합격 소식 듣고는 저 나름대로는 
좋았습니다. 가기 전에 준비한 것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제2외국
어를 뭐 했노 하면, 독일어를 했기 때문에…. 독일어는 저 나름대로 
제1장 조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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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한다고 해도 여기서 했던 독일어 하고 독일 가서 하는 독일어는 
다르니까요. 그거는 한 마디도 안 통해요. 우리가 뭐 독일어 한다고 
하면은 그 사람들 멍하니 서서 있어요. 왜 서 있냐면은 너희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이렇게 해 버리니까 우리가 
독일어를 더 못하죠.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배워온 거는 독일어 
뭐 악센트가 센데, 자기들은 부드럽게 이래저래 돌아가니까요. 
그러니 벌써 이 발음 자체가 틀리기 때문에 저 사람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거를 이해를 못 하더라고요. 그래가 이제 한 2년 
지나 3년쯤 접어드니까, 조금 이제 통하고 내 나름대로 혼자서도 
알아듣고 여행도 할 수 있고, 길 모르면 물을 수도 있고 내가 지금 
현재 여기 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느냐고 이런 거 묻고 그랬죠. 
교육은 조금 많이 받은 편이에요. 당시에 외국어 공부는 이렇게 
했죠. 서울 강북구 수유동 거기 공무원 연수원에 가서 우리가 한 
한 달 정도인가 그렇게 하고, 그다음에 또 태백광산에 들어가 가지
고 가서 또 연수를 좀 많이 받았어요. 그래 출발했는데 광산에서는 
탄 직접 캐는 거, 막장까지 들어가서 그 사람들 캐는 거 견학하고 
그런 거 주로 했었지요. 문경광산에도 가고…. 이게 예를 들어서 
경도가 몇 도인데 60도 경도에서, 고도에서 이래 탄을 캐는데 이걸 
탄을 운반하는 데는 뭐 어떻게 한다 뭐 이런 거요. 한 일주일 정도 
견학을 하고 했으니까요. 주로 무엇을 견학하냐면, 막장까지 들어
가 가지고 거기에 필요한 자료 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이래 보니까 
소나무를 이렇게 커다란 걸 몸하고 같이 묶어서 기어들어 가더라고
요. 그런 것 보고, 우리나라는 탄이 분탄이기 때문에 이렇게 털어먹
잖아요. 산이 이렇게 있으면 거기 가서 이렇게 뭐 찌르면 쭈륵 쭈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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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떨어져가지고 타 먹고 이래 하지마는, 독일 같은 사회는 가면 두 
층으로 위에 한 층이 요렇게 있고 밑에 한층 있는데요. 중간에 층이 
요정도 되면, 그거를 호벨이라는 기계가 왔다 갔다 하면서 깎아 
먹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는 이제 필요한 재료가 들어가고, 저 밑으로는 완성한 
물건이 또 저쪽으로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고무밴드가 아주 넓은 
게 있는데, 그것을 실어서 밖으로 나가면 저 밖에 한 200m, 300m, 
500m 밖에는 탄을 실을 수 있는 차가 딱 대놨다고요. 그거 한 대 
차면 밀어내고, 또 한 대 차면 밀어내고. 밀어내는 거는 기계가 밀어
내는데 그거 다 중간마다 붙어서 사람이 작업하거든요. 돌 이런 
게 막 실려 나오면 돌 그거 또 미루고 그래 합니다.
사실 당시 광부는 광부의 광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갔다고 봐야 
안 되겠습니까. 처음에 갈 때 우리가 제일 1차로 갔으니까요. 저도 
학교에 있다 간 사람이니 고사리 같은 손을 갖는 거 아닙니까. 거의 
다 대학교 졸업한 사람들이 갔을걸요. 왜 그렇냐면, 그때 외국에 
못 나갔잖습니까. 공부 암만 잘해도 외국에 못 나갔거든요. 그래 
광부로 가서 출세한 친구들이 많아요. 
저는 64년도에 11월 23일, 1차 3진으로 갔습니다. 2진하고는 
한 달 차이로요. 그러니까 말로만 3진이지, 한 달 간격을 두고 이래 
갔다는 거지요. 그래 3진. 1차 3진 갔겠나 이래 생각되는데, 그래 
가니까 요즘은 전부 다 인천서 뜨는데, 그때는 김포에서였어요. 갈 
때는 아마 루프트한자를 탔지 싶은데 올 때는 에어프랑스를 타고 
그래 갔어요. 독일을 그 뒤셀도르프 거기서 내려가자고 숙소까지 
가는 거리가 차로 약 한 시간 몇 분 정도 이래 걸렸다고 봐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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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갈 때는 일본을 거쳐서, 알래스카를 경유해서. 그때 당시만 해도 
이 비행기에서 급유를 자꾸 받았어요. 요즘 같으면 뭐 바로 거기까
지도 가고 이렇게 하는데, 그 당시만 해도 스튜디어가 거기 가서는 
또 그 사람들 다 내리고 새로 타고, 알래스카 가서는 또 더 내리고 
또 거기서 다시 타고 급유 다시 받고 또 비행기 점검하고 그랬죠. 
이래 인제 떠나고 이렇게 하데요. 알래스카에서는 독일 그 뒤셀도르
프 공항에 바로 내렸어요.
<사진 2> 함보른 광산 기숙사 앞 
(류혁인 동아일보 기자와 본인(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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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도 12월에 돌아왔는데, 온 날짜는 정확하게 모르고 갈 때는 
루프트한자 타고 갔는데 올 때는 에어프랑스 타고 왔어요. 갈 때는 
또 에피소드가 하나 있어요. 얘기하면은 한국 사람 쭈그리고 앉아서 
똥을 눴잖아요? 변을 봤는데, 거기 이래 가니 이상하게 둥그러니 
뭐 이렇게 있고 위에 올라가 가지고 변을 보고 이렇게 그 무거운 
몸을 그 위에 올라가 삐걱삐걱 그러면 뚜껑을 다 깨 놔 버리고, 
또 화장실에 수건하고 갖다 걸어놔 놓으니 금방 걸어놨는데 한 개 
더 없어져 버리고 이래서 비행기 안에 심부름하는 아들, 스튜어드 
그 사람들이 이상하다, 화장실에 가니 변기를 다 깨 놓았는데 보니 
발자국도 있고 이런데 그거 왜 올라갔는지 모르겠다고, 왜 올라갔는
지 모르겠대요. 그거 올라가야 똥이 나오는데 어떡하겠습니까. 그
래가 거 올라가 똥 누고 그랬죠. 또 수건은 말이죠. 원래 뭐 이렇게 
가지는 걸 좋아하는 한국 사람인지 몰라도 그걸 다 훔쳐서 자기 
사물에다 다 갖다 넣어놓고 그랬어요.
캐나다 가서, 알래스카, 참 알래스카가 가지고. 이게 이제 기름을 
주유해가, 일본에서 한 번 주유하고 알래스카 가서 한 번 주유하고 
그다음에 뒤셀도르프 공항에 내렸는데, 알래스카 가서 돈을 교환하
는데 1 대 1로 막 바꾸는 거예요. 내가 옆에서 이래 보니 그거 내가 
영어만 할 줄 알만 “이거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고 가지만은 
그렇게 못했어요. 그때 마침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한 은OO
라고 있었는데, 그분이 이제 중간에 비집고 들어가 이거 이래 바꿔주
면 안 됩니다. 몇 대 얼마로 이래 바꾸면 됩니다. 그래가 그때 그 
사람들이 안 그렇냐고 그랬어요. 이미 바꿔준 거는 회수하지도 못했
고요. 23일 날 저녁때쯤 돼가…. 시간은 거 확실하게 정확하게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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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기억은 잘 기억은 못 하겠습니다마는. 그 이틀 지나 가니까. 7시 
몇 분이던가, 그 정도 됐지 싶어요. 그렇게 독일에 도착했습니다. 
▮ 독일 광부 생활과 작업 과정
뒤셀도르프에 도착해서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숙소는 루르 지방
에 있었는데, 거기에 함보른 광산이라고 있어요. 함부르크가 아니
고요. 독일에 함부르크라고 하는 곳은 또 따로 있고요. 항구도신데 
여기에는 함보른 탄광이라고 있는데 거기로 갔어요. 거기로 가가 
거기 이제 가면은 숙소가 있는데, 숙소 한 방에 두 사람 내지는 
네 사람도 있고요. 그래 올 때까지 그 숙소에서 3년 동안 지내다가 
그래 왔어요. 숙소 건물은 아파트하고 비슷해요. 우리는 그때 2층인
가 그렇게 있었지 싶은데, 3층도 있고 이래 올라가면서 그래 몇 
층까지 있고 방에는 우리 네 사람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들끼리 이래 뭉쳐가 
살았고, 또 일본, 터키, 이태리, 스페인도 있었고 각 나라 사람들이 
다 있었는데, 끼리끼리 저거는 저거대로 요래 뭉쳐 살고 하니까 
그 사람들하고 접촉할 필요성도 없고, 또 사귈 그런 입장도 못되고 
그랬죠. 뭐. 너나 할 것 없이 그냥 막노동하러 왔는데 너한테 뭐 
배울 게 있겠냐? 그런 정도. 뭐 지금 외국 사람들 동산병원 짓는 
데 와서 일하는 사람들이랑 같다고 보면 되죠. 그래서 독일 사람들
하고 같이는 없었죠. 그러니까 숙소에서 생활했기 땜에요. 
한 1년은 가정집에 나가서 생활했는데 거기도 한 번 우리 나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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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있어 봤습니다마는 그 사람들 없이 우리 한국 사람들끼리 한 방에 
네 사람 아니면 세 사람, 또 적게는 두 사람도 있고 그래 생활했기 
때문에 불편한 점은 없었습니다. 
지금 저 여기에 모량에서 간 사람인데, 모량은 경주 못 가서 모량
인데 거기 있는 사람도 갔습니다. 장OO. 살아있는데, 매우 어렵습
니다. 많이 어려워서 지하철 거기 가서 일한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분은 전라도 분이고 같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죽었어요. 자기가 부주의로 말 같은 거 잘 안 통하고 기계 같은 
거 잘못 만지고 이래하면 그런 위험성이 오거든요. 여기 백서에 
보면 76명이 죽었는데 저는 뭐 갔다 와도 모르잖아요. 한 사람도 
죽은 줄을 몰랐습니다. 이 백서 보고 알았는데 또 그중 한 사람은 
최OO 그분이 이제 교회 장론데, 그분은 지금 한국에 왔다가 미국 
가서 있어요.
제가 이게 처음에 다 뭐 하면 직업병이 걸려서 관절 이게 전부 
다 꼬부라져서 펴지를 못하잖아요. 왜 그런가 하면 쇳덩어리를 이래 
만져가, 이래 당기고 이래가 그랬어요. 그거 하나에 25킬로 나가는
데 그거를 40개를 만지고 나오거든요. 40개. 4개도 힘든데 40개를 
그걸 갖다가 천장에다 무너지지 말라고 붙이고 나오거든요. 그러면 
아무리 강한 사람도 엉엉 울고 나온다고요. 그래 하고 그 장화 신었
던 그걸 갖다가 땀이 흘러 내려와서 한 열 번도 더 물을 붓는 거예
요. 거기에도 계절 변화 있습니다. 근데 춘하추동 있어도, 겨울은 
뭐 우리 있는 동안에는 눈 오고 뭐 하는 거 별로 못 봤고요. 3년 
있어도 항상 안개가 많이 끼고 또 날씨는 그렇게 안 춥고요.
먹는 거는 주로 국수예요. 한국 사람들이 주로 잘 먹는 거?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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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에 그 나라에 보면 대개 주식이 감자에요. 감자 이거 독일말로 
말하면 카토필인데, 그거를 주로 주식으로 해서 삶고 다양하게 쪄서 
또 먹고 뭐 그렇게 많이 하데요. 빵 주로 많이 먹고 그다음에 소시
지! 독일은 소시지가 유명하거든요. 그리고 이제 달걀, 그다음 깡통
에 들어 있는 통조림 주로 고기 뭐 이런 거 먹었죠. 점심은 이제 
아침 먹고 갱내에 들어갈 때 빵으로 자기 먹을 양만큼 주로 가지고 
들어갔는데, 먹는 거는 뭐 언제든지 풍부하게 되어있으니까요. 물
통에 물 넣고요.
탄광 일에서는 현지 교육은 없고 바로 투입되죠. 예를 들어가 
차 타고 여기에서 뭐 영천쯤 간다 이렇게 생각하면. 예를 들어서 
한 한 시간 정도 간다고 하면요. 그럼 또 타고 가서 내리면은 바로 
작업 들어가죠. 작업장은 숙소에서 5분 거리도 안 되지 싶은데요.
장비 사용법은 현장에 가서 대충 보면 기계를 만지는 거는 저거가 
다 이렇게 하고요. 시다바리 하는 거는 한국 사람 한 사람에 독일 
사람 두 사람 붙어서 해요. 굴진해 내 들어가는 거는, 위에서 들어가
는 거는 코프스트레키라고 말하고 밑에는 반스트레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들어가면은 나온다. 그러니까 위에는 이제 전부 다 필요한 
물자 같은 거하고 밑에는 다 만든 제품이 나오는 탄이 나오는데, 
고무밴드가 있는데 이렇게 넓은데 거기 돌이 이렇게 큰 것도 실려 
나오거든요. 그럼 군데군데 서 가지고 그걸 내리고 탄은 보내고 
그랬어요. 그럼 예를 들어서 저 끝에 가면은 500m 밖에 이 탄 실은 
차를 대놨는데 거기 이제 자동으로 실리면은, 차면은 지대로 기계가 
스톱하는 거에요. 그럼 또 하나 밀어내고, 또 하나 받고 이렇게 해서 
예를 들어 50칸을 다 받았다. 이러면 떠나는 거예요. 그거는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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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고 또 갖다 대고 그래요. 그런 거 보면 잘 되어 있어요. 
탄광은 주로 타고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데, 여름에는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도 한 10명이나 이래 탈 수 있죠. 근데 한 500m 내려가
고 또 많이 내려갈 때는 한 1,000m도 내려가고 그랬어요. 주로 
많이 내려가면 더 내려갈수록 덥지요.
갱내에 들어갈 때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그렇게 들어가고, 나오면
은 일단 또 작업복 벗어놓고 그다음에 샤워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 했어요. 근무시간은 하루 24시간을 계산해서, 그러니까 뭐 
3 × 8에 24, 3교대였어요. 조가 이제 저는 독일 사람 두 사람에 
저 혼자 주로 굴진했습니다. 굴진은 이제 구멍을 뚫어서. 화약을 
집어넣어서 터뜨리면은 거기 이제 무너지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3m 뚫었다 하면은 3m 무너질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거를 인제 
그날로 다 처리하고 다 들어내고, 그다음 거기 동발을 세워서 3m 
들어갔는가 정확하게 재보고 그랬ᅌᅥ요. 그렇게 완성됐을 때는 인제 
작업을 마치고 나오는 거예요
채탄은 그거는 어떻냐 하면 막장이라고 보면 되는데요. 그거는 인
제 스텐베르라고 하는 게 있는데 예를 들어서 사람이 막장에 가서 
서 가지고 이렇게 있으면 안 닿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데는 요만큼 
되어서 사람이 겨우 기어나갈 수도 있고 그렇거든요. 이래 굴곡이 
져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게 이제 막장인데, 무너지지 말라고 슈템펠
(Stempel)을 갖다가 이래 세워놓는데 이게 뭐냐면은 쇳덩어리예요.
위에는 홀츠슈템펠, 이게 나무를 이래 잘라가지고 갖다 바쳐 놓는 
건데, 그래서 그걸 인제 지탱하거든요. 그럼 예를 들어서 호벨이 
왔다 갔다 하면서 탄을 깎아서 들어가면은 그 공간이 많이 빌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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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까. 그게 무너질 염려가 있으면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밤에 
들어가서 그걸 터뜨리는 기예요. 그 슈템펠을 다 빼내고 무너뜨려 
버리는 거죠. 그래 그런 작업을 또 하는 사람도 따로 있어요. 그게 
제일 애먹어요. 힘이 제일 많이 들 겁니다. 굴진하는 사람들도 힘들
지마는 그 슈템펠을 세우는 사람들이 굴진하는 사람들보다 더 힘들
어요.
굴진은 맨 처음에 코프스트레케라고 물건이 들어가는 길을 뚫는
데, 여기에 굴 뚫어서 기차가 왔다 갔다 하는 그런 거 크게 하거든
요. 그게 굴진이고요. 인제고 밑에는 다 했던 기어나가는 굴진인데, 
우리는 주로 인제 뚫어 나가는 거지요. 뚫고 들어가는 거지요. 동발
이란 것은 이래 원형으로 된 것 중간에 구멍이 뚫어져 있어서 인제 
시멘트를 해서 이래 연결하는 거예요. 이게 동발 세우는 거예요. 
동발 세우는데 한 개가 이래 안 되잖아요. 이래 올라가고 또 이래 
걸쳐서 양쪽에 쇳덩어리만치 긴 게 되어 있는, 그렇게 해서 위에다
가 홀스(나무) 요런 거를 한 3m 되도록 이렇게 잘라서 그것을 갖다
가 많이 걸친다고요. 안 무너지고 안전을 위해 집어넣는다고요. 그
래 하고는 또 그다음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그거 위에 시멘트를 
하거든요. 
또 재료 운반하는 일도 있는데, 재료는 주로 인제 나무에요. 그다
음에 인제 스텐벨 뭐 이런 재료를 갖다가 현장까지 대줘야 해요. 
한마디로 옮겨놓는 작업이지요. 굴진 일도 3인 1조로 조가 여러 
개 있는데, 주어진 시간 내에는 세 사람뿐이고요. 자기가 나오면은 
또 세 사람 들어가고 그래가 그 사람 들어와서 자기네들 또 확인하
거든요. 얼마쯤 진도가 나갔느냐 그것도 확인하고요. 우리가 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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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도록 다 되어있나 이런 것도 확인하고요. 그라면 인제 또 다 
해서 나오고, 또 자기네들 마치면 다음 조 또 들어가서 일하고 그랬
어요.
위험한 거는 주로 인제 우리가 보아함마라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뭐 3m, 5m 이렇게 되어 있으면 물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이래 탁탁
탁 치면서 뚫어지면 들어가는데요. 요걸 잘 만들기 위해서는 요게 
스무 구정이 적당하다, 아니다. 스물다섯 구정이 적당하다, 서른 
구정이 적당하다 그래 하면, 독일 사람들이 알아서 그럼 요래 뚫으
라고 하죠. 고거를 인제 어느 정도 딱 맞춰 놔놓으면, 이거만 잘 
쥐고 있으면은 뚫어 들어가는 것은 자기가 알아서 뚫어 들어가니까
요. 사람이 매달려서 이래저래 떤다. 그런 것은 좀 힘이 많이 들죠.
작업할 때 손이 떨려도 많이 떨리지요. 몸도 진동하고, 주로 힘든 
건 그 일이에요. 폭파가 힘든 건 이제 그래서 화약을 재서 폭파할 
때는 그 부근에 있지를 않으니까요. 저 멀리 가서 길을 막고 그다음
에 터트리면, 그다음에 이제 잘 무너졌나 안 무너졌나 그런 것도 
와서 보고 또 덜 무너진 거 있으면은 나무 막대기 긴 거 가지고 
무너진 부분을 전부 다 찔러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여기 서 
있으면 한 3m밖에 거를 이래 찔러보고 예를 들어가 단층이 이렇게 
있으면, 독일에서는 굴곡이 이렇게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많이 있는 
게 아니고 조금 있어서요. 여기서 저기까지 500m 같으면 500m를 
잘라서 파묻고, 그다음에 또 위층이 몇 미터 정도 위에 또 층이 
있다 이렇게 되면 또 가서 파묻고 이런 식으로 인제 했다 하거든요. 
지도를 놓고 딱 보면 아, 여기는 파묻었다, 여기는 남았다가 요래가 
샅샅이 그거를 갖다가 조사해서 다 파묻어 버리는 거예요.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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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괭이 들고 막장에 기어 올라가 가지고 분탄이다 보니 털어버리지
만, 그 사람들은 그게 아니거든요. 호벨 왔다 갔다 하며 깎는데. 
분탄이 아니고 뭐 조개탄 비슷한 번쩍 눈이 나는 그런 탄이에요.
어려운 것은 일을 하는 시간이 가장 어렵죠. 집중해서 뭐라도 
잘하고 오늘 무사히 일 마치자. 라는 마음이지요. 5일제 근무했습니
다. 그때 당시만 해도 5일제 근무였습니다. 근데 토, 일은 안 했습니
다. 혜택 봐도 많이 받은 턱이죠. 문화 그런 것에 있어서는 혜택을 
많이 봤지요. 64년도 한국은 일요일이 어딨습니까. 일요일도 없고, 
토요일도 없고 하루에 12시간이고 20시간이고 일하려고 하면 했고 
이렇죠. 근데 거기는 가니까 그때 아마 사회 모든 보장제도가 잘 
되어있어서, 혜택을 본 것 중의 하나이지요.
그 나라의 국가 공휴일이 상당히 많아요. 뭐 예수님 이러쿵저러쿵 
그런 거 상당히 많은데, 그거 있을 때마다 불려서 갱도에 들어가기
만 하면 뭐 보통 한 번 들어갔다 하면 삼일 것을 계산해서 나오고 
거기에서 돈을 많이 올리죠. 근데 그거도 인제 아무 이름 부르는 
게 아니에요. 어쩌다 그거 뭐 이래 불려 들어가고 잘 보이는 사람은 
자주 불러 들어가고 그랬어요. 토요일, 휴일 한 번 흰 모자 쓴 사람
하고 같이 가면은 예를 들어서 하루에 평상시 5만 원 같으면 15만 
원 나오고 이런 식으로 받을 수 있었어요.
사실 특근 이런 것은 없고요, 이런 게 있습니다. 일을 마칠 때 
안 있습니까. 독일 사람이 “미스터 조!” 이렇게 부릅니다. 그래 30분
만 더 있으면은 1시간 쳐주니까. 근데 조금이라도 더 지체하다가 
나오면은 1시간을 더, 돈을 남게 받을 수 있었어요. 여기에 우리 
앉아 있다가 한 30분 지나고 나가자 이랬죠. 그게 이제 꾀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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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가 그 사람들도 한국 사람들하고 마찬가지인 거에요. 어떤 방법으로 
하면은 돈을 조금이라도 더 받을까 봐 이거 연구하는 겁니다. 그럼 
마켓 넘버라는 게 있는데, 자기 고유번호가 있어서 들어갈 때 넣으
면 땡 하고 내려가는데 나오면은 정확하게 그게 체크가 되거든요. 
몇 시에 들어가 몇 시에 나왔다. 이렇게요. 그럼 그 몇 시에 나왔는
가를 기준으로 해서 돈을 또 쳐주거든요.
막장은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인제 그 슈템펠을 보통 네가 
하루에 40개를 세우라는 식의 기준이 있고, 거의 다 기준을 맞춰서 
작업하려고 하거든요. 혹은 못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몇 개 더하는 
사람도 있고 이렇거든요. 그래서 막장에 일하는 사람도 힘이 더 
들고 그렇죠. 돈도 조금 더 받았다고 그래야 안 되겠나 싶은데,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이 하루에 50마르크를 받았다 이래 되면은 굴진하는 
사람은 뭐 한 40마르크도 못 받았다. 이런 거죠. 
작업 현장에서는 독일 두 사람에 저 한 사람 했습니다. 그게 한 
조인데, 그것도 그렇게 필요한 때가 있고 한국 사람끼리 몰려다니면
서 하는 것도 있고 그랬죠. 그거는 주로 이제 굴진 해가 지고 들어가
는 거였어요. 벽을 뚫어서 3미터 그래 들어가 가지고 기계로 그거 
다 치우고, 거기 이제 안 무너지도록 동발을 세우고 홀츠슈템펠
(Holzsstempel)이라는 나무를 갖다가 끼워서 이래저래 나가는데
요. 그런 작업을 하면 결혼한 사람은 아이가 한두 사람 정도 있으면 
가족수당 지급이 총각보다 거의 한, 배는 안 되지만, 배 가까이 많아
요. 같이 살고 안 살고 그건 관계없잖아요.
계약 3년 더 연장했던 사람 많았어요. 왜 그렇냐 하면 자기네들이 
그 당시만 해도 값싼 근로자를 찾지 못해가 그런데다가 사람들 뭐 
제1장 조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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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하겠다 하면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 없었으니까요. 전부 다 공식
적으로 이렇게 나와 있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한 10년쯤 있다 
나온 사람도 있고, 한 5년이나 7년 이렇게 있다 온 사람도 있고요. 
그리고 미국이나 캐나다로 가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너희들 갔다 
오너라, 갔다 오면 나는 마 내가 못살아도 좋으니까 하고 그래 나가
련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미국에 가면 데리고 가면 되었지만. 데리고 가면 되지마는 
그래도 인제 그 당시 생각은 안 그렇거든요. 내가 돈을 얼마쯤 보내
놨는데, 또 아이들 키우는 건 어떻게 키우는지 등 뭐. 여러 가지 
향수병이 많잖아요. 그래서 결국 귀국했는데, 돈을 벌어서 캐나다로 
가는 사람들이 제일 많았어요. 거기 가서 지금 캐나다 사람들하고, 
한국 사람들하고 비교하면 한국 사람들이 월등하게 더 잘 살아요. 
그 당시 캐나다는 가면 뭐 했냐고 물어보면 벌목한다, 벌목하는데 
나라에서 이거를 갖다가 언제까지 베어내라 이렇게 하면 그때까지 
베어내야 하는데, 사람은 없으니까 한국 사람 일 잘한다고 하는 소리 
듣고 거기 가는 것으로 다들 막 당기는 기에요. 근데 총각은 안 된다 
이거에요. 총각은 어떻게 안 되는지 나는 그 이유는 모르겠는데 결혼
한 사람만 올 수 있다. 그래가 거기로 간 사람들이 많았어요.
독일에 거주하는 분들은 대개 자기 나름대로 거기 혼자서는 못 
있고 독일 여자하고 결혼했다든가 또 독일 남자가 한국 여자하고 
결혼했다든가 이런 움직일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휴일에는 주로 여행이죠. 3일 정도 논다 이러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알프스 같은 데 가서 실컷 놀다가 오고 그랬어요. 뭐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알프스는 얼마 안 되거든요. 기차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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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도 하고 그러니까요. 
▮ 박정희 대통령 독일방문과 송금 관리 
독일에서 그런 게 많이 알려졌어요. 처음에 대통령이 차관 받으러 
가서 다른 나라에서는 다 실패했지 않습니까. 손 내미는 곳마다 
다 실패했거든요. 그래서 독일 갈 수 있었던 것은 차관때문이라고 
이야기가 돌았지요. 그러다가 12월 10일 날에 대통령이 오셨어요. 
거기 연설하다가 못 했어요. 내려와서 울면서요. 그리고 우리도 머
리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닌데 내가 지금까지도 딱 한 가지 기억하고 
있는 게, 내가 대통령으로서 오직 못났으면은 여러분들을 이역만리
에 이래 남겨놓고 가겠느냐 그런 이야기 하시더라고요. 여러분들 
제발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오기만 하면 여러분들 원하는 대로 내가 
다 해주겠다 이래 약속하셨어요.
자기가 그런 말을. 그래가 이분이 이제 대통령 딱 앉고 뭐를 견학
했나 하면, 독일 가서 아우토반 길을 보고 온 거예요. 아우토반이 
세계적으로 독일에 잘돼 있으니까 가서 함 보고 오자. 이래가 거기
로 온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사람이 차관 해서 갈 때는 아무 나라 
가도 다 안 해주려 하니 독일을 한 번 가보자. 독일 가서 그래 너희
가 정 안 되면은 우리가 여기에 광부하고 간호사하고 잡히고 차관 
좀 해달라고 처음은 그렇게 애걸해서 그래가 돈을 받아온 거예요. 
그 종잣돈의 시발점은 처음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에 땅 
있는데 거기다 투자했고, 우리가 갔다 오고 난 뒤에 한참은 안 있었
제1장 조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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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바로 뒤따라서 월남 가서 돈 또 좀 벌고 들어오고 이렇게 해서, 
결국 처음에는 그 종잣돈이 저희가 번 돈에서 나온 종잣돈이라고 
보면 됩니다. 
<사진 3> 조충래 씨가 소장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 
함보른 광산 방문 기념사진 (1964년 12월 10일)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와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
속도로 닦을 때 김대중하고 김영삼 두 사람이 거기 누워서 반대한 
사람들입니다. 반대 많~이 했습니다. 해도 적게 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날 죽이라 이러고 그랬죠. 그래 그거를 서울에서 부산까지 
빨리 닦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이래 잘 사는 겁니다. 또, 그 당시만 
해도 박정희 대통령이 닦는다고 그런 생각은 못 가졌는데, 저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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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돈 주는 사람이 뭐 예를 들면 수상이라 할까 그런 사람이 그래 이거 
돈을 빌려 가신 건 좋은데, 가셔서 뭐 하려고 합니까? 이래 물었는데 
이 사람 멍하게 있으니까 이거 빌려 가셔서 다른 건 할 생각하지 
말고 고속도로를 빨리 닦으라고, 그러면 너희네 나라는 잘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알려 준 거예요. 그래 어쨌건 닦았다는 말이지요. 
들은 바에 의하면. 우리는 잘 모르는데, 우리가 거기서 3년 있는 
동안에 우리한테 대한 보험을 그 사람들이 우리 몰래 각자 개인별로 
넣어 줬다고 해요. 자기네들 돈을 거기에 넣어 준 게 아니고, 우리 
명세에 없는 돈을 자기네들이 들어서 넣었다 이거에요. 들어갔는
데, 그 돈은 일단은 아무 이상 없이 우리가 귀국하게 되면은 꼭 
자기네들이 의무적으로 내줘야 하는데 한국 정부에서 당시에 돈이 
없으니까, 이 거래가 크고 하니까 그거는 우리 정부랑 우리가 알아
서 처리하겠다 이렇게 해서 한국 정부에서 자기네들이 우리 몰래 
그 돈을 썼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연락을 안 해주고요. 그것에 대해 
몰랐던 사람들은 얘기가 그거죠. 왜 고생해서 피땀 흘려 돈 벌었던 
거를 나라에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런 식으로 썼느냐? 또 지금 와서 
말이죠. 이거를 나는 그거 타 먹었다고 방송으로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독일 가서 일하면서 본 것은 그 사람들 검소하게 산다든가, 그 
사람 문화에 대해서 그만치 많이 알았다든가 그런 거요. 저도 뭐 
한국에 있을 때 제2외국어 하고 독일어 2년 동안 하고, 갈 때도 
뭐, 서울 강북구 수유동 거기 가면 공무원 연수원이라고 있는데, 
그거 가서 또 한 달간 독일어 배우고 갔어요. 근데 첨에 가 하는 
인사하는 것도 그 사람들 못 알아들어요. 예를 들어서 우리는 ‘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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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물인데, ‘터’를 갖다가 발음을 세게 해버릴까 봐, 네, 저 사람들
은 뭐 ‘워러’ 이러면 대번 안다니까요. 
