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박신규·이토히로코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인문사회연구소
도서출판 책과세계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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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한인디아스포라의 대표적 재외한인은 재일한인으로, 형성과정에
서 특별한 역사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재일한인은 일반적으로 일본
의 식민지 시기에 조선에서 일본으로 이주하거나 강제징용의 형태
로 들어와 해방 이후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과 그 후손들이다. 
이들은 한국의 역사 과정에서 한일관계 및 남북관계에 따라 존재성
과 이들을 호명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일제강점기에 이주하여 세대
를 거쳐 거주하고 있는 재일한인은 올드커머로, 한일협정 시기인 
1965년 이후 이주한 한인은 뉴커머로 명명한다.
이와 같이 재일한인은 한민족이라는 동일성 내에 세대, 계층, 
이념, 국적 등의 다양한 축에 따라 다원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
다. 일본으로 이주하여 3, 4세대에 이르기까지 본국의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올드커머 재일한인에게 있어 특히 민족정체성 
은 이들의 존재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부각된
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재일한인의 고령화, 지역사회와의 
공생문제, 차세대 정체성의 갈등, 다문화공생 사회변화로 인한 
다양한 구성원의 출현 등은 재일한인사회에 있어서 민족 정체
성의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으로 민족정체성에 있어 재일한인 1세대와 2세대는 
일본에 대한 반발심과 함께 민족성에 큰 애착을 느끼고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자신의 언어와 정서를 지키려고 노력한 것으로 
평가되는 반면, 3세대와 4세대는 민족에 대한 기억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민족이란 소속감과 귀속감,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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념이고 내용적으로는 소극적 민족정체성을 지닌 존재로 분석되
고 있다. 따라서 본 서는 재일한인 1, 2세대의 특성을 보여주면
서, 일본사회에서 전쟁의 체험과 기억 계승 전달이라는 카타리
베 활동을 하고 있는 배동록씨의 생애를 대상으로 한다.
그동안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에서는 2011년부터 SSK 다
문화와 디아스포라연구단의 사업으로 일본과 중국, 중앙아시아 및 
러시아 등에 거주하는 재외한인들의 삶을 기록하여 왔고 연구의 
성과물은 『재외한인 구술사 총서』로 출간하였다. 이번 총서는 경북
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이 2019년 인문사회연구소 지원사업에 선
정되면서 기존『재외한인 구술사 총서』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기획된 첫 번째 총서이다.
본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 생애사』총서는 재일한인 거주지역
인 오사카에서 거주하고 있는 재일한인의 삶을 기록한『일본 오사카 
지역 재일한인의 구술생활사』와 재일한인의 정체성 탐색을 보여주
는『자이니치, 민족과 조국』, 그리고 오사카 개호보호 서비스 시설에
서 노년을 보내는 재일한인 1세 할머니의 삶을 보여주는 『오사카 
사랑방, 재일한인 1세 할머니』등의 총서와 함께 재일한인의 이주사 
내용과 재일한인 사회의 세대 변화를 보여주면서 구술생애사를 통
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배동록씨는 1944년 규슈에서 태어났으며 부모 세대가 강제연행 
방식으로 일본으로 이주한 사례이다. 재일한인으로서, 부모 세대가 
야하타 제철소에서 힘겨운 노동과 차별을 겪으면서 자녀들을 성장
시켰고 특히 어머니의 헌신적 노력으로 일본사회에 정착하게 된다. 
그중에서 배동록씨를 비롯해 2세들의 민족학교 진학은 재일한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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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한편 배동록씨는 40대 이후 시민운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 과정
에서 ‘옛날이야기나 전쟁 체험 등을 차세대에 이야기하여 전승하는 
사람’이라 불리어지는 ‘카타리베’ 활동을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하게 된다. 배동록씨가 카타리베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1989
년 여름 오오무타(大牟田)시의 미쓰이미이케(三井三池)탄광의 마와
타리(馬渡) 사택 51동을 방문하면서 그 벽장 속에 조선인 노동자가 
남긴 망향의 한문시를 발견하고 이와 같은 식민지의 기억을 다음 
세대에 계승할 필요를 느끼게 되면서부터다. 이후 전쟁과 피식민지 
경험이 있는 어머니 강금순씨를 설득하여 함께 카타리베 활동을 
전개하였고 배동록씨는 1년간 평균 50회의 강연을 진행하였다. 강
연은 2016년 2월 1,000회를 달성하였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본서는 크게 5장으로 나눠진다. 제1장에서는 야하타 제철소로 
강제이주 하게 된 가족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제2장에서는 성장
과정에서 조선학교에 진학을 하면서 정립된 민족정체성을 주요 내
용으로 언급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장년기에 접어들어 배동록씨
가 시민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와 마와타리 사택 보존운동에 주도
적으로 참여한 배경들이 서술된다. 제4장에서는 어머니 강금순씨
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과 현재 진행하고 있는 카타리베 활동에 
관한 참여관찰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5장에서는 현재 
70대의 배동록씨가 진행하고 있는 카타리베 활동의 의미와 향후 
본인이 소망하는 평화운동의 내용도 정리해 보았다.
일본사회에서 배동록씨와 어머니 강금순씨가 진행한 카타리베 
활동은 지역사회의 사회문화적 행위로서 전쟁 체험, 그리고 알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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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은 재일한인의 역사와 기억을 전달하는 데에 큰 역할을 수행했
다는 것을 본 총서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배동록씨와 같은 
재일한인의 카타리베 활동이 지속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방안도 
일본 시민사회와 연결하여 고민되어야 할 작업으로 여겨진다.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인문사회연구소 지원사업은 이와 같
이 재외한인의 구술사 단행본 출간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여 
한인디아스포라 관련 DB를 구축하는데 일조할 것이다. 따라서 향
후 본 연구원의 재외한인의 구술사 집필 노력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하는 바이다. 
2020년 6월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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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9
▮ 야하타 제철소로 부모의 강제이주········································10
▮ 어머니 강금순을 통한 이주와 제철소 노동 생활···············12
▮ 해방과 미귀환(未歸還)에 대한 어머니 강금순의 기억········18
▮ 가난과 배고픔의 유년시절·····················································20
제2장 조선학교 진학과 정체성 수립의 청년기·······················33
▮ 조선인 부락에서 보낸 초중고 시절······································34
▮ 조선학교 진학과 조선인 정체성 강화··································38
▮ 어려운 가정경제로 대학 중퇴 후 사회생활 시작···············43
제3장 지문반대와 마와타리 사택 보존의 사회운동 참여·······47
▮ 결혼과 자녀들의 조선대 입학················································48
▮ 성실하고 부처 같았던 아버지의 죽음··································52
▮ 지문반대운동부터 시작된 시민운동······································54
▮ 마와타리 사택 보존운동과 기념비 설립·······························55
제4장 어머니 강금순과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65
▮ 시민운동과 어머니의 참여·····················································66
▮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70
▮ 현재도 진행 중인 카타리베 활동··········································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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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카타리베 및 평화운동가로 보내고 싶은 노년기········109
▮ 국적 변경과 북한에 대한 생각···········································110
▮ 시민운동과 카타리베 활동, 그리고 삶의 변화··················114
▮ 평화운동과 기록보존 희망···················································119
◆ 찾아보기············································································123
- vii -
배동록 (2020년 2월 7일)
- viii -
배동록의 
연보
- ix -
1944년
(1세)
:
5남 2녀 중 5번째 출생
1950년
(7세)
:
한국 귀국 예정 기념 촬영 등 귀국예정, 
미귀환
1960년
(16세)
:
하나오중학교 졸업 
1961년
(17세)
:
야하타 공업고등학교 입학 1년 중퇴
1962년
(18세)
:
규슈조선학교 입학
1966년
(22세)
:
조선대학교 역사지리학부 입학 
1972년
(28세)
:
결혼, 2남 2녀
1985년
(42세)
:
지문날인거부운동 참여 
1989년
(46세)
:
‘강제연행 발자취를 젊은 사람들과 더듬어 
찾는 여행’에서 마와타리 사택 보존운동 
필요성 인식 
1993년
(50세)
: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과 ‘마와타리 
사택 보존운동 모임’ 결성 
1997년
(54세)
:
마와타리 기념비 건립 및 제막식
1998년
(55세)
:
어머니 강금순과 카타리베 활동 시작
2007년
(64세)
:
국제반전평화순례단 ‘2007 스톤워크 
코리아’ 참석
2008년
(65세)
:
어머니 강금순 사망 이후 카타리베 활동 
지속
2020년
(77세)
:
카타리베 및 평화운동가로 활동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 
야하타 제철소로 부모의 강제이주
어머니 강금순을 통한 이주와 제철소의 노동생활
해방과 미귀환에 대한 어머니 강금순의 기억  
가난과 배고픔의 유년시절
1942년 어머니와 4남매의 도일(渡日)시 사진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   
11
▮ 야하타 제철소로 부모의 강제이주
아버지가 1940년 여름에 일본으로 왔고 2년 후 42년, 42년에 
11월 달인가? 추운 그 날씨에 그때 4명이. 우리 형님, 누나 데리
고. 4남매 데리고 왔어요. 1년 후에 내가 야하타 제철소 하청회
사 사택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합천 출신이고 어머니도 합
천 고향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그 합천 율곡면 율치리, 어머니는 
율곡면 하일동. 집에서 그 걸어서 가면 한 40분 정도 거리. 차 
타고 가면 10분 정도. 집안에 서로 아시는 분들이 소개하셔서 
결혼하신 거지요.
어머니는 진주가 본가인데 잘 살았어요. 근데 일본 놈이 들어와
가지고 하룻밤에. 몰락농민으로. 할머니가 그래서 한이 나가지고 
죽었어요. 어머니의 어머니. 원래 어머니가 5살 때 돌아가시고 아
버님이 다시 결혼을 하셨지요. 거기서 살았는데 일본 놈이 들어와
가지고 하룻밤에 토지의 뭔가 등기증을 몰수해가지고 하루 만에 
거지생활이 돼버렸어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그 일본 놈한테 증
오심이 뭐 땅을 빼앗겼다고. 죽을 때까지 원망을 하고 있었어요. 
일본 놈 때문에 못 살게 됐다고. 할머니가 뭐 그래서 병에 걸려서 
할머니도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엄마의 새엄마가 왔어요. 계모가 
왔어요, 계모. 새엄마가 왔는데 정이 안 들어가지고. 차갑게 대해졌
대요. 그래서 전혀... 새어머니한테 뭐 이렇게 했다고요. 차갑게 
대응 받았다고요.
12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1)
 실제로는 국방저금이 아니라 국방저축인 것으로 보임. 중일전쟁 개시 
이후, 국채 상환과 군수산업에 대한 융자를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국
민에게 저금이 장려되었고, 1938년 4월 18일 이후에는 이 업무를 담
당하는 부국으로 대장성(大蔵省)에 국방저축장려국이 설치되는 등 저축
장려가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음.
   (참조:https://www.jacar.go.jp/shuhou/topics/topics01_04.html)
2)
 밀가루로 만든 납작한 국수(경단)를 된장 맛 또는 간장 맛의 국물에 
넣은 오이타(大分)의 향토 요리.
어머니는 1942년에 일본 와가지고 석 달은 그 뭐라. 아이들 돌보
고 이래 보다가 사람이 모자라서 도중에 나오라고. 명령을 하죠, 
회사에서. 우리 어머니도 같이 아버지와 나가게 됐어요. 그래서 나
도 태어나서 무려 3주일에. 지금이라면 석 달이죠. 3주일이라 그때
는. 일 나가라고요. 불과 3주일인데 일 나가라고요. 부모님은 제철
소를 해방될 때까지. 45년까지 아버지는 5년. 어머니는 3년. 그리
고 해방해가지고 회사에서 ‘너희들은 오늘부터 필요 없다. 고향에 
돌아가라’. 귀국할 사람은 귀국하라고 해요. 아무 퇴직금도 없고. 
돈도 올 때는 하루 2엔. 2엔이라 했는데 오니까 1엔. 1엔을 주고 
쌀도 좀 주고. 국방저금1). 국방저금이라고 받았어요.
우리 어머니 일본어 잘 모르는데 국방저금. 나쁜 징용, 국방저금. 
병대. 그리고 뭐라. 단고지루(だんご汁, 경단국)2)라든가. 국방저금. 
그리고 몇 가지 있었는데 지금 생각이 안 나네요. 암튼 일본 그 
식민시대가 사무치고 있어요. 일본군에 대한 증오심이라 할까. 차
을 받은, 그에 대한 반발, 그런 게 있었습니다. 
해방 후 아버지는 노가다. 죽을 때까지 노가다. 그렇게 해서 
7명 키웠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식량 조달, 그리고 집에서 요리 
만들고 빨래하고. 어머니가 봉건적인 사상도 있었고 그 우리 아버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   
13
3)
 배동록의 어머니 강금순씨는 본인의 생애에 대한 기록들을 여러 인터뷰
를 통해 전달하고 있음. 따라서 여기부터는 기존 기록들에서 강제이주 
및 도일 상황에 대한 글을 정리, 각색하여 소개하고자 함. 글의 원자료
는 오구마 에이지·강상중(2019), “식민지의 한을 아리랑에 담아 전하다
_강금순”, pp.13-22,『재일 1세의 기억』, 姜金順(2002), “にんげんド
キュメント 姜金順: 最後の語り部/ 朝鮮人強制連行の歴史を語り、平和
への祈り!”, 9-20,『市民活動情報紙 アクティブ: いのち育む序章』, 福
岡:向陽社.
지 어머니, 여러 번 이야기했었어요. 가시나는 공부시키면 못쓴
다. 남존여비로. 여자는 설거지만 하면 좋다. 빨래만 하면 좋다고 
생각하셨지요. 
▮ 어머니 강금순을 통한 이주와 제철소 노동 생활3)
나도 남편도 경상북도에서 태어났고, 남편은 1940년에, 나는 
1942년에 30세였어요. 남편은 징용으로 야하타 제철소(현 신일
철, 신닛테츠, 新日鐵)의 하청에서 일했어요. 나는 4명의 아이를 
데리고 생활의 전망이 없는, 긴박한 상황에 있었어요. 2년 후, 남편
을 따라 나와 젖먹이를 포함한 5명이 일본으로 건너왔어요, 당시 
조선에서 농업을 하고 있었는데 쌀도 공출(供出)로 몰수되었고, 우
리는 겨우 먹고 살아왔어요. 남편과는 1927년에 내가 열일곱 살에 
친정아버지가 혼담을 정해서 결혼했고 시어머니와 시동생하고 같
이 살았어요.
1940년경에 징용이라고 일본에서 일하는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
어요. 남편은 일본으로 건너갈 결심을 했는데 그때 도항 제한을 
1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4)
 61년은 인터뷰할 당시 시점으로, 인용된 인터뷰 자료는 2002년에 발
간되었음.
엄격히 해서 제철소 모집이 아니면 자유롭게 일본에 갈 수 없었습니
다. 후쿠오카현에 있는 야하타 제철소 직원 모집을 하는 모집책이 
마을에 와서 남편이 지원했어요. 모집이라는 건 이름뿐이고 실제로
는 강제연행이에요. 일본에 가면 돈도 좋고, 하루 2엔의 임금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실제로는 대부분 강제저금 등이라고 해서 
거의 받을 수 없었어요. 
2년 후인 1942년 12월 31일에 나와 아이들은 마을을 떠나 낙동
강 건너 버스를 타고 대구로 갔어요. 대구에서는 기차를 타고 부산
으로 갔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지요. 
부산에서 배를 탔는데 현해탄(玄界灘)에 들어가는 순간 바람이 
세지고 바다가 매우 거칠어졌어요. 파도는 갑판까지 부딪쳐오고, 
우박은 지붕을 쳤어요. 배는 크게 흔들렸고, 빈틈없이 꽉 들어찬 
배 안은 공포로 ‘아이고~ 아이고~’ 울어 외치는 소리로 가득했
어요. 큰 파도가 부딪쳐올 때마다 짐은 끝에서 끝까지 데굴데굴 
굴러떨어지고,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설 수도 없었
어요. 61년4)이나 지난 지금도 그 당시 기억이 되살아나요. 아이
들은 ‘물, 물을 줘요’라고 그랬지만 물조차 줄 수 없어서 참으라
고 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녁에 부산을 출발하고 새벽녘에 시모
노세키(下関)에 도착하였고 약 10시간의, 목숨을 건 도항이었
어요. 지금은 8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여정이지만요.
나는 폭풍으로 배가 가라앉고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마음으
로, 아이들의 손을 잡고 각오를 했었어요. 그 폭풍은 그칠 기세도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   
15
5)
 일본 건축에서 가옥 내의 일부를 구성하는 공간. 일본의 전통 민가와 
헛간의 실내공간은 나무 널빤지 등을 깐 마루 부분과 지면(地面)과 같
은 높이의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후자를 바로 ‘도마(土間)’라고 부름.
안보이고 아이들과 같이 죽을 거라고... 그때 나는 ‘하나님, 오늘 
밤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고 잘 지켜주세요.’라고 계속 빌었어요. 
날이 새면서 폭풍은 조금 약해지고, 겨우 시모네세키항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도착했을 때에는 모두 뱃멀미와 심로로 인해 반 죽은 사람처럼 
되었었고, 몹시 피곤해서 그대로 땅에 쓰러질 것 같았어요. 그래도 
도착한 기쁨과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은 가득했어요. 아이들
은 방심상태였고, 말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어요. 남편의 얼굴이 눈
에 들어온 순간은 정말 기뻤어요. 남편이 ‘무사히 도착했네요!’라고 
웃으면서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우리 5명을 맞이해줬어요. 
그리고 야하타히가시쿠(八幡東区) 에다미쓰(枝光)의 함바로 데려가
줬고, 거기서 아침을 먹었어요. 그날 하나오마치의 하치만 제철소
에서 제공하는 사택으로 들어갔습니다.
야하타히가시쿠 기온마치(祇園町)의 북쪽에 있는 하나오마치(花
尾町)라는 곳에 연립주택이 있었는데 그것은 15헌 연립주택을 포함
한 5동이 있었고, 그 중 1헌이 우리 집이었어요. 3장, 4장 반의 
2칸. 그리고 3장 반의 토방5)이 있었어요. 그 토방에는 취사용의 
부뚜막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전기나 가스는 없었고, 
모두 땔나무를 태웠어요. 그렇게 해서 6명의 생활이 시작됐어요. 
거기서 동록을 비롯해서 애가 3명 태어났고, 9인 가족이 33년간 
생활했지요.
16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어머니와 4남매의 도일시 사진 (1942년) 
일본의 전쟁 상황이 안 좋아지면 결배(欠配)라고 쌀의 배급이 멈
추는 일이 자주 있었어요. 한창 먹을 아이들을 데리고 정말 힘들었
어요. 주변 들판에서 쑥, 미나리, 달래와 같은 들풀을 뜯어서 적은 
쌀에다가 넣고 물 같은 죽을 매일 먹었어요. 그렇게 해서 아이들과 
같이 굶주림을 견디어 냈어요.
우리 집은 끝에서 6번째였어요. 그때 노무 사무소는 15헌 연립주
택의 가장 입구에 있었어요. 거기에 감독이 있었고, 아침 5시가 
되면 각 집 문을 막대기로 쳐서, ‘빨리 일어나라, 빨리 밥을 짓고 
일하러 나오라’고 이야기하고 다녔어요. 부뚜막에 불을 태웠는데 
연기가 안 나와 있으면 다시 문을 치러 왔었어요. 나는 한 번도 
주의를 받지는 않았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해요.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   
17
6)
 무기나 탄약 등의 장비를 제작, 저장 및 보급하기 위한 시설.
처음은 아이 때문에 사택의 허드렛일만 하면 끝났는데 전쟁 상황
이 안 좋아지고 일본인 노동자가 현장에서 부쩍부쩍 전쟁터로 보내
지게 되었어요. 그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나도 현장에 나올 
수밖에 없게 됐어요. 야하타 제철은 증산에다가 증산의 체제로 들어
갔기 때문에 나도 현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제철소에서 
잡역부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야하타 제철소 어머니 신분증 (1944년)
그 당시 야하타 제철소는 근교의 치쿠호(筑豊)탄광, 고쿠라
(小倉)탄광 그리고 와카마츠(若松)의 석탄 뱃짐 등, 그리고 중
국에서의 철광석, 고쿠라 조병창(造兵廠)6), 이런 일은 내지 노
동력의 일환으로, 조선인 강제연행 노동력으로 만들어졌어요. 
18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7)
 일반적으로는 ‘철은 국가이다(鉄は国家なり)’라고 표현함.
8)
 배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대를 의미함.
그 노동력이 전쟁을 위한 군함이나 무기가 되었어요. 일본의 
당시 풍조는 ‘철이어야 국가이다(鉄こそ国家なり)7)’라고, 나
라는 철을 만드는데 광분하고 있었어요. 조선인 강제노동은 대
륙침략을 위해 이용당했어요. 
중국 등에서 운반된 철광석의 산더미가 항 안벽에 있었어요. 그 
한데에 쌓인 철광석을 맨손으로 잡아서 화차에 실었어요. 이레코라
는 작업이지요. 지금처럼 벨트 컨베이어라든가 그런 건 없고, 인간
의 힘으로 화차에 실었어요. 그 당시는 거의 대부분이 인해전술(人
海戰術)이었어요. 그 철광석을 철로 된 갈퀴 같은 걸로 소쿠리 같은 
것에 넣고, 그걸 배에 안고, 디딤널을 걷고 올라가요. 그 철광석이 
정말 무거웠어요. 하나의 화차에 4인 1조로 작업을 했어요. 결배(缺
配)8)로 굶주린 몸에 그 작업은 정말 혹한 것이었고, 그걸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철광석과 함께 화차에 떨어지고 싶다고 몇 번도 
생각했어요. 그러한 나의 모습을 보고 조선인의 동포들이 ‘어머니 
우리가 할 테니 좀 쉬세요’라고 말을 걸어준 것은 지금도 잊지 못해
요. 당시 여성들의 급료는 하루 1엔이었어요. 5일에 한 번 받았지만 
이런저런 명목을 붙여서 국방저금을 하게 했어요. 야하타 제철소 
도바타(戸畑)공장은 광재라고 해서 그걸 바다에 버리고 묻고, 그 
위에 공장을 지었어요. 동포인 전씨는 그 광재를 바다에 버리는 
일을 했었어요. 광차에 광재를 싣고, 바다까지 광차를 밀고 가는 
일이에요. 광차가 너무 무거워서 미는 것도 힘들었지만 바다 옆까지 
광차를 밀고 갔다가 와쿠를 빼는 것도 너무나 무거워서 힘들었어요.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   
19
9)
 군대의 소집 영장.
그 와쿠를 뺄 때 전씨는 광재와 같이 밑으로 떨어졌어요.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죽을 뻔했대요. 조금이라도 쉬고 있으면 ‘빨리 밀어
라!’고 혼났어요. 
대부분 하청의 함바나 사택에 살고, 일했던 조선인들은 저변의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중노동이 강제되었어요. 철광석의 운반, 
광재를 퍼내고 물을 붓고 식힌 다음 화차에 싣거나, 코크스가 타고 
남은 찌끼를 운반하거나, 매진의 열악하고 더러운 말단의 일이 강제
되었어요. 정말 일본이라는 나라는 철이어야 국가이다, 철을 만드
는 것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했었어요. 외지와 내지는 ‘내선
일체’라 불리고, 전쟁에 맥진했었어요. ‘황국신민, 당신들은 천왕폐
하를 위해’, ‘나를 위해’로 하면서 동원당했어요. 당시는 그것에 거
스르지 못하고 우리 조선인은 모두 일본의 전쟁을 위해 노예와 같은 
취급을 당했어요. 우리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힘든 시대였어
요. 빨간딱지(赤紙)9) 한 장으로 소집되어 전쟁터로 가게 되었어요. 
전사해도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 해방과 미귀환(未歸還)에 대한 어머니 강금순의 기억
전쟁 후 우리 동포들은 조선에 가려고 했지만 결국 약 70만 명의 
조선인이 남았다고 들었어요. 다양한 이유로 본국에 갔어도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대요. 본국에 돌아가도 먹을 것도 없고, 가
20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족도 이산하고, 일본에 돌아와요. 돌아와도 살 데가 없고 집을 분뇨
처리장 근처나 묘지 근처에 함석지붕의 판잣집(바라크, バラック)을 
짓거나, 강변에 짓거나 해서 살았어요.
우리도 갈 예정이었지만 모두 같이 갈 수 없었어요. 돈이 없었고, 
하루하루 생활에 쫓기고 있었어요. 이래저래 하고 있는 사이에 조선
전쟁이 일어나버렸어요.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인해 조선반도를 
이분하고, 같은 민족이 싸웠어요. 슬픈 사건이에요. 결국 38도선으
로 2개로 갈라져 버렸어요. 우리는 남쪽 고향으로 갈 꿈도 끊어졌어
요. 남편은 고향의 육친과 재회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그것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우리 남편은 제철소의 하청 1조에서 해고되었어요. 어쩔 수 없이 
이쪽저쪽 날품팔이의 토목 작업원을 하고 생활에 보태줬어요. 남편
은 정말 성실하게 일을 잘했고, 회사에 대드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남편이 해고당했을 때는 나는 정말 분했어요. 일본패전과 동시에 
외지에서 일본인이 복원(復員)하거나 인양으로 돌아온 사람들도 늘
어나서 노동력으로서의 조선인은 필요가 없어진 것 같았어요.
나는 젖먹이를 비롯해서 5명의 아이를 데리고 전력을 다했어요. 
먹을 것도 없고, 일본인도 그랬지만 정말 힘들었어요, 주변 들판에
서 먹을 수 있는 쑥, 민들레 등을 찾아 가져오고 떡국으로 해서 
먹었어요. 나도 생계를 보태기 위해 일하고 싶었지만 일본어 읽기·
쓰기를 못해서 일은 한정적이었어요. 전쟁 중이거나 해방 후에도 
아이들에게 충분히 먹일 수 없었던 것은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부모
의 기일은 잊은 일이 있어도 굶주림은 잊지 못해요. 그런 생활 속에
서도 나는 아이들에게 우리와 같은 고생을 시켜주고 싶지 않았어요.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   
21
지게를 짊어지는 생활을 시켜주고 싶지 않았어요. 공부를 하게 해주
고 싶었어요. 나는 일본어를 쓰는 것도 읽는 것도 못하니까 근처 
빈터를 밭으로 하고 상추, 마늘을 만들어 기타규슈의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는 부락에 가서 팔았어요. 
▮ 가난과 배고픔의 유년시절
나는 여기서 태어났어요. 40년에 아버지가 왔고 2년 후에 어머니
가 4명의 아들딸 데리고 왔고. 2년 후에 내가 태어났고. 그 침략전
에 가담한 우리 조선 사람을, 가담을 시켜가지고 일 시켜가지고. 
전쟁 마치고 나서 해방돼가지고. 모든 사람은 돌아갔는데 우리는 
여기 남아버렸어요. 그렇게 70년의 세월이 흘러갔어요. 그래서 재
일동포. 우리 알다시피. 전쟁, 식민지 통치의 전쟁 피해자의 손자들
이지요.
어렸을 때 연중행사처럼. 봄이 되면 4월 되면 켄쨩의 생일, 29일 
날. 그때 딱 연휴, 연휴가 있어요. 그때 산에 올라가서 일주일간. 
산나물 뜯으러 쫓아다녔어요. 야하타 제철소는 지금도 있지마는 
가동은 안 하고 있고, 여기 옮겨가지고 바다 쪽으로. 옮겨가지고. 
그 야하타 제철소의 중심, 본거지가 여기였어요. 여기서 한 4km 
정도 가면. 아니 한 3km. 여기 그 야하타 제철소 이레이구미 사택, 
아까 봤지요. 3km 정도 걸어서 그 JR 야하타역이라고 있어요. 여기
에 입구가 있어요. 공장 안에 들어가는. 일본어로 ‘고~나이(坑内, 
갱내)’ 여기 안에 들어가서, 거기서 힘든 일을. 철광석을, 배에서 
22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내린, 그 중국에서 뺏어온, 그것을 갖다가 그 화물차, 덮개가 없는 
화차를 뭐라고 할까? 무개차(無蓋車)라고 할까? 거기에 철광석을 
싣고. 그리고 그건 무거워요. 그래서 어떻게 실었냐면, 이건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공장이 있었고 여기에 그 사택이 있었고. 여기를 여
기 매일 다니면서 공장에서 그 힘든 일을 조선 사람이 했어요. 약 
6,000명.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부모님처럼 노예노동을 
당했어요.  
너무나 가난해서 어머니가 여기에 시장, 시장이 있어요. 바로 
내려가면 시장이 있어요. 양쪽에 쭉~. 여기서 어머니가 이래 아홉 
명 밥을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야채 같은 것도. 쌀. 여기가 쌀집이
라. 왼쪽. 기온산 베이코쿠텐(祇園山米国店)이라고. 쌀집. 여기서 
쌀을 사가지고. 지금처럼 도구가 없어요. 자전거도 없고. 손으로. 
한 말을. 무거워요. 이래 가지고. 도중에서 무거우니까 이래다가. 
쌀은 무거워요. 3일에 한 말이 없어졌지요. 아홉이니까. 식구가 
많으니까 시장 가죠. 가면 그러면 여기서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어머니가 뭐 다섯 시 여섯 시, 겨울에는 다섯 시가 되면 
캄캄하게 되어서 이렇게 벌벌 떨면서 어머니가 오는 걸 내가 여기
서 기다리고. 여동생과 둘이. 그리고 우리 형님은 마지막까지 안 
나왔어요. 내가 여기서 기다렸단 말이야. 그때 어머니가 여기 등에 
그 쌀을 가져와서 무나 감자 그런 것을 후로시키(風呂敷, 보자기), 
그때는 후로시키라고 있었어요. 거기에 담아가지고 등에 이래 업
고, 딱 내가 여기서 어머니가 오는 거 기다리다가. ‘아 어머니가 
왔다! 아 어머니~’ 이래가지고 어머니가 등에 들고 있는 거 
내가 받고 그랬어요.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   
23
유년시절 어머니를 기다리던 장소인 류센지(龍潜寺)
야채 가게가 늦게까지 했어요. 8시까지. 그럼 불이 있고, 알전
구가, 지금은 형광등이지만 그땐 형광등이 없었어요. 알전구라
고 전구. 그래서 그때 사람 시끌벅적하고, 와 그때는 아는 사람
이 들어가서. 어머니가 야채를 여기서는 안 사요. 왜, 쭉 저기 
시장가면 싼 데가 있어요. 그리고 항상 사오는 건 고구마. 뭐 
2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10)
 1946년 6월 동경도의 실업대책사업으로 직업안정소가 지급하는 일용
직 근로자에 대한 정액일급을 240엔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 100엔 2
장과 10엔 4장이라는 일당으로, 일용직 근로자를 ‘니코욘’이라고 불렀
음. (참조: NHKスペシャル戦後70年ニッポンの肖像, https://www.nh
k.or.jp/po/zokugo/801.html)
매일 고구마야. 고봉으로 담겨 있는 고구마가 이렇게 있었고, 
그땐 해방돼가지고 한 무더기가 30엔. 그러면 몇 집이 있어요. 
이 집에 보고 어느 쪽이 양 많은가. 이쪽에 하나 많다. 여기가 
제일 좋다 하면 여기서 사가지고. 음 지금이라면 골판지상자나 
비닐봉투가 있지만 그때는 없었어요. 그 짚으로 만든 이쁜 바구
니가 있어요. 전용의. 그 바구니를 매일 들고, 그 바구니에 넣고. 
그리고 그걸 들고 집에 가서 그날과 다음날의 식량. 매일 고구마 
사러. 그리고 밥은 이 조끔만. 그리고 반찬은 김치. 단백질은 
20살 때까지 고기 먹은 기억이 없어요. 물고기는 먹었지만도. 
소고기, 돼지고기는 먹어본 적이 없어요. 눈물 나와요. 지금은 
이런 포식의 시대. 지금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시대. 돼지고
기도 못 먹었다고 하면 부끄러워서. 아버지 노가다 땅해가지고 
쌀. 그 여기서 아버지는 노가다해서 240엔. 니코욘(ニコヨ
ン)10). 240엔을 니코욘이라고 해요. 그걸 받고 쌀을 사면 반찬 
사면 여유 없지요. 
어머니는 가사 일을 잘했어요. 나무 뜯으러 항상 산에. 나무를 
뜯으러. 어디 가면 나무 뜯으러 가. 이런 나무들 깊은 이야기가 
있어요.
집세는 그때 한 달에 백 엔. 그 만 원 이하. 한국 돈으로 그래서. 
집세를 낼 때 항상 어머니가. 집금하러 오는 아저씨가 있었어요.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   
25
11)
 곱자로 6자 5치(2m정도)를 한 칸으로 하는 다다미의 척도로, 주로 
간사이(関西)지방에서 사용함. 
그 나이 많은. 우리가 끌려왔으니까, 피해자니까 우리는 무료로 해
야 되잖아요. 그 회사에서 명령이니까 우리도 오늘 집세로 받고 
가야 된다고 했대요. 그럼 돈이 없다. 돈 내소. 뭐. 한 달 되면 집금
하러 오는 아저씨. 항상 뭐 싸움만 하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돈이 
없다. (그쪽은) 내라. 옆에서 듣고 있으면은 슬프기 짝이 없었어. 
야하타 제철소의 사택이었던 장소
방은 4장(畳) 아니 3.5장에. 지금으로 말하면 교마(京間)11), 조금 
좁지만요. 그때는 혼마(本間)라 좀 넓었어요. 그 다다미 1장이 1.8
26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미터. 폭이 1미터인가? 1.8미터가량. 그것이 3장. 2개 있었고. 그리
고 평수가 좀 있고. 그리고 화장실은 수세식 변소가 아니라 ‘도쓰보
(どつぼ)’라고. 재래식 변소. 똥을 싸면 똥이 떨어지고. 냄새나고. 