당시 월급을 6만 원씩 받으면은 1년하고 2년째는 또 올라가고 
그랬어요. 그래서 올 때는 한 10만 원 받았죠. 제가 말씀드리는 
거는 뭐냐 하면은 그거를 제가 뭐 어디 독에 묻듯이 그런 식으로 
돈을 모았다는 게 아이고 여행하고 뭐 하고자 하고 싶은데는 다 
했어요. 송금은 한 70% 이상하고 30%는 내가 쓰고요. 한국으로 
송금할 때, 저는 또 돈을 마누라 앞으로 안 보내고요. 내가 일을 
좀 잘못했던 것 같아요. 부모님이 거기 계시고, 형이 거기 계시고 
하니까, 그쪽을 더 믿었다고 돈을 그쪽으로 보냈어요. 가족은 이제 
필요한 양 만큼만 보내주고 이렇게 했는데, 결국은 형제가 많고 
이렇게 하니까 돈이 절로 없어졌다고도 볼 수 있어요. 다 없어지지
는 않아도 일부 없어졌다고 보면 안 되겠습니까.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견물생심이라고 돈 보면 탐 안 내는 사람 없지 않습니까. 
우리 바로 위에 형님이 나하고 네 살 차이인데, 초등학교도 졸업 
못 하고 숯 굽는 데 가서 일하고 우리보다 월등하게 일을 많이 했어
요. 항상 내 염두에는 우리 형님을 도와줘야 하겠다는 이런 생각은 
가졌지마는, 자기를 믿고 내가 돈을 전부 다 보내고 이렇게 했는데 
마지막 돌아왔을 때 내가 그거 뭐 언제 얼마 보내고 언제 얼마 보내
고 언제 얼마 보냈는데 왜 형님 이거밖에 없습니까? 이렇게 할 수도 
없고요. 예. 형님 감사합니다. 그동안에 관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렇고, 그걸 뭐 따지고 그래 하는 건 없거든요. 
이제 동네 사람들이 저는 아버지가 거기 살아계셨으니까요. 우리
는 옛날에 클 때 말이지 효를 많이 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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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부모 말이라고 하면 언제든지 순종하고 이래 살아나왔기 때문에, 
예. 아버지 알겠습니다! 이렇고 그랬죠.
그 동네 사람들 하는 얘기가 왜 독일 가서 그만큼 고생해서 돈을 
마누라 있는 데 안 보내주고 왜 거기로 보내느냐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살았죠. 집사람보다는 아버지가 거기 살아계시고 
지키고 있으니까, 그쪽이 뭐 더 관리하는 것에 있어서는 안전할까 
싶어서 이래저래 해서 거기로 보냈죠. 주로 논 사서 귀국해 가서 
보니까 그때 샀던 가격이나, 내 지금 귀국해서 파는 가격이나 비슷
하더라고요. 오히려 파는 가격이 더 다운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우리 형님이 시골에서 동장질을 했는데, 동장질 하니
까 그 아시잖아요. 동장질 하면 그때 현금으로 주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현금으로 조금 나간다 하더라마는 그 당시만 해도 그거 뭐 
보리농사 짓고, 타작해서 제일 끝에 그 뭐 돌 반, 보리 반으로 좀 
그게 다인데 그거 받아서 무슨 돈을 모으겠습니까. 이렇게 있다가 
내가 귀국하자 자기도 대구로 나와서 저를 계명대학에 취직시켜줬
고 계명대학에 들어가서 초등학교도 졸업 못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
로 잘해서 그 연금 받아서 먹고 살다가 그래 돌아가셨는데, 정식직
원으로 들어가서 연금도 받았거든요.
▮ 귀국과 계명대 직원으로 정년퇴직
3년 일하고 그해 12월, 그러니까 67년도 12월쯤 되지 싶은데 
그때 귀국했어요. 귀국 소감 이런 것은 뭐 제가 잘 갔다 왔다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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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한 가지가 남아있고요. 내가 공부하러 갔다 오거나 연구하러 
갔다 온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까요. 그 나라의 문화라든가 뭐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참 검소하게 독일 사람들 사는구나 이런 거. 그러
니까 남한테 표현할 수 없는 거를 내가 습득해가 왔다 하는 그런 
거를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인데, 그거 우리나라 문화하고는 독일이
라는 나라가 완전히 틀리고요. 한마디로 잘 갔다 왔다. 그리고 내가 
뭐 후회를 한다든가 이런 거는 없습니다. 그때만 해도 64년도 하면 
오래 안 됐습니까. 그때 벌써 그 나라 문화, 사회보장제도라든가 
이런 게,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을 보고 
왔으니까요.
돌아와서는 저가 신명여고 있었기 때문에, 계명대학교 직원으로 
들어갔어요. 주변 인맥 관계로 해서 들어갔죠. 근데 우리는 이제 
어디 한군데 끈을 붙들면은 안 놓으려고 하는 그게 있잖아요. 항상 
끝을 봐야 하죠. 그래서 저가 68년도에 계명대학에 들어와 가지고 
2018년도에 나왔으니까 얼마나 오래 있었어요. 이 학교에서는 행
정직에서 일 좀 보다가 95년도에 정년퇴직 했어요. 그러니까 저는 
여기에 그 당시 68년도에 들어왔을 때는 대명동 저쪽으로 들어왔는
데, 그 당시 거기에는 건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있는 신일희 
총장 어른 계실 때 들어갔어요. 이분은 계성고등학교 교장으로 시무
하시다가 계명대학으로 옮겨가자고 그래가 오셨는데 그분하고 인
연을 맺었어요. 왜 맺었느냐 하면은, 이분이 이제 기독교 우리나라 
대표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회의하러 오셨어요. 그때 오실 때 마침 
거기가 일요일인 거에요. 그래서 이분의 조카가 독일 갈 때 내가 
광부로 같이 갔어요. 그래서 여기가 총장 사촌 형님 되죠.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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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이분하고 같이 가서, 할아버지가 오신다고 하는데, 우리 한번 가봐
야 안 되겠나 그래가 내가 그때 프랑크푸르트, 거기가 우리 있는 
데서 거리가 멉니다. 먼데, 거기 가서 그때 최고로 유행한 게 뭐냐
면, 바바리코트인데. 바바리코트 하나 사드리고 다음 호텔 좋은데 
잡아드리고 이렇게 했지요.
여기로 돌아와 가지고 뭐 얼마나 나를 좋아하는지 여기 학교에 
일해 보고 싶거들랑 일 봐라 하시면서, 내가 그때만 해도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다 하면 되어서 뭐 이런 식으로 해가 지금까지 
내려왔던 것이지요, 이게 물론 베푼 것도 돌아왔지만, 그 이전에도 
계대하고 연관성이 있는 신명여고에 근무했죠. 
계대에서 일했었던 거는 뭐 처음에는 들어와서 한 3년간 사무직 
일을 봤어요. 그러다가 사무직에 일을 봤는데 총무처장이라는 사람
이 자기가 잘못해서 결국 그 일을 못 하게 되었어요. 총무처장이라
는 사람은 지금 미국 가 있어요. 
자기는 동산병원에 간호사하고 결혼했는데 나보다 4살 많은 사람
이에요. 미국 가가 돈 많이 벌었다고 소문났어요. 신OO 씨라고 
있는데, 그 사람 계리사 합격해서 경영대학에 회계 그거를 봤는데 
자기가 결국 잘못해서 나도 거기 한데 엮여서 이후에는 다른 잡일, 
예를 들어 도서관에서 학생들 신분증 조사 이런 거를 하고 그래 
했어요. 
제1장 조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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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독일 귀국 후 가족사진 촬영
당시 나는 시키는 대로, 그러니까 그 사람을 많이 믿고 내가 일을 
해왔는데 그 위에 사람이 불러올려서는 뭐 묻거들랑 무조건 된다고 
해라. 책임은 내가 지겠다. 뭐 이런 식으로 해서 결국은 일이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었죠. 사람이라
는 거는 안 되는 거는 안 된다 그래 얘기해야 하는데 안 되는 걸 
되도록 대답해라 그러니까. 그때만 해도 뭐 저는 압니까.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해서 지내왔다고 봐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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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계대를 울타리로 삼아서 거기 있는 인맥 관계로, 전부 모르는 
사람이 없고 다 아니까요. 내가 지금 나이 팔십에 보통 65세 되면 
교수님들도 전부 다 정년퇴직하시는데, 아담스 채플이라고 여기에 
올라가 가지고 예배 보는데 거기 가면은 지금 직원 중에서는 저 
혼자밖에 없습니다. 전부 교수로 있다가 퇴직하신 분들, 아니면 총
장으로 있다가 나오신 분들, 이분들하고 같이 어울려 다니면서 놀기
도 하고 교회도 잘나가고 그랬는데요. 
그러다보니 선택을 학교에서 그렇게 했어요. 들어와서 하여튼 
최선을 다해달라고 그렇게 해서 한학촌을 2004년도 5월 20일 날 
완공해서 준공했습니다. 준공을 하기 한 달 전에 우리가 여기 들어
와서 지금까지 있는데, 햇수로는 인제 13~14년 좀 지났고 내년 
5월이면 14년 지났겠죠. 
나이 되면 정년퇴직하는데, 어떻게 직원으로 들어가 그래 오래 
있었느냐고 사람들이 물어요. 계명대학에 사회공무원들하고 똑같
아요. 62살(만 61살)에 정년퇴직을 하는데, 정년퇴직을 95년도 2학
기 때 해서 그때 또 저걸 연금을 써야 하는 건데 연금도 못 쓰고 
그래가 제가 당시 딸 시집보내고, 뭐 장가보내고 이렇게 하는데 
일시금으로 받아서 연금을 썼던 거에요. 거기 두었으면 저도 연금으
로 받으면 지금쯤 꽤 많이 받지 싶은데, 그래 찾아서 쓰고 그러니 
이거 사립학교 연금법에 의해서. 일단 우리는 이제 받게 되면은 
또 뭐가 없어지냐면 기초연금 그게 또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기초
연금 그거는 지금 받기는 하는데, 지금 그게 딱 정확하게 절반 받아
요. 다른 사람 1인당 25만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1인당 한 
회에 12만 원을 받거든요. 
제1장 조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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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95년도 정년퇴직해서 학교에서 뭐를 지었냐 하면은 계대 
한학촌이라는 곳을 지었는데, 한학촌 그거는 2004년도 5월 달에 
완공했어요. 영남대학교 같은 데는 가보면 집을 옮겨 와가지고 세워
놓고 이랬는데 우리는 지었거든요. 지어가지고 거기 이제 관리할 
적임자가 없다, 또 관리해도 젊은 사람은 안 되고 나이 좀 들은 
사람이 관리해야 한다 이래 가지고요. 저보고 들어와서 거기 일을 
좀 봐달라, 이렇게 해서 들어가서 16년간 있었어요.
▮ 파독광부회 모임 결성과 현재 삶의 의미 
광부회 모임은 이제 독일 갔다 왔던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찾다 보니까, 우리가 처음에 네 사람도 모이고 이렇게 해서 그래서 
이제 서로서로 연락을 해서 결국 지금 현재 인원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의 계 모임이죠. 우리가 뭐 모였다고 해서 특별한 
저거도 없고, 또 어디 뭐 10원이라도 도움 받아서 운영해나가는 
거도 아니고요. 우리 회비 만 원씩 내지만 만 원씩 내는 거는 점심 
간단하게 뭐…. 그날 와서 잡숴보셨지만, 도시락 그거 하나라서 족
하고 또 그렇지 않으면 회장이 조금 더 보태가 바깥에 나가서 먹자
고 하면 만 몇천 원짜리도 먹고 그러죠. 이렇게 또 얘기하다가 가는 
사람 가고 오는 사람 오고 이렇게 몇 사람씩 모여가 좀 놀다 오고요. 
대개 보면 먹자마자 가는 사람도 많아요. 뭐 바쁜 생활을 하는 사람
들이 많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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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사진 5> 매일신문에 게재된 조충래 씨 인터뷰 기사
(2013년 1월 23일 자)
독일 갔다 온 경험은 나에게 자부심을 생기게 했죠. 왜냐면은 
우리가 한국을 발전시켰던 종잣돈이기 때문에 더 자부심이 안 있었
겠나 싶어요. 나는 그래 생각하고 다른 것은 없고 딴 사람은 우리보
다 영 많이 벌어왔는데 우리도 더 벌어가 보탰다 하는 그런 말 안 
하죠. 제일 시초에 우리가 고생해서 벌어서 고속도로 닦는데 일부라
도 보탰다 하는 그런 자부심요. 
차관 그래가 받아온 게 참 경제발전에 기틀이 되고…. 제일 시초 
아닙니까. 그거 받아와서 서울서 부산까지 고속도로 닦은 거 아입니
까. 그때 그 당시 김대중, 그 다음에 김영삼이 날 죽여라 이랬죠. 
죽이고 고속도로 닦았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겁니
다. 그래 그 돈은 처음에 어떤 돈 갖다 닦았나 하면 월남에서 들어오
는 돈으로 다 닦은 거 아닙니다. 우리 있는 데서 나왔던 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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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은 겁니다. 월남에서 벌어온 돈으로 닦은 돈이 아니라 우리가 
벌어서 들어온 돈입니다. 한참 있다가 월남에서 자기네들 나름대로 
돈이 좀 들어왔는지 난 잘 모르겠지만요.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잘 되면은 그걸 자꾸 숨기려고 하는 사람
들이 많이 있거든요. 권희종 씨라고 이번에 여기를 왔다 갔는데, 
내가 몇 가지 사진을 보여드릴게요. 바라는 거는 그저 건강하게 
잘 교회 다니고 하다가 언제나 주님이 부르시면은 가야죠. 근데 
죽음은 두렵게 생각하면 안 되고 언제든지 편안한 자세로 가야 해
요. 그거 언제 가느냐 그거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 그것뿐입니다. 
저는 욕심나는 것은 전혀 없고요. 그러니 뭐 전 가진 건 없어도 
마음은 항상 같아요. 언제든지 좀 푸근하다 할까 넉넉하다 할까 
그래요. 
사실 독일 가서 본 것은 검소하게 살더라 하는 그것이고 뭐 차별
은 안 받아봤어요. 그 사람들 ‘alles egal’이라는 게 무슨 말인가 
하면은 다 똑같다는 것이거든요. ‘egal’이라는 그 말이 똑같다, 그
러니까 세상 사람은 누구라도 다 같다라는 말을 많이 썼어요. 
나의 목적만 성취하면 돌아가라 하는 그것보다도, 저 사람들이 
우리도 물론 넓은 땅에 가서 사는 사람 많이 있겠지마는 자꾸 우리
가 짧은 생각인진 모르지만, 결국은 나중에 한국이라는 그런 단어가 
없어지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을 많이 가져봅니다. 그런 생각은 
왜 가지느냐 하면은, 한 나라 사람들만 들어오는 게 아니고 이 좁은 
땅에 각 나라 사람들이 다 덮이니까요. 이게 어떻게 보면 한국 같아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잡국 같아 보이기도 하고 뭐 그러니
까요. 결국은 나중에 가서는 이게 그래 안 되겠나 싶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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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내 경험으로 보면 우리를 광부, 간호사로 잡히고 그럼 우리 차관
해가겠다 그래서 일을 딱 시켜보니까, 진-짜 한국 사람이 일 잘하거
든요. 그래서 그다음에 차관하는데, 사람 잡히고 하는 거 다 필요 
없다, 필요한 만큼 빌려 가라 그래요. 우리가 물론 저 월남 갔다 
왔던 사람들이 우리는 전쟁터에 나가서 말이지 이렇게 말해도 고생
은 독일 광부들이 더 많이 했습니다. 저거보다는 더 많이 했습니다. 
안 죽고 살아왔으니까 하는 얘긴데, 어디 월남 갔다고 해서 월남 
뭐 어디에 다 죽었습니까?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정부에서 
우리가 공청회를 하는데, 저도 서울에 한 다섯 번 정도 국회에 올라
갔다 내려왔는데 마지막에는 국가유공자 예우를 어떻게 하느냐 그 
문제 가지고 여야 한 37명이나 거 나왔더라고요. 근데 이구동성으
로 하나같이 제일 1순위인데 왜 여태까지 안됐느냐 하면은, 자기들
은 하기 좋은 말로 자꾸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안 되니까 하는 소리 
아닙니까. 안됐는데 그거를 하려고 지금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
다. 발의를 아직 못 시켜서요. 조원진 같은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런 
곳에 힘을 많이 썼거든요. 근데 뭐 세월호 터지고 나와버리고, 그렇
게 하고 박근혜 대통령 초청도 받았거든요. 초청 받아서 내일모레 
올라간다고 이래 준비를 다 했는데, 김영삼이 죽는다고 무산되어 
버리기도 했어요.
마지막으로 나는 뭐 사실 요즘 젊은 사람한테 들려줄 거는 내 
자랑은 할 것도 없고, 그저 자기한테 주어진 모든 일에 대해서 최선
을 다하라 하라는 것. 그것뿐이에요. 그 말밖에 할 게 없어요. 누구
라도 최선을 다하다 보면 그 길이 열리게 되어 있다고요. 왜 그러냐 
하면은, 그거는 자기가 노력한 만큼 분명히 대가가 뒤따라온다고
제1장 조충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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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그리고 또 내게 어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거를 놓치지 말고 
내가 꼭 해야 하겠다 하는 그런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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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보충자료>
광부·간호인력의 파독배경 및 과정 (1)
독일로 한국의 광부와 간호인력이 파견된 시기는 공식적으로 
광부는 1963년, 간호사는 1966년이었음. 한국에서 이 시기
는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이 수립되고 있었음. 1960년대 
초까지 한국 정부는 전후 복구 및 경제발전에 필요한 재원을 
미국의 무상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했음.
미국의 무상원조가 유상원조로 변경되면서 정부 차원에서는 
원조공여자를 찾아야 되었고 이 과정에서 1961년 3월에 서독
과의 기술원조 협정을 체결하여 협력방안의 기틀을 마련함. 
1961년 12월에는 경제원조까지 포함한 한·독 정부간 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협정을 체결함. 이 협정은 향후 독일의 
재정원조와 기술원조에 대한 근거를 제공함.
독일은 기술원조에 의거하여 1960년대 초반 한국의 기술훈련
생을 소규모로 받기 시작했음. 한편으로 독일의 경제발전 속에
서 완전고용상태에 도달하여 부족한 노동력은 동독에서 충당하
였으나 1961년 노동력 유입이 중단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를 받
아들었고 특히 탄광노동인력의 절대 부족에서 한국인들이 파독
광부로 들어갈 수 있었음.   
한국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과 국내실업률을 감소시
키기 위해 젊은 인력을 해외로 파견함. 
  * 자료출처: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2009), 『외화벌이의 첫 삽을 뜬 
파독광부 백서』
  
제1장 조충래   
39
광부·간호인력의 파독배경 및 과정(2)
파독광부는 정부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최초의 시점은 
1963년 12월 21일이었음. 그 이전에 민간회사가 주독한국대
사관을 통해 한국 정부에 고용할 의사를 밝혀왔으나 1963년 
5월 11일 독일노동성에서 한국 광부를 고용하겠다는 정식 의사
표시를 전달, 정부차원에서 실무를 진행함.
1963년 8월 13일에 독일파독광부선출위원회를 구성, 전국
적으로 파독광부를 모집함. 최초 모집에 2,895명 지원, 최종 
선발은 194명과 이후 독일 요청 인원 미달로 91명 보충선발.
출국 전 선발인원은 실지교육과 어학교육을 받음. 제1차 1
진 송출 후 6개월 만에 다시 광부파견 요청이 오고 재모집하
여 파견함.
4진 모집부터 정부는 1965년도 독일노동력협력에 관한 탄
광 노동자 출국계획을 수립, 세부방침을 마련함. 모집 방법
은 공개경쟁모집과 응모 자격으로 5항을 명시함. 그중에서
1) 연령 20~30세 이상의 병역을 필한 대한민국 남자 2) 중학교 
1학년 이상 수료자 3) 탄광 종사 경력 1년 이상인자로 이직후 3년
이 경과하지 아니한 자 등을 제시함.
1965년 정부는 재단법인 한국해외개발공사를 발족, 광부 
및 해외인력 송출을 전담시킴.
1969년 제1차 광부협정을 개정, 파견 광부 인력 수와 자격
등 변화.
1973년 유류파동 이후 경기침체로 외국인 노동력 감축 방
향 수립하고 78년 외국 신규근로자의 고용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취함. 
40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광부·간호인력의 파독배경 및 과정(3)
간호사와 간호보조사 등의 간호인력의 파독은 독일과 한국의 
민간에 의해 시작되었음. 최초의 간호인력에 대한 파독은 1957
년 주한 독일신부 파비안 담이 경북 김천의 성의여고 졸업생 
30명을 선발, 서독병원에 간호학생으로 입학, 이후 간호사 자격 
취득 후 병원에 취업함.
민간차원의 간호인력 파독이 196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다가 
이수길 박사가 1966년에 정부 대행기관 한국해외개발공사와 
알선계약을 하면서부터 정부의 개입이 시작되었음.
1966년 4월 28일의 128명 간호사 파독부터는 보건사회부가 
주관하고 한국개발공사가 실무를 전담, 정부주도로 추진.
1969년 8월 한국해외개발공사와 독일병원협회가 한독정부간
의 간호원 협정을 체결, 본격적인 파독 사업을 진행함. 고용기간
과 근로조건에 대한 법적 보호를 받음.
파독 간호 인력에서 간호사는 만 42세 이하, 간호보조원은 만 
35세 이하로 연령 제한, 간호사는 독일이나 외국의 국가고시 
합격자로 병원 근무 적격자, 간호보조원은 한국해외개발공사와 
23개 한국간호보조학원에서 양성 파독함.
1970년 6월 유자격 한국간호원 및 간호보조원 독일병원 취업
에 관한 협정, 74년 10월 2차 협정을 통해 지속적 간호요원 
송출. 75년 이후 급격히 감소. 이유는 한국 간호 인력의 타 지역
으로 무단이탈, 한국 국내 수급 문제, 서독 간호 요원의 임금상
승으로 독일여성이 간호 직종 선택.
1975년 공식적인 한국간호인력 파독은 정리됨. 
  * 자료출처;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2009), 『외화벌이의 첫 삽을 뜬     
           파독광부 백서』
제1장 조충래   
41
광부·간호인력의 파독 현황
(단위: 년도, 명)
광부
간호요원
기능공
1963년
247
247
1,043
-
1964년
806
806
-
1965년
1.198
1,180
-
1966년
1,513
286
1,227
-
1967년
428
7
421
-
1968년
94
3
91
-
1969년
847
10
837
-
1970년
3,022
1,305
1,717
-
1971년
2,731
982
1,363
476
1972년
1,728
71
1,449
208
1973년
2,176
842
1,182
152
1974년
2,386
1,088
1,206
92
1975년
462
-
459
3
1976년
376
314
62
-
1977년
795
795
-
-
18,899
7,936
11,057
931
  * 자료출처: 독일병원 협회(생산연도 미상): 주독대사관, 
             업무현황. 1981 (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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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파독광부가 근무했던 광산
한국인 광부가 근무했던 광산은 고용주별·지역별·단위 광산
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됨. 루루 탄광 주식회사 소속 탄광과 
룩셈부르크 왕궁재단 에쉬바일러 탄광 주식회사 소속, 그리고 
남부 독일 및 탄광지하 부설 회사 소속이었음. 
구체적인 단위 광산별로 보면
Ahelen Bergwerk Westfalen/ Bottrop Bergwerk Franz Haniel/ 
Castrop-Rauxel Bergwerk Victor-Ickern/ Castrop-Rauxel Bergwerk Erin 
/ Siersdorf Emil Mayrisch/ Dinslaken-Lohberg Bergwerk Lohberg/ 
Dortmund-Derne Bergwerk Gneisenau/ Duisburg-Hamborn Bergwerk 
Friedrich-Thyssen/ Duisburg-Walsum Bergwerk Walssum/ Gelsenkirchen 
-Schalke/ Gelsenkirchen Bergwerk Graf-Bismark/ Herne Wanne-Bergwerk 
Pluto/ Oberhausen-Sterkrade Bergwerk Sterkrade/ Oberhausen-Sterkrade 
Berwerk Osterfeld/ Bergwerk Recklinghausern
https://geowiki.tistory.com/2134
  * 자료출처: 외화벌이의 첫 삽을 뜬 파독광부 백서(2009),
             (사) 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
제1장 조충래   
43
파독광부의 근무조건과 임금
독일 광산에 취업하는 한국 광부는 <한국광부 임시 고용 정책에 
관한 한·독 정부 간의 협정>(1969.11.27)에 의해 임금조건 및 
근로조건, 노동보호 등에 있어서 동급의 취업자와 동등한 대우
를 받을 수 있었음. 
당시 한국이 국제노동기구에 가입되지 않은 국가여서 한국광부
는 직업병에 대한 보상규정과 공상(公傷)에 대한 보상에 있어서 
자국 및 외국근로자 동등 취급규정에 대한 보상 혜택은 못 받음. 
한국광부의 근로계약기간은 3년이었고 그 이상의 연장은 1년 
내지 6개월이었음. 고용신분은 광산기술 교육훈련생이었지만 
노동조합 가입, 의료보험 등 각종 보험의 가입과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음.
근무시간은 주5일 40시간, 1일 8시간으로 지상근무자는 휴식
시간 30분을 제외한 8시간, 지하근무자는 휴식시간을 포함한 
8시간이었음.
기본임금은 1964년 기준, 지상작업일 경우 1일 20.20마르크
(약 1,290원), 지하작업은 30~39마르크(1,920~2,500원)이었
고 1975년에는 1일 64.33마르크(약 12,930원)로 승급과 능력
에 따라 임금 차이를 보임.
  * 자료출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8). 『해외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자료집: 파독광부·간호사의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pp.203-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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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파독광부의 근무조건과 임금
대부분의 광산에서는 도급제 방식으로 임금을 지불함. 도급
제는 매일의 출결근, 작업량 등을 체크해 월말에 모아서 임
금을 지급하는 방식임. 광부의 실수령액은 개인별로 차이를 
보임. 
타국의 출신 광부도 존재하였는데 1996년 자료에 의하면, 
한국광부들의 임금은 독일이나 기타 외국에서 온 광부보다 
평균적으로 조금 낮은 것으로 나타남. 한국광부는 평균적으
로 600마르크, 외국광부 700마르크, 독일광부는 800마르
크의 수준이었음.
독일 광부는 연방광부공제조합에 의한 개인질병보험과 탄
광직업협동조합에 의한 공산산재보험에 자동으로 가입됨. 
따라서 한국 광부도 동등한 보험헤택을 받음. 임금계속 지
불법에 의해 의사가 인정하는 병, 결근에 대해 전 2개월 평
균임금이 지급되었음.
광부들은 지하 갱에서의 작업을 위해 광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3주간의 지상교육과 3주간의 지하교육 총 6주간의 교육
을 받음.  
주거는 기본적으로 모든 광산에서 기숙사가 제공, 기숙 여
부는 자유였고 기숙사비는(1976년 가준) 3식 제공의 경우 숙식 
1일 기준 11마르크 내지 12마르크의 본인부담이었음.
  * 자료출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8). 『해외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자료집: 파독광부·간호사의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pp.203-210.
제2장 정동옥
기독교와 의료계 집안에서 출생 
간호전문학교·수간호사 생활, 파독간호사 지원 
독일입국과 파독간호사로 임무 수행
귀국 후 홀트양자회·제일모직 의무실 근무 
전업주부와 학부모 활동 참가 
다양한 사회활동으로 풍족한 노년 생활 영위
대구·경북지역 파독모임 회장으로 모임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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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 기독교와 의료계 집안에서 출생
경북 영주 풍기 출신이에요. 1936년 4월 18일생이죠. 출생은 
예천에서 우리 아버지가 OO의원이라고 병원을 하셨거든요. 그래
서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풍기에 왔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못 
가게 해서 아버지가 거기서 병원을 하셨죠. 그 시절에 좋은 부모를 
만난 셈이죠. 우리 할아버지가 아주 좋으신 분이고, 옛날에는 
재산이 뭐 만석, 천석이랬잖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만석꾼, 한
마디로 부자였어요. 
제가 초등학교 몇 살 때 돌아가셨는지, 아까 사진 보셨지만 
제가 교회를 다녔고 요새도 풍기 00교회라고 있습니다. 풍기선 
제일 큰 교회인데, 00교회 거기 창시자시거든요. 우리 할아버지
가 선교사. 대한민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100년이 넘었잖아
요. 선교사를 통해서 예수를 접하고 믿은 가정이기 때문에, 지금 
저는 대한민국에서는 5대째거든요. 그게 역사에요. 할아버지, 
아버지, 나, 우리 아들, 손자. 그래서 여기 대구에서도 000, 정동
옥하면 어지간히 다 압니다. 
당시 생각하면 그 집에선 얼마나 고맙겠어요. 다 살았으니까요. 
우리 아버지 얼마나 존경하고 그랬는데요. 우리 아버지도 훌륭했는
데 이제 나이가 들고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도 훌륭하신 분인 거예
요. 요새는 새마을 있고 비행기 있고 그러지만, 그땐 말 타고 서울 
가고 했으니까요. 우리 할아버지가 휘문 배제 나오셨거든요. 거기
제2장 정동옥   
47
가 다 기독교거든요. 우리 아버지가 그래서 경성의전, 지금 서울대
학이잖아요. 거기에 가셨어요. 아버님이 오 남매 중 장남이세요. 
그런데 저희 집안은 의과 쪽이에요. 고모도 약사시고요.