여름에는 구더기가, 구더기를 뭐라고 해요. 벌레. 벌레가 올라오네
요. 이렇게 보면. 그리고 휴지가 없으니까 신문지. 잡지 같은 거 
어디서 구해서 쓰고 그랬어요.
내가 태어났을 때는, 전쟁 시대는 모르지만도, 사택은 처음에는 
전부 조선 사람이었어요. 해방된 후에는 다 돌아갔지만. 해방 후에
는 100명, 약 150명가량 있었어요. 가족 포함해서. 전쟁 마치고 
나서 만세 만세 부르고, 우리 조선인 해방됐다 돌아갔는데 몇 집이 
남았어요. 우리 집하고 히라오나(平岡), 그리고 저쪽 이와무라(岩
村), 그리고 요시다(吉田), 이와무라(岩村). 다섯에서 여섯 집인가
요. 그래서 빈 집에 일본 인양자라고, 만주 같은 해외에 있었던 
일본 사람들, 인양자라고 했어요. 그런 사람들이 여기 들어와가지
고. 내가 27살까지 여기 살았으니까. 일본 사람도 전부 일하고 있
어요. 조선 사람도 그때 해방 직후는 귀국은 안 되니까요. 그러니까 
전쟁시절은 집세는 내지 않아서 좋았는데 전쟁 마치고 나서 해방돼
가지고는 집세를 내라고. 안 냈고요. 원래 기숙사였으니까. 그래서 
그 집세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니까 수금원이. 그럼 오면 
어머니랑 싸움을 하고 있어요. 옆에서 듣고 있으면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내라, 없다. 내라, 없다고 이러면서 계속 말싸움을 했던 기억
이 나요.
일단 우리 집에까지 가서 보아요. ‘하모니카 나가야(ハーモニカ
長屋)12)’가 있어요. 하모니카 연립주택. 여기 3집, 이쪽 6집, 그리고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   
27
12)
 1965년쯤까지 탄광주택은 어디를 봐도 10채 정도가 나란히 줄지어 
있는 연립주택이었음. 그 구조가 하모니카의 구멍이 늘어져 있는 모습과 
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에 ‘하모니카 나가야’라고 불렸음. 
이쪽에 5집. 그 사이에 좀 공간이 있어요. 통로가. 그리고 뒤편에 
똥 퍼내는, 그게 좁은 통로가 있었으니까. 바로 뒤에 들어갈 수 없잖
아요. 그래서 첫 번째 3집. 그리고 6집. 그다음은 2군데 이렇게, 
뒤로 나가는 통로가 있어가지고, 쭉 서는 ‘하모니카 나가야’가 하나, 
둘, 셋, 넷. 4줄. 그리고 3번째 줄은 적었어요. 5집 정도밖에 없었어
요. 그리고 모두 다 합치면 여기에 30집 정도 있었어요.
한 식구가 6명씩 정도였어요. 그때는 식구가 많았으니까 한 집에 
5명, 6명이라면 150명 있었어요. 그리고 4장과 4장 반의 방은 2칸
인데, 그리고 요리를 하는 그 마당. 지금처럼 봉당, 판자가 없는 
상태. 봉당. 땅 위에 그리고 부뚜막, 솥이 있고. 그리고 거기서 불태
워가지고 밥을 짓고 반찬 같은 거 풍로라고. 풍로라고 찌꺼기, 석탄
이 탄 찌꺼기. 그리고 조개탄. 조개탄이라고 지금은 없는데. 조개탄
을 연료로 하면서 냄비에 반찬도 나물 가지고 만들고 그랬어요.
그리고 수도가 없으니까 우물, 공동 샘. 공동우물을. 그러고 먼저 
우물을 열고. 그리고 여기는 호수가 많았으니까 펌프. 펌프로서. 
막대가 있어서 막대로 가지고 이렇게 하면 물이 폭폭폭 올라와요. 
그래가지고 물통에다가 물통에 넣고 이렇게 집에 가요. 물을 푸는 
것이 참. 물도 참 무거워요. 8리터나 10리터의 큰 캔에. 물통에 
넣고. 물통도 사는 것도 힘들어서 캔, 석유캔. 옆에 구멍을 만들어가
지고 이렇게 해서 들고. 약 20리터, 18리터 물을 넣고. 무거워요. 
저 2개 들고. 그때는 아직 젊었으니까 이렇게 들고 처음에는 막대로 
28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이렇게 양쪽. 물이 출렁출렁 흘러 나가버려요. 그럼 다음은 손으로. 
손으로 들고 가는 게 덜 흘리니까. 
아버지는 노가다하고 집은 가난하고 250엔 받으면 반찬 살 여유
가 없었어요. 아무래도... 그리고 어머니 바깥에 가면 쑥이나 민들레 
한두 개 뭔가 가져와서. 뜯어서. 그리고 그걸 삶아가지고 씻고, 삶고. 
시래기국 끓이고. 고구마하고 밥은 고 정도. 아버지만 흰밥. 아버지
는 노가다를 65살 정도까지 했어요. 적어도 70살 넘어서인가, 오래 
했어요. 배봉건이라고 그 이름 밖에 못 써요. 참 원망스러워요. 
그때 우리 수제비! 매일 수제비였어요. 그 기름 물에 담가가지고 
장을 좀 넣어가지고. 지금 같으면 맛있게 할 수 있는데, 가쓰오부시
나 쪄서 말린 잔 멸치라든가 그걸로 맛국물을 만들 수가 있었지만. 
여유가 없으니까. 물에다가, 이래가지고 소금도 좀 넣어보고. 부끄
럽지만도. 장 좀 넣고 그리고 끓여가지고 어머니하고 같이. 나한테 
도와주라고. 내가 힘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밀가루 넣어가지고. 손
으로 쪄서 넣은 거야. 물이, 맛국물이 이렇게 넣는 거라. 그랬더니 
물이 튀는 거야. 그럼 뜨겁다. 아 뜨겁다 얼굴이. 이래 하면 그 밑에
서 나무 데우고 살살 김이 올라가고 나머지 조금 있으면 먹을 수 
있어요. 그리고 끓여가지고 가족이 만나가지고 아버지도 일 마치고 
돌아와서 밥상 차리고 먹는 거지요. 큰 냄비에 솥에 있는, 수제비를 
놓고 냄비 가지고 와서 그 위에 밥상에 가지고 오지요. 어머니가 
국자에 사발에 놓고 주는 거지요. 어머니가 이렇게 수제비를 나눠줘
서 먹는 거지요. 다 먹으면 어머니는 위에 올라가지 않고. 옆에 솥에 
있는 곳에서 이래가지고 이렇게 국물만 마시고. 나는 3그릇 먹고도 
땡땡하게 배가 부른데 어머니가 ‘더 먹을래?’라고 하면, 그래서 내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   
29
가 사발을 건네면 어머니가 또 냄비를 이렇게 봤더니 수제비는 한두 
개밖에 없어요. 그걸 나한테 주신 거지요. 그래가 어머니가 그쪽에 
가시고, 앉아서 국물만 후루룩. 후루룩. 어머니는 국물만 마시고.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 그렇게 어머니는 
나한테 그렇게 애정을 담아주셨어요. 잊을 수 없어. 자기는 국물만 
마시고. 나한테 그 수제비 하나라도 많이 주려고. 그것이 제일 이
래... 가슴 아프고 그 뭐랄까. 표현하기 좀 힘들지만도... 거기서 
고생하면서 어머니가 나를 키워줬다는 그 은혜는 잊을 수 없어요. 
그 우리 어머니만이 아니고 조선의 어머니 다 그래 했겠지요. 
1950년 귀국 예정 전 가족사진 촬영
(왼쪽 아래 배동록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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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이건 50년 사진인데 아버지 어머니. 장남 여기 그 누나. 그리고 
여기에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내가 네 번째에 있어요. 5월 
달 찍어서, 찍고. 여기 에구치 사진관이라고 있어요. 시장 안에 들어
가면 거기 사진관 아들이 지금 에구치 요지로라고. 내하고 동급생이
야. 그 일본학교. 그 아버지가 이 사진을 찍었어요. 그 사택까지 
와가지고. 그 당시는 사진사들은 집에 오고 그랬어요. 그리고 오고 
사택 앞에 있는 빈터에서 사진을 찍고. 이 사진은 가난하게 살았지
만도 다비(足袋, 일본식 버선)를 신거나 해서 최대한으로 정장을 
입고, 가난했지만도. 옷을 그 갖춰 입고, 그리고 최대한으로 멋을 
내고, 해가지고, 자기 고향에 돌아간다. 이래 마음을, 기뻐해가지고 
전부 미소를 짓고 있으니 좋지요. 그게 다 거꾸로 돼버렸어요. 전쟁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한국에, 자기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 
한 달 후에 6·25전쟁조선전쟁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못 갔어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결국 자기 가족들 못 만나고. 만나고 싶다. 
만나고 싶다. 애타게 애타게 돌아가시고요. 우리도 이산가족이야. 
남북도 이산가족이면 우리도 이산가족이지요. 
제1장 야하타 제철소로 가족 강제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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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자료>
일본 지역 강제동원 작업 현장(노무)
아시아태평양 전쟁 기간 중 일본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의 노
무동원 작업장은 4,119개소로 기업명이 확인된 작업장 
1,259개 기업(2,876개소), 현존 기업 운영 작업장도 1,260개
소로 나타남.
- 미쓰비시 계열 108개소, 미쓰이 계열(미쓰이 스미토모 포함) 
77개 소, 신일본제철 스미토모 계열(스미토모 계열 포함) 120
개소, 니시마쓰 건설 31개소 등 주요 일본 기업 망라
일본 지역 작업장은 47개 도도부현에 모두 분포, 홋카이도(北海
道)가 381개소로 가장 많고 효고(兵庫)현 252개소, 후쿠오카(福
岡)현 248개소, 가나가와(神奈川)현 230개소, 도쿄도(東京都) 
200개소, 오사카부(大阪府)가 187개소의 순이었음.
직종별로 보면, 군수공장(1,159개소)이 가장 다수를 차지, 토건
(1,068)과 탄광산(892개소), 군 소속 작업장(586개소), 일반 토
건(346개소)의 순으로 나타남.
* 자료출처: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
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   
32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일본 지역 강제동원 작업 현장(노무)
- 치쿠호 탄전과 야하타 제철소 -
후쿠오카현 동쪽에 위치한 치쿠호 지역은, 이즈카시(飯塚市)를 
중심으로 동쪽의 다가와시(田川市)와 북쪽의 노오가타시(直方
市) 3개 도시를 둘러싼 지역을 지칭함. 치쿠호 탄전은 후쿠오카
현 북부 온가강(遠賀川) 유역 일대의 남북 약 50km, 동서 약 
20km의 면적 약 800㎢의 탄전 지대로, 치쿠호 지역 북서와 
북동에 인접한 도시들에 걸쳐 있는 대탄전임. 일본 전국에서 
출탄량 제1위를 차지한 적도 있음.
초기의 치쿠호 탄전은 죄수를 사용한 수인노동 현장이었음. 미
이케 탄광에서 시작한 죄수(수인)노동은 다른 탄광에 확산되어 
당시 보편적인 탄광노동의 모습을 띠었고, 죄수 대신 조선인이
나 일본 최하층민을 투입함. 갱부에 대한 인식과 처우는 이후 
조선인에게 그대로 적용함.
지역 토착 자본의 성장 및 중앙 대자본의 진출, 그리고 1901년 
야하타 제철소(八幡製鐵所) 조업 개시와 맞물려 이 지역 석탄 
생산량은 증대. 1911년 치쿠호의 총 출탄고는 792만 톤으로 
1891년에 비해 8배 이상으로 증가, 전국 출탄량의 50%를 점
함. 일본 석탄 생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이 치쿠호 탄전의 
탄광들은 조선인 노동력에 주목, 다수의 기업들이 1920년대부
터 조선인들을 광부로 고용함. 
* 자료출처: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
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진상조사보고서』(작성자 심재욱), 
2011, 10~12쪽  
제2장 조선학교 진학과 정체성 수립의 청년기
조선인 부락에서 보낸 초중고 시절 
조선학교 진학과 조선인 정체성 강화 
어려운 가정경제로 대학 중퇴 후 사회생활 시작 
1961년경의 야하타 제철소
제2장 조선학교 진학과 정체성 수립의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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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부락에서 보낸 초중고 시절 
초등학교 때 이름은 호시하라(星原)라고 창씨개명해서 호시하라, 
이름 하늘, 별. 호시하라, 토로쿠(東錄, 동록을 일본식 음독). 호시하
라 토로쿠라는 이름으로. 근데 초등학교 시절 3학년, 4학년 때 바보 
취급을 당했죠. 토로쿠라고 그때 ‘고메의 토로쿠(米の登録, 쌀 등
록)’라고 있어요. 쌀집에 등록해야 해요. 등록이라고 이런 수첩이 
있어요. 그걸 보여주고 가족이 7명 있으니까 그럼 당신 집은 몇kg, 
지금은 kg라고 하지만 그때는 1되, 2되. 1말이라든가. 단위가 달랐
어요. 그리고 그 쌀의 등록증이라고 있었어요. 그걸 흉내 내서 ‘고메
의 토로쿠’, ‘호시하라의 토로쿠’, 그게 낮추어 하는 말. 그게 정말 
정말 싫었고. 왜 토로쿠라는 이름을 지었는지 아버지 어머니 원망했
어요. 학교에는 조선인 학생들 많았지요. 여기 부락의 학생 전부 
갔으니까, 근데 여기만 그런 게 아니야. 어디라도 이이즈카의, 어제 
갔던 곳에 라쿠이치(楽市)초등학교라고 있어. 거기는 반이 조선인
이었어. 여기도 많았지. 야하타니까. 여기는 (전교생이) 500명쯤 
있었지. 그 중 100명쯤 우리 학생이었어. 여기, 여기는 야하타 제철
소에서 일했지요. 그 아이들이 아버지 어머니 여기서 일했기 때문에 
당연하게 여기서 살았죠. 여기서 학교 다니죠. 야하타의 히라노초
등학교에 다녔지요.
그리고 중학교는 하나오중학교라고, 하나오중학교 동포가 많았
지요. 우리 형님도 그렇고 선배, 동생들도 있었고. 한 반에 5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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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13)
 이름을 가지고 놀림을 당했음.
있었어요. 중학교는. 중학교 때 전교생은 1,800명, 전부 한 반에 
1학년에 600명이니까 3학년이라면 1,800명. 대규모 학교였어요. 
하나오중학교. 나는 3학년 7반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성적을 발표
했어요. 내가. 50명씩 47번, 48번, 49번 뭐 꼴찌, 꼴찌. 마지막. 
맨 끝에라. 그러니까 무슨 그 자존심이 있겠어요. 조선 사람이 가난
하지요. 이름도 ‘고메의 토로쿠’지요13). 공부 안 되지요. 
이젠 지나간 일이지만도. 지금은 차 타고 싣고 이래, 자전거 타고. 
그 당시는 전부 인력으로. 힘으로 이래 쌀을 싣고. 어머니는 머리에. 
몸은 작았지만 당시. 이래 등에도 후로시키 묶고 싣고. 이렇게. 안짱
다리. 안짱다리는 뭐라고 해? 그것이 일본 사람이 보면은 이상한 
모습이지요. ‘아~ 조센징, 조센징. 조센징이 머리 위에 짐을 싣고 
있다!’면서 비웃고. 일본 사람은 안 하는데. 조선 사람은 머리에 
묶고, 그리고 또 이래, 걷는 모양이 애들이 보면 걷는 모양이 이상하
게 보이는 거지요. 비웃고, ‘아~ 조센징 머리 위에 놓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학교에 그 하교할 때 여기 히라노초등학교라고 있어요. 
그 500미터 정도 있었어요. 그리고 돌아올 때, 여기 포장된 게 아니
고 자갈길이었어요. 그런데 여기로 학생들이 돌아가요. 어머니가 
학생들 만날 때도 있어요, 때때로. 3시나 4시나 돌아갈 때 어머니가 
시장에서 머리 위에 이렇게, 일본인 학생들이 비웃고 하니까 내가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래서 어머니는 이쪽, 나는 저쪽으로. 그래 
도망갔어요. 
초등학교 때 생각나는 게 그쪽 요기 땅이 있어가지고 그... 상추
밭. 봄에는 상추 키우고 여름에는 그 고추 따가지고 팔러 보자기에 
제2장 조선학교 진학과 정체성 수립의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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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고, 거기에 적혀있지요. 짚으로 이래 10엔. 10엔의 묶음을 만들
어가지고 스무 개, 서른 개 보자기에 싸고. 어깨에, 좀 머리에다가 
놓고 조선 사람 부락 있는데 팔러 갔어요. 내가 어머니 따라갔어요. 
학교 하교해가지고. 3시나 5시에. 학교에서는 공부는 못했지만도 
가을 되면 매미 있잖아. 맴맴맴 울잖아요. 저녁매미. 나무 밑에. 
낮은 곳에서 울어요. 그래가지고 딱 손을 잡아요. 학교에서 공부는 
안 했지만도 이런 짓은. 
야하타 제철소 사택지와 유년기를 보낸 장소
누나가 8살 위에라 어머니 대신으로 누나가 막 고생했어. 누나가 
전부, 엄마 대신해. 설거지도 해야 되고. 물도 퍼야 되고 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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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가야 되고 누나가 죽을 것처럼 그냥 고생했어요. 누나는 학교도 
못 가. 형은 하나, 누나 위에 있었어요. 다섯 명, 여자 둘. 그니까 
7남매라. 형, 누나, 형, 형, 저. 다음에 여동생, 남동생의 순이죠. 
남자 형제들은 학교 다녔고. 그때 고학(苦學)이라고. 아르바이트, 
그래서 바깥에 나가질 못했어요. 우리 그 형님은 동경에 가서 아르
바이트하면서 그 동양대, 일본 동양대학교라고 윗 형님은 나와 열 
살 차이고 누나하고는 8살. 여동생은 3살, 남동생은 7살 차이가 
나지요. 큰형님은 15살엔 여기 있었어요. 아버지랑 어머니랑 같이 
일했었어요. 야하타 제철소에서. 그 형님도 같이. 아버지 따라가지
고. 그때 뭐 중학생 되면 나가라고. 그 형은 머리가 좋았어요. 머리
가 좋아서 장학생, 고학을 해서. 동경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어머니
도 공부하라고. 머리가 바보 같으면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노예같
이 된다고 했어요. 
공부해야 된다. 공부에 대한 그 뭐라 욕심이랄까. 우리 어머니 
보통 아니었어요. 촛불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달까지 이래 간다
고. 그런 정신으로 꺼지지 않도록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달까지 
가라고. 저는 때때로 배탈이 났어요. 장이 약했으니까. 어머니 배 
아파서 학교를 못 간다라고 했더니 ‘뭔 말 하냐 이놈아, 우리는 학교 
가고 싶어도 못 갔다! 가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두 번째 형은 고등
학교는 일본 고등학교 갔어요. 조선에서 초등학교 3년, 일본에서 
그대로 6년간은 못 갔어요. 생활 곤란하고 그래서 3번째 형은 조금. 
여기 일본에 와서 초등학교는 여기 히라노(平野)초등학교, 그런데 
여기 하나오(花尾)중학교 갔고요. 머리도 좋았고 마라톤도 잘했고
요. 그 운동회 때 그 1,500미터 마라톤 2등, 나보다 조금 컸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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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실제로는 규슈조선중고급학교(九州朝鮮中高級学校). 학교법인 후쿠오
카조선학원이 운영하는 조선학교. 1956년 4월에 설립.
머리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근데 그 형님은 먼저 돌아갔어요. 
2008년인가. 12년 전에.
여자 공부하면 안 된다고 누나는 학교를 못 갔지만 우리 여동생은 
시대가 좀 바뀌었으니까. 우리 여동생은 머리가 좀 좋았어요. 나보
다. 나는 공부를 안 해서. 어머니한테 관심을 받고. 어머니가 나를 
이래 많이 도와줬어요. 좋은 뜻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100프로 받
았어요. 좀 이상하지만 그 7남매 중에 내가 어머니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어요. 
▮ 조선학교 진학과 조선인 정체성 강화
고등학교는 그 규슈조선고등학교14). 거기 갔어요. 우리말, 우리 
역사 우리 문화 배워가지고. 아~ 나는 조선 사람이다. 나쁘지 않다. 
그래서 그 정체성. 자기 자부심을 거기서 찾았어요. 그때는 우리가 
1960년대 다 귀국한다고 귀국운동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우리 동
포가 일본에서 태어나도 우리말 모르고, 일본어... 그래 어디 사람인
가? 어디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해서. 그리고 우리는 조선 사람이니
까 조선말을 배워야 된다. 그래서 민족학교가 56년이 됐어요. 그래
서 거기서 편입해가지고 들어갔어요. 
내가 중학교, 여기서 하나오중학교 졸업해가지고, 그쪽 야하타공
업고등학교라고 알아요? 내가 토목과에... 입학시험을 봤다가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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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15)
 북한 평양시에 있는 기념건축물.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한반도의 38도선 북부를 소련군이 해방한 것을 기념하여 1946년 
8월 15일에 평양시 모란봉의 남록에 건립됨. 
16)
 조선대학교는 1956년에 설립되었고 1958년 이후 4년제로 변화됨. 
배동록씨가 다닌 역사지리학부는 1964년에 생겼음. 참고로 배동록씨는 
조선대학교 9기임. (참조: 朝鮮新報(2006.05.30.), “朝鮮大学校同窓会
第7会総会 第6回「朝鮮大学校同窓会奨励賞」授賞式も”) 
했어요. 아 뭐 꿈같애요. 거기 들어갔는데 그 그전부터 귀국운동 
벌어지고 언젠가 우리도 귀국해야 된다, 이래 돼가지고 그러면 뭐 
귀국한다면 조선말을 알아야 된다, 한국말을 알아야 된다. 이래가
지고 야하타공업고등학교. 야하타공업학교라고 있어요. 거기 그만
두고 거기서 조선학교로 편입했어요. 그렇게 해서 내가 3학년, 그러
니까 내가 야하타공업학교 1년. 그러니까 고등학교 4년. 귀국할 
생각으로 조선학교를 들어간다는, 우리가 언젠가 귀국한다는 것, 
그것은 전제조건이었지요. 당연히 뭐 우리야 뭐 일본에서 살고 있었
지만 그래도 여기는 임시거처라고 생각해서. 언젠가 우리는 돌아간
다. 아까처럼 50년대에 돌아간다고 했는데 못 돌아가고. 전쟁 때문
에 못 돌아갔지만 언젠가 우리는 돌아간다고. 그러니까 우리학교 
갔을 때 모두 70년대 해방탑15)에서 만나자고, 그게 표어였어요. 
평양을 해방탑이라고. 그 천리를 천리를 날아가는 하룻밤에 날아가
는 말이 있잖아요.
조선대학교 갔어요. 대학교. 1964년16)인가. 올림픽 그때인가. 
1년 전에인가. 조선대학교에 역사지리학부라고. 거기 갔어요. 돈이 
없고, 곤란했죠. 아버지 노가다하지요. 뭐 그날그날 먹기 살기가 
힘들어. 그래서 그 고등학교 졸업해가지고 진로, 진로를 정할 때, 
조선대학교 가가지고 좀 머리가 좋아지면 우리 민족학교 선생님 
제2장 조선학교 진학과 정체성 수립의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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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라고. 그게 방침이었어요. 그리고 청년... 일꾼! 일꾼. 일보는 사
람. 그게 하나의 목적이었어요. 그래서 조선대학교. 그때는 좀 내가 
여기서 살기가 조금 좋아졌죠. 조금 나아졌죠. 그래서 조선대학교 
갈까. 공부는 하기 싫었어요. 우리 그 장학금, 그 공화국에서. 조선
인민공화국에서 장학금을 내준다고 그럼 장학금 내준다면 가볼까 
이래가지고. 실제로는 그런 거 가고 싶진 않았지만요. 형님들이 가
라고. 형님들 셋이 민족학교 선생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집은 우대
해주는... 나는 우대를 받고. 장학금 내준다고. 그래서 내가 조선대
학교 갔어요. 
4년 가가지고 거기서 배웠어요. 배우기는 배웠어요. 거기서 배
운 것이 지금 뭐랄까. 보람은 없었지만도 거기서 배운 것이 조금 
밑거름. 밑거름을 뭐라고 하지? 지금 활동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지요.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항상 기도했는데 ‘장남은 동경에 갔습니
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공부 잘 하시고 합격해가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해주십쇼. 그리고 차남은 신체가 좋습니다. 
일 많이 열심히 하도록. 스포츠 그 체력이 있으니까 공부도 잘하고 
그 운동도 잘하고. 세 번째, 삼남, 이놈은 머리가 아프지만도 머리가 
좋습니다. 머리가 좋도록 공부가 잘 되도록 해주소서. 이래 네 번째 
동록이는, 이것은 공부는 잘 안 되지만은 나한테 잘 보태주고 설거
지 잘합니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30분, 20분 정도는. 이렇게. 
‘우리가 여기서 살고 있지만도 이래, 잘 지켜 주이소. 잘 시켜 주이
소.’라고 이렇게 기도했지요. 특히 어머니는 나한테 많은 애정을 
담아주었어요. 그래서 내가 어머니 얘기를 많이 하고. 학교 강연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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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로 가면 어머니를 꼭 가운데. 빨리. 어머니 때문에 내가 살아있다고. 
어머니 사랑을 120프로 받았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우리는 학교 
가고 싶어도. 글이 이게 무슨 글인가. 이해를 못 하고 너무나 억울하
게 살았다’고, ‘공부해라. 공부 안 하면 일본 놈한테 나라를 빼앗기
고 사랑까지 빼앗긴다. 일본 사람한테 절대로 지지 마라. 일본 사람
에게 지면 또 나라를 빼앗긴다.’ 항상 말하고 그랬어요.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어머니가 없으면 지금의 내가 없어
요. 일본사회에서 가만히 조용하게 이래. (조선인이라는 것을) 감추
고 살아있었을걸요. 어머니 덕분에 이렇게 가슴 펴고. 몸은 작지만
도. 어머니 대단했어요.
“나는 일하고 있었으니까 어린 애들은 당연히 장녀 동선이가 돌
보게 돼요. 학교에 갈 수 있는 애는 히라노초등학교에 다녔어요. 
취학 전의 애는 장녀가 보지 않으면 누구도 없으니까, 그녀는 학교
에 못 가는 날이 당연히 많았어요. 나는 나갈 때 ‘학교는 쉬지 않고 
꼭 가라’고 이야기하고 일하러 갔었어요. 내가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했고, 아이들에게는 우리처럼 ‘지게’를 지게 해주고 싶지 않았어
요. 정말 일본에서 평안한 날을 보내고 싶어서 꿈꾸고 왔지만 현실
의 냉엄함에 참지 못해 몇 번이나 죽을까 하고 선로에 섰어요. 남편
도 나도 성실하게 아무런 나쁜 짓도 안 권하고 살아왔는데 왜 남만
큼 인간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건가. 매일 원한의 눈물을 흘렸습
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열심히 힘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게 해주고 싶다. 손가락에 불을 켜고, 하늘의 달에 받치다
는 마음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남만큼 주변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의 
생활을 하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은 조선
제2장 조선학교 진학과 정체성 수립의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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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姜金順(2002), “にんげんドキュメント 姜金順: 最後の語り部/ 朝鮮人
強制連行の歴史を語り、平和への祈り!”, 9-20,『市民活動情報紙 アクテ 
ィブ: いのち育む序章』, 福岡:向陽社.
학교에 보냈어요. 아이들이 조선의 말, 역사, 문화를 배우고, 일본에
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키웠어요. 그리고 모두 훌륭한 조선인
으로서 성장했어요.”17) 
우리 명절에는 그때는 뭐 모두 정장하고요. 어머니도 치마저고리 
입고. 우리 조선 사람은 벚꽃이 있는 데를 좋아하는데 명절 때는 
아주 굉장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조총련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가 있었고. 학교에 모였고 학교에 안 갔을 때는 벚꽃 나무가 
있는데 거기서 잔치하고 김치, 돼지고기, 뭐 해방돼가지고 생활이 
좀 안착돼가지고. 그전까지는 생활이 그날그날 먹고 살기 힘들었고
요. 죽자 살자 뭐 그날그날 먹는 것이 바빴어요. 1970년대 들어서 
조금 여유가 됐죠. 
1970년. 그때 일본도 고도경제성장기. 그 일본도 많이 발전하고 
그때 우리도 좀 여택(餘澤)을 받았지요. 그러나 우리 보통 조선 사람 
직업은 땅 파는 노가다. 고물상, 고철, 그리고 호르몬이라고. 일본 
사람들 그걸 안 먹었어요. 그래서 그걸 호르몬야키라고 구워서. 그
리고 밀소주. 밀소주를 만들고. 그리고 일본 사람들 술 좋아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밀주. 도부로쿠(どぶろく, 탁주) 그리고 밀소주도 
만들었어요.
그리고 돼지 많이 키웠어요. 조선 사람이. 부락이 있으면 반드시 
돼지막이 있었어요. 근데 돼지막은 돼지가 똥 하잖아. 냄새가 나는 
거예요. 여기서는 돼지를 키우면 안된다고 하니까 자리도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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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근데 딴 데는 구로사키(黒崎)라든가 여러 군데는 돼지막이 있었어
요. 그리고 그 돼지막 옆에서 밀소주. 술 숨겨 와가지고. 그리고 
그걸 내가 사러 가는 거야. 어떻게 갔었냐면 그때 주변에 일본 사람
이 있었으니까 술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밀소주 사가지고 오면 
먹으러 오는 거예요.
▮ 어려운 가정경제로 대학 중퇴 후 사회생활 시작
대학 시절엔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있었어. 동경이니까. 무사시
노(武蔵野), 고다이라(小平)시라고요. 그래서 겨울방학 때 갔어요. 
돌아와서 다시 도쿄로 올라가지 않고 결국 대학교 중퇴를 했어요. 
그 4년 다녔죠. 27살 때까지 부모님하고 살았는데 누나는 나가고. 
나도 우리 형님도 3명이었지만 우리 민족학교 선생이었어요. 오늘 
갔지요? 학교 선생. 그때 선생이 없었어요. 선생들이. 조금 머리 
좋은 사람이. 그 첫째 형님. 그리고 둘째 형님. 큰형님은 고등학교 
선생. 동경 다녀온 인텔리였으니까요. 그때 그 시대에는 인재가 없
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머리가 좋은 사람은 민족학교에서... 당신이 
선생 하라고. 강제로. 우리 조련 시대에는. 큰형님은 고등학교 선생. 
지리. 두 번째 형님은 신체가 좋아서, 중학교 체육 선생. 세 번째 
형님은 초등학교 선생. 초등학교는 따로 있었어요. 오리오에 있는 
학교는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초등학교는 거기 야하타에 있어
요. 내가 있는 아노라는 데에 있었어요. 그리고 또 옮겨가지고 고쿠
라에 농아학교라고, 말이 안 되는 그 농아학교, 그 학교 빌려가지고. 
제2장 조선학교 진학과 정체성 수립의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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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힘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교섭을 해가지고 일부를 빌려가지
고 초등학교는 고쿠라에 있었고. 거기 우리 세 번째 형님은 야하타
에 있다가 이사해갔지요. 
조선학교 다니면 일꾼이 되라고. 졸업식 때 모두 진로가 정해져
요. 아니면 우리 민족학교 선생도 그때 부족했으니까. 학교 선생 
아니면 일꾼 되라고. 그런 지시가 내려왔어요. 나는 집일을 거들어
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총련... 일꾼 나는 능력이 없으니까. 대학 
가도 1도, 조금도 공부 안 했어요. 거의 공부 안 했어요. 그래서 
결국 집을 도와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고생고생하
고 계시는 걸 보니까 내가 가서. 형님들 그때는 애국사업이라고 
학교 선생이라고 하면 모두 좋다고 하지만요. 근데 집을 보면 너무
나 가난했어요. 학교에서도 학교도 돈이 없고. 그때 우리 큰 형님들
도 만 엔. 1만 엔. 그때 일본 사람들 월급이 4만 원인가 5만 원인가 
받았었는데 (조선학교 선생은) 만 엔밖에 못 받았어요. 근데 여기서 
3장과 4장의 좁은 방에서 결혼해서 안쪽에서, 고작 3장 정도의 작
은 방에서 거기서 신혼, 우리 형님이 살았어요. 
그리고 그때는 모두 일본인도 모두 검소한 생활이라고 하나. 가난
한 생활을 했었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꾼으로 나가라고 
해도 어머니를 보고 있으면, 고생하는 아버지, 어머니를 보면 나는 
도저히 일꾼 안 한다, 그래 하면서 도망쳤어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
와서 부모님 곁에 있었어요. 
여기서 뭐 여러 가지 했어. 처음에는 야채 파는 사람이 있어가지
고. 거기서 도와주고. 그리고 그 다음은 뼁끼. 뼁끼 바르는... 뼁끼를 
10년을 했고. 일본 회사에 들어가가지고. 뼁끼... 잘 바릅니다. 뼁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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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는 그 솔이 있잖아, 그 솔을 가지고 캔에 뼁끼를 넣고. 이렇게. 천장
이라든가. 뼁끼가 떨어지지 않도록 잘 바르고. 다음은 고철회사에
서 조금. 고철도 폐품 회수도. 우리 형님이 여기 밑에 내려가는 데에 
집이 있었어요. 지금은 살고 있지 않지만요. 거기서 고물상 했었어
요. 그리고 신문지. 헌종이. 제지회사에 파는... 신문지라든가 집에
서 못 쓰는 거. 세탁기, 냉장고, 스토브. 그런 거 고장 나면 버리지 
않소. 거기서 해가지고. 누나의 남편이 또 고물상 했어요. 그리고 
도중에 자동차 해체. 70년대 후반기에서 80년대. 자동차 해체. 거
기서 또 일하고. 아. 몸은 작지만 힘든 일은 많이 했어요. 몸은 작지
만도. 보면, 좀 내 손 보소. 이런 몸치고는 일하는 사람 손이라고 
해요. 자동차 해체하는 일은 80년대까지 했지요.