우리 어머니는 부잣집 딸이고, 옛날 치면 우리 엄마는 초등학교도 
별로 안 나왔고요. 천석, 만석 하는 양반집에서 자랐고 외할아버지가 
아주 부자셨대요. 대한민국의 가정으로서는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가 
공부하시니까 20년은 신랑 없는 시집살이를 하신 거죠. 시부모를 
모시고 아주 온순하고 우리 엄마가 좋아요. 자기 엄마 안 좋은 사람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제가 나이를 들고 보니까 나는 엄마의 
발꿈치도 못 따라가는 사람이더라고요. 아버지 공부 다 하시고 아버
지가 엄마를 데리고 가서 아기를 낳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늦었어요. 
엄마가 나를 39살에 낳았어요. 18세에, 17세에 시집을 왔대요. 우리 
아버지랑 한 살 차이에요. 결혼만 하고 시부모 모시고 풍기에서 시집
살이 사신 거죠. 우리 아버지는 공부하러 서울 가고요.
그래서 친할머니한테 구박을……. 아니죠. 옛날엔 다 그렇잖아
요. 밤새도록 명줄을 다듬도록 하고 모이면, 우리 친할머니가 아주 
구박했대요. 우리 엄마가 말하기를 그 신랑도 없는 시집살이 하는 
며느리가 명줄 밤새도록 다듬질해서 바치면, 나와서 햇빛 대고 명주
는 문에 가 다 있어야 한다고 하데요. 마음에 안 들면 바가지에다 
물 부어 버리고. 그만큼 유별났데요. 그걸 우리 엄마가 얘기하고 
지금 내가 나이를 이만큼 먹고 보니, 우리 엄마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새삼 알겠더라고요. 
1943년 우리 가족, 저는 풍기에서, 태어나기는 예천에서 태
어났는데 예천 00의원이라고 아버지가 크게 하셨거든요.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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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을 아주 크게 하다 보니 사람들이 필요하니까 친가, 외가가 다 
거기 일을 하신 거죠. 그래서 서울 간다고 풍기가 고향이니까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아들 얼마나 대견하겠어요. 그 시절에. 
1년만 있다가 서울 가라 이래서, 그런데 풍기 가는 길에 그냥 
우리 아버지가 주저앉아버렸어요. 
<사진 6> 아버지 정도협씨의 의사 면허증 
대한민국에서는 초창기 아닙니까. 저는 해방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됐거든요. 제 세대만 해도 대한민국 역사 어지간히 다 알잖아요. 
6·25전쟁은 안동여중에 있을 때 터졌는데 학교 가려고 공책 사고 
연필 사고 그게 보배 아닙니까. 1학년 때 사서 좋아서 땅에 파묻고 
비닐 싸고 했죠. 우리 집은 병원이 너무 크니까 국군들이 점령하고 
제2장 정동옥   
49
있었어요. 병원이 너무 크니까 군인들이 와서 원장님 조금만 빌려주
세요. 그래라 그래서 소백산 폭격 소리 듣고 군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지요. 우리는 고생 하나도 안 했어요. 그냥 군인들 따라 다녔어
요. 군인 장교님들 차 우리 가족 다 타고, 우리 아버지 왕진 가방 
하나 들고요. 눈에 선하죠. 청도 가서 여관방 하나 빌려서 아버지 
하시고, 자기 직업이니까요. 
그래가 하는 데 복구가 돼서 다 오잖아요. 근데 큰오빠가 행방이 
없는 거예요. 그때 우리 작은 오빠가 와서 그래도 고향에 가야지 
어떻게 하나 하고 작은아버지도 사정하고 해서 1년 만에 우리가 
풍기로 다시 갔어요. 집에 들어가 보니 풀하고 뭐하고 혹시 또 터질
까 봐, 그런 거 숨겨 놨을까 봐요. 너무 비워두어, 1년을 비워놨으니
까요. 그리고 병원 개업하시고 그러다 우리 아버지는 69세에 돌아
가셨어요. 그 시절에는 오래 사셨거든요.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예천에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제가 
2학년 때 밤 10시가 넘었고 맏이가 아들, 10살인데 아기 엄마가 
아기 낳을 때 제가 왕진 가방을 들고 따라갔어요. 얼마나 똑똑했으
면 그랬는가 하면은, 병원에 인제 다 퇴근하잖아요. 밤중이니까, 
위급하니까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우리 아버지 따라가서 그
때도 각서 받고 다 하잖아요. 사고가 나면 아이가 죽든가 하는 각서 
받는 거까지 다 봤어요. 요새는 이비인후과나 산부인과가 다 구별되
어 있는데, 그때는 의원이라 하거든요. 그래서 치과도 하고 내과도 
하고 외과도 하고 그런 게 의원이에요. 다 하셨는데, 저는 아버지가 
너무 훌륭하시잖아요. 아기가 거꾸로 있는데 우리 아버지가 음부에
다 손을 넣어서 돌려서 아기가 나왔어요. 생생해요. 지금 이 시각까
50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지도요.
<사진 7> 정동옥 씨의 5살 때 전체 가족사진 촬영 (아래줄 왼쪽 두 번째) 
저는 오 남매예요. 큰언니, 큰오빠, 작은 오빠, 언니, 저. 제가 
막내거든요. 지금 오 남매 중에 저 혼자만 살아있어요. 우리 오
빠도 오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00제약의 최고까지 계시다가 
나와서, 현재 00 주식회사인 곳의 사장님으로 계시다가요. 큰오
빠는 6·25 사변 때 행방불명 되었어요. 그때 고려대학교 졸업반
이었어요. 근데 그때 나라에서 징병 다 오라 해서 가서, 그래서 
우리 부모님이 화병으로 돌아가신 거예요. 69세에 우리 아버지
가 화병으로 돌아가시고요. 
우리 엄마는 86세에 돌아가셨는데요. 점심 잡수고 낮잠 주무시는 
제2장 정동옥   
51
시간에 돌아가셨어요. 나는 어젯밤에도 우리 엄마 생각을 했는데, 
어젯밤엔 몸이 조금 안 좋은 것 같더라고요. 내가. 나도 이렇게 죽는
가 싶어 약을 먹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까 개운하고요. 너무 
허무하게 돌아가셨어요. 우리 오빠 00제약 주식회사 회장인데
도 약 한참 안 잡수고 건강하시고, 얼마나 건강하셨는지 몰라요. 
매일 새벽기도 가고요. 나는 우리 엄마가 그때는 침대가 없잖아
요. 엄마가 반듯하게 누워서 자는 걸 못 봤어요. 평생을 베개 
베고 기도하는 모습이었어요. 우리 엄마는 예수를 안 믿었대요. 
예수를 안 믿는 집에서 우리 외할아버지가 우리 할아버지하고, 
옛날에는 할아버지들끼리 맺잖아요. 
이모가 한 분 계셨고, 그밖에는 더 기억이 안 나는데 이모님이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살림살이를 도와주고 우리를 다 키워주셨어요. 
가족사진에 보면 내가 이모 옆에 요래가 있는데, 우리 이모님이 
우리 집에 와서 예천에 병원 할 때 와 계셨고 외할머니도 우리 
집에 와서 있었고요. 
그러고 언니가 하나 있고, 언니는 돌아가신 지 2년 됐어요. 우리 
언니는 공부를 많이 못 했어요. 암만 아버지가 의사고 뭐래도 큰오
빠 둘 시켰고 절 시켰죠. 전 셈이 많아서 언니한테 제가 양보를 
안 하거든요. 그래서 간호사가 됐죠. 큰언니는 유아 전문 나와서 
지금 이화여대 아닙니까. 교편 잡으시다가 돌아가셨죠. 바로 위에 
언니는 공부를 많이 안 했으니까 시집을 일찍 갔죠. 그래서 그 아이
들이 조카들 아닙니까. 다 잘살아요.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공부를 
많이 한 건 아닌데 자식들이 그렇게 잘하더라고요. 물론 자기 엄마
도 잘해야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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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사진 8> 안동여중고 시절 
풍기초등학교 나와서 안동여중, 여고 갔죠. 그래서 서울로 시
험 치러 갔죠. 저는 어디를 가나 활달하고 리더쉽 있고 어디든지 
가도 뒤에 쭈그려서 남 하는 거 보고 그러진 않아요. 지금도 
그렇지만 어딜 가든 앞장서고 내가 해야 하고 그렇다고요. 내가 
잘나서가 아니고 위치가 그래 돼 있어요. 반장 이런 거 다 하고, 
지금도 내 생활이 그렇잖아요. 어디를 가든 앞장서니까요.
▮ 간호전문학교·수간호사 생활, 파독간호사 지원 
집안이 의료 계통이다 보니 지금은 간호 대학이지만 그때는 간호 
제2장 정동옥   
53
전문이거든요. 그러니까 1년만 더 하면 약사가 얼마든지 돼요. 제 
친구 약사 된 사람 두 사람 있는데, 저는 약사보다 간호사가 좋아요. 
전 의사는 싫고 간호사가 너무 좋았어요. 일 너무 좋아요. 
<사진 9> 메디컬 간호전문학교 졸업 
(현 국립의료원)
의사는 아버지가 의사였으니까 그렇고, 또 오빠는 약사고요. 간
호사가 더 보람 있고 좋더라고요. 졸업하고 이제 서울로 메디컬 
시험 봐서 들어갔으니까요. 내가 약사 되고 싶으면 그때는 뭐 쉬웠
잖아요. 1년만 더 하면 되는데요. 오래 있었어요. 수간호까지 하려
고 하면, 내가 57년도에 졸업했고 8~9년쯤 해야 하거든요. 수간호
5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사는 보통 해서 되는 게 아니었어요.
저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운영되었던, 메디컬에 있었어요. 지
금 국립의료원이잖아요. 거기에 학교를 나왔으니 거기에서 모집했
어요. 제가 수간호사로 일했는데, 메디컬센터에 모두 시험 치러 오
고 이러니까 가고 싶잖아요.
그 시절엔 독일이고 뭐고 외국에 나간다고 하는 것은 대한민국에 
있을 수 없잖아요. 돈도 그렇고 패스포트가 안 나오잖아요. 대한민
국에서 여권을 안 해줬잖아요. 그땐 이런 게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 대구만 해도 여권이 발부되어서 가긴 갔다 왔는
데 서류가 없는 광부들이 몇 명 있어요. 저도 그랬어요. 완전 1차로 
간 사람들은 서류가 없대요. 그래서 이제 보증을 서 가지고 했죠. 
제가 독일 갔다 왔다는 서류가 없어요. 미리 간 사람은 몇 명 있어
요. 대한민국의 광부들, 간호사들은 인정이 안 되죠. 그 서류는 너무 
오래되어서 63년부터 돼 있었거든요. 
내가 보니까 나는 66년에 갔다 왔고 내가 제일 빠르다고 그랬는
데, 63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이랑 육영수 여사랑 막 울고 할 때 전 
없었거든요. 그건 64년도였어요. 왜 갔는지 몰라요. 패스포트가 없
으면 안 되잖아요. 그죠. 그때는 어떻게 여권을 발부해서 갔는지 
몰라요. 
그때는 나라에서 나라, 저 갔던 시기는 나라 대 나라거든요. 박정
희 대통령하고요. 박정희 대통령이 온 세계 다니면서 그걸 다 해도, 
우리나라를 도와주는 나라가 하나도 없었잖아요. 못산다고, 뭘 믿
고 해주느냐 그렇게 해서.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랑 광부들 막 
울고 독일 대통령이 감탄을 했지요. 자기네들 인력도 부족하고 해서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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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담보해서 준거죠. 말하자면 팔려 간 거죠. 나가고 싶어도 
나갈 기회가 안 되잖아요. 돈보다도 여권이 있어야 나가죠. 
<사진 10> 메디컬센터 수간호원 시절
그러니 얼마나 좋은 기회가 되겠어요. 좋은 기회가 되니까 오빠가 
바람도 한 번 쐬고 3년 계약이니까 네가 하고 싶으면 가거라 해서 
갔고 우리 친구들은 캐나다로 많이 갔어요. 그때 우리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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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안 계셔서 오빠가 주장 아닙니까? 그죠. 캐나다는 그때 개발지역이
거든요. 이민 가겠습니다. 사인만 하면 다 보내줬어요. 3년 안 지나
도 캐나다로 갈 수 있었는데, 우리 친구들 몇 명 갔어요. 저도 갈라
고 다 썼거든요. 근데 우리 오빠가 안 돼, 대한민국에 살아야 한다고 
이랬어요. 우리 오빠만 허락했으면 저는 지금 캐나다에 있었을 거예
요.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르지만요.
원해서 갈 때는, 아 그 사진이 없구나. 저 공항에 갈 때 우리 
엄마, 우리 아버지, 우리 오빠 나와서 막 섰는데 그 사진이 어디 
갔는지 없네요. 가는 나는 좋은데 우리 엄마랑 조카들은 막 울었다
고요. 그때는 비행기 타고 어디 가면 죽는 줄 알았죠. 우리 엄마는 
시험 쳐서 합격했다 하니 조카들하고 막 울고 그런 게 아직도 눈에 
훤하네요. 내가 합격했다고 오니까, 우리 오빠 애들이 5살, 6살인데 
우리 엄마는 막 통곡을 하고 우는 거예요. 
엄마는 독일이 어딘지도 모르고 우리 엄마 입장에서 실컷 키워놓
으니까 간다고 하니까요. 못 본다고요. 독일 가는 비행기장에 우리 
엄마, 오빠, 조카 뭐 올케 이모까지 나온 사진요. 근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 독일입국과 파독간호사로 임무 수행
독일 도착했을 때, 프랑크푸르트 1차로 갔거든요. 1966년 1월 
20일 날, 간호사로서는 1차예요.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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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1> 정동옥 씨의 여권 (1996년 1월 20일)
독일에 126명이 딱 함부르크에 도착하니까 비행기에 배치가 다 
되어 있죠. 배치를 자기네들끼리 다 했죠. 우리는 가라 하면 가는 
거고요. 저는 저 혼자 OOO호스피탈에 갔어요. 그때 초창기니까 
독일의 그 많은 병원에서 서로 달라고 그랬죠. 
수간호사인 것보다는 126명이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에 도착
을 해 놓으니 그때는 인력이 부족해서 서로 데려가려고 하는 상태이
기 때문에 한 병원에 한 둘, 그러니까 거기 가서 알게 되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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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사진 12>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착 환영식 
프랑크푸르트, 뷰로호스피탈이란게 한국으로 치면 시민병원이거
든요. 시민병원이 그러니까 제일 좋은 병원이죠. 제가 제일 좋은 
데 있었어요. 전부 얘기 들어보면 시골에 갔고 추천하는 그 사람은 
시골 병원, 암만해도 대한민국같이 큰 시골보다 그런 데는 고생을 
좀 한 모양이더라고요
나는 간호사이니까, 간호사에 대한 내 임무만 하면 되는 건데 
우리가 126명이 1차로 타고 갔거든요. 여기 나오지만, 그래서 비행
기 도착해가 일본 가서 갈아탔어요. 그때는 직행이 없었어요. 가서 
딱 내렸는데 126명 1차로 갔기 때문에 126명이 다 흩어졌어요. 
한 병원에 2명도 안 주고요.
통계로 말하면 지금까지 독일 간호사로 갔다 온 사람의 숫자가 
한 천 이삼백 명 된다고 하거든요. 정확한 숫자보다도 천 얼마지?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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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은 아니지 싶어요. 근데 광부들은 그때, 우리는 칠 대, 육 대 일이
었거든요. 그 시절에 독일 간다고 하는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직원
이 많았는데, 그때 광부 김홍규 씨 만나서 얘기 들어보세요. 한 이백 
대 일이었대요. 그런데 광부로 가는 거는 광부가 아니었어요. 통계
로 치면 열 명 중에 한두 명이 광부였고, 일곱, 여덟 명은 다 직장에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우리
는 내 직업이니까 임상 다 끝난 상태에서 케어만 하고 내 지금 일하
면 되는 건데, 광부는 그게 아니잖아요. 이천 미터 갱 안에 들어가서 
죽은 사람도 있고, 우린 죽은 사람 없는지, 있는지 몰라요.
우리는 가서 6개월 동안 언어를 배웠어요. 독일어요. 6개월 딱 
되니까 영어도 한마디도 못 하게 하고 독일어 하게 하고 그래서 
독종이다. 이러면서 욕도 좀 하고 욕 아닌 욕 하고 그랬죠. 6개월 
해서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고초가 많았어요. 
독일어는 휴식 시간에 점심 먹고 6개월간 배웠어요. 독일 교수가 
우리한테 처음엔 영어를 좀 하다가 6개월을 가르치더라고요. 영어 
하면 우리가 조금 알아듣잖아요. 잘은 하지 않아도 배웠으니까. 근
데 6개월 지나고 나니까 영어는 한마디도 못 하게 하더라고요. 제가 
제일 어려웠던 건, 아침에 모닝 케어 할 때 8시부터 9시까지 병원마
다 스테이션 간호사 그게 있거든요. 1시간 동안 앉아서 그날의 일을 
다 기록하고 전화가 오잖아요. 너 가서 전화 받고 와. 그게 제일 
싫은 거예요. 그건 받고 답하고 알려줘야 하잖아요. 지금도 생각하
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싫어요. 지적하는데 가서 받고 와 가서 어떻
게 했다 얘기를 해야 하는데, 아직 얘기하지도 못하는데. 저는 독일
에서 그게 제일 고민이었어요. 그렇지만 간호사는 주어진 일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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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주사 놓고 약 주고 이런 거야 얼마든지 다 할 수 있잖아요. 
저는 또 수술실에 오래 있었어요. 수술실에 오래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편하게 있었죠. 외국인이라고 차별하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그거 하나는 참 존중해줘야 해요. 차별 없고, 검소한 
거요. 독일 사람들 얼마나 검소합니까. 
제가 갔을 때 요새 대한민국 시내의 요양병원 있듯이 그렇더라고
요. 제가 프랑크푸르트 제일 좋은 병원에 있었거든요. 빌 호스 파텔
이라고, 길만 건너면 요양병원이 있고 여기서 근무하고 저기서 또 
근무하고 그랬죠. 그러면 잠은 언제 자고? 의심이 나겠죠. 그런데 
독일은 12시간이 근무시간이에요. 임무 계통이 8시간인데, 요새는 
모르겠지만 저 갔을 때는 12시간, 2부 교대에요. 미국의 미션, 거기
는 8시간 근무지만 3교대인데 독일은 12시간 근무예요. 점심 먹고 
1시까지는 기숙사 가서 자야 해요. 안자면 그것도 벌금이에요. 벌금 
내는 게 아니고 규칙이에요. 기숙사는 혼자고, 더블은 없어요. 독일
은 같이 자는 법이 없어요. 각자 싱글로 자고 나와서 또 근무하고, 
그리고 또 들어가고 그러죠. 그럼 기숙사에서 병원까지 오려고 하면 
새벽에 5시에 나오잖아요.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열심히 하면 우리
도 잘살았을 거다 그러잖아요. 제가 봤을 때 독일과 대한민국의 
생활은 차이가 100년 난다고 했어요. 그런데 100년이 아니라 50년 
만에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살게 됐죠.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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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3> 독일병원 근무 중 독일간호사와 기념촬영
그리고 제가 계약한 병원에서 일하고 길만 건너면 요양병원이 
있었거든요. 거기 가면 솔직한 얘기로, 우리가 계약하고 받는 페이
보다 더 받거든요. 꼭 뭐 내가 돈 벌러 가는 것보다도 지루하니까, 
그것만 해도 충분하니까. 그래서 요양병원에 가서 제가 또 근무했어
요. 거기서 근무할 때 주로 노인들이 밤에 잘 죽잖아요. 줄초상 하는 
게 있어요. 그러면 독일 간호사하고 둘이 근무를 하는데, 할아버지
가 죽든지 할머니가 죽든지 치우고 둘이 싣고 영안실에 갖다 놓고 
또 죽고 그렇게 하룻밤에 다섯 여섯을 치운 경험이 있어요.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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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날이 훤하고요. 
대한민국 그때는 이해가 안 됐죠. 부모 다 여기 맡겨놓고 보지
도 않고 불효자식들이라고 저는 이해를 못 했죠. 우리 한국은 
엄마 아빠를 기관에 맡기고 오지도 않는 그걸 이해를 못 했어요. 
간호사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어요. 그만큼 독일에서 우리를 
초청할 때는 간호사가 부족했거든요. 인력이 부족하니까 우리 갔을 
때도 베트남 같은 이런 데에서도 많이 와서 일하더라고요. 일 열심
히 했고 열심히 살았어요. 저는 수술실에 많이 있었어요. 물론 한국
도 그렇지만 독일 수간호사들은 한번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들고, 
진실하고 이러면 저 가라 저 가라 이렇게 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수술실에 오래 있었고 한국에서 메디컬 센터에 있을 때 아기를 많이 
받았어요. 그때만 해도 가정에서 가족계획을 잘 세워서 아기를 많이 
낳았어요. 하룻밤에 여섯 일곱까지 받거든요. 요새는 아기를 낳으
면 회음부를 가위로 딱 하잖아요. 근데 제가 수간호로 있을 때 회음
부를 보호한다고 받쳐서 아기를 댕겨서 뺐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하룻밤에 다섯 여섯 명도 받고요. 제가 결혼하고 안 그래도 요새 
오십견이 생겨서 아파 가지고 그게 이제 나이를 먹어서 나타나는구
나 싶어요.
한국에서 간호 학교 졸업하고는 3만 원 받았거든요. 근데 독일에
서는 60만 원 정도? 하여튼 갈 때 그 정도로 차이가 크게 났어요. 
그러니까 다들 기를 쓰고 가려고 했죠. 20배까지, 한 열몇 배 정도
까지는 차이가 났어요. 제가 생각하기엔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졸업
했을 때 3만 원 받고 4만 오천 원 받고 그랬는데, 지금도 대한민국 
간호사의 페이가 많지는 않죠. 수고하는 것만큼 의사들은 많이 가져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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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서. 우리도 약사 되고 의사 되려고 하면 편입만 하면 됐거든요. 
그때 그 시절에는 얼마든지 약사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었어요. 딱 
1년만 더 하면 됐거든요. 우리는 3년이고, 약사는 4년이잖아요. 
친구 몇 명도 약사로 가서 서울에서 약국 하고 그런 친구 두서너 
명 있었어요. 
저는 제 멋대로, 송금 안 했어요. 우리 집이 그렇게 가난한 집도 
아니고 제가 어디 보낼 데도 없고요. 가정이 있는 사람은 결혼하고 
간 사람이 많더라고요. 전 어디다 송금하겠어요. 송금할 필요도 없
고요. 저 풍족하게 즐기다 온 거죠. 간호사들은 결혼한 사람 몇 명 
없고 다 미스였어요.
제일 외로운 게 저녁만 되면 하늘 쳐다보고 울고, 음식도 난 괜찮
았는데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어요. 해만 지면요. 그때 정
훈의 안개가 유행했어요. 오빠가 보내주더라고요. 기숙사에 모여서 
막 울고 그랬죠. 그리움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다 그렇겠지만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 돼요. 한국이 그래서 참 조국이 그리운 
거예요. 조국밖에 그리운 게 없어요. 그 나라 얼마나 잘 삽니까. 
먹는 게 그립나, 생활하는 게 그렇나, 다 풍족하고 좋지만 단지 
내 가족, 내 조국 그거밖에 없어요. 많이 울었어요. 진짜. 해만 
지면 하늘 쳐다보고, 기숙사 모이면 막 울고 그랬어요. 지금도 
눈물 나요.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그렇죠. 
그래서 그다음에 들어오는 사람은 캐나다로 많이 갔더요. 내 독창
할 때 피아노 치는 사람이 경희의료원의 간호사였는데, 피아노도 
치고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몇 명이 친해졌는데 그래서 1차로 캐나
다 많이 갔어요. 저도 캐나다 가려고 다 썼는데, 우리 오빠가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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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된다고 해서 나왔죠. 그때는 캐나다, 이민 그게 자기 희망만 쓰면 
되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그걸 3년 계약을 했는데 못 채우고 갔잖아
요. 그래서 1차로 간 사람들은 욕 좀 많이 먹었어요. 그래서 그다음
부턴 그게 금지가 됐죠. 불명예스러운 그게 있었어요. 안 되는데, 
3년을 다 채우고 가야죠.
모임은 코리아 나이트라고, 저녁이라고 해서 한국 광부들과 간호
사들의 모임이 있어요. 그래서 훽스트 100주년 노래를 했다니까요. 
요새도 뭐 있겠죠. 한국인의 모임.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 되거든
요. 누구나 외국에 나가면 대한민국, 그래서 조국이 좋은 것이고, 
암만 우리가 미국 사람 좋다, 독일 사람 좋다 해도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대한민국 백성이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니까요. 내 부모
가 대한민국인이니까요. 조국이 그렇죠. 
그리고 한국에 제가 초콜릿을 많이 보냈어요. 거기는 선물이 일하
면, 환자들 퇴원하면 돈이 아니고 초콜릿만 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조카들도 다 컸지만, 고모 독일에 있을 때 초콜릿 실컷 먹었다
고, 그 당시 대한민국에 초콜릿이 어디 있느냐고 해요. 지금도 모이
면 우리는 고모 때문에 초콜릿 실컷 먹었다고 말하죠. 한 달만 모으
면 상자로 이만큼 되거든요. 다 여기로 보냈지요.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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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4> 한국인의 밤에서 독창 공연 
저는 그룹으로 다니고 그러진 않았어요. 사진에도 있지만, 한국
인 밤하고 한독 제약회사에서 훽스트 100주년 기념으로써, 우리 
한국의 밤 해서 거기서 나가서 독창하고 그때 그랬죠. 그런 거 가끔 
한국 사람들이 주선하거든요. 그래서 광부 아저씨랑 간호사들 모아
서 수소문해서 저한테 왔더라고요. 그래서 크게 노래는 못해도 한국
말로 아리랑 부르고 그랬죠.
저는 어디를 가든 적응 잘해요. 적응도 잘하고 남하고 대화도 
잘하고요. 성격 자체가 저는 혈액형이 O형이거든요. 용감한 기질에 
씩씩하고요. 그래서 독일 근무할 때도 독일 간호사들이 자기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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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크잖아요. 근데 우리는 요래 조만하고 예쁘잖아요. 안 예뻐도 자기
들 보기엔 예뻐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귀여움 너무 많이 받았어요. 
독일인은 금요일 되면 손님 이래 초청하는 그게 없는데, 저는 금요
일 날, 남의 집에 초청받아가 가면 꼭 남편이 앞치마 걸고 자기가 
이 음식 다 했다 하고 맛있게 먹으라 하고 그랬죠. 저는 독일의 
수간호, 저도 수간호였지만 거기 가면 하수 아닙니까. 굉장히 귀여
움 많이 받았어요. 자기네들 우리 볼 때 덩치도 작아 보이고 그렇잖
아요. 자기들은 덩치 크고 하니까요. 그래서 이뻐하고, 참 재미는 
있었어요.
독일은 11달 일하고 한 달은 자기 맘대로 여행하려면 하고 돈을 
벌려면 벌고, 외국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고 그런 조건이 있었어요. 
시스템이 좋기는 좋죠. 그리고 저는 양식이고 뭐고 다 잘 먹어요. 
못 먹는 애들은 진짜 못 먹거든요. 그래서 제일 그리운 게 김치인데 
김치가 어디 있어요. 슈퍼에 가면 케베츠(cabbage) 있잖아요. 
그거 가지고 김치 담아놓고 그랬죠. 기숙사에 도둑은 하나도 
없는데 오직 김치 도둑만 있었어요. 
여행 많이 다녔죠. 근데 여행은 12달에 11달은 일하고 1달은 
돈 벌려면 벌고 여행하려면 하고 그랬어요. 제도가 아주 잘 되어 
있어요. ‘깐즈’는 한 달 동안이란 뜻인데, 그동안 영국이다 로마다 
다 가봤죠. 그리고 저는 재작년까지만 여행을 많이 했어요. 여기 
와서 합창단이 있으니까 영국도 가고 미국도 가고 캐나다도 가고, 
이렇게 몇 년 전에 좀 다녔어요. 
캐나다에 이민을 받았어요. 종이가 왔더라고요. 그때는 신청만 
하면 보내줬어요. 여행 가는 거죠. 여행 가서 거기서 완전히 사는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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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죠. 저는 제 친구 하나 갔거든요. 친구가 가자고 했는데 저는 도저
히 그게 안 되더라고요. 거기 가면 완전히 살아야 하고 또 우리 
오빠는 안된다 했으니까요. 저는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전 약사보
다는 간호사가 좋아서요. 전 제 직업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어요. 
▮ 귀국 후 홀트양자회·제일모직 의무실 근무 
제 여권 보면 알지만, 독일에서 70년대 귀국했거든요. 그때 와 
가지고 홀트양자라고 있어요. 지금은 없어졌어요. 삼덕동의 여기 
대학병원 바로 길 건너에 교육관이 있었는데 그게 없어졌어요. 거기
서 2~3년 일하다가 제일모직으로 갔어요. 
독일에서 귀국해 저는 가만히 못 있으니까 한 달 쉬고는 홀트양자
 여기에 미혼모 애들이 오거든요. 미혼모 애들이 오면 아이를 
한 가정에 하나씩 케어하는 거에요. 다니면서 다 돌봐야 하잖아요. 
예를 들어, 30가정이면 다 다니면서 우리가 우유도 주고 기저귀 
주고 수고비 주고 이래서, 아프면 제가 데리고 대학병원 가야 하고 
그랬죠. 대학병원 가면 최OO이라는 소아과 의사가 있어요. 삼덕 
교회 장로님, 최OO 장로님 유명하잖아요. 그분이 우리 아버지 후
배라, 우리 아버지를 너무 잘 아는 거예요. 제가 선배님 딸이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재밌게 지냈는데요. 이렇게 지내면서도 다시 독일에
도 가고 싶어서 미치겠는 거예요. 그래도 살았다고 김포공항에 딱 
내리니까 먼지가 내 입으로 다 들어오는 것 같아서. 한 2, 3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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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가고 싶어서 오빠한테 가면 안 돼요? 하고 대사관까지 가고 했는데, 
결국은 못 갔어요. 그 시절에 그랬는데 얼마 있다가 가고 싶어서 
가족 말고 친척들이랑 2번 여행 갔다 왔어요. 근데 가니까 또 그게 
아닌 거예요. 그 뒤에 제일모직 의무실에 들어갔어요.