제3장 지문반대와 마와타리 사택 보존의 
사회운동 참여
결혼과 자녀들의 조선대 입학 
성실하고 부처같았던 아버지의 죽음 
지문반대운동에서 시작된 시민운동
마와타리 사택 보존운동과 기념비 설립
1997년 마와타리 기념비 설립 축하 연설 
(어머니와 배동록)
제3장 지문반대와 마와타리 사택보존의 사회운동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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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과 자녀들의 조선대 입학
처음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그 사는 데에서 같이 살고 있었어요. 
결혼해서도 아버지, 어머니하고 3년 같이 살았어요. 그 후에 좀 
여유가 돼가지고 우리 형님들이 좀 도와주고.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집은 1975년인가 지어가지고 거기서 살아가지고 나도 결혼해
가지고 4남매, 아들 둘, 딸 둘이 있어요. 그 식구를 만나 결혼은 
1972년, 그 다음 해에 큰아들이 태어났고 1년 후에 우리 형님들이 
도와줘가지고 집을 사가지고 거기서 같이 살게 되었지요. 
우리 바로 위에 형님이 형제 중에서 3번째, 내가 4번째. 그 3번
째 형수가 시모노세키(下関)에서 왔어요. 그 어머니, 그러니까 사
돈 어르신께서 시모노세키에 처녀가 있다고 선보자고 그래서 내가 
시모노세키에 가서 만나고 선보고 그래서 했어요. 다음 해인가, 
만나기는 한 번. 둘이서는 한 번. 두 번! 근데 부인의 부모들이 
지금도 그 시모노세키에 촌에 살고 계세요. 그 지금 큰형이 농사짓
고 있어요.
소량하고 소박한 그런 딸이었어요. 우리 마누라. 지금은 아니지
만. 내가 1943년생이니까 부인은 48년생 쥐띠지요. 나는 양띠. 5살 
차이 나요. 부인도 7남매 중, 거기도 아들이 다섯, 우리하고 똑같아
요. 아들, 딸. 딸 둘이라. 그 누나가 있고 그 둘째 딸. 그 밑에 남동생 
둘이 있어요. 시모노세키에 있고 둘이가 오사카 이쿠노쿠에. 이쿠
노쿠는 그때는 공업이 없어서. 직업이 많이 없었잖아요. 그래서 그
50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쪽은 1960년, 70년 학교 뭐 중학교까지 졸업하면 다 오사카로 넘어
갔어요. 
우리 아들, 딸 조선대학교 보냈고 형님들 협조를 받았어요. 큰아
들은 조선대 그만뒀고 둘째 아들하고 딸 둘이는 조선대학교 갔지요. 
우리 둘째 아들은 내가 다닌 역사지리학부, 큰딸은 머리도 좋았고 
조선대학교 외국어학부 영어과 나와서 우리 민족학교에서 영어 선
생님 했고 조선무용도 잘해서 무용도 가르쳤지요. 큰딸은 사가(佐
賀)에서 불고기집 운영하고 있어요. 
어머니 강금순과 딸 배유향과 함께 
막내딸 배유향(裵由香)은, 노래를 잘 불렀어요. 조선대학교 음악
과. 거기서 배우고 2년 연구원, 대학생 가르치는 연구원하고 있었어
제3장 지문반대와 마와타리 사택보존의 사회운동 참여   
51
18)
 ‘후꾸오까 조선가무단’은 1966년에 발족하여, 조총련 산하에서 활동
함. 현재 단원은 4명이고, 모두 조선학교 출신자로 구성됨.
  (참조: https://www.asahi.com/articles/ASLDM3QG3LDMTIPE00
G.html)
요. 2년. 아니 6년 있었네요. 그래가 내려와가지고 조선가무단, ‘후
꾸오까 조선가무단(福岡朝鮮歌舞団)’18) 들어가서, 가무단 당원 돼
가지고 노래 부르고 문화 활동 많이 했어요. 지금 오사카 이쿠노쿠
에 있어요. 
결혼 문제가 있었는데 사위가 ‘일경(日經)’의. 일본경제신문의. 
케이오(慶応)대 출신의 엘리트이고, 부자 아들이고. 나는 그런 건 
싫어해요. 고생하고 그런 노동자 같은 사람은 좋은데 엘리트이고 
부자 아들이고, 집은 큰 공장을 하고 있답니다. 부잣집의, 억만장자
라고 하더라. 그래서 결혼식에 내 안 간다고 했어요. 결혼식에 안 
간다고 했더니 같이 시민운동 하는 사람, 구리타(栗田) 선생이라고 
친한 사람이 있어요. 집에까지 와서 유향의 처음이자 마지막 결혼식
인데 왜 아버지가 안 가요, 안 됩니다. 우리 집에까지 와가지고. 
딱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아버지 나오이소. 나오이소. 그리고 또 한 
명 선생님, 나카노 에리코라고. 그분 지금은 현역이지만. 그리고 
자꾸 전화를 했어요. 아버지 결혼식에 가야 됩니다. 가야 됩니다. 
나는 안 간다고 했고 아침에 9시인가 10신가... 집에 와서... 그 
집 앞,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아버지 갑시다, 갑시다, 그렇게 했어
요. 결혼식은 후쿠오카에서 했어요. 뭐 할 수 없이 갔어요. 
딸이 일본 사람과 결혼해서, 사위와 딸은 1년에 한 번쯤, 오기는 
하는데, 그 마음이 여러 가지 복잡합니다. 그 30 몇 년간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서 억압받고 내내 차별받고 그래서 그런 속에서 어머
52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니가 일본 사람 절대 친해지지 말라고, 나라를 빼앗기고 사람까지 
빼앗아 갔다고 그랬지요. 우리 아버지, 그날 일본 사람하고 왜 결혼
하냐고. 지금이라면 흔한 국제결혼도 그때는 보통 아니었지요. 지
금부터 20년 전이라면. 일본 사람하고 결혼했다, 그러면 왜놈으로 
넘어갔나. 이런 식으로. 왜놈으로 일본 사람. 그 왜놈에 넘어갔나. 
일본인한테는. 왜놈에 넘어갔나. 조총에서는 그렇게 말해요. 왜놈 
된다. 일본 사람하고 결혼하면. 왜놈하고 결혼했어요. 우리 딸이 
나이 많은 사람하고. 우리 어머니 살아있을 때. 그러니까 그런 감정
이 있고. 한쪽에서는 운동하고 시민단체 운동하는 사람들이 ‘배상~ 
당신 틀린 게 있다. 당신은 학교에서는 차별하지 마라, 이래 하면서 
딸이 일본 사람하고 결혼한다고 차별하지.’라고. ‘당신 반차별이라
고’ 하고 그래요. 장남, 차남 며느리는 애를 낳았고. 유향은, 일본 
사람하고 결혼한 애는 아이가 안 태어났어요. 사위가 전근 가서 
요코하마로 그리고 딴 데 있다가 지금은 오사카 이쿠노쿠에 있어요. 
내가 후쿠오카에서 강연했을 때 보러 와가지고 사위가 신문 기사
를 써줬어요. 기사도 잘 쓰고. 이해가 있는데 나도 마음 그 깊은 
곳에 녹이지 못한 모순, 모순이 남아 있어요. 꽁한 감정이라고 하는 
건지, 그걸 빨리 풀면 나도 편해질 텐데 나는 뭔가 나의 활동 후계자
로 막내딸을 생각했는데... 막내딸 유향이 노래를 부르니까 음악을 
무기로 해가지고 많은 사람들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믿고 있었는데 애가 순식간에 등을 돌리고. 사랑과 증오는 
표리일체죠. 제일 좋아하는 딸이 이놈이 일본 사람하고 결혼했으니
까요. 이때까지 사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놈, 이놈의 자식. 
증오스러워. 슬프네요. 유향이를 좋아한 사람이 5~6명 되었어요. 
제3장 지문반대와 마와타리 사택보존의 사회운동 참여   
53
“아버지 유향을 좋아합니다. 유향하고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말
하는 사람들이 우리학교 졸업생들 중에서 많이 있었어요. 미인이고 
가무단하고 있으니 눈에 띄어요. 무대에서 노래 부르니까, “쟤 누구
야? 배동록이 딸이야. 우리도 아들이 있으니까 결혼하면 좋겠다.”하
는 동갑생이 있었고 몇 번이나 이런 말들을 했어요. 그런데 하필 
일본 사람하고 결혼해버리니까 배신감이 보통 아니었어요. 이제 
결혼해서 10년인가 11년. 10년 됐어요. 결혼을 해가지고 몰래 애라
도 생기면 좋을 텐데 안 생기니까. 정이 아무래도 손자라도 있으면 
할아버지 하면서 오면 그러면 마음이 좀 좋을 텐데요. 
▮ 성실하고 부처 같았던 아버지의 죽음
1981년! 8월 23일 날. 78세로 이 세상을 떠났어요. 조선 사람은 
술 마시면 이놈의 자식들 이러면서 생트집을 잡고 싸우고 그랬어요. 
근데 우리 아버지는 조용하고 술도 안 마시고 담배만 피고, 담배 
피면 자고 아침에 일어나고. 아침 5시. 우리는 7시, 7시 반 되면 
일어나고. ‘일어나! 일어나!’ 나는 잠에서 깰 때 잠투정이 심했으니
까요. 항상 그것만 아버지가 혼내셨지요. ‘빨리 일어나!’ 어머니도 
‘빨리 일어나! 니가. 태양이 올라가 있는데 왜 너만 자고 있나!’ 혼났
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는 착실하고 솔직하다고 이웃 사람들이 이
야기했어요. 아버지같은 사람만 있으면 경찰은 필요가 없겠다고 
했어요. 
5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아버지 환갑 축하 기념사진 (1963년)
연립주택이었으니까 한 달 뒤면 똥을 퍼 올려야 되었어요. 우리는 
가족이 그 한 달 뒤면 똥이 쌓일 거지요. 그러면 건물 뒤편에 재래식 
변소라고. 바가지가, 막대기로 이렇게, 바가지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통에 똥을 넣어요, 그리고 그 이래 양쪽에 그 이렇게. 밭에. 
지금은 생각하지 못 했지만 당시는 밭에. 인분이라고. 인분으로 쓰
고 있었어요. 50년 전에는. 밭에 비료로. 옆에 옆집 아줌마가. ‘호시
하라상, 하는 김에 같이 우리 집 것도 좀 파줄래요?’, ‘똥을 파주소.’
라고 부탁하면 우리 아버지, 하나님 같은, 부처님 같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아 좋아요!’. 근데 자기 우리 집도 똥을 하고 가야 하는데, 
옆집 똥까지 퍼주고 있는 거예요. 우리 엄마가 말을 하지요. ‘에이
구! 누구한테 또 해줘가지고! 힘든데! 우리 집 똥 그 퍼내는 것도 
힘든데! 옆집도 해주고 바보야!’라고 우리 엄마가 욕했어요. 아버지
제3장 지문반대와 마와타리 사택보존의 사회운동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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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姜金順(2002), “にんげんドキュメント 姜金順: 最後の語り部/ 朝鮮人
強制連行の歴史を語り、平和への祈り!”, 9-20,『市民活動情報紙 アクテ 
ィブ: いのち育む序章』, 福岡:向陽社.
20)
 최창화(1930-1995). 조선 평안북도 출신의 재일한인 목사. 서울신흥
대학교 졸업 후, 1954년 당시 국교가 없었던 일본으로 밀입국하여 기
타규슈시에 불법체류, 거주를 시작하였다. 1960년대 재일대한기독교회 
코쿠라교회를 개설하였고 그곳에서 목사로 일하였음. 목사 활동과 병행
하여 일본의 대학교에서 법률을 배웠고, 외국인참정권 문제에도 큰 관심
는 그때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요. ‘하는 김에 하는 건데 무슨 
문제야’라고 말했어요. 그런 아버지였어요. 그러니까 남에게 해
롭게 하는 아버지가 아니었어. 부처님이었어요.
“남편은 78세로 이 세상을 떠났어요. 남편은 성실하게 잘 일했어
요. 동네에서도 정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고, 정말 열심히 일했
어요. 고향에 가서 육친과 재회하는 걸 꿈꾸고 있었겠죠. 그것을 
못 했던 게 정말 아쉬워 못 견디겠네요. 아이들은 남편의 묘표에 
다음과 같이 새겼어요. ‘망향·차별·생활고의 냉엄한 생애였다. 다
행히 5남 2녀를 훌륭하게 키워 선조에게 되갚았다.’ 남편은 항상 
나와 아이들에게 ‘대지에 뿌리를 뻗고, 똑바로 전진해라. 땀을 흘리
고 그리고 공유해라.’라는 말을 했었어요.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었
던 이 말은 남편의 묘표 뒤편에 새겼어요.”19) 
▮ 지문반대운동부터 시작된 시민운동
시민운동 참가는 85년 지문날인 반대운동부터였어요. 고쿠라의 
최창화(崔昌華)20)라는 목사가 있었어요. 당시 대량변경이라는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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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을 가졌으며, 외국인 지문날인에 대해서는 거부입장을 밝혔음.
21)
 여기 자료들은 西日本新聞(1997.03.02.), “「朝鮮人収容所」記念碑が
完成/社宅壁に墨書の誌/発見の裵さん執念実る”와 芝竹夫(2001), 『歴
있었어요. 지문날인이라고 우리를 다 죄인 같이, 아무것도 나쁜 짓
을 안 했는데도 죄인, 죄를 일으킨 사람 같이. 정말 그것이 싫고 
싫고. 마치 죄인 취급했는데 지문날인 반대를 호소했던 사람이 최창
화 목사였어요. 돌아가셨지만도. 그 목사님이 목소리를 올려가지고 
일본 각지에서 운동을 시작했어요. 또 그때 최창화 목사를 지지, 
응원하는 일본 사람들이 있었어요. 시민단체가. 내가 그 시민단체 
사람하고 연결되어 있었어요. 같이 할래라고 해서 시작했어요. 내
가 비디오 촬영일 잘했으니까 그 모습을 찍어두면 좋겠다고 했어요.
가토 케이지씨하고 이누가이 목사라든가 대부분 목사였어요. 고
쿠라에 가서 가토 케이지씨라든가, 그 사람들이 최창화 목사를 뒤에
서 이래 밀어주고 우치오카 선생은 그때 교원이었으니까 학교에서 
못 나와서 같이 활동은 못 했지요. 그래서 프리로 시민단체 하는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지요. 그때 나도 프리였으니까 비디오로 기록
을 했었지요. 우리 애들도 자주 데리고 가고. 한쪽에서는 치쿠호(筑
豊)의 탄광지에서 기록을.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이라고 지금도 
있어요. 그것을 내가 계속 기록해 왔어요. 
▮ 마와타리 사택 보존운동과 기념비 설립21)
21)1989년 여름, 시민그룹의 항례로서 ‘강제연행의 발자취를 젊은 
제3장 지문반대와 마와타리 사택보존의 사회운동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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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を刻む在日コリアンたち』, 福岡:向陽社, 115-133 내용 중 배동록씨
의 인터뷰 내용 등을 참고로 본 총서에 맞게 재편집하였음. 
22)
 구체적으로「壹心壹徳 自力갱生 中山海鳳 平生壹心 正元慶力。朝鮮京
畿道長面上里萬村◯◯ 先生」라고 적혀 있다. 묵서는 「成則軍黄 城即軍
皇 敗主力的。京畿道長淵郡長道面本村 高陽郡 여州郡、三郡連合壹隊」라
고 있음. 
사람과 더듬어 찾는 여행(強制連行の足跡を若者とたどる旅)’은 강
제연행의 역사를 배우기 위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진행하는 것이었
어요. 오오무타시 미쓰이 석탄광업소와 미이케광업소를 방문했는
데 거기에는 2종의 마와타리 조선인수용소가 남아있었지요. 썩어 
문드러진 마와타리 사택 51호동의 벽장에 먹으로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는데 ‘열심히 하면 꼭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반드시 고향으
로 돌아가자’라는 뜻을 가진 한문시와 몇 가지 조선의 지명이 적혀
있었지요.22) 이 동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선인의 수용소였어요, 
그때 강제연행 당한 사람들이 고향이나 부모를 그리워했음에 틀림
없다. 건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이 마와타리 사택 일대가 향후 해체, 조성되고, 대형할인점인 ‘미
스터 맥스’의 부지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벽도, 51호동도, 
5동의 ‘마와타리 조선인합숙’의 자리도 모두 약 1만 5천 평이라는 
대형점포의 용지로 매수되었고, 그 모습조차 그리워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시간적 문제였지요. 그래서 필드워크 일행과 함께 사택 
해체 연기와 그 보존을 긴급과제로 하였고, 제가 대표가 되어서 
‘보존하는 모임’을 결성했지요. 제가 소속된 각종 시민 그룹과 저와 
친분이 있던 분들이 참가하였어요. 이 ‘보존의 모임’이 결성된 것은 
1993년 3월 10일이었고 그 이후 약 1,400명분의 서명과 기부금을 
58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토대로, 오오무타시, 미쓰이광업, 미스터 맥스사에 대해 총 15회에 
걸친 단체교섭을 진행하였어요.