제일모직은 침산동에 있었는데, 제일모직 의무실에서 간호사를 
2명 뽑는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2명 뽑는데 200명이 왔어요. 제 
실력도 경력도 말할 것 없이 좋지만, 제일모직이 상공회의소에 속해 
있잖아요. 상공회의소 회장님이 나를 추천해서 일하게 됐죠. 상공
회의소 소장이 요새는 아니지만, 그때는 빽이었거든요. 해! 하면 
꼼짝 못하고 하는 거죠. 요새도 그렇지만 병원은 페이가 적어요. 
근데 제일모직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우가 좋았죠. 병원이 30만원 
주면 여기는 50만원 줬으니까요. 의무실이니까 일도 편하고 대접도 
받고, 그래서 이병철 회장님 온다고 하면 한 달 전부터 그 사람 
온다고 청소하고 그랬어요. 이 사람은 새벽 5시가 되면 꼭 혈압을 
재요. 그래서 제가 혈압도 2번 재 드렸죠.
한국에 돌아와서 지금까지도 열심히 내 생활에 충실하며 살았어
요. 그래서 제가 70년대 귀국하자마자 저 화원 자동차 있잖아요. 
거기서 운전면허를 따는데, 다 남자들 딸 때 여자는 딱 둘이 있었어
요. 그때 운전면허를 땄죠. 대구에서는 제가 1호입니다. 여자치고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제가 이 나이에도 끄떡없이 운전하고 있잖아
요. 늦게 배우고 그러면 안 해야죠. 운전하는 게 저는 좋아요.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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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업주부와 학부모 활동 참가
제일모직 들어가 가서 3년 있다가 늦게 결혼했어요. 제가 독신주
의자는 아닌데, 30이 넘어서 늦게 했죠. 아들 하나 낳았거든요. 
얼마나 감사해요. 저는 결혼할 때 아기를 못 낳는다고 하고 갔거든
요. 그런 각오까지 다 되어 있어서 갔는데, 아기를 주시더라고요. 
우리 아들이 마흔일곱인가, 여섯인가 다섯인가 그래요. 손자를 두 
명 주셔서 한집에 살아요. 
중매혼으로 36살에 했나 그랬어요. 아는 사람 통해서 했죠. 여기 
와보니까 저를 아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제가 고향이 풍기잖
아요. 지금 다 돌아가셨지만, 풍기에서 오신. 결혼할 때, 여기서 
결혼을 했으니까요. 여기 시집을 오니까요. 풍기에 우리 할아버지
가 너무 잘 사셨어요, 옛날에는 우리 할아버지가 터줏대감이었죠. 
그 밑에 농작하시던 그때는 남의 땅 빌려 가 농사짓고 그랬잖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많이 아시던 가정이 서너 가정 있었어요. 막내딸이 
여기로 시집을 왔으니 교회가 뒤집혔었죠. 
10살 차이나는 남편은 사업하시고 잘 살았죠. 아마 이 교회에서 
제일 잘 살았지 싶어요. 사귈 새가 없어요. 그냥 만나 보자. 근데 
결혼하고 보니까 날 다 잡아놓고 결혼한 것이더라고요. 만나보
니 저보다 나이 차이는 열 몇 살 나고 저보다 더 젊어 보였어요.  
그분은 자수성가 한 분이고 16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 
많은 재산을 만들었으니, 성격 자체가 저랑 안 맞는 부분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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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어요. 그래도 아들을 낳고 나니까 저를 너무 좋아했고, 좋아서 
못살죠. 농담으로 남편이 도망가면 우리 오빠한테 가서 그때 일
억을 배상받는다고 하고 그랬어요. 가치를 따지면, 그때 일억이
면 지금 백억도 넘어요. 예를 들어서 그때 50사단 사령관 앞에 
아파트가 있었는데, 거기 제가 살았거든요. 도망가기만 가면 으
름장을 놓는 거죠. 그렇다고 제가 도망갔겠어요. 아들 낳고 잘 
살았지요.
결혼하면 일을 관둬야 하는데 갑자기 못 그만두잖아요. 의무실에 
조건부로 한 달은 일해주고, 그 이후로는 전업주부로 살았어요. 
OO 아빠가 보수적이고 샘이 많은 사람이라 남 앞에 서는 건 절대 
안 되거든요. 
그리고 제가 또 나오기 시작했죠. 제 성격에. 우리 아들이 6살 
때 00동에 있는 유치원에 가게 되었어요. 거기에 제일 유명한 
바로 거기 빨간 한옥에서 살았거든요. 우리 아들이 태어나고는 
남편이 자기 아들에 관한 건 돈 상관없이 뭐라도 하게 하는 거예
요. 그래서 아들이 6살이 되면서 영어 유치원에 갔어요. 영어 
유치원이 대구에서 제일 좋잖아요. 유치원 원장이 저보다 10살 
적은데, 그 원장 이름이 이00이에요. 그분이 자기 부모한테 물
려받은 재산으로 운영했죠. 거기가 사립으로서는 대구에서 제
일 좋았죠. 들어가자마자 원장하고 나하고 잘 맞아서, 아니 맞는 
게 아니라 그 사람도 처음 유치원을 시작한 거라 제가 총회장 
엄마가 된 거예요. 그때는 어린이집 클라스가 다섯 클래스, 총 
220명이 있었어요. 10년 동안 제가 유치원에 접종을 해 줬어요. 
요즘은 약을 못 사서 안 되지만, 그때만 해도 제약회사에서 한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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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사면 스무 명 맞거든요. 그 사람이 자기도 태어나서 OO 엄마 
같은 사람 처음 봤다, OO 엄마 같은 사람 세상에 없다고 하더라
고요. 지금도 못 잊죠. 
이제 이걸로 인연이 되어서, 그때부터 00 중학교 3년, 00 3년, 
어린이집 3년 내내 어머니 회장을 다 했죠. 그때 우리 아들 유치
원 입학한 이때부터 지금까지, 어디 가면 전부 다 회장이에요. 
어딜 가도 OO 엄마가 회장. 그래서 유명해졌죠. 근데 그게 지금 
생각하면 우리 애한텐 안 좋았어요. 자기는 싫대요. 너무 엄마가 
설치는 거죠. 선생님들 들어올 때마다 장OO 누구냐고 묻고 그
랬죠. 총회장 어머니 회장이니까 선생님들 다 알잖아요. 원래는 
제가 그걸 몰랐는데, 얼마 전에 아들이 저한테 얘기하더라고요. 
저한테 엄마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 받았는지 아냐 하면서 하
길래 알게 됐죠. 그동안 저는 그걸 생각도 못 했거든요.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요. 
00 중학교 3년을 하는데, 선생님들 소원이 뭐냐 하니까 제주
도 보내 달라 하더라고요. 그때 교장 선생님, 그리고 그때 선생
님들 제주도 가본 적 없다, 그런 학교는 없다 그랬죠. 근데 OO 
아빠가 능력이 되니까 그때만 해도 다른 건 못하게 해도 OO한
테 드는 건 얼마든지 괜찮았거든요. 심지어 미국도 보냈으니까
요. 00 초등학교 다닐 때 거기서는 학생들이 미국하고 자매학교
가 되어서 한 달씩 있다가 오고 그랬어요. 근데 00 들어가서 
어머니 회장을 하니까 그때는 교실에 선풍기도 없었고 아무것
도 없었어요. 그래서 선풍기 다 해주고 그랬죠. 제일 소원이 뭐
냐 하니까 학교장이 제주도 보내 달라 하더라고요. 잊어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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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도 못해요. 지금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선생이 76명 
있었어요. 근데 학교는 지켜야 하니까 3명 당직 빼놓고요. 그때
는 단체 운동복이 대유행이어서 38명에게 2만 원 주고 입혔죠. 
그리고 제주도 여행 3박 4일 몇백만 원 들여서 갔죠.
▮ 다양한 사회활동으로 풍족한 노년 생활 영위
우리 아들요? 공부를 많이 안 했어요. 전문대학을 나왔어요. 공부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공부하라 하면 미국이 아니라 
우주라도 다 보낼 수 있었는데 공부가 취미가 아닌가 봐요. 공부를 
안 해서…. 요새는 자기 사업해요. 요즘 삼대가 한집에 사는 집 별로 
없거든요. 어지간해도 삼대가 한집에서 사는 집, 행복하다 하는데 
행복해요. 처음엔 결혼시켜서 늦게 낳은 아들 며느리한테 밥이라도 
한 끼 먹어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일 년만 살고 내보내야겠다 
싶었어요. 결혼시킬 때는 그렇고…. 미국서 결혼했거든요. 
그래서 살다가 나가야 안 되나 하니까 아들은 엄마, 우리가 
왜 나가야 하는데? 우리가 왜 나가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20년 
넘게 지금까지 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며느리가 뭐 요새 시어
머니 좋아하는 사람 있나, 너는 안 살고 싶겠나. 지도 없고 저는 
집에 잘 안 있으니까요. 우리는 다 그래요. 세상이 다 그러니까
요. 한 일주일이라도 안 나가려고 해서. 한 세 번 실패하고 같이 
사는 거예요. 요샌 제가 좋아요. 저들도 좋지만, 같이 사니까 
제가 관리비고 뭐고 다 해주잖아요.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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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 아빠는 남 앞에 서서 막 하는, 요새같이 이런 활동 절대 못 
하게 하죠. 돌아가시고 아이고 이제 내 세상이 온 거죠. 61살에 
새로 활동하기로 했어요. 모임이 많아요. 00 방송,  대구 총 여전
도회, 00기독교총연합회라고 있어요. 그 00 총사무실이 00교회 
5층에 있어요. 거기 초대회장이고, 00 여전도 연합회라고 있어
요. 여기가 00구 아닙니까. 기독교로서는 00 여전도회 연합회
가 23년 짼 데 거기도 초대거든요. 
남 이해 잘하고 공부는 뭐 날 때부터 보고 배우고 그게 그런데, 
요새 노인 시대 아닙니까. 저는 배웠다기보다 이 나이에 저만큼 
배운 사람도 드물더라고요. 어딜 가도 드물고요. 여 교회에서 
노인 70세 이상 되는 사람 70, 80명한테 교육 아닌 교육을 23년
째 하고 있거든요. 소망부라고 해서요. 
처음엔 웃음 강사로 제가 자격증을 땄으니까, 웃음 강사로 
교육을 다 했죠. 또 지금까지도 웃음이 얼마나 사람한테 긍정적
이고 좋습니까. 서울대학병원 가면 웃음 강사가 있잖아요. 금요
일마다 환자들 그렇게 교육하고 하는 거 오래됐어요. 나도 노인
들 65세 이상 사람들 너무 많아서 70세로 낮췄는데, 70세도 
우리 소망부 거기서 2달에 한 번씩, 옛날에는 매주 제가 그랬는
데 23년째…. 
강사를 저 혼자만 할 수도 없고요. 하면 하지만 제가 교회 
사람들 좀 하라 그래서, 00은행 지점장 하시던 권사님 ‘저도 
강의 좀 하게 해주세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 더블로 하는 거예
요. 그분이 지금 우리 소망부에 강의를 맡고부터 지점장 재작년
에 그만뒀거든요. 행복 아카데미 웃음 치료, 사무실 내어 가지고 
7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돈을 얼마나 버는지 몰라요. 자기는 어디 가서 한 번 하면 50만 
원, 30만 원. 저는 그건 이제 나이 많아서 할 수도 없고 그분은 
젊었으니까요. 
제가 소망부 이거 맡고 그때 자격증을 빨리 땄어요. 웃음치료사고 
수성 아카데미 있잖아요. 거기서 땄어요. 웃음치료사는 저 짝 만촌
동에 웃음 치료 학교가 있었잖아요. 거기도 제가 1회거든요. 처음 
배워야겠다 싶어서요. 우리 집에 사진도 어디에 있지 싶은데, 그때 
몇 기생 그런 거 있잖아요. 전 1기생이었어요. 그때 강의료가 35만 
원으로 굉장히 비쌌어요. 어쨌든 좋다 그렇게 하고서는 냈는데, 가
니까 큰 거울을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주더라고요. 처음에 거울 보고 
거기 서서 웃으래요. 그러면 무조건 웃는 거예요. 웃음도 머리에 
입력이 돼야 하거든요. 강의도 무슨 이런 강의가 있나 싶었는데, 
그게 교육이에요. 말하자면 뭐든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저 웃는 거예요. 시시덕거리던 하하 호호하던가 그런 강의를 시키
더라고요. 그게 제 머리에 입력이 딱 되니까, 웃음이 보상 계라고 
뇌 왼쪽 여기에 있어요. 그렇게 그게 제 몸에 배니까 전 지금도 
그래요. 웃음보 한번 터졌다 하면 참지를 못했어요. 그때는 할머니 
미쳤나 할 정도로 웃었어요. 지금도 웃음보 터졌다 하면 혼자 막 
웃어야 하죠. 실컷 웃는 거, 그게 참 제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신체적으로 요. 웃고 나면 얼굴도 붉어지고 온 몸이 다, 
강의하는 목적도 그건 거에요. 제가 섰다 하면 웃자 해서 무조건 
웃자하면, 모두 다 얼굴이 처음엔 날 잡아먹어라 하면서 쳐다보더라
도 막상 다 웃고 나면 마음이 열리는 거에요. 그래서 웃음이 역시 
좋구나 싶어요.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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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000 단장을 맡고 제가 성악을 하는데, 지사장님하고 
어제도 금요일에 가서 사진도 찍어왔는데 하룻밤 자고 왔거든
요. 그 가족들하고 유대관계가 너무 좋아서 1박하고 왔는데 토
요일 날 왔거든요. 지사장님이 예총 회장을 하셨거든요. 지금 
000 지사장을 하시다가요. 그분들은 다 미국에서 제일 좋은 공
부 다 하시고, 000 지사장으로 임명되어 저하고 같이 8년을. 
너무 친분도 좋고 그 가족 사모님도 선생이라 경북대학 나와가
지고, 지난 해에 퇴직하셨어요. 따님하고 아들하고 한 가족이나 
마찬가진데, 날 엄마 엄마 하거든요. 참 좋아요. 내 삶이 기쁘고 
좋고요.
▮ 대구·경북지역 파독모임 회장으로 모임 운영
파독모임은 지금 한 지가 5~6년 넘었거든요. 서울에 본부가 있거
든요. 사무실 와 보셨지만, 전엔 사무실이 없었어요. 그런데 처음에 
하시던 회장님이 다 같이 시청에 가서 우리가 이런 모임이 있는데 
사무실을 하면 좋겠다고 사정을 했죠. 청을 넣었죠. 하나 주시면 
안 좋겠어요 하고요. 그만한 여유는 없고요. 제가 찾아간 게 아니고 
있다 하길래 가봤죠. 가보니까 여자는 하나도 없고 간호사는 없고, 
전부 광부 할아버지들만 10명 식당에서 모여서 그걸 하고 있더라고
요. 초대했던 회장님이 어느 교회 장로님인거에요. 나한테 안을 내
더라고요. 권사님 나오시면 어떻겠냐고요. 나가보니까 대한민국 파
독 광부 간호사들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거든요. 우리 다 죽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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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없잖아요. 아주 귀한 모임이고 제가 반생을 살았던 모임이고요. 나
가보니 좋더라고요. 할아버지들도 좋아 보이고, 처음엔 참 좋아 
보였거든요. 제가 좋으면 다 좋은 거예요. 
<사진 15> 파독광부·간호사 모임 월례회의 (2018년 1월 10일)
한 달에 한 번씩 식당에 모여서 점심 먹고 헤어지고, 별 그게 
없었어요. 그랬는데 그게 벌써 5년인가 6년인가…. 권영진 시장님
이 이 사무실을 돈 한 푼 안 내고 공짜로 주셨잖아요. 전기세도 
저희가 안 내고 은행에서 다 내줘요. 우리 아지트가 아니고, 사
무실이 잘 형성되어 있잖아요. 한 분이 1년 하시고 나가셨고, 
다음 김홍규 씨가 받아서 했고 지금 제가 3년을 맡아 하거든요. 
그러니까 재작년에 제가 이걸 맡았는데 막 사정을 해서, 처음에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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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한 번 모이면 만 원을 내요. 돼지국밥 먹고 술 먹는 할아버지
들 있잖아요. 돈이 없잖아요. 만원 내면 요즘 식사 뭐 하겠어요. 
맨날 안 넉넉한 거예요. 모자라고 그래서 재작년에 제가 회장을 
맡으면서 몇백만 원 들여서 식탁하고 식탁 의자, 물건 다 샀어요. 
그리고 술도 막 상자로 들여놓고 실컷 먹으라고 그러고 나니까 여유
가 있는 거예요. 
점심때 되면 나가서 안 먹고, 밖에 나가도 먹을 것도 없어요. 시켜 
먹자 그래서 본죽 시켰죠. 그전에는 다른 데서 뭐 먹고 했는데, 본죽
만큼 맛있는 것도 없더라고요. 그리고 그 외에도 가끔 명절이다, 
이럴 땐 행복식당, 두류공원 거기 가서 갈비도 사드리고요.
아무나 오고 싶어도 못 오는 데에요. 광부 아니고 간호사 아니
면 못 오는 거예요. 자격이 없잖아요, 그렇죠. 전 그래서 이 모임
이 너무 좋은 거예요. 제가 살았던 그거고요. 그래서 제가 돈을 
얼마를 내도 하나도 안 아까워요. 재작년에 제가 맡고는 참 보니 
기가 막히더라고요. 그래서 몇백만 원 들여서 다 했잖아요. 
작년부터 생일축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자꾸 눈에 
들어오고 머리에 들어오고 그래요. 남 생각도 못 했던걸요. 작년부
터 몇십만 원 들여서 생일선물 제가 자비로 샀어요. 생일 맞은 사람
들을 다달이 제가 선물을 직접 주고 그랬더니, 예를 들어 저는 만 
원짜리를 샀다 하면 그 사람들은 오만 원을 내는 거예요. 저는 미안
했죠. 선물 더 좋은 걸 살 걸 싶었어요. 작년엔 그렇게 지냈어요. 
그 돈이 20명 넘고 그러니 이백만 원, 백만 원 되잖아요. 그런 식으
로 초창기엔 제가 100만 원 내놓고 50만 원 내놓고, 놀러 갈 때도 
몇십만 원씩 내놓고 떡하고 뭐하고 기증하고 돈이 몇백만 원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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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요. 제가 현대백화점 잘 가니까 지난주에 현대백화점 가서 선물을 
암만 고르려고 보니 돈 만 원 짜리 별것 없더라고요. 포크하고 수저
하고 한 세트 만 오천 원짜리가 있더라고요. 그걸 몇십 개 사서 
생일선물이라고 주니까 그렇게 좋아하데요.
모임에서는 지난날 얘기도 하고 그래요. 저는 이 모임이 너무 
좋아요.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좋아서 하는 거고 마음도 사랑도 
바치잖아요. 사람이라 하는 건 진실하게 하는 거 다 알아요. 제가 
회장을 맡고 보니까 분위기도 좋고, 암만 내가 할머니라도 할아
버지들은 저를 볼 때 편안해 하시거든요. 
이번에도 뭐 만장일치로, 이제는 그렇다고 기어이 내가 못한
다면 못하는 거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총무님
이 제일 젊잖아요. 회장님이 하면 자기도 총무하고 안 하면 자기
도 안 한다 하는 거예요. 안 하면 또 어떻게 되는데요. 그 사람이 
다 문자 넣고 하는데…. 올해는 내가 할 테니까 내년엔 총무님 
회장 해라, 그건 또 내년 돼 봐야 아는 것이지만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독일에서 3년 생활의 의미는, 요점이 일밖에 안 했으니까요. 주어
진 일이 제일 좋았고요. 우리나라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직업이 좋았
어요. 내 생애에 전 봉사하는 게 좋고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잇는 
것도 좋았어요. 우리 동포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한 만큼 대가도 받고 
돈 벌러 가는 것도 포함되어 있죠. 일하면 대가는 받아야 하잖아요. 
무료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필요도 없고요. 처음에 갈 때는 다 돈 
벌러 가는 것이지만 그것만은 아니고요. 광부들은 돈 벌러 갔겠죠. 
그런 간호사들도 많겠지만 저는 이런 길이 있으니까 한번 가고 싶다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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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 거죠. 오빠하고 가정에서 한 번 가봐라. 그래서 시험을 친 
거니까요. 할아버지들 얘기는 전부 돈 벌러 간 거죠. 그때는 뭐 예를 
들어서 한국에서 50만 원 받는다고 하면 거기서는 700, 몇백만 원 
받았으니까요. 마르크로 치면, 독일은 달러가 아니고 마르크잖아요. 
환율이 그랬단 말이에요.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고요. 광부 아저씨들
은 열이면 열이 돈 벌러 갔지요. 그때는 외국이라고 못가죠. 가고 
싶다고 가고 뭐 그런 게 있나요. 비행기 삯도 없는데요. 
광부 아저씨들도 교수 된 사람도 몇 명 있어요. 지금 광부 간호사
를 유공자로 만들자는 일을 전개하고 있는데, 사실 진작 만들었
어야지, 지금은 너무 늦었어요. 자꾸 죽어나가잖아요. 
서울에 전체 사무실 있잖아요. 절 회장 하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75살만 돼도 해보겠지만, 광부로서는 공부를 제일 많이 
한, 고려대학교 교수로 있었던 양00 회장이라고 있어요. 그분은 
독일에서 공부를 더 했어요. 그래서 공학박산가 뭐 박사를 따서 
와서 00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다가, 그분이 회장을 3, 4년 더 
했거든요. 
저희가 참 운이 없어요. 유공자라도 만들어줬으면 저흰 자격 되거
든요. 예를 들어 파병 월남 갔다 왔던 사람도, 우리보다 더 못하다 
하면 이상할지 모르지만 다 연금 받잖아요. 근데 우리는 10원 하나 
없고 인정도 못 받고…. 
이제 인정을 해줄는지는 모르지만, 서류 넣은 게 얼마나 밀려가 
이러고 있는데, 국회가 저러고 있으니까 이게 통과가 되나요. 세월 
자꾸 흘러서 우리 다 죽으면 다 끝나는 건데요. 우리 사무실도 시장 
메시지 넣고 회장님 수고하신다고…. 우리 죽고 나면 저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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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필요 없는 거죠. 언제까지 사용하라고 할지 모르지만, 권영진 시장
님이 저런 사무실이라도 줘서 우린 또 감사하잖아요. 얼마나 
감사해요. 
제2장 정동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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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인력의 파독 시기와 특징 
간호인력의 파독 시기는 문헌을 통해 보면 3시기로 구분되고 
있음. 
제1시기는 1950년대 말부터 1966년 1월까지 민간주도의 시기
로 카톨릭 교회, 이종수 박사, 이수길 박사의 주선으로이루어
짐. 제2시기는 1966년 3월부터 1969년까지로 정부와 민간이 
동시에 주도하고 한국해외공사와 협력하여 파독하였음. 제3시
기는 1,2차 간호협정에 관한 시기로 1970년에서 1976년까지
로 정부주도의 시기였음. 
한국에서 간호인력 양성은 1957년을 전후로 간호고등기술학교
에서 간호과와 조산과로 나누어 교육됨. 이후 1962년 개정된 
교육법으로 간호학교가 초급대학 또는 전문학교 수준으로 승
격, 간호교육의 고등교육화, 전문화가 이루어짐. 
1959년부터 종교단체 주도르 독일로 이주하고 1965년 이후부
터는 독일의 간호사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던 간호사들이 파
견됨. 독일로 가기 전 6개월간의 코리아프로그램이라는 사전 
교육프로그램에 참여. 이론과 언어 중심의 교육으로 현장 교육
에는 한계.
독일의 간호사 시스템과 한국과는 차이를 보임. 한국의 간호사
는 ‘과자격화된 인력’이 송출된 것으로도 평가받음. 독일의 간
호개념은 간병 초점, 한국에서 간호사들의 수행하는 의료행위
는 의사 업무, 업무 차이로 간호업무에 대한 평가가 와전된 측면
이 있음.
  * 자료출처: 노명환(2014). 『독일로 간 광부·간호사: 경제개발과 이주 
사이에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현대사 연구총서 2, 
pp.151-211.
82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간호사의 근무조건과 임금 
간호사와 관련된 협정은 1969년 9월 22일 한국간호요원 독일 
내 병원 취업에 관한 절차 합의와 1970년 6월 26일 유자격 
한국간호사 및 간호조무사 독입병원 취업에 관한 협정이 존재
함.
구체적으로 간호사의 근무조건과 임금은 70년에 체결된 협정
에 명시되어 있음. 본 협정의 11조 1항에 의해 독일병원에 고용
된 간호사나 간호보조원은 독일 간호인력과 동등한 대우를 받
음. 고용계약은 독일법 적용, 모든 문제는 소속 병원에 제기함.
근무기간은 3년이고 중도해약은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하며 
기간만료 후 고용관계 연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
여야 함.
독일에 도착한 후 3개월 이내에 최소한 1개월간 독일병원에서 
취업을 위한 일련의 기술 훈련에 참가할 의무가 있음. 훈련 과정
은 독일어 교육, 독일 생활에 대한 일반상식, 독일의 공중보건, 
병원과 간호제도에 대한 해설, 근로계약에 의거한 권리 등을 
교육받음. 
 
  * 자료출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8). 『해외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자료집: 파독광부·간호사의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pp.209-211. 
제2장 정동옥   
83
간호사의 근무조건과 임금 
근무시간은 시기별로 차이를 보임. 1969년 1차 간호협정개정
에서는 주 46시간, 1974년까지는 주 42시간, 1975년까지는 
주 40시간으로 변화를 보임. 1주에 7일 근무하면, 2주째는 5일 
근무, 격주제로 주말 2일간 휴무형태였음.
간호사의 임금 및 근로조건은 노동조합과 고용주 협회간에 체
결된 연방임금 및 보상협정에 근거함.
기본급 이외에 지역수당, 자녀수당, 위험수당 등을 받음. 1972
년 기준 지역수당은 미혼으로 S급 도시일 경우 약 281.50마르
크, 기혼일 경우 355.50마르크, 자녀가 있을 경우 400마르크, 
정신병원 등은 100마르크의 위험수당이 지급됨. 
간호사들은 독일법에 따라 연금보험, 실업보험, 질병보험의 세 
가지 사회보험에 가입하여야 했고 후생복지제도로서 연간 24
일의 유급휴가를 받도록 하였음.
숙식은 병원에서 제공받았으며 숙식비는 병원에 따라 다르게 
제공되었음. 
  * 자료출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8). 『해외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자료집: 파독광부·간호사의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pp.209-211.
제3장 문종섭
의성 출신, 대학 중퇴 후 광부지원 
파독광부 사전 교육 참가
독일입국과 오버하우젠에서 파독광부 생활
독일 일상생활과 미래를 위한 예금적립
귀국 및 파독광부 참가모임과 자긍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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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 의성 출신, 대학 중퇴 후 광부지원 
저는 의성 시골에서 자랐는데, 우리가 6형제, 7남매인데, 아들 
여섯 형제 중에서 4번째입니다. 제일 위에 큰 누나가 있었고, 그 
밑으로 남자만 6명이었지요. 의성 시골에서는 그래도 잘 살았지요. 
우린 보리밥 먹고 그래 크진 않았어요. 쌀밥만 먹었지요. 잘 살았어
요. 머슴들이 농사지었고. 우리 초등학교 다니고 이때에는 100석씩 
했어요. 면 단위에서는 제일 잘 살았어요. 그래도 그때는 다들 어려
웠지요, 뭐. 돈 아예 뭐 대학 졸업해도 별로 앞이 안 보였으니까요. 
그래도 전 대학은 서울 쪽에서 했어요. 그때는 대학을 나와도, 제대
를 해도 취직하기 힘들었어요. 공무원 시험 치기도 어려웠고요.
전 1948년생으로 대학교 2학년 다니다가 해병대로 군에 갔지요. 
그때는 해병대가 24개월을 갔어요. 만 2년. 해병대로 가서 딱 훈련 
받다가 김신조가 넘어와 가지고 군대 생활을. 처음에는 24개월 갔
는데, 김신조 사건으로 만 36개월 군 복무를 채우고 나왔지요. 그때
가 70년도 12월 31일 날 제대를 했지요. 제대를 하고, 인자 복학을 
하느냐, 뭘 하느냐 하다가. 2월 달인가... 라디오를 딱 트니까 광부 
모집한다 이라데요. 그래서 바로 쫓아갔지요.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고 쫓아갔지요. 그때도 제 나이가 제일 어렸을 거예요. 결혼도 
안 했지. 집에 나이로 하면 스물다섯. 초창기에 갈 적에는, 광부 
경험 없는 사람들은 거진 60, 70프로가 대졸 출신들이었어요.
산격동 경북대학교 있는데 거기에 인력개발원인가 있었어요. 거
제3장 문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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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지금도 그 건물 있던데, 개발원 아니고 다른 걸로 바뀌었던데. 
2월 초에 시험 치고 2월 말쯤 경향신문에 합격자 발표. 한 달쯤 
있다가 났어요. 경향신문에 났어요. 그래가 인자 그때, 4월 달부터 
교육받고, 4월, 5월, 2개월 교육받고 71년도 6월달 2차 9진으로 
갔어요.
독일 간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리고 또 해외라 그러니까 
관심도 있었고. 그때가 저는 독일가서 2,000마르크, 1,800 내지 
2,000마르크 받았는데. 그때 150대 1쯤 됐어요. 환율 차이가. 요즘
은 유로화지만 그때 마르크는 1마르크가 우리나라 돈으로 한 150
원 정도. 그래 됐어요. 그런데 우리가 그때 한 1,800 내지 2,000마
르크 받으면은, 경찰이나 9급 공무원들 1년 봉급 정도 됐지요. 공무
원들이 만 이천 원씩 이래 받았을걸요.
처음 갈 때는 3년으로 계약하고 갔습니다. 그리고 오니까 벌어 
놓은 돈으로 집을 한, 두 채는 살 수 있었어요. 그렇게 갔다 와서, 
현대 그룹 입사 후 한 30년 근무하다가 퇴직했지요.
▮ 파독광부 사전 교육 참가 
71년도 6월달 2차 9진으로 갔어요. 귀국은 75년도. 5월달에 왔
어요. 한 4년. 만 4년쯤 있었지요. 원래 기한은 3년이요. 3년인데, 
그 일 잘하는 사람, 거기서 보면은 사고 치고 아프다 하면서 의사한
테 병가 가서 싸인 받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면 일주일씩 쉽니다. 
그런데 3년간 그런 행동을 안 하고 일 열심히 한 사람들에게는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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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끝나면은 더 연장할래, 한국 갈래, 묻습니다. 묻고. 일 못하고 꾀 
부린 사람들은 묻지도 않고. 착실하게 일한 사람들한테는 물어봐
요. 그러면 1년 더 있겠다 그러면 1년 연장해줘요. 연장해주고, 
인제 뭐 먹고 살만치 벌었다 싶으면 고향 생각나서 가겠다 그러면은 
보내주고. 그런 식으로 합니다. 거기서 결혼을 하면은 또... 간호사
들 있으니까 정착할 수 있었지요. 햇수 관계없이.
광부는 초창기에는 독일에서 진짜 광부를 보내라 이래 가지고 
반은 광부고 반은 학생 출신들이었지요. 그 시기가 이제 60년도, 
초창기 갈 땐 그랬고. 그러니까 이제 가서 그 사람들 일 잘하니까 
그때. 한국 사람이라 그러면 많이 받았지요. 1진에 한 120명씩, 
180명씩 이렇게 들어갔어요. 일은 열심히 했어요, 
독일 사람들은, 학교 딱 들어가면은 중학교쯤 되면은 정해져요. 
넌 어느, 무슨 공과 계통 가라, 넌 마이스타 그런 학교 들어가서 
졸업하면 어느 회사 들어가라 정해져요. 독일은 대학 들어가기는 
쉬워도 졸업하기는 힘든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노동
자가 부족했지요. 독일은 우리나라에서 광부가 가기 전에 유고, 터
키 등지에서 많은 광부를 데리고 왔지요. 하지만 한국에서 광부들이 
투입되면서 생산량이 엄청 증가했어요. 
한국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독일에서 터키 아들, 이태리 아들, 
이 사람들 많이 받았는데 외화 차관으로 인해 너희 나라는 실업자 
많으니까 돈은 빌려줄게 노동자를 보내라. 이렇게 해서 가게 된 것이
지요. 그렇지만 광부 일자리에서 정작 요직은 독일 사람들이죠. 감
독하고, 이런 사람들. 그 사람들 전부 독일 사람이고, 밑에 제일 
힘들고 막일 하는 사람들은 터키, 한국, 이태리 사람들이었어요.
제3장 문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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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때에는 해외여행 가기도 힘들었고. 또 유럽 쪽, 선진국. 
독일이라니까 갈라고 다들 그랬죠.
<사진 16> 서독취업자를 위한 송금예금 설명서 
당시 우리 갈 때에는 필기시험은 없었고 광부 아닌 사람도 갔는
데. 우리 앞에 선배 그리고 우리 뒤에 사람들은 광부 아니면 못 
갈 정도로 엄했어요. 우리는 운 좋게 광부 경험 없는 사람도 그때 
모집했더랬어요. 그때 많이 보내기 위해서 그랬는지. 또 운이 좋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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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지요, 우리는. 진짜 광부 출신 모집 같으면 우린 못 갔지요.
독일 가기 전에 교육은 서울 인력개발원 노동청인가 거기서 독일
어 공부를 한 달간 좀 하고. 강원도에 가서는 실제 광산에서 2주간 
교육받고 그래 갔어요. 신체검사 합격한 사람만 교육을 받았는데. 
고려대학교 옆에 거기서 교육을 한 4주 받았어요. 독일어하고, 안보 
교육 같은 거 4주 받고. 광산 교육을 한 3, 4주 받고. 실제 한두 
달은 교육 받은 택이지요.
▮ 독일입국과 오버하우젠에서 파독광부 생활 
출국할 때 독일 비행기가 왔어요. 우리를 실으러 와서, 이제 
여객선이 김포에, 그때는 뭐 저쪽에 인천 공항이 없었지요. 김포
에 오면은 백몇십 명 타면은, 그때 우리가 한 160명? 그때 한 
200명 됐을 거예요. 타면은 알래스카 갔다가 바로 독일로 날아
갔어요. 중간에 기착지, 여행자 태우는 건 없었고.
알래스카 거기 공항에 기름 넣으면서 또 내려가 좀 쉬고. 거기서 
다시 또 독일로 가고. 요즘은 중국으로 해가 절로 가면은 뭐 8시간, 
12시간 그러는데. 그때는 한 스물 몇 시간 걸렸을 거예요. 프랑크푸
르트 내렸어요. 거기 내리면은 인제 몇 명 온다는 연락받고 버스가, 
관광버스가 딱 대절해 있다가 내리는 사람 번호대로 불러가지고 
인원을 잘라서 이제 너는 어느 쪽으로, 너는 어느 쪽으로 가는 거죠. 
그럼 너는 어느 지역, 너는 어느 지역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오버하우젠 근처 스테어크라데(Sterkrade) 쪽으로 갔어요. 거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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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아니에요. 우리나라는 산에 광산이 있는데 거기는 산이 아니고 
시내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것. 평지에서. 그러니까 보면 일반 공장
같이 보이지요. 거기에서 샤크트(Schacht)라는 게 있어요. 우리나
라에서 보면 엘리베이터 같은 것을 타고 800m씩 내려가는 거지요.
<사진 17> 광부 여권 (출처: 파독광부 백서)
독일에 도착하고도 한 4주간 지상 교육을 받았어요. 거기에서도 
독일어를 배우면서, 4주간 끝나면은 이제 면담 비슷하게, 독일어 
할 줄 아는지 물어보고. 장비 이런 것 다 거기에서 교육받아요. 다 
가르쳐줘요. 사용 방법은 거기는 뭐 간단한 것만 하지요. 아까 말한 
샤크트라는 게 있어서 타면은 현장까지 지하로 내려가는 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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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우리나라에서 보면 엘리베이터 비슷하지요. 이거는 육지에서, 지상
에서 그러는데 거기는 지상하고 지하 내려가는 게 있어요. 그거 
타고 내려가요. 지하에 내려가면은 이제 또 전동차가 있어요. 열차 
같은 거. 한 칸에 몇십 명씩 타 고 쭉 가고. 한 30분? 갔을 거예요. 
타고, 타고. 그래 30분 가면 현장 내려가서 자기 일자리 찾아가고 
하는 거지요.
<사진 18> 광산과 샤크트 (출처: 파독광부백서)
일과는 하루 8시간. 그리고 또 안에 기계가 고장나면은 또 한 
세 시간, 네 시간 잔업을 하면서 기계 고칠 때까지 기다리고. 뒷일 
좀 해주고. 일은 인원 없는 데 우선 배정을 해주었어요. 너는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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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무슨 일. 일이 쉬운 데는 돈이 적고, 일이 힘든 데는 단가가 
비싸요. 일의 종류는 제일 막장에서 탄을 캘 수 있도록 다이너마이
트 터뜨려서 할 수 있도록 구멍 뚫는 사람도 있고. 보통 한 굴 길이
가 한 100m 됩니다. 100m 되고 넓이가 한 200m 되고. 독일은, 
그 탄층이, 우리나라는 굴곡이 있는데 거기는 편편해요. 기계가 왔
다 갔다 하면서 그냥 쭉 깎아 들어가는 거예요. 수평에서 독일은 
굴곡이 없어요. 
우리나라는 뭐 오르막 내리막 있고 거기에서 막 캐내는데 거기는 
안 그래. 기계가 ‘호벨’ 이라는 게 막 왔다 갔다 하며 깎아내지요. 
깎아 나오면은 거기에 고무밴드가 있어서 앞에는 밀고 나오면은 
거기에 실어서 자동으로 슈우욱 하고 저 한 100m 옆에 떨어지면 
거기서 또 싣고 나가고. 그래 가지고 어디 한쪽으로 모으지요. 모이
면 저는 그걸 운전했어요. 기계가 지나가면은, 뒤에 뒤치다꺼리. 
앞에 인제 슈템펠(Stempel)이라는 거 그걸 밀고 나가는 거. 그거 
했는데 그게 제일 위험하고, 단가가 제일 비쌌고. 또 이제 실어내는
데, 고무밴드 거 뭐 싣고 이래 내려가는데 거기서 찌꺼기 떨어지고 
하는 것을 이제 삽으로 퍼 올리는 사람들은 돈이 되게 적고. 또 
자재. 나무 침목 같은 거 이런 것을 실어 나르는 사람들도 좀 단가가 
약했고. 근데 일은 뭐 정해줘요. 너는 어디로 가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뭐 복불복으로 해줘요.
다시 작업을 이야기해 보면 굴진은 이제 기계가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한 5m 먼저 뚫고 나가는 거지. 길을 내주는 거지요. 이게 
한쪽으로 파고 들어가서 기계가 왔다 갔다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는 거지요. 한 7, 8m 이것이 양쪽으로 길을 내줘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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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8m 양쪽으로 해주면 이게 길이가 한 100m 되거든요. 그렇게 그 
기계가 나가면서 그 기계 호벨이라고 하는 것을 왔다 갔다 하면서 
깎아내는 거예요. 대패로 깎는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것이 톱니바
퀴 이렇게 가면서 털면 떨어져 가, 떨어져 가. 고무밴드에 그냥 막 
실려 나가지. 올라갔다가 깎고 내려오면서 깎고 이렇게 하면은 한 
1미터씩 나가요. 한 번씩 왔다가 하면은. 그래 그라면 계속 막 실려 
나가고 그럼 뒤에서 그걸, 천장에 바위가 안 무너지도록 하나하나 
지지대 받쳐가며 그렇게 나가는 거지요. 호벨이라는 것을 운전해서 
하는데 운전은 독일 사람이 하고. 뒤치다꺼리는 뒤에서, 기계를 앞
으로 밀고 나가게끔 하는 것은 터키, 한국인, 이태리 이런 사람들이 
하지요. 
저는 슈템펠(Stempel)이라는 일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기둥 같
은 거 세워서 나가는데. 독일에서는 슈템펠을 기계로 해요. 세우는 
것, 그게 한 개에 40kg이고, 위에 또 이것을 수평 잡아주는 게 20kg, 
60kg이지요. 그걸 하루에 40개씩 해야 되어요. 그게 한 개 길이가 
1미터씩. 그렇게 하는 게 40개, 아 10개, 4번 나가야 하니까요. 그걸 
하루 40개씩 해요. 슈템펠작업이 돈이 제일 많아요. 토요일, 일요일 
들어가면은 또 50% 플러스, 평일의 50% 플러스 주지요. 그래가 
150% 주지요. 그럼 그때 들어오라고 하면 일은 안 하고 이제 뒤치다
꺼리해요. 다음 주에 일할 수 있도록 이제 이상 있나 없나 그런 것만 
이제 보고하는데. 그때는 주말에 일하러 들어오라 하면은 좋다 했지
요. 그냥 놀다 나오는 것이고. 돈은 150% 받으니까.
작업 중에서 슈템펠이 최고 힘든 거지요. 슈템펠 조는 10명이 
되면 이제 독일 사람이 너는 여기에서 여기까지 정해줘요. 1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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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2번 누구 누구 정해주면은 나가고. 마이스타는 일을 지시하고 
감독하고. 노란 모자 쓰고. 그 굴에 최고 책임자는 하얀 백바가지 
썼어요. 한국 사람들 한 서너 명? 한 굴에. 그렇게 많이 못 했어요. 
못하고. 그냥 다른 사람들 뒤치다꺼리. 이제 자재운반 하는 거, 또 
밑에... 굴진하는 거 이거는 전기기사들 뭐 좀 경험 있고, 거기는 
전기로 많이 하니까. 가장 위험한 게 슈템펠 세우는 거지요. 
그건 잘못하면 뒤에 이래 넘어지면 때릴 수도 있고. 위에서 바위 
이런 것이 막 떨어질 수도 있고. 그때그때 보고 조금씩 금 가고 
이러면 그때그때 빨리빨리 쌓아주고 해주어야 되는 것이지요. 위에 
천장이 안 무너지도록. 거기에는 물 압력으로 쏘는 게 있어요. 그거 
갖고 싹 지대로 올라가고, 뺄 적에는 그것을 꼽아서 마구 땡기는 
게 있는데. 그거 줄을 매어서 땡기면 싹 밀어와서 빨리 꺼내고 앞에 
세우고, 앞에 세우고, 뒤에는 그러면 한 5m. 후방에는 돌이 막 무너
져 내려오지요. 그렇게 열심히 하니까 독일 사람들도 좋아하면서 
가지 말고 여기 몇 년 더 근무하라고.
코담배를 하는데 이것은 탄을 많이 들어 마시면 이제 마스크 이래 
갖고 하는데. 코에 석탄이 많이 들어니까. 분진 가루가 있어요. 손에 
부어 가지고 흡~ 하면 쑥 들어가서 쐐하고 콧물이 쭉 나와 버리면 
안에 있는 탄이 씻겨 나온다는 것이지요. 개인 지참이에요. 물도 
개인 지참이고, 거기 들어가서 간식도 개인 지참을 해야 되고요. 
거기서는 주는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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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사진 19> 코담배 (출처: 파독광부 백서)
안에 들어가서는 연장 기구 같은 것을 잃어버리거나 부러지면은 
달라고 하고 장갑이고 양말이고 옷이고 그런 것은 얼마든지 싸인 
받으면 주는데. 무한정 주는데, 이제 먹는 것이라든지 개인이 사용
하는 것은 자기가 준비해야 됩니다.
작업 시간, 휴식 시간 없고. 자기 맡은 거, 오늘 여기서 2m 다, 
4m 가야 되는 것 같으면 4m 나갈 때까지는 저는 알아서 해야 해요. 
따라와야 해요. 남이 나가는데, 또 한 네 사람이 한 열 명하는데, 
한두 사람 처지면은 일이 안 돼요. 그럼 저는 어떻게든 따라와야 
해요. 그래가 휴식 그것도 없어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해내야 
해요.
이제, 빨리하고 좀 여유가 있으면은 빵, 간식 비닐봉지에 싸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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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 뭐 탄 먼지 나도 안 묻도록. 그래 주면 이제 물 먹고, 그걸 
좀 먹고 나오고. 한국 사람 대체로 간식을 안 먹어요. 빵, 그걸 식성
에 안 맞아서 그런지. 또 쉴 때, 인제 나올 때 되면은 빵 좀 먹고, 
과일 좀 먹고 이래 갖고 나와서. 목욕하고, 집에 와서 인제 점심 
먹고 이랬지요. 자기 혼자서요. 드문드문 떨어져 있으니까. 먹고. 
물 먹을 때는 기계가 고장 나거나 이러면은 터키 아들, 이태리 아들
이 와. 모여서 물 좀 먹고. 손짓, 발짓 해가며 얘기 좀 하고 그랬지요.
평상복을 입고 광산으로 딱 가면은 자기 옷 벗는 자리 있어요. 
거기 서 가지고 옷걸이 걸어 놓고 옆에 가서 이제 작업복 갈아입고. 
이제 들어가지요. 대기하다가 시간 되면 그 앞에 카드 뽑아 가지고 
찍고. 출근했다는 거지요. 찍고 샤크트 타고 내려가지요. 나올 때도 
또 카드 있어요. 있으면 찍고 그리고 옷 벗고 목욕하고. 그러면 또 
목이 컬컬하면은 뒷거래로도 맥주 파는데 목욕탕 안에. 한 병 사서 
마시고, 기분 좋게 나오죠.
헬멧 같은 것 다 안전하게 해줘요. 방진 마스크를 주고 하루 한 
번씩 안에 필터 빼내고 꼽고 할 정도로. 필터는 매일 교환합니다. 
그리고 물 같은 것은. 독일은 지하수가 나쁘니까 끓어 가지고 물통
을 여기에 놓으면은 자기 물통 가지고 가서 자기 먹을 만큼 받아가
지고 들어가면 되고. 물하고, 간식하고, 공구는 가지고 갔어요. 막장
에 들어가면 옷은 다 벗고 일을 해요. 더우니까. 나올 때는 옷 다 
입고 나오고요.
광부 일은 한 6개월 하니까 요령이 생기고, 할 만했어요. 한 1개
월은 지상에서 한 달 교육 받고. 지하에 내려가면은 독일 마이스타, 
노란 바가지 쓴 사람이 반장 역할로, 그들이 한 달은 같이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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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해줘요. 어떻게 하라고 얘기를 해주고. 하다가 한 달 후에 이제 독립
해서 저 혼자 일하게 되어요. 독일 사람들 왔다 갔다 하다 보고 
알려 줘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하고, 뭐 갖고 어떻게 하라고 지나가면
서 얘기 해줘요. 공구 없으면은 어디 가서 구해서 갖다 주고. 첨엔 
다 그렇게 잘해줬어요. 6개월 지내니까 뭐 요령도 알고. 똑같은 
용어를 자꾸 쓰니까 눈치로 하고. 백화점 같은 데 가서 뭐 사는 
데에는 손짓, 발짓 다 하고 그랬어요.
▮ 독일 일상생활과 미래를 위한 예금적립
독일의 숙소는 딱 가면 기숙사. 기숙사는 몇 백 명 수용하는데 
학교 같이 크기도 커요. 거기도 터키, 이태리, 한국 사람들 다 있어
요. 이쪽에는 한국 사람들, 이쪽은 이태리, 터키 이렇게 나누어 있어
요. 기숙사가 밥은 아주 잘 나왔어요. 잘 나오고 기숙사비가 조금, 
한국 따져보면 비쌌지요. 
침대 생활인데, 저쪽에 침대 한 개, 이쪽에 침대 한 개, 여기 옷장 
있고. 2명이 방 한 개 썼어요. 그래서 아파트 단지같이 그런 단지인
데 단층으로 해갖고. 그리고 한 해 내내 있으면은 말도 알고, 지리도 
알면은 민간 집에 방 얻어 가지고 자취하러 나갔어요. 한 1년 있다
가. 한국 사람들 4층 빌딩을 한 개 얻어 가지고 한국 사람끼리. 
그럼 방 몇 갠데 요는 얼마하면 되겠다, 그래 자취생활 하면은 기숙
사 생활하는 것보다 한 50프로 절약되지요. 다 나갈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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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 오버하우젠 기숙사 앞에서
기숙사 있으면은 밥도 잘 나오고 편하고 좋은데. 기숙사비가 좀 
비싼 편이지요. 비싸고, 방 얻어 나가면 자기 자취생활 하면은 좀 
귀찮지마는 돈은 절약됐어요. 
식사는 독일식으로 나왔는데 잘 나왔어요. 아침에는 빵 같은 거, 
우유, 계란, 귤, 과일 이런 것 나오는데. 점심은 고기에, 채소 같은 
거, 아주 잘 나왔어요. 저녁은 고기하고 여하튼 우리나라에서는 못 
먹어보던 것을 거기 가서 다 먹어볼 수 있어요.
처음에는 좀 안 맞았지요. 한 달간. 그래서 그 얘기를 듣고, 선배
들이 올 때 뭐 갖고 와라, 뭐 해라, 고춧가루 같은 것 음식 나오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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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거기에 고춧가루 넣어서 먹고 그렇게 했지요. 근데 한 달 지나니까 
입에 맞아서 먹었어요.
제일 힘든 것은 김치 같은 게 없으니까 양배추 사 가지고 좀 절여
서 김치 비슷하게 만들어 먹는 것도 있고. 또 마늘 넣어서 먹으면 
독일 사람들 바로 알아요. 금요일날 먹었는데도 월요일날 만나면 
너 마늘 먹었지 그러면서 뭐라 그래요. 냄새 난다고. 그 사람들 몸에 
노랑내 나듯이 똑같아요. 그 사람들 빵 먹고 고기 많이 먹기 때문에 
우리가 뭐 땀 흘리고 같이 일할 때 보면 노랑내 납니다, 똑같이. 
쌀은 어디 가도 있는데. 밥을 해 먹고 하는데. 김치 같은 것 이런 
거는 없고. 
당시 근무는 주 5일인데. 토요일, 일요일날 일하러 들어가면은 
50% 플러스가 되지요. 휴일날은 150%. 여하튼 평일날은 100%. 
휴일날은 플러스 50% 더 줘요. 우리나라도 지금 뭐 그렇게 할걸요. 
휴일에는 친구들하고 여행도 가고. 안 그럼 또 피곤하니까 집에 
푹 쉬기도 하고. 
일이 힘드니까, 취미생활은 거의 못했을 거예요. 토, 일요일날 
일하러 안 가면은 노는 날은 집에서 푹 쉬지. 푹 쉬지 어디 뭐 취미 
해갖고 어디 나가 가지고 이런 것은 거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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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1> 독일 자동차 면허증
<사진 22> 자동차로 독일여행 중 사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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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본에 친구들이 있어서 주말 되면 놀러 갔어요. 그때는 자가
용 갖고 있었어요. 아침에 오버하우젠 거기서 본까지 가면 한 시간 
반? 두 시간 고속도로로 가면. 거기는 고속도로 통행료가 없어요. 
그때는. 통행료 없으니까 맘대로 갔다가 12시 되면 들어와가 그 
다음날 아침 출근하고 그래 했어요. 1년 반 되었을 때 차 사고 거기
서 면허증 따가지고 중고차 샀지요. 새 것은 살 필요 없었지요. 올 
때는 다른 사람 주고 왔지요.
<사진 23> 독일 가정 초대 (2주에 한번) 
또 당시 저는 교회에도 가곤 했는데 그 사람들은 참 좋았어요. 
일요일만 되면 노는 날, 언제 노느냐고 물어보고 2주에 한 번씩 
데리러 와요. 우리 집까지 데리러 와 가지고 점심 같이 먹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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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되어서 집에 오면은 독일 가정에 가서 점심 먹고 놀다가 저녁
에 한 7시 되면 또 데려다 줘요. 그 생활도 한 3년 했어요. 독일 
교회를 갔는데 예배 보고 나오는데 거기에서 보기가 좀 안되었던지 
독일 가정을 맺어주데요. 한 노동자에 한 가정을 그때 연결을 해주
었어요. 
다른 외국인과의 교류는 터키 사람들하고. 일 끝나고 밤에 일 
끝나면 한 10시 되어 끝나면 자기 집에 가자 하면, 가면은 터키 
사람들끼리 모였다가 한국 사람 왔다고 해서 모여서 얘기하고 놀고 
술 먹고. 그런 것은 가끔 있었지요. 같이 일하면 단짝끼리는 그런 
게 있었지요. 
<사진 24> 독일 가정 초대 (2주에 한번) 
또 체육대회 했어요. 1년에 한 번씩 했어요. 광산 떠나서 한국 
10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사람끼리 했지요. 72년도에 대사관에서 주재해서 또 한국 사람들 
세미나를 했어요. 광부, 간호사들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했는데, 산
중에 호텔을 얻어가 했는데. 그때 한 60명, 60~70명 왔을 거예요. 
한 2박 3일 그런 행사도 했어요. 광부 출신들 중 독일서 박사 받은 
사람들 와서 강의하고, 그런 행사는 가끔 있었어요.
<사진 25> 1972년 뮌헨 올림픽 경기장 앞에서 
제3장 문종섭   
105
72년 뮌헨 올림픽 시기에 또 우리는 차 대절해서 응원하러 가고 
했어요. 선수들 응원하러 가고. 1박 2일이지요. 밤새도록 거기서 
놀다가 밤에 또 올라오고 버스 대절해 가지고. 개인적으로 가는 
게 아니고 대절해 가서 한 40~50명씩 가서 놀다가 또 올라오고 
그랬어요. 
독일에서 인간 차별하고 이런 건 없었는데 독일에서는 뒷고기를 
안 먹었어요. 족발 같은 거. 머리 같은 거, 내장 같은 거 이거 안 
먹었어요. 근데 그거 자주 들락날락하다 보면 안면 있고 소머리 
언제 한 개 사러 올 테니까 갖다 놔라. 그러면 또. 그때 한 담배 
세 갑 값만 하면은 소머리 한 개 샀어요. 그러면 그 고기는 거의 
한 바가지 됐어요. 그러면 인제 그거를 노는 날, 이 사람 저 사람 
오라 그래서 구워 먹고 볶아먹고. 근데 독일 사람들은 그런 거 안 
먹으니까 상당히 헐었어요. 그런 것 가져다 먹고. 같이 일한 이태리
하고 터키 출신 사람들 순했어요. 해코지하고 그런 건 없었어요. 
싸우고 이런 건 없었어요. 안 싸워봐서 모르겠는데. 말썽부리면 해
고죠. 조기 귀국시킨다는 말들을 했지요. 
아프다고 의사한테 싸인 받고, 광산 제출하고. 그러면 한 일주일
씩 집에서 쉴 수 있는데 꾀부리고 다른 데 가서 일하는 때도 있었어
요. 들키면 조기 귀국이지요. 바로 보내버려요. 그런 사람들 많았어
요. 근데 거기는 어디든지 일하고 싶으면 나가면 뭐 일자리는 항상 
있으니까. 그때 우리도 한 20일간 휴가 주면은 휴가 안 가고 일하러 
가지요. 건설업체에서 가서 일 좀 하고 싶다 그러면 어디든지 오라
고 그래요. 휴가 끼면 일해서 그걸로 옷 사입고. 
받은 월급은 은행 다 예금했어요. 국내 안 보내고. 다 예금 해놨다
106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가 바로 위에 형님이 경찰에 있었는데 편지해서 연락해라, 내 돈 
보낼게, 이래 갖고 영대 앞에. 봉덕 거기 한, 두 채를 사고. 이제 
그래 나왔죠. 1,800, 2,000마르크는 한창 잘나갈 때고. 그때는 기
본밖에 안 줬을 거예요. 한 1,000마르크 정도밖에 안 됐을 거예요. 
최저 기본밖에 안 받았으니까요. 3개월 후에 오토바이 사서 봉급에
서 일정 부분 까는 거로 해서. 할부로 사서 다 주고 이랬어요. 그리
고 한국 사람…. 교육받고 오는데 준비할 때 빚졌어요. 그때 돈으
로…. 우리나라 돈으로 한 30만 원씩 미리 돈을 받아줬어요. 미리 
돈을 받아주면은 그걸 한국으로 보내고. 봉급에서 조금씩 까고. 이
렇게 했어요. 다 그렇게 했을 거예요.
<사진 26> 독일근무 시 문종섭씨 월급 명세서 
제3장 문종섭   
107
▮ 귀국 및 파독광부 모임 참가와 자긍심
75년도 귀국해서 현대그룹에 들어갔어요. 보험 쪽으로요. 거기
서 한 30년 근무하다가 퇴직했지요.
결혼은 스물아홉. 그때 결혼했죠. 귀국하는 해에 한 2, 3개월 
있다가 결혼하고. 또 한 2, 3개월 있다가 현대에 들어가고 취직했지
요. 부산 살다가 대구로 와서 그때는 자가용이 없었잖아요. 76년도 
말은. 자가용도 없었고, 한 번씩 명절 때 올라고 그러면 열차 타는데 
힘들어 가지고 고향 보내달라고 이야기 해서 대구로 와서 계속 있었
지요. 근무를 오래 했어요. 
독일 갔다 온 것이, 개인적 보람은 좀 여유 있었다는 것. 우리 
나이에 비해. 내가 독일 갔다 와서 직장생활도 했고, 자식들 남 유학 
못 보내는 걸 난 그래도, 아들 미국 보내 갖고 약대 박사 학위 받고 
미국 대학 연구실 근무하고 있으니까. 남보다는 조금 여유 있게 
산다는 것이지요.
파독광부가 한 일은 우리가 돈 보내가지고 그래도 산업 발전되고 
수출 많이 하고 했던 일. 그때 우리 갈 때, 1961년도 국민소득 82불
이었는데 현재 2020년도 국민소득 32,000불로, 경제 건설에 한몫
한 택이지요. 70년도 1억 불, 1억 불도 수출 못했을거예요. 당시 
차관을 빌려달라고 하니 독일서는. 광부 임금을 담보로 해서 박대통
령이 차관을 빌리고, 공장 짓고 했던 것이지요. 박대통령이 독일 
방문 후 서독은 3국의 보증 없이도 한국에 차관을 공여했지요. 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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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와 간호사들의 받는 월급을 은행에 예치하는 조건으로요. 
우린 지금 유공자로 해달라 그랬는데, 국회에도 청원도 하고 했는
데 거기도 삐꺽해서 지금 안 되고 있어요. 우리는 사실 진폐, 인제 
탄가루 많이 들어 마셔 가지고 아픈 사람들 치료는 해달라, 그 정도
는 해달라 이 요구지. 월남 갔다 온 사람들은 뭐 최저 월 20만 원, 
좀 아픈 사람들은 100만 원씩 주는데 우리는 돈 요구 안 했고. 
이제 유공자로만 인정을 해달라, 인제 그 안을 냈더랬어요.
<사진 27> 독일 귀국 후 독일가정과 1984년까지 서신교환
제3장 문종섭   
109
여기 대구·경북지역 지부는 회원명부상으로는 서른여덟 명인데 
지금 회비 만 원씩 받아요. 식대로, 나오는 사람만 한 달에 만 원. 
그리고 이 협회 사무실은 대구시장이 대구은행장한테 얘기해서 전
기, 수도, 집세 없이 친목을 위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어요.
110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파독광부·간호사의 송금액과 경제기여
독일로 간 파독광부와 간호사가 1960~70년대 보내온 송금
의 규모와 그 의미를 정리해 볼 필요가 있음. 일종의 서독으
로 인력송출로서 이들이 보내오는 외화가 경제개발의 종잣
돈이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함. 당시 1960년대 한국의 자본 
상황은 5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원조에 근거하였고 원조
도 1961년까지 연간 2~3억 달러였으며 대부분 소비재 수
입에 사용됨.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충분한 
자본이 요구되었고 이를 위해 외자도입과 외환 수취를 통해 
조달하고자 함. 이러한 상황에서 서독으로 간 취업노동자의 
국내 송금은 규모와 상관없이 1970년대 한국경제 성장의 
종잣돈으로 평가받을만 함. 
송금의 유형은 개인에 따라 다양하였으며 1966년에는 광부
의 약 60%가 국내에 송금, 간호사의 경우 1972년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 정기적으로 송금한다는 비율이 57.2%, 특별
한 경우에 송금 17.8%, 전혀 송금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25% 정도로 나타남.
송금 액수와 체제 기간을 연관해 보면 체제 기간이 길수록 
송금액은 감소, 계약이 끝나는 3년이 지나면 거의 대부분은 불
규칙적인 송금이거나 송금하지 않음.   
  * 자료출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8).『해외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자료집: 파독광부·간호사의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pp.212-213.