1994년 3월에는 이케타 마스미 카메라맨과 함께 한국을 방
문하고, 낙서에 나왔던 여주군의 동네를 돌아다녀 당시 미이케 
탄광에서 일했던 문용군, 최복남, 이창용의 3명을 찾아냈고 할
아버지들한테 당시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고 할아버지들은 강제
노동에 대해 격한 분노를 표현하였지요. “낙반이나 린치, 영양
실조 등으로 인해서도 많은 많은 조선인이 미쓰이 자본으로 인
해 죽었다. 그리고 지금 모든 것이 아스팔트로 굳혀지고, 강제노
동의 사실을 은폐하고, 강제연행의 증거 물건을 지워 없애려 
한다. 그러니까 1세와 함께 2세인 우리가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
하고, 후세에 남기는 것은 인류 보편의 원칙이어야 한다. 평화와 
인권을 존중한다는 뜻으로도 평화의 메모리얼로서도, 이 마와
타리 조선인 수용소를 벽과 함께 남기는 의의는 크다.”라고 하
시면서 철거에 항의하여, 수용소의 보존을 호소하셨지요.
미쓰이는 1994년 가을, 부지 매각을 위해 벽만 제거하고, 나머지 
사택들은 모두 파괴해 버려서 제가 광업소에 들어가 낙서에 담긴 동포
들의 마음을 왜 이해하지 못하느냐고 책상을 치면서 항의했지요.
제3장 지문반대와 마와타리 사택보존의 사회운동 참여   
59
미쓰이광업과 사택보존을 위한 교섭 장면 
‘보존하는 모임’은 수차례에 걸쳐 미쓰이석탄광업소와 오오무타
, 미스터 맥스사와 보존 요청을 위한 교섭을 거듭했지만 전혀 
호전되지 않았어요. 티비 방송에서도 이 운동에 대한 특집 보도가 
방송되었고,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지만 회사는 토지의 제공을 
거부, 시는 건물 보전이나 유지, 대체 토지의 제공에 응하지 않았어
요. 미스터 맥스사는 기본적으로는 미쓰이와 재일한인들의 문제라
고 계속 피하면서 미쓰이광업이 당사자이기에 직접 관여할 수 없다
고 대응을 피하고, 보전의 전망은 좋지 않았고 교착상태가 이어졌어
요. 당시 1993년 12월에는 조총련 후쿠오카현 본부도 알선에 나섰
지만 시종 진전되지 않았어요.
오오무타시는 당시 그쯤 미이케광업소의 3년 연속 합리화에 따라 
큰 위기를 맞이하여, 탈출구를 찾고 있었어요. 국내 최대였던 출탄 
60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양도, 종업원 수도, 탄광 부문뿐만 아니라 전력 분야나 화학 분야까
지 모두 어쩔 수 없이 축소하게 되었고 그래서 시가 살아가기 위한 
대책 중에 하나가 아리아케해(有明海)에 면한 약 1만 제곱미터의 
저탄장이 있었던 자리에 30억 엔을 염출해서 ‘석탄산업과학관’을 
건설하는 것이었지요. 마와타리 수용소의 벽서와 묵서는 미이케탄
광의 역사자료나 석탄산업전시장의 일부에 흡수되는 것으로 이는 
조선인 수용소 시설 그대로 보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에요. 
그래서 보전의 요청 행동으로 인해 낙서와 묵서는 일단 제거하고 
근처에 있는 요네오(米生)중학교의 창고에 보관되었지요. 건조물의 
이전 보전은 막다름인 상태라서 ‘보전의 모임’에서는 다음 대책으
로 석비를 건설하는 복안을 생각한 거예요. 51호동의 해체 철거는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고 싶었고 어렵다면 마지막 해체를 지켜보고 
싶다는 그런 마음으로, 1994년 9월 1일과 19일의 2번에 걸쳐 해체 
시 사전 통고를 해달라고 미쓰이석탄광업과 그 하청인 산코(三鉱)
개발, 룍켄(緑建)공업 등에 제의하였고 양해를 얻었지요. 그러나 
51호동은 9월 24일 예고 없이 대형 불도저로 인해 단숨에 무너지게 
되었고 저는 예고 없는 해체와 ‘몰랐다’고 하는 미쓰이 기업의 야비
함, 어머니의 분노 등으로 저도 너무 화가 났었지요.
당시 1993년 12월 이후 교섭은 ‘일조(日朝)합동조선인강제
연행진상조사단’이 이어받아 담당하게 되었어요. 조사단은 ‘보
존하는 모임’과 함께, 첫째 1995년 7월에 건설될 시립 석탄산업
과학관의 한 구석에 수복한 벽서와 당시의 사택 모습을 축소 
및 복원한 모형을 전시하는 것, 둘째, 새로 건설되는 할인점의 
제3장 지문반대와 마와타리 사택보존의 사회운동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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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분을 공원으로 만들어, 기념비 건설을 위한 구획을 마련하
는 것 등을 시 당국과 2번에 걸쳐 교섭하였지요. 이 2가지 항목
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겨우 타협하고, 기념비의 관리에 대해서
는 오오무타시가, 기념비 비용의 일부는 미쓰이석탄광업이 부
담하는 것으로 회답을 받았고 또한 기념비에 새길 문안에 대해
서는 합동조사단에 일임하였어요.
건립문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오오무타의 미쓰이탄광으로 조선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이 강제연행되었고, 과혹한 노동을 강제시켰다. 그중 약 200여명
의 조선인이 ‘마와타리사택’에 수용되었다.
‘마와타리사택’ 51동의 벽장에는 그들 망향의 마음이 담긴 벽서가 
1989년에 방문한 강제연행의 역사를 배우는 그룹으로 인해 발견되었다.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조선인에게 엄청난 희생을 초래하고, 더하여 희
생자의 아픔을 생각할 때 또다시 이러한 행위를 반복하면 안된다. 그래서 
이 땅에 ‘벽서’를 복원함으로써 전쟁의 비극, 평화의 소중함을 차세대에게 
이야기하고 전달하기 위해 이 기념비를 건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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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51호동에서 발견된 벽서를 보고 있는 배동록과 어머니 강금순 (1997년)
이 기념비는 저희의 운동을 이어받은 국회의원들과 조총련의 진
력으로 완성되었고 비용은 미쓰이가 부담하였어요. 
마와타리 기념비
제3장 지문반대와 마와타리 사택보존의 사회운동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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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3월 1일, 후쿠오카현 오오무타시에서 마와타리 조선인
수용소가 있었던 자리에서 기념비의 제막식이 진행되었지요. 태평
양 전쟁으로 인해 강제연행당하고, 미쓰이미이케 탄광에서 일했던 
약 2,700명의 조선인을 그리는 비석은 이 땅에 있었던 사택 방 
벽에 조선인이 낙서를 쓴 ‘망향의 시’를 복사한 것이었어요. 역사를 
이야기하고 계승해갈 수 있는 증거가 생겼고 봄의 햇볕을 흠뻑 쬐는 
것처럼 기뻤어요. 제막식에는 미이케광업소장이 참여하였고, 강제
연행에 대한 반성의 말은 있었지만 사과를 듣지는 못했어요. 제막식 
날은 우리 조선민족이 일본 지배에서 독립을 외치고 투쟁했던 3·1
운동으로부터 79년이 지난 날로 선조나 동포의 ‘한(恨)’의 후원을 
받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요.
돌이켜 보면 50대 그 오오무타 마와타리 기념비라고 그것을 보존
하는 운동에 나서 가지고 그리고 내가 미쓰이랑 격한 투쟁을 한 
것이지요. 우리가 놓여있는 입장을 생각하면서 왜 우리가, 조선 사
람은 차별을 받는가. 또 60년, 70년 왜 이렇게 가난한가. 일을 하지
만도 생활은 편해지지 않고. 왜 우리 조선 사람은 여기서 비참하게 
이런 힘쓰는 노동만 하고 내 땀을 흘리면서 생활은 좋아지지 않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고, 민족차별도 받았고.
가난하게 살아 60년, 50년. 일본 사람도 모두 검소한 생활을 했
지요. 검소하게. 그런데 우리는 그 위에 조선인 차별이 있었으니까. 
뭘 조선인 너희들은... 이런 식으로. 그것에 대한 민족적 분노가 
확 마그마처럼. 가슴속에 마그마처럼 불타고 있었어요. 그래서 치
쿠호의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모임과 만나게 되면서 
나의 운동은 시작되었고 계속하고 있는 것이지요. 
6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보충자료>
마와타리 기념비 
오오무타 역에서 동쪽으로, 차로 15분 가면 미쓰이 석탄광업 
미이케광업소의 마와타리 사택 흔적이 있음(현재는 미스터 
맥스가 있는 곳). 아시아태평양전쟁 때 강제연행된 조선인 
노동자의 수용소임.
조선인 강제연행은 1939년 국민징용령에서 1942년 국민동
원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해감. 이 수용소 유적의 폐욕 51동 
벽장에 조선인이 쓴 먹글자의 벽서가 남겨져 있었음.
‘외곬으로 한마음으로 열심히 꿋꿋하게 살자, 그리고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자’, ‘자신들은 일본군에 잡혔지만 일본은 언
젠가 적에 패배할 것이다’ 등의 글과 그들의 출신지로 생각되
는 글자도 쓰여져 있음.
1989년 기타규슈시의 ‘강제연행의 발자취를 젊은 사람과 더
듬어 찾는 여행’의 일행이 위의 벽서를 발견한 후, 1990년 
8월부터 마와타리 조선인 사택건물 보존회가 미쓰이미이케 
석탄광업소와 오오무타시 건물과 벽서 보존 운동 진행.
현재 석탄산업과학관에 벽서 보존, 1997년 3월 마와타리 
제1공원 안에 마와타리 기념비 설립함.
* 자료출처: 땅속에서부터 인권의 평등을 말한다. 탄광과 인원 오오무타 
필드워크 자료집
 
66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제4장 어머니 강금순과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시민운동과 어머니의 참여
어머니와 함께한 인권교육으로서의 카타리베 활동
현재도 진행 중인 카타리베 활동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2013년)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67
23)
 八幡製鉄元徴用工問題を追及する会.
24)
 日本製鉄元徴用工裁判を支援する会.
▮ 시민운동과 어머니의 참여
‘일본제철 징용공문제를 청구하는 모임(日本製鉄徴用工問題を追
及する会)23)’이라고 오사카와 도교에 있어요. ‘일본제철을 지원하
는 모임(日本製鉄を支援する会)24)’이라고. 그래도 내가 재판에 오
사카에서 신천수(申千洙), 여운택(呂運澤)이라고 그 할아버지들 돌
아가셨지만도. 그때는 야하타 제철소, 그전에는 일본제철소였어요. 
그 오사카 거기서 일하다가 돈은 못 받고. 공탁금. 그 공탁금을 되찾
는 재판! 하는데 우리가 여기서 방청, 방청지원이라고 갔어요. 동경
도 오사카도 갔어요. 
시민운동에 같이 참여한 어머니 모습
68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25)
 八幡製鉄元徴用工問題を追及する会.
어머니 데리고 그땐 우리가 ‘야하타 제철소의 징용공 문제를 청구
하는 모임(八幡製鉄徴用工問題を追及する会)25)’이라고 있었어요. 
거기서 돈을 모아서 1인당 1,000엔인가 1,500엔씩 모아서 차비를 
해가지고, 우리가 대표로 해가지고. 그러니까 어머니 일 많이 했어
요. 학생들한테 알리는 계몽운동. 계몽운동입니다. 그리고 본인의 
문예학습. 청춘(학교)에서 배우고. 또 오사카나 동경까지. 그런 시
민운동까지 참가하였지요. 
어머니와 기념촬영
시민운동을 하다가 도중에 어머니를 데리고 가니까 어머니 이야
기를 듣고 싶다 해서, 거기에 나와서 이야기하니까 눈물 흘리고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69
들어줬어요. 그 선생이 ‘우리 학급에 가서 6학년 학생들한테 좀 
그런 얘기해주소.’ 그래서 어머니 데리고 가서 나도 같이 참가했지
요. ‘차별하면 안 돼요, 전쟁하면 안 돼요.’ 어머니가 울면서 그러면 
여학생들이 뭐 울고. 어머니도 그때 딱 93년도 야하타 아노에서 
문예학교라고 1주일에 한 번. 목요일 7시부터 9시까지. 거기에 쭉 
나가고 한쪽에서는 글을 배우면서 한쪽에서는 그 시민운동 나하고 
같이했어요,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 “너 운동하는 건 좋지만 왜 어
머니를 데리고, 나이 많은 어머니 데리고... 만약 차 타고 교통사고 
나면 큰일이니까. 어머니 데려가지 말고 너만 가라”고 자꾸 형님들
이 나를 꾸짖었지만 내가 일부러 데리고 갔어요.
시민활동에 참여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제 생각에는 
아직 일본인이 모를 것 같고 잊혀질 것 같은 일이 있어요. 예를 
들어, 해방 시 조선인이 조국 조선으로 배 타고 가려 했을 때 태풍으
로 인해 배가 가라앉았어요. 그 희생자를 모시는 기타규슈시 와카마
츠쿠의 오다야마(小田山) 묘지 건립 등, 교과서에서는 결코 다루지 
않는 묻힌 역사예요. 그 이외에도, 우리는 많은 양심적인 일본 
사람들과 만나왔어요. 예를 들어, 치쿠호의 ‘강제연행을 생각하
는 모임’, ‘재일조선인교육을 생각하는 모임’, ‘강제연행의 발자
취를 젊은 사람과 더듬어 찾는 여행’, 1993년에 다케마쓰 테라
오(武松輝男)씨들과 함께 조선인 약 3,000명이 강제연행된 오
오무타의 미쓰이석탄 미이케 광업소의 마와타리 조선인 수용소 
51호동의 보존을 위한 활동으로 분주했어요. 
70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또한 1997년에는 많은 사람들의 협력으로 벽에 쓰여진 망향의 
마음을 절대 잊지 않도록 ‘마와타리 기념비’의 건립을 실현했어요. 
그리고 치쿠호의 탄광에 희생된 무연불의 공양을 위한 납골당 ‘무궁
화당’의 건립에 참여하고 활동해 왔어요. 이를 이해하는 일본인과 
만나 차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고 감사하고 
있어요. 
내가 이런 운동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첫 번째는 우리는 일본
으로 강제로 끌려온 재일의 살아있는 증언자라는 것이지요. 역사의 
진실을 올바르게 배우면 좋겠다는 것이에요. 예를 들면, 일본의 조
선 식민지 지배나 강제연행 등 역사의 진실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있어요. 그리고 양국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가지고, 또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을 바라고 있어요.
우리는 지금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고, 앞으로도 일본에서 살 거예
요. 일본의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고, 두 번 다시 비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많은 일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요. 또한 외국
이 갈라놓게 한 조국의 통일을 실현해주면 좋겠다는 소망도 있어요. 
지금까지 당한 조선인 차별을 극복하고, 다음 세대에는 우리 손자와 
일본의 아이들이 사이좋게 살아가면 좋겠어요. 그리고 평화를 사랑
하고, 우호적인 나라가 되도록 바라고 있어요.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71
26)
 카타리베는 ‘문자가 없었던 나라 시대에 이야기 전해져 온 사실(史
實), 전설 등을 보존하여 이야기를 전하는 것을 일로 하는 사람’을 가
리켰음(川松, 2018:6). 카타리베는 신이 들려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
으로서 신이 말하는 ‘수단’으로 여겨졌고, 전하는 내용보다는 전해지는 
내용에 관심이 많음. 1980년대 이후 일본 사회의 신문상에서도 ‘카타
리베’라는 호칭이 자주 등장(佐藤, 2014:248, 川松, 2018:8)하였고 
‘옛날이야기의 카타리베’와 히로시마, 나가사키, 오키나와, 도쿄대 공습, 
공해피해 등의 ‘전쟁경험자 및 공해피해자의 카타리베가 주된 계부였음. 
최근에는 ‘식(食)의 카타리베’, ‘생업의 카타리베’, ‘역사의 카타리베’ 등 
다분야에 걸쳐 카타리베가 양성되고 지역문화 전승을 이끌어 가는 사람
이 되어 가고 있음(佐藤, 2014:248). 
▮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26)
어머니가 2008년도 11월 8일에 돌아가셨으니까 10년 전인 
1998년도부터 카타리베를 하게 되었네요.
어머니를 설득하는데 참 힘들었어요. 어머니가 우는 소리, 아리
 소리하는 거다. 아리랑 아라리요. 우리는 일본 놈 제국주의 일본 
놈 때문에 이렇게 못 살았다고. 학교 문 앞에도 못 갔다고 울면, 
우는 소리 하는 거지요. 일본어로 너무나 차별을 받고, 일본에 나라
를 빼앗기고, 그런 힘든 상황 속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민족차
을 당하고, 그 가슴에는 한이 맺힌 거지요. 그리고 그걸 듣고 우리
는 그 어머니의 목소리를, 어머니한테 이야기해달라, 후세들에게 
알려야 된다고 각오를 다졌어요. 나는 그전부터 학교에 가끔 가서 
강연 했는데 어머니한테 학교를 같이 가달라고 그랬어요. ‘어머니
가 그 한이 맺힌, 그 한을 풀고 일본의 학생들 앞에서 그 얘기를 
72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해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뭘 말해, 내가 하는 이런 말을 누가 들어
서 좋다고 하노. 안 간다! 안 간다! 절대로 안 한다. 그 부끄러운 
이야기를 뭐 하러 하노. 학교 가서 욕 듣는다.’ 그러면 제가 ‘그렇지 
않다. 일본 사람 좋은 사람 있으니까 이야기 듣고 싶어 한다’ 그랬어
요. 그래서 그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이라고 내가 행사에 있을 
때 자주 데려갔어요.
어머니 카타리베 활동 홍보 포스터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73
어머니와 함께한 고등학교 강연
시민운동 할 때인 1993년부터 했으니까, 어머니와 같이 갔다가 
거기서, 철창 두드리면서 어머니가. 내가 하는 것보다 어머니가 하
는 말이 설득력이 있었으니까. 피해를 받은 당사자니까. 내가 하는 
것보다 어머니가 하는 말이. 그쪽에서도 놀랐고. 어머니의 기세 보
고 놀래요. 어머니는 폭발하고. 그 식민지 통치에서 고통을 직접 
받은 피해자로서 설득력이 있는 거예요. 그리고 저기, 오오무타에
서 4년간 싸웠어요. 오오무타시와, 오오무타시의 시의 기획과와. 
그리고 미쓰이 자본가. 그때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미쓰이가 
첫 번째로 가잖아. 미쓰이광산이라고. 오오무타에서 가장 큽니다. 
미쓰이광산, 거기에 미쓰이 광업소와. 가서 목숨 걸고 싸웠어요. 
그리고 결국 (마와타리 사택은) 철거했지만 큰 비석을 세웠어요. 
여기 폭이 7미터, 그리고 2.8미터. 2미터 80. 마와타리 기념비라고 
세웠어요. 정말 어머니 대단했어요. 어머니 없으면 나도 못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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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그리고 그런 운동하는 과정에서 내가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
’이라고 모임이 있어요, 지금도 있어요. 작은 그룹으로, 한 10명 
정도. 지금은 10명도 없어요. 또 빠지고 또 빠지고. 지금은 7명 
정도밖에 없어요. 내가 회원이요. 그 선생들 만나서 어머니 데려가
는 과정에서, 거기 분들이 어머니 모시고 와서 직원 연수에 이야기
를 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모시고 갔지요. 
어머니는 처음에 싫다 싫다 하면서, 시바타 선생님이라고 친해
요. 모리타 선생, 우라베 선생. 친척같이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이야기 
간단하게 좀 해달라. 그리고 아리랑도 좀 불러 달라고, 슬픈 아리랑 
노래를 부르고. 해주소. 부탁했어요. 그럼 마지못해 이래 하면서 
직원 연수에 갔어요. 어머니한테 제발 아리랑 불러주세요. 이야기
는 안 하는데 노래나 좀 해달라고 그렇게 어머니한테도 빌고 빌고. 
빌다시피 해서. 그럼 어머니가 하려다가 안 하고, 하려다가 안 하고. 
우리 옆에서 답답해서 어머니 빨리 노래하라고. 어머니가 할 수 
없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
리랑 아리랑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이고야 아이고야~ 아이고
야~ 내 낭군 어디로 갔느냐.’ 그 노래 부르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
서. 정말 소름 끼치는. 연기 아니고. 아리랑 부르면서 눈물이. 연기 
아니고 진짜야. 내 뭐 몇 번을 들었어요. 보통 그렇게 눈물 흘리면서 
하는 사람 없어요. 어머니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체험에서 나오는 
그 울분 울분. 너무나도 슬픈 울분이 그대로 스스로 나오는 거지요. 
옆에서 듣고 있는 선생도 눈물 (흘리고). 이것을 후세대에 알려야 
된다. 그래서 내가 열심히 했어요. 돌아가시기 1년 전에. 93세까지 
오래 살았어요.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75
카타리베 활동 시 한복 입은 어머니와 배동록 (1998년)
마지막이 기타규슈대학교. 김미자라고... 문예학습의 그 사람이. 
딱 한국에서 문예활동? 그 관계자가 왔어요. 그래서 거기서 휠체어
를 타고, 거기 타가지고 기타규슈대학에서 강의를 했어요. 
76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27)
 2020년 2월 7일 가마시립 이나쓰키히가시초등학교(嘉麻市立稲築東
小学校)에서 6학년을 대상으로 인권 수업으로 실시한 카타리베 활동을 
일정에 따라 정리한 내용을 원본대로 수록함.
소학교에서 진행한 카타리베 활동 중 문화공연 (2000년)
▮ 현재도 진행 중인 카타리베 활동27) 
▶ 자기소개
오늘 이렇게 여러분과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저는 동록이라 합니다. 오늘 이나쓰키히가시소학교 여러분들과 
이렇게 만나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박수~”. 지금 배상28)이 조선어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77
28)
 학생 앞에서는 스스로 “배상”이라고 함.
로 인사했는데 일본어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까요? 없나요? 
다시 할게요. “저는 배동록이라 합니다. 오늘 이나쓰키히가시소학
교 6학년 여러분들과 이렇게 만나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시간
저는 배동록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나쓰키히가시소학교 6학년의 
여러분과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어때? 배상의 일본어, 
비교적으로 듣기 쉽죠? 외국 사람이 오면 일본어 어렵다, 일본에는 
히라가나가 있고, 가타카나가 있고, (한자도) 음독 훈독 여러 가지 
있죠. 그런데 (일본어에) 익숙하지 못 할 때엔 ‘하.지.메.마.치.떼.’, 
‘요로시쿠 오네가이치마스’, ‘아리가또 고자이마치따’. 그런데 배상
은 ‘하지메마시테’,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 ‘아리가또 고
자이마~스’. 여러분과 거의 차이 없죠? 배상이 일본어 잘할 수 
78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있다는 건 알았죠? 
▶ 한국어 인사 배우기
그럼 간략하게 한국어 인사를 합니다. 그럼 5분 정도 이웃나라의 
언어를 배웁니다. ‘곤니치와’, ‘아리가또’, ‘사요나라’. 그럼 ‘곤니치
와’ 합니다! ‘곤니치와’는 조선어로 ‘안녕하세요’라고 합니다. 해봅
시다. ‘안녕하세요~’. 이건 어렵지 않네요.
누나 배동선과 같이 한국어 인사 수업
다음! 공손한 표현. 예를 들어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와서 
선생님 보고 ‘오하요’나 ‘안녕’이라고 안 하지요? ‘오하요고자이마
스’라고 제대로 인사할 거죠? 공손한 표현, ‘안녕하십니까’. 시작~. 
해봅시다. ‘안녕하십니까’. ‘무’의 발음은 비음화라고 해서 코로, 
입을 다물고 코로 발음합니다. 이해되나요? ‘안녕하시무~니까.’ 입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79
을 다물고. ‘안녕하시무~니까.’ 오 잘했어. 이 ‘무’의 발음은 많이 
나와요.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다 비음화. 코로 소리를 내
야 해요. 기억해두어요. 다음! “연필 빌려줘”, “네 좋아요”. 작은 
친절함에 대한 사례말. “고맙~습~니다”. 이 ‘무’도 입을 다물고 코
로 발음해요. “감사드리겠습니다”. 사례말. 공손한 표현. “간샤(感
謝)”를 “감사”라고 해요. “감사합니다”. 시작~. “감~사~합니다”. 
음. 어렵지만. 
다음! “사요나라”. 일본에서는 “사요나라”, “바이바이”로 끝나지
만 조선에서는 헤어질 때 보내는 사람이랑 돌아가는 사람이 인사말
을 다르게 쓴다는 그런 규칙이 있어요. 배상이 오늘 교류회 끝나서 
갑니다. 그럼 배상이 돌아갈 때 보내는 여러분이 배상에게 “안녕히 
가세요~”라고 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의 어원은 “안네
이(安寧)”. 안온하게 조심하게. 그런 뜻. “안네이”라는 말이 “안
녕히”가 되었어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그런 뜻으로 “안녕히 
가세요~”. 보내는 측은 “안녕히 가세요~” 시작~. 집으로 돌아
가는 사람이 그 자리에 남는 사람에게 “안녕히 계세요~”. 시
작~. 여기 “가”와 “케”의 차이네요.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그럼 
복습할게요. 언어 공부 끝입니다. 박수~. 
▶ 한일관계 및 교류의 중요성에 관한 이야기
한국어 좋아하는 사람, 손 좀 들어보세요. 손 들었죠? 음... 일단 
먼저 한국을 좋아해주세요. 관심을 가지는 거. 그럼 한국과 일본 
바로 사이좋아져요. 지금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씨가 사이 
80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안 좋은데 좀... 정치가들은 싸우기만 해요. 그런데 배상은... 여기 
학교 23년 동안 다니고 있어요. 교류회나 강연 중에 가장 오랫동안 
계속하고 있는 학교가 여기 학교예요. 그래서 저는 이 학교를 제 
모교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 좋아해요. 이런 학교에서, 이런 
교류회를 몇 십 년째 계속하고 있는데 나라끼리 싸우고 있어요. 
작년 7월 이후 사이가 안 좋아져서 이전투구잖아요. TV를 봐도 
뭘 봐도 한국은 나쁘다, 문재인 쓰러뜨리라. 그런 말 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인터넷 보면 네토우요(ネトウヨ, 인터넷 우익)라는 사
람이 한국... 일본에 있는 한국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라, 라든가. 
바퀴벌레 조선, 구더기 조선. 죽여라. 그렇게 말해요. 정말 기가 
죽어버려요. 정말... 이렇게 마음이 쪼글쪼글해져요. 마음이 몹시 
상해버릴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런 걸 튀겨 버리고 한국을 좋아하
고 사이좋게 삽시다. 그렇죠? 감사해요. 
▶ 한반도 역사 이야기
둔하고 굼뜬 배상이지만 열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할 테니까... 
그럼 다시 한번 배상의 누나를 소개합니다. 누나는 야하타(八幡) 
니시쿠(西区), 나도 야하타 니시쿠에 살고 있어요. 여기서 차로 1시
간, 오늘도 차로 1시간 15분 정도 걸렸을까... 야하타 니시쿠의 
이쪽... 아노(穴生)라는 곳에 살고 있어요. 저 집에서 차로 5분 정
도. 제가 아침 사무소 (가서) 짐을 싣고, 그리고 누나 집으로 가서, 
태워주고. 이렇게 오늘도 9시 15분쯤에 도착했어요. 현수막을 붙
이는 작업들 모두 다 같이 하는 것도, 공동작업처럼. 같이 붙였다라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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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가.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여기 있는 건 모두 제가 학교 강연에
서 받은 거. 약 23년 동안 해왔고, 이런 큰 거, 작은 거 다 합쳐서 
약 150매 정도 있어요. 400, 500매 있었지만 3년 전쯤에 창고에 
다 넣을 수 없으니 버렸어요. 사무소에. 그리고 이런 소중한 것만 
가져왔어요.
누나는 뒤에... 치마저고리라는 민족의상을 입혀줘요. 남자는 이
쪽이고, 여자는 저쪽. 그 의상을 입혀주는 작업을 누나가 해줘요. 
누나는 나이가 많지만 그럭저럭 이렇게 와주고. 이제 가고 싶지 
않다고 하고 있지만. 그래도 오늘은 이나츠키히가시, 제 모교라서 
가자고.
누나가 그 학교라면 가자고 해서 왔어요. 추우면... 집을 나가기 
싫은... 나가기도 어려운데 이렇게 둘이서 열심히 할 테니 잘 부탁해
요. 그리고 더 한 명. 저기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은 오오시마상이
라고, 이이즈카(飯塚)에 있지만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농담이 
아니라 이제 그런 나이니까. 살아있을 때 배상의 사진을 찍고 싶다
고. 그래서 봉사활동으로, 돈을 전혀 받지 않고 스스로 좋아해서, 
혼자 버스 타고 여기까지 왔어요.
여러분. 이 지도를 보세요. 3년 전에 보여줬을 수도 있네요. 
이 지도 본 기억이 있어요? 잊어버렸죠? 3년 지났으니. 이거 
좀 보세요. 접착테이프 붙이고 붙인. (접착테이프를 많이 붙였
기 때문에 생긴) 혹이 3개나 생겼어. 전에도 저기 갔더니 선생
님이 놀랐어요. ‘배상 이거 오래된 거네요.’ 이건 2003년에 만들
었어요. 지금 17년째. 실로 이 지도. 2003년 세계에서 큰 사건
이 있었어요. 이라크전쟁이라고 4월에 있었어요. 그 1개월 전에 
82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타가와(田川)의 이타(伊田)초등학교, 이타초등학교 6학년에
서 오늘처럼 학습회를 했어요. 그때, 한 달 전에 제가 협의회에 
가서 선생님~ 혹시 괜찮다면 6학년들에게 지도를 그려달라고 
해줄 수 있냐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2월에 학교에 갔어요. 갔더
니 이게 이렇게 붙어있었어요. 우와~ 대단하네요. 이 지도보고 
저는 감격했어요. 저는 마음에 들었고요. 제가 마음에 든 가장 
큰 이유는 이해하기 쉬운 거예요. 그래서 저는 간직하면서 써 
왔는데... 그래도 종이니까 찢어지잖아. 찢어지지만 이렇게 접
착테이프를 붙이고 오늘까지 왔다는 거죠. 
지도에서 여기 규슈예요.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는 ‘조
선반도’라고 해요. 조선반도는 원래 하나의 나라였어요. 오늘부
터... 1950년 6월 25일, ‘조선전쟁’이라고 발발해서 3년간의 격한 
전투 끝에 ‘너희들은 남과 북으로 갈라져라’. 이렇게. 강제로 남과 
북으로 갈라졌어요. 38도선이라는 선으로. 이 38도선이라는 선으
로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어요. 남의 사람, 북의 사람 같은 민족. 
얼굴, 외모, 생활습관 똑같아요. 말도 전부 다 통해요. 그런데 남은 
한국, 대한민국, 북은 조선, 조선민주주의공화국, 줄여서 북조선. 
그런데 원래는 하나의 나라였고, 모두 다 같은 민족. .... 슬프네요. 
하나의 민족이 싸우고, 이 조선전쟁으로 약 400만의 사람이 죽었
고, 부상당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비극이에요. 그리고 지금도 100
만 명의 군대가 남은 북을 향해, 북은 남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면서 
이렇게 대립하고 있어요. 어때요? 슬픈 일이죠. 그 이유는 왜 조선
전쟁이 일어난 건가. 그걸 좀 이야기할게요. 
일본과 조선반도는 가장 가까운 나라. 이 쓰시마(対馬, 대마도)라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83
는 섬, 일본의 섬. 이런 날씨가 좋은 날, 쓰시마의 육지에서 부산의 
육지가 보인다고 해요. 부산은 시모노세키(下関)와 매일 페리로 왕
래하고 있어요. 하카타(博多)항에서 부산까지 매일 배가 3시간, 고
속선이 있어요. 즉 일본 사람은 한국으로, 한국 사람은 일본으로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여기 중요한 부산이라는 항구도시. 이 부산
이 쓰시마에서 보인다고 해요. 이웃나라지만 맑은 날에는 보인다는 
것은 멀어요? 가깝죠? 그래. 그리고 거리를 보면 부산에서 쓰시마까
지 직선거리로 하면 60km. 배상이 사는 야하타에서 오사카까지 
500km나 돼요. 도쿄까지는 그 2배 1,000km나 돼요. 그런데 쓰시
마에서 여기, 부산까지는 직선으로 60km. 가깝다는 걸 알았죠? 
실감할 수 있죠? 가깝다는 걸. 저는 작년 8월 한국에 갔는데 하카
타... 아니 배로 갔는데, 그런데 8월만 그 배가 없어서 비행기로 
갔는데 후쿠오카공항에서 갔더니 불과 30분 만에 부산이에요. 부산
의 상공이 보였습니다. 오사카나 도쿄로 가는 것보다 가까워요. 가
깝다는 걸 기억해줘요. 그리고... 조선반도와 일본은 이웃나라니
까... 500년, 1,000년... 그런 기간으로 보면 정말 사이가 좋은 나라
였어요. 
고대로부터 보면 벼농사, 사찰의 건축기술, 그리고 도자기. 아리
타야키(有田焼), 리산페이(이참평, 李参平). 아리타야키라든가 도자
기의 전부는 조선반도의 도공이 400년 전, 450년 전인가. 조선반도
에서 끌고 온 사람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기술을 전승하고 있어
요. 이렇게 일본과 조선은 사이좋은 나라였는데 히데요시(豊臣秀吉)
의 시대, 조선을 침략했어. 임진왜란(文禄・慶長の役). 사람을 죽이
고, 귀를 자르고 코를 자르고 이만큼 죽였어요... 라고. 히데요시에
8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게 그렇게 보고하고. 그 후에 도쿠가와(徳川)막부가 되면서 일본과 
사이가 좋아져요. 수복해요. 화해해요. 밟았던... 밟고 때린 사람이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화해를 할 수 있어요. 화해해서 일본과 조선
은... 조선왕조는 다시 사이좋은 나라가 되었어요. 