제3장 문종섭   
111
파독광부·간호사의 송금액과 경제기여
광부, 간호사들이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보낸 송금액은 
총 101,530천 불로 초기 3년 송금액을 총 수출액과 비교하
면 당시 총 수출액의 2%에 근접하였음.
국민 총생산(GNP, Gross National Product)에 있어서 파독
근로자의 송금액은 1964년부터 1975년까지(1967~69년 
제외) 해당연도 GNP의 0.1%에 육박하거나 상회함. 
송금방법은 파독광부나 간호사가 직접 한국은행이나 한국
은행과 연계한 독일은행을 통해 우편 또는 전신송금으로 가
족에 송금.
광부 및 간호사의 국내송금에 의한 외화가득은 국제수지 개
선과 국민소득증대에 기여함. 해외인력진출에 의한 외화획
득은 국민소득계정의 해외수취요소소득으로 취급, GNP의 증
가에 기여함. 
  * 자료출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8). 『해외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자료집: 파독광부·간호사의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pp.213-214.
노명환(2014). 『독일로 간 광부·간호사: 경제개발과 이주 
사이에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현대사 연구총서 2.
연도
총수출액
서독 근로자 
송금액
총 수출액중 
서독 송금액 비중
1965
175,082
2,734
1.6%
1966
250,334
4,779
1.9%
1967
320,229
5,791
1.8%
제4장 김태익
구미 인동과 부산에서 보낸 성장기
독일광부 지원과 합격
뒤스부르크 광산배치와 탄광생활
독일에서의 일상생활과 송금
귀국 후 파독생활 경험으로 지역 봉사생활 참여
노년기의 대구지역 파독모임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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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 구미 인동과 부산에서 보낸 성장기
1946년생으로 저는 구미 출신이죠. 아버님과 함께 가족이 
6.25사변 나고 청도로 피난 갔다 고향인 인동으로 돌아왔는데, 
그해 제가 6살인데 아버님이 밭에 일하러 가셨다가 폭발물로 
돌아가셨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다치시고 집으로 실려 오
셔서 손도 못쓰고 몇시간 있다가 바로 돌아가셨는데 아버님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요. 폭탄으로 사람이 다친다는게 
정말 좀 그래요. 그때는 어머님, 형님, 저랑 셋이 참 힘들게 산 
것 같아요. 
부산에 고모 되는 분이 있어서 그 시기에 부산으로 이사를 
하였어요. 이사를 해서 엄마와 형님하고 부산에서 살았고 열 
살까지 살았어요. 그러다가 어머님 혼자 우리를 키우셨는데 온
지 한 2년쯤 지나 고모를 통해서 중매가 들어와서 친척들 동의
하에 어머님이 결혼했어요. 워낙 미인이시고 아직 나이도 젊고 
해서 중매가 들어온 거 같아요. 원래는 내가 어머님이랑 같이 
사는 거로 되어 있었는데 그게 또 안 될려니 잘 안 되더라구요. 
형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나도 참 살아가는게 그랬어요. 
그러다가 아버님 땅이 인동에 좀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없잖아요. 그래서 어렸는데도 그것 때문에 와서 살게 됐어요. 
혼자. 내 혼자. 큰집에서 인제. 큰집에서 얹혀 산다는거는 재산
이 있어도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 그때는 그런게 
제4장 김태익   
115
안되잖아요. 나이도 어리고 하니까. 그러니까는 큰집에 있으며 
눈칫밥에 학교 다니는 것도 그렇고 고생을 많이 했지요.
일반 초등학교를 다녔고. 인동 와서 졸업하고 중학교는 독학, 
통신, 시사학습지로 했어요. 그리고 16살인가 정도에 부산에 
다시 갔어요. 큰집에 얹혀 산다는게 중학교도 안 보내주고 일해
야 하니까요. 부산에 와서 천막학교를 다녔어요. 천막 학교에서 
공부를 한 1년 6개월정도 했어요. 내가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선교사하고 우리 한국분하고 같이 학교를 운영했
던데 그때 학교 다니면서 돈 벌려고 연필, 흙사탕, 비누, 회충약 
이런 것을 팔려고 많이 돌아다녔던 기억도 있고 그래요. 그때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던 처지라 독일 갔다와선 계명대학 
무역대학원 1년 공부도 했어요. 
그 시절 형님은 대구에서 객지 생활을 많이 했어요. 군대 갔다 
와 가지고 농사를 군대 가기 전에 “우리 것을 찾아서 농사를 
짓겠다.” 이랬지요. 그때 나락이지. 그때 몇 섬이 됐어요. 빚 놓
잖아요. 그러면 50% 받고 그런 시대인데요. 본전만 받기도 하
고 그러다가 제가 고등학교 나이 때쯤 형님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게 됐고 이제 정말 막막하게 혼자 남게 되었어요.
부산에서 1년 반 천막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다시 인동으로 
돌아왔어요. 여기 또 땅이 있으니까 그래그래 오게 되고. 어느 
때 해병대에 지원해서 군대 갔다 와서 신문사에 있었고 거기서 
2년 있다가 혼자 가진 것도 없어 처갓집에서 허락도 못 받았지
만 부인을 만나 결혼했지요.
당시 신문사의 월급은 월말마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수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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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큼 벌어서 살아야 했어요. 경향신문, 경향신문 대구지사에 다녔는
데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정화여고 재단 이사장 조OO 씨가 
우리 지사장이었어요. 그 사람 대구에서도 대단한 인물이었고. 한 
2년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2년 정도 있다가. 그 지사에서는 신문에. 새벽차로 신문이 오면 
중앙지가 8개 신문이라. 그때는 신화도 있고 한국, 대한, 전부 해서 
8개 신문이라 한꺼번에 내려오면은 사람들 데리고 나가서 가자고. 
그때는 차가 귀하잖아요. 신문사는 차가 3대밖에 안 되었어요. 그래 
싣고 오면 배달 나가고. 그 취재부 있으면 취재 같은 것하고 송고 
같은 것 이런 것하고 그랬지요. 
▮ 독일 광부지원과 합격 
우리 아내는 한 동네 출신으로 만났어요. 그때가 68년과 69년 
사이인 것 같아요. 그렇게 지내다가 1년 정도 시간이 흘러 처가댁에
서 허락받고 인정받아서 지금까지 잘살고 있어요. 
독일 광부 모집은 신문에서 본 것 같은데 그 시기에 내가 시골 
청도에 일 할게 없던 시절이라 남에 농사 도와주며 그래 살고 
있었지요. 청도에 그때 선거도 있고 그런 것이 있었던 걸로 기억
나요. 그래서 내가 신문에서도 봤지만, 그 국회의원 했던 박OO 
그 양반이 자기 책임지고 광부 열 명을 보내주겠다는 이런 이야
기가 되고 있었지요. 그때 경찰서장하고도 친분이 쭉 있었는데 
광부지원에 협조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래서 신
제4장 김태익   
117
문에 모집 광고도 보고 주변에서 권유도 있고 그래서 대구의 
노동청에 가서 1차 심사를 했어요. 10명 갔는데 저 빼고 다 떨어
졌어요. 
촌에서는, 대구는 가보니 촌이더라고요. 서울은 가보니 정말로 
브로커들도 있는데. 내가 볼 때는 확실하게 된다는 보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돈도, 돈도 안 되면은 돌려준다 그런 이야기도 했지요. 
제일 처음에는 대구에서는 아마 서류하고 면담하고 끝난 것 같아요. 
오래되어서 기억은 확실하지 않은데요. 
서울 개발공사에서 2차하고. 여하튼 뭐 신체검사가 파일럿하기
보다 더 힘들었어요. 왜 그러냐 하면은 지금도 그런 기분은 느껴 
본 적은 없던 것 같아요. 이렇게 가라고 해 놓고 중간에 중지시켜서 
왼쪽, 오른쪽 묻는 그런 것도 있었어요. 마지막 3차에는 독일식 
신체검사가 있었어요. 독일에서는 무상으로 다 지원해줘야 하니까 
자세하게 검사했지요.
우리 같이 그룹으로 서울에서 경상도 사람들이 7명이 와 있었는
데. 내일 중앙지에서 발표 나는 시기였고 우리 7명이 그래 누구든지 
되면 되는 사람이 밥 사는 거로 하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가 내일 발표 전에 조선일보에 가서 사정했어요. 
시골에서 왔고 좀 알려달라고 했어요. 4시에 가면 신문 글자 
맞혀놓고 하는 시간이기에 사정했더니 7명 중에 나밖에 없다고 
하는 거예요. 밥 사기로 했는데 막상 떨어져서 기분이 그렇잖아
요. 그냥 다들 헤어졌지요.
내가 독일 광부 지원할 때 둘째가 태어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우리 아내는 반대 안 했어요. 그때 반대 안 했던 것은 
118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생활하는 것도 어려운 시기여서 달리 방법도 없고 여기서 독일 
가기 전에 2개월 정도 독일어 교육을 받았어요. 문법 뭐. 데어 
데스 댐 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독일어 한 2개월 공부 하고 
그때는 독일어 잘하는 사람들이 잘 없었어요
대학교도 그렇고 고등학교도 그렇고 선생님들이 독일어에 대한 
자신도 없던 시기였으니까요. 2개월 배워 독일에 가니 통하지도 
않고 그래서 사전 들고 시장에 가서 이야기하고 그랬지요.
▮ 뒤스부르크 광산 배치와 탄광 생활
독일로 출국해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시간 정도 가면 도착할 
수 있는 뒤스부르크 지역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광산에 배치되었어
요. 광산 이름은 추라이핀프인데 거기로 배치를 받았어요. 도착해
서 배치 받아서 갔는데 거기엔 당시 한국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71년에 우리랑 같이 출발했던 사람은 120명 정도 되는데 우리 20
명만 그 광산에 떨어졌던 것이지요. 
일단 광산 가서는 나 같은 사람은 바로 일을 시키는 게 아니고 
신체검사 다시 하고 교육을 받으면 2개월 정도 지나가고 그리고 
나서 신체검사에 이상이 없는 사람은 일 배치를 해주었어요.
제4장 김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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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8> 뒤스부르크 지역 광산 앞에서 촬영 
광산의 일은 막장에서 일하면 돈이 많고 보통 그 보다 덜 힘든 
곳에서 일을 하면 덜 힘든 만큼 돈은 많지 않아요. 우리는 한 
20명 갔는데 막장에 떨어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왜 그
러냐 하면 원하는 사람이 많은데 자리는 적어서 지원한다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거기 가면은 돈도 많을뿐더러 토요일 
일요일에 잔업이 또 생겨요. 덜 힘든 곳은 잔업이 없어요. 그래
가 봉급봉투를 받으면 2배 차이가 나고는 했어요.  
광산에서는 8시간 근무하는데 한국 사람이라고 전부 똑같은 일을 
하는 게 아니었어요. 좀 이래 천태만상이라. 근데 요즘 보통 사
람들 얘기하는 것처럼, 우리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막장에 
가서 탄을 직접 캐고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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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하던데 우리가 간 곳은, 그리고 내가 했던 일은 뭐였냐 하면은 
운반이었지요. 독일말로 트랜스포트라고 독일말로 물건 같은 
거 싣고 밧줄로 이제 그 운반해서 오면 스톱시켜 가지고 연결해
주고 또 인제 출발하고 그런 것을 했어요. 이 칸에 이제 배에 
실어다가, 배에 이제 예약을 해가지고 물건 이렇게 해 가지고 
덜어가지고 싣고, 이러면은 쇠밧줄로 이렇게 연결고리가 되어 
있어서 운반되는 그런 일을 했지요. 
자기 나라 떠나서 타지에서 그 나라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은 했는데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저는 힘들
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한국에서 사는 게 워낙 팍팍했거든
요. 먹고 살 걱정 안 해도 되지 밥 잘 주지, 기숙사도 주지, 옷도 
잘 주지 걱정할 일이 없잖아요. 내만 열심히 일하면 되니깐. 그
정도는 한국에서 한 일에 비하면 편하니깐요. 아마 다른 사람들
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을 거에요. 
내가 맡았던 일도 그렇고, 거기 가서 이제 느꼈던 게 뭐냐면
은, 한국에서는 물론 경험은 없습니다만 거기 가니까 광산의 
탄층이 우리나라 그 시루떡 모양처럼 생겼어요, 그러니까  이제 
탄들이 이제, 호벨이라고. 이 드르륵 갔다가 드르륵 오고 하는 
기계인데, 한 500m 되는데 드르르륵 갔다가 드르륵 오고. 이제 
막 이런 식으로 되어 있었어요. 근데 이제 우리 같은 경우에는, 
중간에 독일 사람이 있는 데도 있고, 한국 사람끼리 하는 데도 
있고 그랬어요. 그러다 보니 막장보다는 환경이 좋고 그렇지만 
받는 돈은 훨씬 적었습니다.
일이 이제 좋긴 좋은데. 편하면은 또 더 편하고 싶다고. 당시 일주
제4장 김태익   
121
일에 5일간 일을 했잖아요. 근데 우리 그 지역이 또 시범 지역이 
되어가지고 한 8개월 동안은 일주일에 4일밖에 일을 안 했어요.
토·일요일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있을 때 6개월 동안은 금요일
도 일을 안 했어요. 시험한다고 일주일에 4일간 일해도 5일간 
일한 능률이 오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6개월은 4일간 밖에 
일 안 했어요. 그 시차가 많으니까 아침에 너무 늦게 일어나면
은, 한 시간 이상 늦으면 출근 못 해요. 무단결근 3번 하면은 
한국으로 돌려보낸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만약 잠을 늦게 잤다 
그러면 병원을 가요. 가짜로 감기걸렸다 등등 해서 그 뭐든지 
병을 막 만들어가 가면 독일 의사들이 깜짝 놀라요. 당신 머리가 
이런데 어떻게 살았냐 이러면서 한 달씩 막 끊어주고 그랬어요. 
그 때 독일에서는 이제 일주일에 5일 하는 것보다 4일 하는 
게 어쩌면은 능률이 더 오를 수도 있다, 이제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래 이제 하는 거라. 이렇게 하니까 몸은 편한데 일해서 돈 
벌고 싶어도 자꾸 일이 하는 날이 줄고 하니 일이 멀어진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도 거기는 무단결근하면은 용서를 안 합
니다. 그래서 무단결근은 안 하고. 만약에 오늘이 이제, 8시에 
들어가야 하는데 10시까지 자버렸다. 그러면 2시간 늦었잖아
요. 2시간 늦으면은 출근이 안 됩니다. 1시간 늦었을 때는 출근
이 가능한데, 2시간 늦으면은 출근이 안됩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식초 같은 것 이용해 발 퉁퉁 붇게 해서 병원으로 가  
진단을 끊어서 회사에 보여주면 넘어가고 했어요.
우리가 갔을 때는 딴 국가 사람들 별로 없고 터키 사람들 많았
어요. 유류파동이 나서 그때 이제 그 중동 쪽에 이제 뭐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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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사람들이 그때는 그 기름 관련 금액을 많이 못 받아서 가난했거
든요. 그랬었는데 석유 파동이 나고 경제가 완전히 역전되고. 
근데 우리하고 갔던 사람 중에 막장에서 일하겠다는 친구가 있
었어요. 2년 동안 거짓말 안 하고 파주에 그 땅을 300마지기 
샀다고. 그때는 파주 쪽이 쌌을 때라. 내가 갔을 때도 인동에 
농사짓는 땅 100, 200원밖에 안 했어요. 그래 인제 평균 뭐 하여
튼 월급이 적어도 아껴서 하면은 한 논 10마지기 정도 살 수 
있는 그런 돈을 한 달에 받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 독일에 도착하면은 기숙사가 제공되는데 식당까
지 다 있어요. 작업복도 세탁해서 주고, 이불도 깨끗하게 주고. 
한국에서 사는 게 힘들었는데 그것과 비교하면 모든 게 정말 
좋았어요. 그 기숙사에서는 한 1년쯤 있으면은 이제 두가지가 
좋지요. 한 가지는 뭐냐 하면은 독일 말을 해야 하니 빨리 배운
다. 그리고 인제 돈을 좀 덜 쓴다. 이것이지요.
그러다가 나가서 정말 자취. 자취 생활을 했는데 좀. 나오는 
사람들 많아요. 1년 좀 지내면은. 이 자취, 이제 하면 그거 또 
광산촌 주위에는 보면은 막 3층에 이래 옥상에, 다락방 같은 
거 이런 걸 막 꾸며가지고. 독일에도 방 한 칸 해 가지고 열 
몇 채 빌려서 들어가면 한 10달러 주고. 주방은 공동주방 쓰고 
그랬어요. 언어는 한 1년 정도 있으면 어느 정도 통했어요.
제4장 김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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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9> 뒤스부르크 광산 기숙사 앞에서
그때 보면 남자들이, 음식 솜씨가 없었어요. 나만 그랬는지 
몰라도 할 줄 몰랐어요. 저 마트에 가 가지고, 개가 걸려있는 
식품을 산다고 샀는데 그게 개 먹이라. 그래가 이제 그걸 해가지
고 냄비에 이제. 우리는 올려놔 놓고 끓이고 있는데 터키 아들이 
이제 장난친다고 그걸 건져 가지고 먹었어요. 이제 주인이 올라
와가지고 딱 보니까 사람이 먹는 게 아니다, 개 먹이다 이렇게 
말해 준 경험도 있었어요. 독일은 돼지족발하고 돼지머리 같은 
이런 것은 그 사료용으로 쓰지 사람 먹는 걸로 팔지는 않았어요. 
한국 사람들 특별한 그런 것 좋아하고 음식 솜씨 없으니까 그걸 
사서 와서 먹고는 했지요. 아침에 끓여 놓으면은 저녁에 가면 
묵처럼 변해서 먹을 수 있게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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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또 고사리는 보통 그 공원 같은데 고사리가 엄청 많아요. 고사리
를 꺾어가 한국 사람들이 막 해 먹는단 말이에요. 독일 사람들이 
보니까 한국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 전부 해 먹으니까 독일대학
에서 이 고사리를 연구한 적도 있어요. 해도 없고 득도 없는 그런 
식물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김은 뭐냐 하면은 우리 그 기숙사에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주방이 따로 있었어요. 그때 밥해서 김을 꺼내 
가 밥을 싸 먹고 그래 하거든요. 독일 그 청소하는 아줌마가 보니까 
검은 종이에 막 밥을 싸 먹고 그러거든, 그래가 자기도 한 번 
먹어봤단 말이에요. 그 다음에 와서는 그 아줌마가 하는 얘기가 
한국인이 먹는 검은 종이 그거 좀 줄 수 있나 하더라고요. 종이
라고 하니까 우스워했던 기억이 나요. 
<사진 30> 독일공원에서 고사리 채취하는 장면 
제4장 김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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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렇게 살다 보니 음식은, 독일 음식이 빵이고 뭐고 
영양가도 없고 그래도 참 좋은 것 같았어요. 한 달 정도는 그렇지 
한 달 지나고 나면은 독일 음식이 잘 맞았다고 봐야지요. 외국 
생활에서 음식으로 보통…. 한 몇 달씩 이래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나 같은 경우에는 한 20일 정도 지나니까 적응했
어요. 매일 이제 메뉴가 이렇게 바뀌니까, 그중에서 또 잘 맞는 
음식이 있어서 한 20일 동안만 이제 고생했지요. 그 외에는 잘 
받아들인 것 같아요.
거기 있을 때 독일사람들은 일터뿐 아니고 딴 데 나가도 오히려 
외국인이라고 더 우리한테 대우를 해주었지요. 무시하고 이런 것은 
없었어요. 아니 그런 것은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동양인이라고 차별하는 것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밖에 사회 나가보면 자기들끼리는 맥주를 사준다든가 이런 게 
전혀 없습니다. 안 사줍니다. 근데 우리가 혹시 우리 지역을 떠
나가 다른 데 이래가면은, 너는 우리나라에 온 손님이기 때문에 
내가 맥주를 산다, 이러면서 사주고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선진국이구나 했던 게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내가 자전
거를 타고 이름은 생각 안 나지만 작은 역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
데 자동차와 부딪쳐서 넘어졌는데 독일 사람이 차에서 내려가 
보고 옷이 좀 찢어지고 약간만 다쳤는데 미안해서인지 약 사주
고 옷 사주고 갔지요. 그런데 며칠 있으니 법원 인가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 사람을 처벌하기를 원하냐 이런 내용으로 묻는 거예
요. 그래서 주위 독일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무조건 처벌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법원에 가서 처벌하기를 원한다고 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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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고 나와서 그 독일 사람 만나서 미안하다. 나는 당신이 처벌 
안 받았으면 좋은데 주위 사람들이 그래서 그랬다 말하고 한국
에서는 이런 거 가지고는 그냥 없던 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고 하니 놀래더라고요. 그리고 괜찮다 하더라고요. 구치소 50시
간 처벌 나왔는데 나중에 들으니 1달 동안 자기가 시간 될 때 
주말이라도 좋고 구치소 가서 50시간만 채우면 된다고 하더라
고요. 그때 좀 놀랐어요. 독일 사람은 좀 그래요. 그래서 지금도 
잘사는 거 같기도 하고.
또 어떤 일이 있느냐 하면은, 부양가족. 독일에는 자기 직계가
족만 부양가족이지, 부모를 내가 뭐 모신다든지 이런 게 있을 
수 없잖아요. 우리는 외국인이니까 예외로 그거 인정을 해주는 
거예요. 세금을 이제 환불받을 때가 있어요. 12월에 가면은 이
제 부양가족 신청을 하면은, 그 부양가족 때문에 우리는 환급을 
더 많이 받았어요. 독일 저 국민은 그런 게 없습니다. 근데 이제 
외국인이니까 예외를 둔다. 이렇게 하니까 서류를, 도장이라도 
제대로 팠던 것도 없는데 뭐 이상하게 도장을 만들어서 서류에 
찍어서 이렇게 내밀고 했어요. 그래서 너무 남발하니까 대한민
국에서 발행하는, 정부에서 발행하는 이 모든 서류는 독일대사
관을 안 거친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지요. 전부 너무 가짜가 
많아 놓으니까. 그런 적도 있었어요. 그래 이제 그런 일도 있었
어요. 
그러다가 한 1년쯤 있으면 모두 다 그런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또 자꾸 잡생각이 많아져요. 광부들이 캐나다를 간다, 뭐, 심지
어는 미국을 간다. 미국 가는 간호사들 보면 이게 4년제 졸업했
제4장 김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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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사람들은 미국 가도 4년제 졸업한 것을 인정받고 여기서 뭐 
전문대학이 옛날에는 뭐 단과대학은 그런 거는 인정을 안 해줬
지요. 한국에서 정식으로 4년제 나온 간호사들은 그 시절에는 
졸업하면 그 대학으로 교수로 갈 수 있는 그런 시절이었지요. 
간호사도 그렇게 가고 그랬는데. 독일 와 가 그런 사람들은 미국
이나 선진국에 갈 그런 계획을 하고 그곳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
어요. 이제 그런 사람들은 짝 맞춰서 가려고 아주 그랬지요. 
우리 지역에는 캐나다에 살던 사람들이 장가를 가기 위해서, 또 
이 광부 쪽에 이래 줄을 대 가지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아주 
그랬지요. 뭐 이제 이런 식으로 해서 이제 잡생각을 하는 사람들
도 종종 있었지요. 
그래 나도 사실은 그래 인제 우리 가족들 전부 초청해서 인제 
캐나다에 이민을 갈까 그런 고민을 좀 했지요. 그런데 혼자면 
몰라도 애들 있지, 부인 있지, 내가 앞에 좋은 얘기만해서 그렇
지 외국 나가서 산다는데 좋은 것만 있는게 아니거든요. 힘든 
일도 있고, 서러운 일도 있고 많아요. 그래 적응하기 쉽지는 않
거든요. 그런 고민도 좀 했지요.
▮ 독일에서의 일상생활과 송금
간호원이나 광부나 거기에 가면은 생활이 완전히 틀려 버리니까 
아마 한국에 온다는 생각을 안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활해보니까 여기랑 완전히 다르니까 그때 한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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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보리 떼 가지고 밥 먹을 때니까. 그때 독일에서 여자들 있는 쪽에 
우리가 좀 많이 놀러도 가고 그러면은 여자들 한국으로 원룸 투룸? 
하면은 투룸 해서 집을 따로따로 했거든요. 여자들은 그게 남자들이
랑 다르지 뭐. 엄청 편하잖아. 엄청 편하니까 고향 생각 많이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처음에 우리 갔을 때 광부에 대한 거부가 있었던 같아요. 광부가 
이렇게 좀 그렇다 이런 인식이 있었으니까요…. 여자들이 결혼하려
고 하니까 사람이 없잖아요. 국제결혼은 실패를 많이 해서 한국 
광부가 한국 간호사들한테 선호도 1위였지요. 그때 한국 남자들이 
광부가 거의 다 보면 기혼자가 많았어요. 왜 그러냐 하면은 총각도 
기혼자 행세를 했어요. 혜택받으려고.
나하고 거기서 만난 친한 사람이 결혼했어요. 간호사하고 결혼을 
해서. 그 사람 아기자기한 데도 있고 그래가 뭐 냄비도 사놓고 뭐 
그랬던 사람이지요. 그래가 이제 거기서 자기들이 사식도 해 먹고 
이랬는데 어느 날 결혼식을 한다고 해서 이제 식당을 하나 빌려 
가자고. 식당을 빌리면 또 봉황을 무대 앞에 붙이고 뭐 이래서. 식장
을 해서 거기서 이렇게 결혼식을. 여자들 자기 친구, 남자들 이제 
가까운 사람들 가면은. 참 거기도 또 우스운 일이 뭐냐 하면은, 여기 
뭐 옛날에 보면 뭐 발바닥 때리고 이런 거 있었잖아요. 거기는 이제 
친구들이 이제 기마전. 이거 해서 이렇게. 남자들이 이렇게 기마전 
해서 태워서는 발바닥을 치면 그거 신부 친구들이, 이 돈을 내고, 
돈을 내면 이제 그거 받아서 결국은 2차 가서 다 쓰지요. 그런 일도 
있고 그랬어요.
하루는 어느 날 술집에서 만난 사람이 자기가 초청을 한다고 해서 
제4장 김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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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집에 간 적이 있어요. 초대에 어떻게 할지도 모르겠고. 한 
30분 넘게 걸려 갔는데 주택지하더라고요. 근데 조명이고 이게 뭐 
어마어마하게 해놨어요. 술도 이래 진열해 놔놓고, 주인은 앞치마 
딱 입고, 또 무슨 술을 들겠느냐고 묻고. 부부가 초청했는데 그래가 
그때도 고민을 참, 술 몇 잔 먹기 전까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뭐 
잘못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래 인제 맥주를 시켜서 몇 잔 먹고 나니까 설마 어떻게 되겠나 
싶어서 그 후 이분들하고는 인연이 되어서 주말 되면 같이 몇 군데 
놀러도 같이 간 적이 있었어요. 
<사진 31> 독일인 초청으로 독일인 가정방문 
그리고 우리 있을 때는 그 간호사들하고 광부들하고 한국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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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단합해서 ‘코리안의 밤’이라는 행사도 하고 그러면 독일 사람들도 
초청해서 놀았지요. 뭐 태권도 시범. 시범도 뭐 요즘처럼 차고 이런 
게 아니고 뭐 주로 격파 이런 것하고 그랬어요. 
<사진 32> 한국인의 밤 참석과 기념촬영 
또 그때는 여행을 많이 갈 수밖에 없는 게 1974~75년 이래서 
한국으로 코스가 생겼어요. 우리 있을 때는 그런 코스가 없었어요. 
보통 한 달간은 휴가에요. 원래부터는 일하는 날짜. 20일간 휴가를 
줘요. 그러면 보통 독일 사람들은 자기 좋을 때 맞춰서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12월 마감되어서 찾아 먹었으니까요. 
한 달이니까 그때는 갈 때가 어디 있나, 여행을 가면은 버스를 
대절해가지고 주관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자, 남자 섞여야 재미가 
제4장 김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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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요. 남자들은 자꾸 숫자가 없어요. 여자들은 꼿꼿이 있으니
까. 그래서 누가 이제 주관하면은 남자가 3분의 1 정도로 된다고 
하고 그랬어요. 남자를 모아야 좋다고 그랬어요. 
여행을 가면 보통 한 7박 8일, 길게는 10일도 가고 그랬는데 
가면 프랑스에서 벨기에인가, 벨기에에서 그 해협에 지하도가 없었
어요. 배 타고 영국으로 가게 되고 여행 중에 밤에는 무조건 여자들
끼리는 못 나갔어요. 사고 나면 안 되니까. 남자동행 해서 가라고 
했지요. 뭐 그건 어느 국가이든지 다 그런 것 같아요. 프랑스도 그렇
고 다 그런 거 같아요. 저녁 7~8시 되면은 집에서 밥 먹고. 저녁에 
야경은 개인적으로도 단체로도 잘 없고 그런데. 예를 들어서 여자 
둘이면 남자 혼자 이렇게 짝을 지어서 다녔어요. 내가 파트너한테 
한 시간쯤 야경하고 오면은 같이 또 둘이 나가고. 그래 인제 영국에
서 일어난 일은 잊을 수가 없어요. 영국에는 옷들이 좀 넥타이라든
지 바바리라든지 특별해 가지고 쇼핑할 시간을 줘요. 그럼 단체로 
많이 가고 하다 보니 어떤 여자분이 핸드백을 놔두고 왔어요. 그랬
더니 영국사람이 얼마나 물어물어 가지고 그 호텔까지 와서 찾아주
고 갔어요. 이런 거는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일 사람들도 길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처럼 저쪽으로 가고 왼쪽
으로 가고 이런 것 없으니까요. 차 타가지고 뒤에 따라오라고 하면
서 내가 앞장 서 줄게 그래요. 어디로 가라고 알려주는 일은 없고 
독일 사람들은 확실하게 알려주지요. 
72년 뮌헨 올림픽 구경 갔는데 여자배구가 제일 처음에 소련하고 
했어요. 처음에 8개 팀 예선 거쳐서 그때 소련이 세계 제패를 하는 
팀이었지요. 우리가 1세트에 소련을 이겼어요. 그때 북한도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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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배구선수들이 출전하게 되어서 선수들 관중석에 와서 보고 그랬는
데 우리가 이기니까 응원해 주고 좋아서 손뼉 치고 이렇게 되더라고
요.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나 봐요.
<사진 33> 1972년 뮌헨 올림픽 관람
제4장 김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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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4> 뮌헨 올림픽 여자 배구 경기 관람 (1972년 한국 대 소련) 
우리가 가서 처음에 월급을 받고 은행에 가면 사인을 해요. 
한국 사람들은 주로 뭐라고 하지, 옛날에 뭐 폼 잰다고 사인을 
막하고 이랬는데 어렵게 했던 사인은 제일 처음에 계약할 때 
한 사인을 가서는 똑같이 사인을 못해요. 돈을 못내준다고 하는 
일도 생기고, 갱신을 해 가지고 돈을 찾은 적도 있지요. 
송금은 이제 돈을 보내면은 그때 이제 우리 외환은행, 그때 서울
에서 제일 높은 건물에, 거기서 우리 갈 때, 외환은행에서 파티도 
해주고 그랬어요. 그래가 이제 외환은행에다가 송금하면서 그 내역
을, 뭐 예를 들어서 구미에 있는 홍길동이한테 돈을 예를 들어서 
몇 마르크 보내라. 또 누구한테 뭐 보내라. 그러면 이제 딱 이제 
정리하고. 답장이 또 옵니다. 그때는 그게 이제 통신수단이 그것밖
에 없던 시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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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송금을 하다가 어떤 바람이 불었냐 하면은 캐나다에서 한국 살던 
사람들이 결혼도 하고 한국사람들한테 대출도 하고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그래 가지고 캐나다 가면은 정착금은 조금인데 농장할 
사람은 땅이 2만 평, 10년 분납으로 해 가지고 값도 아주 저렴하게 
지원해 주고 그랬어요. 당시 한국에서는 이민 가기가 너무 힘들었어
요. 그래 가지고 다른 곳으로 갈까 하면서 우왕좌왕하는 그런 사람
들이 많았어요.
내가 볼 때는 뭐 90프로가 한국 들어가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한국보다는 더 잘 살고 환경도 좋고 더군
다나 여자분들은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여자분들은 왜 그러냐면 
그때만 해도, 너무 우리가 힘들게 살던 시기였으니까요. 여자들은 
지금 말하자면 뭐 투룸인가 이런 거 하나씩에 살면서, 가보니 천국
이 따로 없지요, 한국에서 살던 생각 하면은. 그리고 어떤 여자분들
은 이제 임금 차이가 다 좀 다른 것 같았어요. 제일 많이 가서 일했
던 병원이 정신병원이고 양로원은 내가 볼 때는 한 20프로나 될지 
모르겠네요. 정신병원은 엄청나게 많아요. 그리고 일반 병원 같은 
데도 뭐 또 잘 걸리면은, 예를 들어서 여기에 재택근무라. 거기 있으
면은 병원에서, 예를 들어서 앰뷸런스 들어가 수술하는 것도 보면 
다, 뭐라고 하더라. OP라 하고 하던데 무전기로 이제 전화 오면은 
가서 도와주고 그렇게 일을 하는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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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5> 현재까지 소장하고 있는 독일우표 
▮ 귀국 후 파독생활 경험으로 지역 봉사생활 참여
74년도에 귀국해서 생활은 좀 나아졌죠. 농사하고 나하고는 거리
가 좀 있어서. 처가에서는 농사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 뭐 갔다 와서 자영업을 좀 많이 했어요. 그러다
가 또 박정희 대통령 서거하고 서거할 그 시기에는 기업을 경영하던 
사람들이 50% 이상이 아마 문 닫았지 싶어요. IMF보다 더 힘들었
어요. 그러고는 인제 2가지를 했어요. 하나는 지물포. 장판하고 벽
지. 하나는 알루미늄 창틀 일을 했어요. 여하튼 그때 이제…. 장식 
이거만 했던 것은 아니고, 또 뭐 알루미늄 창틀 해서 이래 건축하는 
데 하는 문틀, 이런 것도 하고 이래서. 그때는 일해도 현찰로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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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일은 열에 한 군데 정도 받을진 몰라도 전부 다 뭐 어음이고 그랬잖
아요. 뭐 받으면, 그때는 받아놓으면 경기가 나쁘니까 전부 다 부도 
난 적도 있고 그랬어요.
내가 광부 일 갔다 와서 여기 군위군 고로면이라는 곳이 있어요. 
거기에서 초등학교하고 30년간, 개인적으로 30년간 봉사했어요. 
촌에는 가면, 학교 가면은 거의 다 내가 볼 때 한 70%는 결손가정인
데. 가보면 너무…. 참 마음이 가는 데가 너무 많아졌어요. 그 심지
어는 제일 처음에는 내가, 학교 가서 처음에 이제 자매결연했을 
때는 고로면에 초등학교가 네 개였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어요. 싹 
다 없어졌어요. 그래 산에 있던 학교가, 거기는 가게도 동네에 하나
도 없어요. 학교 있고 뭐 집만 드문드문 있고 이렇게 있었는데. 선생
님이 하는 말이 뭐냐면은, 여기 아이들은 돈을 모른다는 것이에요. 
무슨 얘깁니까 하니까, 전부 결손가정이고 가게도 없고 그래서 돈을 
쓸 줄 모른다고 그랬어요. 아이들 데리고 가서 가게에서 원하는 
것 사라 하면 아이들이 주춤주춤해서, 안 사봐서. 사지를 못했죠. 
그래서 내가 아이들 우방랜드 같은데, 저런 데 이제 데리고 가서 
이제 온종일 그 이용권 있잖아요. 그거 이제 해서. 가면서 또, 옷이 
또 너무 더러워서. 가다가 또 가게에 세워놓고 가게에서 옷 사서 
입혀서. 그렇게도 갔지요. 구미에서도 박정희 생가, 구미시청에
도 방문했는데, 참…. 우스운 얘기지만, 막 뭐냐. 사진대에 들어
가 막 찍고 막 야단났지요. 그런데 구미시장이 이곳 아이들 초청
해서, 이래 상금도 주고 그랬지요.
제일 처음에는 왜 그랬냐면, 거기 이제 입구에 산을 넘으면 경상
북도에도 이런 데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생전 처음 이래 겪어본 
제4장 김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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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이라. 그래 이제 입구에 이래 산에 올라가는 입구에 가면은 
‘기어변경 하지 마십시오. 1단으로 올라가십시오.’ 이걸 써 붙여놨
어요. 그런 곳이 잘 없잖아요. 그래가 이제 호기심이 발동해서 이제, 
올라갔는데. 그래 학교가 있어서 선생님하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내가 하는 클럽에서, 그런 벽지학교 하고 자매결연을 하였으면 좋겠
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야기를 해서. 우리 클럽에다가 이야기했지만 
부결됐어요. 그래서 부결되어서 그럼 좋다, 난 나 혼자라도 한다. 
그래가 이제 그때부터 맺었는데, 여하튼 30년 동안 지원했네요. 
더 할 수도 있었는데 왜 더 못했느냐 하면, 고로면에서 학교가 없어
지니까 선생님들이 이걸 인수인계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어요.
이런 봉사 활동도 파독광부의 경험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죠. 
군대에 갔다가 3년 동안 이러쿵저러쿵하는데, 광부 경험은 그때도 
그 나름대로 그리워하는 것도 있고. 아 그 참 괜찮은 경험이었다. 
아마 3년 동안 그래도 보고 느낀 것은 아마 똑같을 거예요. 사람이 
거짓 없이 진실하게 그렇게 사는 거. 이거는 몸에 익숙한 것 같아요. 
국가관 같은 것도, 아무래도…. 외국에서 살았으니까 그….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랄까, 이런 것도 생긴 것 같고요. 아마 거기에서 우리
가 배웠던 것은 정말로 외국 사람들이 정도로 산다. 이걸 아마 제일 
많이, 내 몸소 많이 체험된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또 그런 
게 있어요. 오늘 저녁에 내 맛있는 거 살게, 만나자, 이럴 때 이유가 
타당하면 사는 건 몰라도. 안 그러면은, 그 사람들은 안 먹습니다. 
이런 문화적 풍토를 좀 많이 배웠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문화를 접해보고. 그 후에 우리 한국 경제발전에 
이바지해서 자부심을 느끼고는 있었지요. 이거는 근데 거기에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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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때는 박정희 대통령에 관하여 이야기가 조금 있었는데. 그 후에 
한국에 있을 때는 그런 얘기할 기회가 없잖아요. 내가 독일 갔다 
왔다는 이런 이야기는 갔다 온 사람이 많으면, 있으면 이야기가 
되지만 그렇지 않고 엉뚱한 데 나와서 내 독일 갔다 왔는데,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한테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잖아요. 이제 안 하게 
되는데 최근에 매스컴에서 광부, 간호사들이 한국에 이바지했다는 
등 이제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아요.
특히 박근혜 대통령 선거하고 당선되고 축하하고 그럴 때는 광부 
간호사들 나오고 그러면서 우리도 경제를 위해서 큰일 했구나 하면
서 자랑스러워했지요. 그 후에 7, 8년 전에 독일 간호사들 150명이 
우리 지역에 왔었어요. 주선하는 사람이 한국에 떨어지고 나서는 
그 누가 맞이해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처음에 구미에 
왔었어요. 구미시장이 이래 와서 호텔에서 만찬도 하고 선물도 하고 
그랬는데. 그 양반들 포항제철도 가고. 1인당 선물도 150만 원 받
아가고 그랬어요.
▮ 노년기의 대구지역 파독모임 참가 
박근혜 대통령 이전에는 파독 광부, 간호사 모임 자체가 없었어
요. 그 당선되고 난 후에 연합회가 창립됐어요. 2009년 그 후에 
대구모임을 갖자고 이렇게 되어서 근데 그게 인제 특별한 거는 없어
요.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서울도 그렇고 대구도 그렇고 자기들 
나름의 좀 프라이드가 너무 세서. 그것 때문에 화합도 안되는 그런 
제4장 김태익   
139
게 있는 거 같아요. 열심히 하다가도 내가 하면 얼마나 하겠나 낙담
을 하는 그런 것도 있고요
모두 모이면 한마음으로 이 모임을 활성화하자 그런 얘기들을 
하는데, 실제는 또 뭐 그게 활성화가 어렵잖아요. 왜 어렵냐 하면은 
자꾸 뭐, 나이가 한 살씩 더 먹고 이러면은 기력도 없고, 그렇네요. 
유공자 선정 논의는 아마 파독 광부 간호사 입에서 나왔겠지마는 
정치하는 분들도 여기에 대한 어떤 저런 걸 좀 많이 가지고 있었는
데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이 모임이 좀 오합지졸이라. 뭐 하나를 
밀고 나가야 하는데. 그 의사단이 저기 가서 회의하면서도 난장판 
되고. 국회의원 와서 있는데도. 내가 보니 뭐 앞장서 가지고 하려고 
해도 브레이크 걸어 버리고 하니까 더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내가 
볼 때는 물 건너가지 않았나 싶어요. 근데 모르죠. 대통령 선거 때 
또 누가 엉뚱한 소리를 해가 또 바람을 잡을는지는. 
나는 이 모임에 아쉬운 것도 많은데, 대한민국은 표 먹고 살아가
서. 표 때문에…. 내가 볼 때는 우리한테 뭐 해준다는 것도, 사실은 
이 표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과연 뭐 그 사람들이 진짜로 국가에 
대한 어떤 그, 저런 거 때문에 우리가 해줘야 한다 이거는 내가 
볼 때 뒷전인 것 같아요. 그래 지금은 국가유공자들 뭐 많습니다마
는. 결국은 뭐, 이거를 업고 뭐 사업이라도 하려고 하면 나이 많은 
간호사, 광부 출신들은 못 하고, 잘나가는 사람이 이렇게 하자면 
할 수 있습니다만. 간호사, 광부 없고 그래 이제 하다 보면……. 
그래 나는 이게 통과됐다 하길래, 그래 안 그래도 아…. 그렇고 싶더
라. 위안부 그거 때문에 터져서 해댔는데, 잘 모르겠네요.
140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사진 36> 파독광부, 간호사 초청음악회 참석 기념사진 
이 모임들은 제일 처음에 박근혜 대통령 취임하면서 우리 간
호원, 광부들이 힘들게 일 했다고 하니까 나서 가지고... 뭐 택도 
없는, 말도 아닌 봉사를 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았었어요.
나는 우리 모임에 대하여 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일반적으
로 뭐, 우리가 뭐 이렇게 이렇게 해야 안 되나 하는데. 나는 그게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게. 지금 뭐... 뭐 병원에 있는데 뭐 어떻게, 
방문을 한다, 사망했을 때 뭐, 조의금을 어떻게 전한다, 이러고 있는
데 실현 가능한 것만 하지, 좀 불가능한 일들은 벌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 뭐,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고 이런데. 뭐 돌아가시고 
이러면, 뭐, 이런 모임이 뭐 연락을 해야 되는지 안 해야 되는지 
자식들이 뭘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뭐 며칠 지났는데, 한 달 지났는
데, 그걸 알아가지고 그 조의금 전하라고 하는 거는 자식들이 다 
제4장 김태익   
141
알아서 하지, 뭐 이런 거는 하지 맙시다. 이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난 건강을 지키는 일 중요해요, 내가 지금, 한 25년간 헬스클럽에
서. 세상에는 아무튼 뭐 공짜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 열심
히 해야지 또 건강도 유지되고 그러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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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상업차관 교섭과 파견인력의 미래 임금지급 
보증 연관 논의 
1960년대 서독의 차관원조는 1961년 12월 13일 대한민국정
부와 독일연방공화국 간의 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협정을 체
결함으로 개발원조의 근거를 마련함.
1961년 협정으로 1억 5천만 마르크가 확정되어 기술원조, 정
부차관(공공차관), 민간차관(상업차관)이 포함되었음, 차관은 
대부분 부족한 자본조달 및 기술도입 측면에서 이루어졌고 서
독 측의 자본재 또는 기술용역을 도입하는 조건부 원조였음. 
당시 독일의 상업차관은 민간베이스의 연불수출신용으로 장기
와 단기의 상업차관으로 나누어짐. 서독으로부터 가용할 수 있
는 상업차관은 당시 7천5백만 마르크였고 서독 정부가 헤르메
스 보험공사를 통해 지급보증 하에 각 기업이 자사제품을 수출
하는 형태로 이루어짐.
한국 측이 독일 정부에 제시하여 독일의 양해를 얻은 사용에 
활용, 대부분 사회간접시설이나 제조업 부문에 투자함.
이와 같은 상업차관에 대하여 서독 광부 및 간호사의 임금을 
담보로 제공되었다는 주장과 논의가 전개됨.
  * 자료출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8). 『해외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자료집: 파독광부·간호사의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pp.213-214. 
  
노명환(2014). 『독일로 간 광부·간호사: 경제개발과 이주 
사이에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현대사 연구총서 2.
제4장 김태익   
143
상업차관 교섭과 파견인력의 미래 임금지급 
보증 연관 논의 
차관담보설은 1962년 당시 차관협상을 위한 정래혁 상공부 상
관과 동행했던 백영훈 박사를 통해 제기됨. 그리고 서독취업 
노동자인 파독광부와 간호사가 이에 대한 내용의 사실여부를 
확인해 줄 것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요청하
여 화제가 됨. 
백영훈 박사는 상업차관에 필요한 지급보증을 받을 수 없는 상
태에서 7,000명에 이르는 서독취업 노동자의 3년 임금을 담보
했다고 주장. 취업노동자에게 전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8년의 조사보고서
를 통해 상업차관 지급보증과 광부, 간호사의 파독은 무관하고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지었음.
구체적으로 제시된 내용을 요약해 보면 1961년 서독의 개발원
조 틀 안에서 이루어진 차관으로 상업차관은 독일정부가 보증
을 섰고 광부, 간호사의 파독과정을 기록한 독일의 자료에 어디
에도 상업차관 지급 보증에 대한 것은 없었음. 그리고 시기적으
로도 일치하지 않음. 상업차관 교섭은 1960~1961년, 상업차
관을 받은 연도는 1962년, 광부파독은 1963년, 간호사 파독은 
공식적으로 1966년이었음. 
  * 자료출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008). 『해외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자료집: 파독광부·간호사의 
한국경제 발전에 대한 기여의 건』, pp.213-214. 
           
노명환(2014). 『독일로 간 광부·간호사: 경제개발과 이주 
사이에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현대사 연구총서 2.
제5장 김홍규
일본 출생, 예천에서 성장
파독광부 지원
독일 입국 및 광부생활
독일 일상생활과 송금
귀국과 파독광부 모임 참가 
146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 일본 출생, 예천에서 성장
제 출생신고는 1946년생으로 되어 있고, 태어나기는 일본에서 
태어났어요. 출생지는 일본인데. 일본 저, 일본 다나카에서 옆에 
아주 조금 저기라 하던데 잊어버렸어요. 45년도. 해방 전이니까 
해방이 8월 15일인데 6월인가 4월인가 그거는 일본에서 못 올리고 
여기 와서 출생신고를 한 것 같아요
내가 태어나고 해방됐으니까. 일본에 아버지가. 옛날에 돈 벌러 
갔던 모양이에요, 모친하고 같이 갔어요. 한국에서 결혼해서 들어
가셨지요.
우리가 외가에서 컸습니다. 예천. 우리 외가가 잘 살아서. 거기 
가서 우리 외삼촌은 일본 오키나와로 갔고. 남매가 컸는데 아버지하
고 엄마하고는 외가로 왔어요. 처가살이했지요, 아버지가, 아버지 
고향은 구미 선산입니다. 
예천 외가에서 중학교 졸업하고 얄궂은 중학교 마치고 고등학
교 졸업 후 서울로 객지 생활하다가, 여러 가지 뭐 상가에서 친구
들 있는 데 있었고 도봉구 방학동에도 있었고, 여러 군데 댕겨봤
어요. 부산에 우리 고모 집에도 가 있었고. 부산 진구 수정동, 
우리 고모 집에도 있었고요.
제5장 김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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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독광부 지원
파독광부는 1973년도. 73년도에 응시해서 74년도에 출국했습
니다. 9월 19일 날 나는 신원조회하고 광산 경력이 없어서 어려웠
어요, 광부 모집은 신문, 경향신문 보고 응시했지요. 
73년도에 응시를 했는데 그 사람들은 1차가 되고 나는 떨어져 
버렸어요. 해외개발공사에서. 서울 마포구 동교동. 1차에 떨어져 
버렸어요. 광부 모집을 응시하게 되었는데 시골 친구들 둘하고 나하
고 셋이. 친구들 서울 가서 만나서 같이 했었는데 나는 결격사유가 
생겼어요. 우리 삼촌이 옛날에 거 저 가입을 했더라고. 요새 같으면 
운동권 비슷하게. 신원조회가. 대단한 거라 신원조회가. 
그래서 치안본부 친척 형이 있어요. 영OO이라고. 대구의 한OO 
씨하고 대구 상고 동기인데. 형이 타자 쳐서 치안본부에서 중앙청 
외무부 여권과로 보냈지요. 거기는 중앙정보부 둘이 있어요. 김홍
규는, 내 이름을 알면, 줄임말로 중정이거든. 중앙정보부에서 관리
하는 건데 중정인데 왜 치안본부에서 타자 쳐서 신원조회를 보냈냐 
이렇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시 예천 경찰서 정보과에서 우리 집에 
신원보호 의뢰가 들어왔지요. 
이제 그래서 서울서 일을 다 해 놓고 우리 어른들한테 내가 서울
에 있으면서 어른들한테 나는 이런 신원조회가 이러니까 대답만 
해주면 되니까 다른 건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서울에 있으니까 
내가. 서울에서 내가 다 해놨었거든요. 마침 대구 남구 대명동에 
148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김OO 씨 형하고 대구 상고 동기라서 한양대학교 나와서 중앙정보
부 들어갔었어요. 김OO 씨 찾아가서 외무부 여권과에 가보라 하더
라고. 가는 길에 신원조회 합격 됐더라고. 그래서 어렵게 갔습니다.
그리고 내 동생하고 같이 근무하는 우체국 직원들이 두 명 있었어
요. 우체국 직원이 집배원이니까 촌 우체국에. 저들도 돈 몇 푼 받아
보니. 경력증명서만 있으면 광부 갈 수 있다고 하니 떼 달라 하고 
같이 가자 하더라고요. 왜 떼 달라 했냐면 서울 오면 자기가 경비를 
대겠다 이런 조건으로 갔었지요. 내가 떼 줬지요. 지금은 세월이 
흘렀으니까 경력증명서, 강원도 가서 강원도 광산에 아는 분들 높은 
분들 있었거든요. 그래서 강원도 광산에 경력증명서만 떼 주면은, 
가자 하더라고. 그래서 증명서를 강원도 태백 광업소, 대구역에 미
도극장 옆에 보면 대성 연탄 있습니다. 그때 연탄공장, 거기 매탄이
라 하는 건 그 쪽에서 쓰는 게 매탄인데 탄을 연탄공장에 대 주는 
사람이 매탄업자입니다. 그 분 정 사장님을 잘 알아서. 그래서 정 
사장님을 알아서 경력증명서를 땠어요. 그래 우체국 직원 둘은 경력
증명서 되어서 갔는데. 나는 우리 삼촌 신원조회가 잘못돼서 그렇게 
오래 있다 보니 경력 이걸 없앴더라고요.
그 당시 경쟁이 치열했는데 우리 갔을 때는 학교 교사, 군대 장교
로 제대한 사람, 공무원 한 사람. 교사가 많았어요. 교편 잡은 사람
들이 많이 받아봐야 당시 월급 2, 3만 원 안 됐을 거예요. 그때 
73년도에. 그래서 우리, 우리 최고 일단은 모집이 중졸 이상이니까. 
학력 제한이. 중졸 이상인데 우리보다 많이 배운, 나도 야간도 다녀
봤고, 전부 다 그 사람들은 고학력자들이었어요. 육군 대위도 있고 
월남 갔다 온 중사도 많고 교편 갔다 온 사람도 많고. 여러 군데서 
제5장 김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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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요. 
우리가 거기 갔을 때는 소문에는 몇백대 일이라는 이렇게 나왔었
어요. 어쨌든 신원조회 합격하고 독어를 배웠지요. 서울 연수원 있
었어요. 거기서 독어 배웠습니다. 독어를 1달까진 배워야 합니다. 
기초를요. 
<사진 37> 파독 사전 교육 시 사용한 독일어 교본
준비 기간에 서울서 하숙집 얻어서 거기서 여럿이, 나하고 먼저 
있던 사람이 한 방 있었고. 거기 교육받는 데 가면은 우리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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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방 있다고 하고 밥해준다고 하면서 여러 사기꾼이 너무 많아요. 
그 주변에 우리가, 동교동 로터리 해외개발공사 거기 주변에는 전부 
다 브로커입니다. 그래 광산 경력증명서 떼 준다고 하고 언제 비행
기 타게 해준다고 하고 온갖 사기꾼들 많습니다. 
<사진 38> 파독 광산 근로자 실습 수료증서 
저도 거기서 73년도 12월부터 시작해서 다음 해 9월에 갔으니까 
제5장 김홍규   
151
여권 나올 때까지 돈 얼마 썼겠습니까? 서울과 대구를 왔다 갔다 
하고 집에 내려오고 하고 거기서 먹고 놀고. 대구 말할 것 같으면 
비산동에 방 세 칸, 네 칸짜리 집 한 채 없애고 왔어요. 준비 비용은 
그때만 해도 빌리고. 독일 간다고 하면서 곧 간다, 곧 간다고 하면서 
빌리고. 곧 가면 돈 금방 부쳐줄게 하면서요. 
<사진 39> 파독 당시의 여권과 사진 
우리가 가려면 신용조회 보증인이 있어야 해요. 2명. 시골에는 
세금, 1,000원 낸다고 하는 사람 잘 없습니다. 보증 2명. 내가 가서 
잘못되면 그 사람이 책임져야 해요. 마침 두 사람이 서 줬어요. 갔다 
와서 내가 대가는 해 드렸지만. 신용보증인 2명이고 우리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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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일본으로 간다고 하면 환송 대가 있었는데 막아버렸어요. 입구에서
만 내가 들어가는 것만 인사하고 가지 비행기 타고 가면 못 봤거든
요. 비행기도 그랬습니다. 일본 하네다공항으로 갔어요.
▮ 독일입국 및 광부생활
하네다 공항에 거기서 공항 가서 밤 10시 30분에 도쿄호텔에 
있었거든요. 거기서 식사를 하고 밤 10시 반 비행기, 또 밤 10시 
반 비행기인데 하네다공항에서 내려서 샤워도 하고 가방을 갖다 
놓고 그랬어요. 나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하는 이야기만 들었지 일본 
땅은 처음 가봤거든요. 하네다공항에 딱 내려서. 다른 사람들은 호
텔 안에 머무르면서 움직이는데 나는 밖에 나왔어요. 
내가 태어난 곳인데 땅이라도 밟아보고 근처도 보고 싶어서 나왔
는데 정말 일본 하네다공항은 다 바닷가거든요. 지금 여기 대구로 
말할 것 같으면 3호선 안 있습니까. 지하철 3호선. 일본에 딱 내려
서 내가 유심히 봤어요. 서울이 지하철 위에 전기선 있어서 차가 
갔잖아요. 그런데 일본은 바닷가에 다리를 쫙했는데 기차가 삭삭 
나가는 것이에요. 그때만 해도. 일본도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내
가 갔을 때만 해도 1, 2층 나지막하게 해서. 담장도 죽 이렇게 있었
어요. 일본에서 다시 밤 10시 에어프랑스 보잉 747타고 갔어요.
일본에서 하룻밤은 안 잤지요. 여기서 낮에 10시에 가면 대기를 
하고 있어야 했어요. 비행기가 없으니까. 밤 10시 반 비행기라. 
거기도 독일까지 바로 가는 비행기가 아니고 에어프랑스 보잉 747
제5장 김홍규   
153
이 프랑스 파리로 가는. 프랑스 파리 가는데. 여기 알래스카에서 
경유를 한 시간 하더라고. 알래스카에서 한 시간 하는데 딱 내려서 
여기 정보부에서 하는 게 뭐냐면 국위선양이라 가방에 태극기, 조그
마한 손 흔드는 태극기. 태극기 꽂아 댕기고 공항 안에 한 사람이 
한국말을 하는 아줌마가 있었어요.
아줌마 언제 왔냐 그러니까 이민 왔다 하더라고 알래스카에. 그래
서 거기서 이제 거기는 예를 들어서 알래스카 공항에 전부 다 일본 
사람입니다. 거기 아줌마 말에 의해서 우리도 거기 가보면 전부 
다 Japan인데 아줌마가 한국 사람 자기 혼자라 합디다. 전부 다 
공항 안에 매장에. 전부 일본 사람. 거기서 한 시간 있다가 이제 
다시 탑승하고 프랑스 파리까지 갔지요.
파리에서 갈아타야지요. 독일로 가는 비행기가 있어요. 거기서는 
이제 조그만 비행기라, 잠자리가 몇십 명 정도 탈 수 있는 것이었어
요. 내가 거기 학교서 선생님도 계시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걸 배웠
잖아요. 일본서 밤 10시 반에 비행기 타고 갔는데 알래스카 가서 
독일로 가는데 해가 지는 거예요. 밤이라. 요새는 여기 날아가고 
그러잖아요. 저는 태평양, 이래 가니까 러시아 옆으로 독일인데 우
리는 이래서 이래 가잖아요. 거기서 다시 밤이라. 나는 비행기 안에 
모든 게 잘 되는 줄 알았는데 담요를 주었어요. 알래스카 가는데 
담요를 앞에 덮으라고. 프랑스 파리 내려서 독일 비행기 타고 갔지
요. 우리는 독일 뒤셀도르프에 내렸지요.
여럿이 갔지요. 가면 거기 가면 갈라지는 게 있거든요. 같이 가서 
독일말은 통역관. 통역관이 버스에 딱 있었지요. 리무진 몇 사람 
타고 그래 타고 우리는 어디까지 갔느냐면 독일 아헨이라 하는 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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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있어요. 나는 아헨 지역의 알스도르프에 우리 하임, 하임이 아파트
입니다 독일말로. 알스도르프. 내 그래 아파트 이름도. 그래 거기서 
있다가 우리 교육과정이 4주예요. 
<사진 40> 국제공인 예방접종 증명서 
알스도르프 거기 아파트에 있으면서 모조 광산이 있어요. 실습
장. 광산에 들어가면 이렇다 뭐가 있다. 뭐가 있다 실습장이에요. 
교육받으면서 실습하는 거야 이제. 그래 실습 하는데 이제 그게 
제5장 김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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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광산에 들어가면 여기서 한국에서 쓰는 건 동발입니다. 광산
의 나무를 굴 뚫는데, 우리는 거기서 슈템펠이라 하거든요. 40키로
입니다. 혼자서 끌고 와서 서 가지고 이런 쇠를, 기둥인데 기둥을 
끌고 와서 쇠를 이런 걸 가지고 끼우는 게 있어요. 그게 이제 실습이
라. 거기서. 무거워요. 쇠가. 
그래서 우리 해외, 신체검사 할 적에는 내가 60kg 이상. 여권에
도 보면 알지만. 60kg 어깨에 매야 해요. 체력훈련. 그거 떨어진 
사람 많아요. 초창기 다 일을 시작부터 했으면 됐는데. 신체검사 
다 떨어지는 거예요. 서울부터 공무원 생활하고, 60kg 어깨에 드는 
사람 잘 없어요. 
본 광산에. 거기는 실습장이고. 강당 같은 데를 지하로 만들어 
놨고. 형식은 지하로 만들어 놨고 우리가 들어가서 허리도 못 피고 
구부려서 당기는 거까지 해 놓았어요. 거기서 교육을 마치고 우리 
회사가, 아헨 회사의 이름이 에벨파워입니다. 에벨파워 옆에 고 회
사 옆에 회사 이름이 에벨파워고 회사 옆에 하임이라고 아파트입니
다. 아파트에 배치가 되었지요. 한 방에 둘이서. 동료들이 두 사람
씩. 우리가 3년 동안 있을 자리입니다. 
터키, 모로코, 뭐 스페인 아들, 뭐 유고슬라비아, 오만 아들이 
이전부터 전부 다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사진 보면 내가 사진 찍어 
놓은 게 있는데 둘이서 나하고 출국을 같이 간 사람. 안동사람인데. 
둘이서 한 방에서도 아침반에 가는 사람 있고 오후 두 시에 입항하
는 사람 있고. 저녁 몇 시에 입항하는 사람 구분되어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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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사진 41> 숙소에서 동료와 함께
<사진 42> 타국 출신 동료들과 기념촬영
제5장 김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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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일은 오전반, 오후반. 저녁반 그렇게 되어 있는데 나랑 내 
동료하고 같이 안 들어갈 적에는 내 동료가 내 밥을 내 올 때 되면 
밥을 따뜻이 내놓고. 그래서 이제 자취를 하면서 그 사람은 참 돈을 
내보다 더 많이 벌었지요. 나는 더 쉬운 일을 했고 그 사람은 굴 
뚫는 거. 굴진 일 그 사람은 천 칠백 천 팔백.
<사진 43> 광부수첩 
광산의 지하로 가면 전부 다, 우리가 한참 타고 가다가 우리가 
일하러 가는 데는 다시 710m 가서 760m, 710m 가면 계속 서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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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처럼 지하철 타고 갑니다. 가서 우리 지역의 어느 지역 가서 내려요. 
그러면 우리는 450m 다시 타고 올라와야 해 우리는. 460m 하면 
공기가 좀 낫습니다. 좀 덜 덥죠. 우리 있는 데는 지하 들어가면 
다른 데는 몹시 더워서 땀을 철철 흘리면, 우린 환풍이 잘 돼 있거든
요. 독일은 환풍이 잘 돼 있어요. 에어컨 바람 같은 거 있잖아요. 
큰 것 환풍기. 탄가루가 그래 날리도록 그렇게 설치 안 해놨지요. 
아주 막장에는 어디로 옆에 대 놓고, 닥터 있잖아요, 막 냄새 뿜어내
는 거. 그 식으로 다 돼 있어요.
그 안에 들어가면 미리 그 사람들이 여기 지역 끝나면 어디로 
갔다가 그러면 두부모같이 딱딱 잘라놨습니다. 일한 자리를. 미리 
기계가 딱 들어가도록 딱 설치 다 해놨어요. 오늘 일자리 여기 칸 
다 했으면 이 칸으로 가도록 설치 다 해놨어요. 그래서 410m를 
올라오지요. 470m 끝나면. 일이 끝나면, 예를 들어서 1시간 일찍 
끝날 때도 있어요. 그러면 거기 안 있어요 굴에. 470m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다고 생각 한번 해보세요. 옆에 굴이 깜깜하거든요. 램
프에 불만 그거 가지고. 사다리에 물이 뚝뚝 떨어져서 미끄럽습니
다. 큰일 나요. 그런데 타고 내려오거든 일찍 가려고 밑에 내려오려
고요. 올라가서 샤워하는데 옷 갈아입는데 거기 와서 놀거든요, 
옷은 안 갈아입고. 어떤 사람들은 독일인들 요령, 샤워 딱 하고 
시간 되면 딱 찍어버려 옷 갈아입고 그런 식이지요. 우린 와봐야 
하임에 와서 안 그렇습니까? 잘 모르고 요령도. 그렇게 생활을 
했어요.
또 우리 일하는 게, 기계 스위치 딱 넣으면 로봇 식으로 이렇게 
나가고 한발 나가고 한발 나가고 천장 이렇게 기계 자체가 척 척. 
제5장 김홍규   
159
전부 다 굴진을 해서. 어떻게 해 놓으면 여기는 석탄층이 한국말로 
석탄층이라 하는데 여기 안에 석탄층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1m 50되는 데도 있고 60 되는 데도 있고 탄이 
두부모같이 잘라놨어요. 굴진이라 하는 건 미리 굴을 뚫어놨다. 
미리 하도록. 그래서 여기 기계가 쇠가 이렇게 두꺼운 게 착착 
가면 위험성 없게 암반을 막아주는 거지요. 이제 돌 안 떨어지라
고. 철판 밑에 쇠 밑에 기계 스위치 하면서 나가는 거라. 로봇 
식으로 착 착. 그럼 밀어주면서 탄광 대패가 있어요. 왔다 갔다 
하면 우리가 기계로 싹싹 밀어주거든요. 그래가 사람이 벌어지
면 자리가 나면. 우리는 거기 앞에는 사이가 뚫려서 벌어졌으니
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이만큼 전진하면 뒤에 이만큼 공간이 
있습니다. 제대로 분리가 되어 있어요. 다 막히는 게 아니라 그
냥 푹 내려앉아 참 잘 돼 있어요. 계속 전진해서 나가잖아요.
그럼 탱크 가는 것, 마냥 뒤에 북낙이 돼 있는데. 교수님이 여 
계시고 여기 석탄층이 탄이 꽉 찼잖아요. 움직이질 않잖아요, 암벽
이. 여기 탄이 없잖아, 탄이 타고 내려갔으니까 탄이 그래 벌어져서 
북낙이 되거든요. 푹 내려앉는데 그걸 하다가 사람이 없어. 손이 
모자라서 내가 독일에서 쓰는 게 용어가 transport입니다. 운반. 
그 transport에 독일인하고 내하고 같이, 나는 거기 기술자 같으
면 보조하는 건데 마스터라 하고 기술자, 보조. 큰 나무 같은 
것 보면 북낙이 석탄층이 내려앉았다 이 말이어요. 철판이 아래 
있는데 여기 탄이 내려앉으니까 공간이 많이 뜰 거 아닙니까. 
여기 나무를 채워주거든요. 그래서 기계를 힘을 줘야 큰 나무가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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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기계로 우리가 내리면 바로 입구에 나무가 많이 내려와 있어요. 
준비가 돼 있는데 이제 타고 내려가거든요. 내려가고 자기 앞에 
시그널이라고 신호를 보내요. 그러면 한번 두 번 하면 정지다 이런 
신호가 있어요. 그러면 내 앞에 있으면 눌러줍니다. 그걸 말 안 들으
면 확 돌리거든 정지하라고 그래서 transport를 했어요. 운반. 난 
그 안에서 하다가 큰 사고가 났습니다. 다쳐서. 이거 박살 났었잖아
요. 빼는 거를 가르쳐 준 대로 그대로 뺐으면 괜찮아요. 우리가 쉽게 
하려고 한단 말이야 뭔 일이라도. 이걸 타고 가면 원래는 어느 정도 
지나가면 여기서 빼야 하거든요. 여기서 빼려고 하면 힘이 들어요. 
어떨 땐 지나가 버려 나무가. 그래 오자마자 여기서 빼낸다고. 그러
다 보면 여기 '탁' 쳐서. 그래서 여기 턱뼈가 나갔었지요. 
오래 입원했지요. 나는 치과 이런 데 다치는 건 덜 한데 여기 
다치는 거 복싱선수들이 턱뼈 나가는 거 이거는 어떻게 깁스하냐면 
이 사이를 뚫습니다. 철사를 쇠를 이래 대고 이거 하고 같이 묶어요. 
그래야 뼈가 붙잖아요. 안 움직여야 하고. 이런 데 뼈 부러지면. 
이래서 이 사이를 뚫어서 이랬는데. 그래서 의사 이름이 한국으로 
하면 치과의사인데 독일어론 의사가 독토이거든요. 이름도 알아요. 
라우터만. 
우리 한국의 병원은요, 영리 목적 아닙니까. 거기는 환자를 치료
하는 목적이거든요. 나는 놀랐습니다. 우리 한국 같으면 그때 70년
대라도 74년도인데 우리 한국은 들어가면 코 뚫고 목 뚫고 오줌 
구멍 뚫고 전부 링거 달잖아요. 거긴 링거 없습니다. 물리치료를 
합니다. 아이스 드라이라고 해서 얼음 찬 거 이렇게 해서. 참 그러니 
내가 치료방법도 거기는 우리 간호사들도 우리는 한국에는 보호자 
제5장 김홍규   
161
가족이 전부 다 수발하잖아. 거긴 나 혼자 다니잖아요. 간호사 있지
마는 다 간호사지. 근데 이를 내가 꿰매 가지고 묶어놨을 때는 어떻
게 먹겠습니까, 안되죠. 희한합니다. 이런 거 있잖아요, 요구르트 
같은 것. 입만 닿아서 당기면 쭉 다 들어갑니다. 그래서 내가 독일어
를 다 몰라서 맨날 먹는 거만. 너 뭐 먹을래 이렇게 물으면 맨날 
먹는 거만. 이거 가져가서 먹고 그랬어요. 입원은 4주 넘게 있었죠. 
치료는 9주 걸렸지요. 그래서 한국 와서 사진 찍어보니. 그 사람이 
너는 언젠간 이를 빼야 한다. 그러더라고 의사가. 결국, 빼서. 그런
데 그 과정이 벌어지는 과정이 또 문제입니다. 
내가 들어가고 싶으면 의사 처방만 받으면 게으름 칠 수 있는데 
그냥 하면 몇 개월 있으면 내가 그 전에 실적을 많이 올렸으면 플러
스 되어서 돈이 더 많이 나오는데요, 내가 가서 일당 하루에 10만 
원이면 예를 들어 10만 원 더 받는 게 낫거든요. 꾀병보다. 그래서 
일하고 그랬는데. 참 그 사람이 의사 선물로 인삼주. 한국 인삼 병에 
인삼 이래 들었는 거 참 좋아합니다. 그 사람들. 먹지 않고 진열해놓
거든요. 그 사람들은 먹는 위주로 안 하거든요. 다쳐도 월급은 나오
죠. 
내가 그 전에 일을 많이 해서 매상을 많이 올려놓은 것 같으면 
더 많이 나오지요. 병원 생활하면 몇 개월 동안. 그런 건 아무 관계
없어요. 4대 보험, 외국 사람 한국에 오면 안 해주지만 우린 
다 되거든요. 똑같아요. 독일인들이 오늘 삽질 10번하고 나도 
한국 사람 10번 하면 똑같이 받습니다. 10원도 안 틀려요. 독일
인들하고 일하는 게. 단 뭐냐. 우리가 2세에 가입이 안 돼서 
자녀수당 이런 건 안 나오지만. 여기 한국 같으면 4대 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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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5대 보험 이런 게 안되지요. 이제 여러 가지가 혜택이 덜 되지. 
총각이 더 적고 결혼하면 더 많고요.
일과 시간은 8시간. 아침 식사 때도 딱 8시간 맞추어요. 그 안에
서 8시간이 아니라 찍는 게. 딱 작업복 입고 나와서 스쿠터 타고 
올라와서 딱 찍는 게. 안되면 시간 될 때까지 찍어야 해요.
8시간이 넘었을 적에. 만 8시간이 되어야 해요. 그 전에 되면 
까버려요. 일찍 올라와도 전부 다 옷 입고 독일인이랑 시간 될 
때까지. 모두 앉아 있지요. 우리는 처음에 710m 내려갔어요. 
엘리베이터가, 한국말로 말하면 한 칸 있잖아요. 여기는 한 칸 
아닙니까? 타는 데가. 착 타면 또 착 꺾어서 내려갑니다. 굴 밑으
로 한 칸. 그러면 또 한 칸 사람 타거든요 그럼 또 내려오거든요. 
또 사람 탑니다. 그리고 내려가고. 타는 게 보통 예를 들어서 
10개 있다 하면 무게 맞춰서 타거든요. 기계 작동이 그래 돼 
있거든. 10명 무게 되면 또 내려가거든요. 삐걱거리면 한 사람 
내려야 하거든요. 그래서 10칸 돼서 내려가면 지하 710m로 직
선입니다. 내려가면은 서울역에 내려가는 거랑 똑같습니다. 지
하철. 우리가 탈 인차라 하지, 사람이 타는 차가 따로 있어요. 
대기하고요. 그러면 어디로 가는 사람은 이걸 타고, 어디로 가는 
사람은 이쪽에 타고. 여기로도 가고 저기로도 가고 그랬지요. 
그리고 반장한테 잘 보이면 토요일, 일요일 나와 이러거든요. 그
땐 일이 배가 되거든요. 일도. 일도 열심히 하고 하면 조금 쉬운 
일로 보내주고 인건비를 같이 계산할 때도 있고 조금 힘든 일 하면 
그날 언제부터 너는 일 힘든 일 했다 하면 거기 딱 나와 있어요. 
보통 토요일, 일요일 쉬는데, 내가 반장하고 잘 지내서 토요일, 일요
제5장 김홍규   
163
일에 기계 설치를 옮기고 하는 게 있었어요. 예를 들어서 그 안에서 
잡일. 토요일 일요일 가면 돈 많이 줘요. “내일 come here” 이러는 
거야. 내일 일하러 오라고. 반장을 잘 알면 좀 그런 게 있어요. 그러
면 토요일, 일요일 뭐 하는가 하면은 딴 게 뭐 있습니까? 6개월 
동안은 두문불출했지요.
▮ 독일의 일상생활과 송금
처음에 우리가 좀 쉬운 일을 하면 천 삼사백 마르크. 보통 천 
사백 마르크는 한 달에 올리죠. 그때는 마르크로 하면 한국 돈으로 
우리 쓸 거 놔두고 하면 한 삼 사십만 원 보내요. 돈 컸습니다. 
한 달에. 내가 가면서 서울 삼일 빌딩 외환은행 거기 종로 3가에. 
삼일 빌딩이 최고 높았거든요. 우리 있을 적에. 외환은행. 거기 1년 
100만 원짜리 적금 가입해놓고 갔어요. 거기 매달 보내주고 나머지
는 집으로 어른들한테. 그래서 내가 비산동 만평 로터리 북구, 400
만 원 주고 집을 하나 샀어요. 450만 원 이것저것 해서. 사놓을 
수 있었어요.
독일에서 음식은 흔히 먹을 수 있는 게 고긴데. 소시지 요만한 
게 다 싸니까. 다 싸잖아요. 달걀이고 뭐고. 그래서 선배 한 사람이 
울진 사람인데 이 사람이 우리보다 1년 먼저 간 사람인데. 이 사람
이 우리 있는 데는 촌이에요. 촌인데, 그 사람이 천엽하고 이런 걸 
먹고 싶어서 도살장에 갔던 모양이에요. 그래 돼지 발하고 이것 
하고 사려고 갔는데 너희 집에 개 먹이냐 이런 식으로 물어보았다는 
16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먹는다고 하니까 의사표시가 이거거든요. 
돌았나. 축구 같은 거 하다 보면 의사표시 어깨, 내가 잘 못 했다 
못했다 의사표시 아닙니까. 그래 돼지 뭐 창자 이런 거 예를 들어서 
소 양 같은 거 사서 먹으려면 사러 가면 돌았나. 그래서 너 집에 
개 먹이냐. 사료용이거든요. 거기서는.
<사진 44> 야유회 모임
그리고 한국에 일이 있으면 휴가 끊으면 되는데 한 번 오려고 
하면 돈 많이 들어갑니다. 나도 휴가 한 번 왔었어요. 우리 외할머
니, 외할아버지 산소에 남동생하고 해서요, 노인네 돈 좀 썼고. 그런
데 그게 거기 가면 참 물가가 쌉니다. 맥주고 뭐고. 한국 사람, 저 
사람 붙들어서 맥주를 한 병, 열 병 팔고 그런 게 없잖아요. 그거 
하나는 참. 
제5장 김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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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5> 독일여행 중 촬영 
 
의사도 잘 압니다. 하우스 독터라고 동네 의사, 여기 말로 동네 
의사. 내가 일하기 싫으면 토요일, 일요일 놀고 월요일 일 하기 싫거
든요. 그러면 동네 의사 찾아가요. 찾아가면 일주일 놀고 일 들어갈 
수 있게 할 수 있어요. 일을. 그러면 예를 들어서 내가 우리 현장 
반장 만나잖아요. 반장이 나 일하는 사람에게 “야 너 꾀병하고 왜 
안 나왔어.” 이 소리 안 합니다. 정하는 의사가 사인을 해 줬기 때문
에. 그거 하나는 좋습니다. 거기서 제일 좋은 분이, 교수님,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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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의사 이 셋. 최고입니다. 내가 거기서 듣고 배운 거는. 예를 들어 
거기서는 중학교 3학년 되면, 예를 들어서요. 고등학교 가잖아요. 
선생님이 교수님이, 갑이라 하는 애는 너 이거 학점이 이래 나오는
데 너는 인문계 못 가. 어디 가. 을이라 하는 애는 너는 잘하니까 
인문계 가. 교수님이, 선생님이 측정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18세 
이하까지는 부모가 부양할 의무가 있고요. 
<사진 46> 관광 중 현지 무용수와 기념촬영 
제5장 김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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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엔 자유예요. 자기가 땡땡이치고 놀아도 엄마가 뭐. 그거 
하나는 좋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면 교수님이 그만큼 교수, 선생님
이 좋다는. 경찰. 의사 최곱니다. 독일은 직업이. 선생님이 선택해서 
인문계 가라 하고 공고 가라 하고 그런 선택권 있는데. 한국에는 
우리 아이가 공부 못하면 선생님 어디 내줘요. 안 그렇습니까? 내면 
떨어지는데. 그래도 내줘야 안 합니까. 참 잘해 놨어요. 그리고 서울
의대 나와서 하우스독터, 우리 지역에서 한참 떨어졌어요. 많이 떨
어졌는데 이 사람 심심하면 우리한테 와서 김치도 먹고 장기도 뜨고 
한국 얘기도 듣고 그 의사가 우리한테 놀러 자주 왔었어요. 서울의
대 나와서 독일 가면 2학년 편입돼요. 우리가 알기로 2학년 편입됩
니다. 2학년 편입돼서 다시 의대 교육을 배워야 해요. 역사 과정을. 
그래서 이 사람이 동네 의사 그걸 따서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심심하면 멀리 주변에 이 사람, 한국 사람 찾아가요. 가면 독일 의사
한테 가면 1주일 끊어주는데 이 사람 2주일 끊어주거든요. 두 주일 
동안 놀다가. 우리 한국 사람들 그런 걸 많이 했어요. 사실은 나도, 
나는 출근도 뭐 그렇게 아주 힘든 일도 아니고 그래도 어지간한 
병명에도 처방받으러 가는 거예요. 2주 하면 1주일 놀고. 그래서 
참. 이 사람도 서울의대 나와서 독일 와서 동네 의사 하는데 심심하
면 우리한테 한 번씩 와서 같이 밥 먹고 술 먹고 놀다 가고. 참 
재밌었는데 그 사람 있을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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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사진 47> 한국 광부들과 기념촬영
같이 간 동료들이 하임에 적응하고 있는 사람이 몇 없었어요. 
전부 나가는 거요. 방 얻어서 나가면 편하죠. 혼자 살면 시끄럽지도 
않고 새벽에 일 갔다 와도 혼자 있으니까 편하고 자유자재로 놀러 
다니고. 우리 지역에는 조금 더 떨어져서 있었어요. 간호사들이 많
았어요. 우리 있는 데는 아헨 지역에는 몇 사람 없었고 그래요. 토요
일, 일요일 이 광부들이 일도 안 하고 휴가 끊어서 간호사 찾아다닌
다니까. 휴가 내고 없으면 그런데 간다고 하니까. 총각들은 간호사
하고 결혼하면 안 좋습니까. 보장되잖아요. 10년이고 20년이고. 
그래 돌아다니는 사람 많았어요.
제5장 김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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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8> 동료광부와 간호사 결혼식 참석 
▮ 귀국과 파독광부 모임 참가
77년도 9월 19일인가 20일인가에 귀국했습니다. 저는 나와 
가지고 캐나다를 가려고 했어요. 여권을 사용할래 묻는 걸, 캐나
다 가려고 그 때는 취업, 해외에 3년 이상 거주한 사람은 캐나다
에 취업이민이 됐어요. 주택을 주고. 1,700불인가 보장이 되어 
있었어요. 그때는 와 가지고 식구들 만나고 하니까 가기가 싫더
라고요. 캐나다 이민을 가는데 가족이 다 가야 했어요. 안 가려 
하는 거예요 이제. 그래서 못 갔지요. 여권이 죽었잖아요. 그래
서 참 안가고. 한국에 남아서 이것저것 많이 해 봤습니다. 
170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사실 독일 간 사람들은 아직 잊질 않습니다. 우리가 굶고 나가서 
굶주림의 해결을 다 했잖아요. 우리 집도 내가 하나 가면서 우리 
집도 그렇습니다. 우리 바로 밑에 우체국이 하나 있었어요. 정년퇴
직했는데, 내가 갈라고 원서를 냈는데 내 동생도 가려고 하는 거예
요. 있어봐라, 내가 가보고. 연락하겠다. 안가니까 좋았어요. 가면 
건방만 떨고. 내 동생은 안 그렇지요. 우린 건방이 들어서 갖고. 
안 되는 거예요. 그래 벌기는 많이 벌어와도 한국에서 이용을 잘해
야 하지요. 
내가 예를 들어서 내가 머리가 안 좋아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실패를 보는 거지 벌기는 내가 잘 벌어요. 가면 뭐를 해도 잘 되는데 
좁쌀 사기꾼들이 붙으면 약한 거예요. 마음이. 독일이 있을 적만 
해도 참 아파트에 내 친구는 있지만 나는 금요일에 일 마치면 나가
버렸어요. 그리고 이랬습니다. 나가야 외래어는 배울 수 있었어요. 
내하고 우리하고 같이 간 사람이 고대 다녔었어요. 고대요. 오OO
이라고 참. 많이 배웠어요. 서울 성북구 돈암동 사람인데. 백화점이 
독일은 이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밀감을 하나 산다고 하면 
몇 마르크 독일말로 적혀 있잖아요. 그런데 흑인이 한 명 왔어요. 
백화점에. 흑인이 뭐를 하나 사서 돈 내는 데가 어딘가 영어로 
하니까 독일인, 여자들 말을 안 하거든요. 그래서 내 친구 오OO
이라고 이 사람이 영어 하고 잘하니까 흑인한테 돈 내는데 저기
다 말하고 보내주고. 그 사람들도 참 이 사람도 어디 나가진 
않았어요. 
계속 마칠 때까지 하임에 있었거든요. 근데 우리는 그 사람도 
무식하지만, 독일말을 하려고 하면 첫째 부끄러움이 없어야 해요. 
제5장 김홍규   
171
안 그렇습니까? 왜 그러냐면 비위가 좋아야 해요. 나는 한국 
사람이고 자기는 독일 사람인데 내가 독일말 그만치 하려 하면. 
그러면 우리가 댕겨 보니까 애들 있잖아요. 애들하고 만나서 
말을 하면 빨리 배우겠대요.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은 한국에서 
내보다 많이 배웠어요. 나는 계속 나가면 독일 애들이랑 생활하
니까 말은 어중이떠중이 듣고 그런 생활을 했지요
파독광부 모임은 두 번째 회장을 내가 했어요. 이렇게 됐을 거예
요. 2010년. 그전에는 서울엔 다 있었고. 우리도 안 올라가도 연락
하고 이랬는데요.
대구에서 처음엔 사십몇 명 있었지요. 자꾸 떨어져 나가고 안 
나오고. 그래도 우리는 권영진 시장님 덕분에 대구은행 부탁해서 
사무실 그냥 물세고 전기세고 일절 안 주고 쓰는 거 아닙니까? 그것
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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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남해 독일마을 조성
 
남해의 독일마을은 2000년부터 남해군이 남해문화예술촌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사업임.
남해군은 1960~70년 독일에 진출하여 한국 산업화의 초석
을 마련해 주었던 재독교민들이 정년을 맞거나 정년에 임박
해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이들의 노후를 설계해주고, 이를 
관광남해의 발전에 연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음. 당시 
남해군수였던 김두관 군수의 형님이 광부로 일했던 개인사
의 경험도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도 보도되고 있음.
2000년 6월 김두관 군수는 본 사업의 추진을 위해 독일의 
주요도시를 돌며 투자활동을 벌였고 5개 도시 순방, 입주 
및 사업 참여희망자 110명의 신청을 받기도 하였음.
  * 자료출처: 남해독일마을 홈페이지
제5장 김홍규   
173
남해 독일마을 조성
 
2003년에 독일마을단지 조성공사가 완공되었고 2015년 현
재 39집이 완공되어 귀국한 독일교포들이 거주하고 있음. 
20여 집 정도가 부업으로 민박을 운영하고 있음.
독일마을 안에는 파독전시관을 설치하고 운영되고 있는데 
이곳은 전국 지방자치단체 중에서 파독을 주제로 건립된 유
일한 전시관으로 2014년 6월 28일 개관하였음.
  * 자료출처: 남해독일마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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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에 대한 지원 및 
기념사업에 관한 법률(2020.6.9 제정)
2020년 5월 20일 제20대 국회 본 회의에서 ‘파독광부·간호사·
간호조무사에 대한 지원 및 기념사업에 관한 법률안’을 통과시킴. 
파독 후 공식적으로 공로를 인정받게 됨. 
따라서 본 법률안은 2020년 6월 9일 제정되었고 목적, 지원
대상, 지원대상에 대한 지원, 기념사업 등, 경비의 보조, 업무의 
위탁 등으로 본문이 구성되어 있음. 
특히 본 법에 적용되는 지원대상은 1. 1961년에 체결된 
「대한민국 정부와 독일연방공화국간의 경제 및 기술원조
에 관한 의정서」, 1963년 12월 체결된 「한국 광부의 임시 
고용계획에 관한 협정」에 따라 1963년 12월 21일부터 
1977년 12월 31일까지 독일에 진출하여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한 광부, 2. 1966년 1월 29일부터 한국해외개발
공사를 통한 알선과 1969년 8월 체결된 「한국해외개발공
사와 독일 병원협회 간 협정」에 따라 1976년 12월 31일까
지 독일에 진출하여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한 간호사 
및 간호조무사로 정하고 있음.
본 법률안의 제정과정은 2014년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에 대한 
지원과 예우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한국 정부가 이 
시기에 파독광부와 간호사에게 조국을 위한 헌신에 대한 감사편
지를 송달하고 이후 공식적 채널을 통해 파독근로자를 위한 국
가적 예우에 대한 논의가 지속적으로 진행됨.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2020년에 본 법률이 제정되는 성
과를 거둠.
  * 자료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부록 : 파독광부 관련 논문
1. 파독광부의 디아스포라 노동 경험에 대한 내러티브 탐색 
-탄광의 막장 안과 밖에서-
박경용(2018), 『다문화와 디아스포라 연구』 제13호 
2. 디아스포라 경계넘기와 독일광부 되기 
-1960년대~1970년대 파독광부를 중심으로-
박경용(2019), 『다문화와 평화』 제13집 2호 
부록 : 파독광부 관련 논문   
177
178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부록 : 파독광부 관련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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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부록 : 파독광부 관련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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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부록 : 파독광부 관련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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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부록 : 파독광부 관련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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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ᄀ)
간호 전문 / 52
간호사 / 51, 53, 78
간호전문학교 / 52
검정고시 / 4, 6
경력증명서 / 148, 150
경북대학교 / 86
경성의전 / 47
경제발전 / 137
경향신문 / 87, 116, 147
계명대학교 / 29
고사리 / 124
고유번호 / 22
공청회 / 36
광부 / 12, 59
광부 모집 / 86, 116, 147
광산 / 9
구례 / 2
구미 / 114
국가관 / 137
국가유공자 / 36, 139
국립의료원 / 54
굴진 / 18, 93, 157
기숙사 / 98, 99, 122
김대중 / 25
김영삼 / 25
(ᄂ)
나이팅게일 / 78
(ᄃ)
대구 협성상고 / 9
대구경북지역 협회 / 109
대한민국 / 64
독일 / 8, 9, 56
독일어 공부 / 90
독일어 교육 / 118
독일입국 / 56, 90
동발 / 19, 155
뒤셀도르프 / 12, 153
뒤스부르크 / 118
(ᄅ)
루르 지방 / 15
루프트한자 / 12
(ᄆ)
마이스타 / 95
만주개척단  / 2
메디컬센터 / 54
모조 광산 / 154
문경광산 / 11
뮌헨 올림픽 / 105,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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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ᄇ)
박정희 대통령 / 24, 25, 138
봉사 활동 / 137
(ᄉ)
사경회 / 5
사회 / 9
사회보장제도 / 29
샤크트 / 91
성내교회 / 46
송금 / 27, 63, 133, 163
슈템펠 / 18, 22, 93, 94, 155
스테어크라데 / 90
시민병원 / 58
신명여고 / 7
신원조회 / 147
신체검사 / 117
(ᄋ)
아리랑 / 65
아우토반 / 24
아헨 / 153
안동여중 / 48
안동여중, 여고 / 52
알래스카 / 13
알스도르프 / 154
알프스 / 23
어머니 회장 / 71
영어 / 9
오버하우젠 / 90, 102
외환은행 / 133, 163
요양병원 / 61
운전면허 / 68
월사금 / 6
유공자 / 79, 108
유공자 선정 / 139
유류파동 / 121
의성 / 86
이민 / 127
인력개발원 / 86
인제의원 / 47
일반 상식 / 9
일본 / 146
(ᄌ)
제일모직 / 67, 68
종잣돈 / 24, 34
(ᄎ)
차관 / 24
청도 / 116
청송 / 4
추라이핀프 / 118
취업이민 / 169
(ᄏ)
캐나다 / 23, 56, 63, 127
코담배 / 95
코리안의 밤 / 130
(ᄐ)
태권도 시범 / 130
찾아보기   
247
태백광산 / 11
트랜스포트 / 120
(ᄑ)
파독간호사 / 52
파독광부 / 87, 107, 137, 147
파독광부모임 / 169, 171
파독광부회 / 33
파독모임 / 75
풍기 / 46
풍기초등학교 / 52
프랑크푸르트 / 23, 29, 56, 57, 
90, 118
(ᄒ)
하네다 공항 / 152
한학촌 / 33
함보른 광산 / 15
함부르크 / 57
해외개발공사 / 147, 150
현대화재 / 107
호벨 / 12, 18, 93, 94, 120
홀츠슈템펠 / 18
홀트양자회 / 67
흑룡강성 / 3
The Life and Itinerary of the Dispatched miners and nurses 
in Daegu and Gyeongsangbuk-do
by Gyeong-Yong Bak, Shinkyu Park, Chai-mun Lee
Copyright ⓒ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Published by BookandWorld. Daegu, Korea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29
대구·경북지역 파독광부·간호사의 삶과 여정
2021년 3월 31일 초판 발행
지은이 박경용 박신규 이채문 
펴낸이 김영모, 
펴낸곳 도서출판 책과 세계   등록 | 2007년 2월 2일, 제2010-000004호
주소 | 41565 대구광역시 북구 경대로 95(복현동)
전화 | 053-953-2417   전자우편 | bookandworld@naver.com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인문사회연구소 
 
ISBN 979-11-91341-07-2   94330  ₩12,000
ISBN 978-89-94255-28-6   94330  (세트)
*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책과 
세계 양측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 이 저서는 2019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9S1A5C2A0208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