한반도 그림과 역사 이야기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85
그 조선통신사는 ... 12번이나 왔어요. 12번이나. 이렇게 통신사
가 왔어요. 조선통신사라는 것은 일본과 조선을 화해시키고, 평화 
외교의 상징이에요. 이건 2017년 제가 오오가와라는 중학교에서 
강연했을 때, 3년에 한 번씩 저를 불러줘요. 그리고 저는 협의회 
때 〇〇〇이란 여성 선생님인데, 저와 정말 사이좋은 분인데. 그 
선생님이 왔으니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그 선생님이 미술동아
리의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대요.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상상해서 
이 지도를 그려주셨어요. ‘과거를 바라보고’, ‘과거를 잊지 마세요’. 
미래를, 새로운 미래를 만들자고. 그런 마음과 조선통신사가 일본
으로 12번이나 온 그 그림을, 그림으로 표현했어요. 
그리고 이 38도선. 남북 분단. 갈라놓은 군사분계선이라는, 국경 
아니에요. 군사분계선이라고 해요. 이 선을 없애서, 평화의 비둘기
가. 이게 참 잘 그린 거 같죠? 중학생이 그린 거야. 어른이 그렸다고 
하면 그렇겠지 싶을 수도 있는데 학생이 그렸다는 데에 대단히 의미
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소중하게 소중하게 여겨서 이걸 
들고 다니고 있어요. 이런 외교, 평화 외교, 지금 요구되고 있어요. 
그러데 문씨와 아베씨는 싸우기만 해요. 정말 슬퍼요. 그래서 여러
분의 세대에 이런 평화 외교, 사이좋은 외교를 할 수 있으면 합니다, 
그죠? 그리고 저쪽에 있는 1,000회 강연. 제가 오오무타에서 했던 
것. 오오무타의 선생님들이 만들어주셨어요.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
면 좋겠는데요. 현실로는 조금 어렵네요.
86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1,000회 강연 기념 현수막
▶ 배동록의 뿌리와 제철소 생활 이야기
다시 지도로 돌아가요~. 자 지금부터 조금 배상의 뿌리(roots)
를 이야기해볼게요. 알지요? 가장 가까운 나라는 조선반도. 조선
은 원래 하나의 나라였지만 전쟁으로 인해 남북, 두 개로 분단되었
다. 분단. 갈라놓였다는 것. 그래서 왜 분단되었는지 그 이야기를 
할게요. 
배상의... 나의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라는 건 아버지. ‘어머
니’라는 건 어머니. 그 이야기를 하면 이해하기 정말 쉬워요. 교과서
에 없는 진짜 이야기. 잘 들어주세요. 자~ 조선반도와 일본은 이웃
나라. 사이좋았어. 그런데 지금부터 약 100년 전. 명치(明治)에 들
어서 일본의 군국주의라는 사람이 나타났고, 여러분의 할아버지, 
조할아버지. 전쟁만 했어요. 진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지금 평화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87
29)
 재채기하는 소리 “에취”의 일본어 발음. 합천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심.
스러운 일본이지만 100년 전은 전쟁만 하고 있었어요. 그 사실을 
이야기해요. 
먼저 저의 고향은 여기... 부산에서 버스 타고 2시간 정도 간 곳, 
여기에 합천이라는 곳에 있어요. 합천, 경상남도 합천. ‘하쿠숀
~~29)’, 합천. 이렇게 외우면 돼요. 여기서 우리 아버지 농사를 지었
었어요. 백성. 쌀을 만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에 군국주의가 
대두하고, 탈아입구(脱亜入欧), 부국강병, 식산흥업이라고. 명치... 
아시아 사람들을 멸시하고, 구미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런 군국
주의가 대두했어요. 그리고 드디어 1910년 일본 군국주의가, 나중
에는 일본 제국주의라고 하지만.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었지만 그
때는 그 말을 썼었어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반도를 통째로 지배해
요. 지배. 지배라는 건 상대국을 무력으로 억압시키고 “우리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이렇게 강제로 조선을 억압하고, 압박했어요.
그리고 1910년 우리나라는, 조선반도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식
민지 지배라는 것은 상대국을 억압시키고 모든 것을 수탈하는 것을 
식민지 지배라고 해요. 스페인이라든가. 영국은 인도 500년... 모두 
식민지 지배를. 상대의 자원을 모두 노획하는 것을 식민지 지배라고 
해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토지를 빼앗고, 곡물을 빼앗고, 
조선어를 금지해서 일본어를 사용하라고. 창씨개명이라고 김이라
든가. 리라든가 박이라든가. 원래 이름을 일본명으로 바꾸라고. 그 
흔적으로... 김씨라면 가네모토(金本 혹은 金元)나 가네다(金田)라든
가... 그렇게 이름도 변경해버렸어. 우리는 성주 배씨니까 호시하라
88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30)
 일본의 기록 작가. 대표작품 『저항(抗い)』. 후쿠오카 치쿠호 지역의 
구 산탄지에는 지금도 아리랑 고개라고 불리는 곳이 있음. 그곳은 옛날 
일본으로 징용되었던 조선인들이 탄광으로 향할 때 걸어갔던 길임.
  (참조: http://aragai-info.net/)
(星原)가 되었어. 강제로 변경되었어. 우리 아버지... 살아계셨을 때 
자주 선조 대대 (써왔던) 우리 이름, 왜 일본명으로 바꿔야 하는 
건가... 슬퍼하면서 한탄했었다고 해요. 그리고 일본은 전쟁을 해
요. 들어봤어? 일청(日淸), 일러(日露), 일중(日中), 태평양 전쟁, 제1
차 세계대전. 그런 전쟁을 계속 계속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돌입해서, 식민지 지배
를 하고 있는 조선반도에서 많은 사람들을 탄광이라든가, 제가 살고 
있는 야하타 제철소, 기타규슈(北九州)에 야하타 제철소라는 게 있
었어요. 거기로 데리고 가서 노동시켰어요. 1940년 우리 아버지도 
합천에서 ‘너는 일본에 가서 일해라’라고 해서 야하타 제철소에 데
려가졌어요. 그 야하타 제철소에서는 약 6천 명의 조선인이 일하고 
있었어요. 6천 명. 여기 치쿠호(筑豊)의 탄광에서는 15만 명의 조선
인이, 가족도 포함해서. 데려가졌고. 하야시 에이다이(林えいだ
い)30)의 책에도 나와요. 15만 명. 어마어마한 수죠? 그리고 우리 
부모 세대는 그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아주 고생했어요. 
1940년, 우리 아버지는 합천에서 부산까지 가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관부(関釜)페리, 당시는 관부연락선이라고 했었어. 배 타고 
왔고, 야하타로 오고, 야하타 제철소의 하청회사 기숙사에 살게 되
었어. 고향에서는 우리 어머니가 ‘남편을 돌려주세요’, ‘시끄러워. 
지금 일본은 전쟁을 하고 있으니 인력이 부족해서 지금 돌려줄 수가 
없다.’ (아버지를) 돌려주지 않아요. ‘그럼 일본으로 간 아버지한테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89
갈 수 있게 해주세요.’. 
간신히 2년 후에, 1942년 허가가 내려와서, 우리 어머니가 4명의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었어요. 그때 증거 사진이 있어
요. 이게 진짜 거예요. 지금으로 따지면 여권 사진이에요. 여권 알
죠? 여행 다닐 때 쓰는. 그 여권 사진이 이거예요. 이게 진짜 거. 
이걸 확대 복사한 거. 우리 어머니, 장남, 차남, 삼남, 이게 누나. 
누나가 7살 때쯤. 아직 여러분보다 어린 애였어. 이렇게 4명의 아이
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오게 되었어요. 폭풍... 태풍 날인 것 
같은 날이었대요. 배가 나뭇잎처럼 흔들리고, 흔들리고, 흔들리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안 날 정도였다고 해요. ‘아~ 오늘, 오늘밤 이 
배는 가라앉을 것 같아’, 각오를 해서 어머니는 이렇게 손을 모으고, 
‘관음보살, 관음보살, 우리를 살려주세요, 우리를 살려주세요’라고 
하면서, 밤새 손을 비비면서 기도했다고 해요. 아이들은 뱃멀미로 
쓰러져서 병석에 누워버렸고... 그리고 어머니는 배가 계속 흔들리
니까 아, 이건 배가 가라앉을 것 같다고 각오를 해서, 아이들 손을 
꽉 잡고, 죽을 때는 같이 죽자고 해서 각오를 했다고 해요. 그런데! 
흔들리고 흔들린 광부연락선. 
“동생이 2살 때쯤. 물 달라고, 물 달라고. 열심히 물, 물...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물조차 없어요, 당시는. 물을 푸는 도구가 없어. 물을 
넣는 용기도 없어. 정말 이 애가 죽지 않을까 해서. 그렇게 해서 
드디어 일본 시모노세키에 도착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항상 울면서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역시 애는 일찍 돌아갔어요. 어릴 때 충격이 
컸을까... 밤새 물 주세요, 물 주세요. 그런데 물이 없어요. 그런 
시대가 있었다는 걸 여러분 조금이라도 알아두고 있어주면 감사하
90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31)
 배동선 누님의 이야기.
32)
 왕골·짚·대 따위로 엮은 깔개의 총.
겠어요.”31)
배동록 일가가 도일하게 된 배경 설명
배가 도착해서, 우리 아버지가 거기에 마중하러 와있었고, 합류
해서 우리 어머니와 함께 그 야하타, 야하타 제철소의 하청 회사로 
갔어요. 12월의 겨울 추운 밤이었대요. 눈이 내리는 추위로 곱아지
는 밤이었대요. 조선에서 이렇게 4명의 아이들이 왔는데 그 사택으
로 갔더니, 어머니가 마지막 죽을 때까지 원망했던. 조선에서 4명이
나 아이들 데리고 왔는데 이불 하나도 없었다고. 조선인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조선에서 왔으니 이불 하나라도, 담요라도 있
겠지 했는데. 그날 어떻게 잤다고 생각해요? 우리 어머니한테 몇 
번도 들었는데 이불이 없으니까 짚, 거적32). 거적 알아요? 그걸 
이렇게 뒤집어쓰면서 잤대요. 어머니는 누나와 아기를 안고. 강아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91
지의 모자가 자는 것처럼.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그리고 1주일 
정도 넝마이불을 가져와서 살았는데요. 
하루 1시간 정도 일하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침 5시가 되면 
감독이 ‘일어나~ 일어나~’ 해서 뎅뎅 문을 (쳐요). 지금은 모두 창문
이지만 옛날은 모두 나무로 된 문. 그걸 ‘일어나~ 일어나~’ 해서. 
그리고 가스가 없는 시대라서 장작을 태우고 밥을 지어요. ‘하카마
키’라고. 지금은 여러분들을 모르겠죠. 전기... 전기솥으로 밥을 지
으니까. 옛날 하카마키라고, 장작을 지피고 태우고 그 불로 밥을 
지었어요. 우리 어렸을 때는. 그리고 굴뚝이 지붕 위에 있죠. 그걸 
보고 (감독이) ‘너 집에는 연기가 안 나오는데 뭘 하고 있어!!’라고 
큰소리로 야단쳐요. 일어나라~ 하면서. 그리고 일어나서 밥을 짓고 
나면 사무실 앞에 정렬해서 하나오마치(花尾町)라고 지금 도시고속
이 있는, 그 주변을 하나오마치라고 하는데. 거기서부터 야하타 제
철소, JR 야하타역이 있어요. 
거기서부터 회사 안으로 들어가서 철광석을 화차에 싣는 일을 
하게 되었다. 마치 원시적인. 맨손으로 철광석을 실었다고 해요. 
부두에서, 외국에서 가져오는 그 철광석을. 그걸 화차에 싣고, 화차
는 용광로까지. 화차가... 하여튼 철을 만들지 않으면 전쟁에 이길 
수 없다. 철을 만드는 것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 그리고 철을 녹이기 
위해서는 석탄이 필요해요. 석탄으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해요. 석
탄을 산화시켜서 코크스(Koks)를 만들어요. 코크스를 넣고 철을 
녹여요. 그러니까 철과 석탄, 조선인의 강제노동. 이 3개의 상관관
계가 생겼어요. 조금 어렵지만. 전쟁 중이니까. 그리고 일본인도 
있었지만 일본인은 모두 전지로, 전쟁터로 보냈어요. 그랬더니 (국
92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33)
 관찰(觀察) 말고 감찰(鑑察). 관찰과 거의 비슷한 뜻이지만 ‘찾아보고 
확인한다’, ‘잘 보고 대조해본다’는 뜻.
내에서) 일하는 사람이 줄어들어요. 그 줄어든 사람들 대신에 그만
큼 조선에서 데리고 와서 일을 시켜요. 이걸 강제연행, 강제노동이
라고 해요.
그리고 우리 어머니도 그 제철소에서. 2, 3개월 후에 인력이 부족
하다고 해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때 문감(門鑑)33)이라는 게 있어요. 
이건 옛날 신분증명서, 당시의. 이건 진짜 거예요. 이제 다시 볼 
수 있는 일이 없을 겁니다. 이것은 우리 어머니가 일했다는 증거입
니다. 사진이 있는, 문감. 문은 ‘문’이고 감은 감찰의 감. 신분증명
서. 이해하기 어렵지만 면허증 같은 것. 이게 어머니가 일했다는 
증거예요. 
현재 야하타 제철소 모습
 
하루 10시간이나 강제로 일하게 되었고, 벌써 75년도 지났으니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93
너는 정말 일했냐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걸 보면. 정말 일했
던 증거가 돼요. 그리고 저를 낳고, 3주 만에 일하러 나가게 되었어
요. 그래서 나를 누나한테 맡기고, 우유도 없잖아요. 미음(重湯)이라
고 알아? 죽은 알죠? 그런 죽 같은 걸 우유 대신에, 울면 이걸 먹이
라고 누나한테 나를 맡기고. 그렇게 해서 우리 어머니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제철소 근무 당시 신분증명서
9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34)
 일반적으로 야하타대공습은 1944년 6월 19일, 1944년 8월 20일 
그리고 1945년 8월 8일의 3번을 합쳐서 말함. 1945년 8월 8일은 야
하타시 츄오우마치(中央町)에서 모모조노(桃園)까지에 걸쳐서 소이탄이 
투하되었고, 바로 화재가 일어난 결과 시가지는 허허벌판으로 변하였음. 
이환자(罹患者) 52,562명. 사상자 약 2,500명. 
  (참조: http://www.asahi-net.or.jp/~un3k-mn/kusyu-yawata.htm)
35)
 1898년부터 1945년까지 있던 대일본제국육군의 사단(師団)의 하나. 
병사의 징병구는 주로 북구 규슈에 있었음. 
함께 제철(소)에서 일했어요. 6천 명 일했어요. 물론 일본인도 전쟁 
중이라 엉망이에요. 인권이나 없어요. 우선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일해라, 일해라. 목숨을 걸고 싸우라.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 전쟁의 공포와 조선인 차별 이야기
나는 늘 이런 이야기를... 뭘 말하고 싶으냐면, 전쟁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쵸? 전쟁은 사람을 죽여요. 정말 서로 죽여요. 무서
운 일이에요, 전쟁은. 저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인도 310만 명이 
죽었다고 해요. 이런 비극을 일부의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주도자
가 전쟁으로 달렸고, 그런데 죽는 건 결국 국민이 죽는 거예요. 
국민이. 죄 없는 국민이 희생이 돼요. 그리고 야하타도. 야하타대공
(八幡空襲)34)이라고 공습을 당하고. 야하타역 주변이 허허벌판
으로 변한... 눈 깜짝할 사이에 8월 8일 대공습으로 500명에 가까
운 사람이 죽어버렸어요. 무섭네요. 그리고 6일에 히로시마에 원폭
이 투하되었고, 그다음은 고쿠라(小倉)에 투하하겠다고. 그때 고쿠
라에는 무기를 만드는 공장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제12사단(第12
師団)35)이라는 군의 사령부가 있었어. 그런데 대공습으로 연기가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95
활활 솟아 올라갔어. 연기 때문에 밑에 잘 안 보였어. 그래서 (미군
은) 나가사키(長崎)에 가서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어요. 히로시
마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하나의 원자폭탄으로 약 10만 명이 죽었
다고 합니다. 
나가사키는 약 7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 원자폭탄으로. 그리
고 히로시마에서 약 3만 명, 나가사키에서 약 1만 명의 조선인이 
죽었다고 합니다. 알려지지 않았죠? 몰랐죠? 왜일까? 군사공장이 
있고, 거기에 조선인들이 동원되어서 일하고 있었어요. 이런 비극
을 낳고, 결국 8월 15일 일본은 포기하고 항복해요. 그리고 전쟁이 
끝나요. 
귀국하지 못한 재일조선인 이야기
96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많은 사람이 조선으로 돌아가요. 그런데 곤란 속에서 우리는 일부 
(일본에) 남았어요. 그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이에요. 그리하여 우리
는 일본에 남게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그 몇 년 후에 조선전쟁이 일어나 남북으로 분단되었어요. 
나중에 돌아가자고 했었는데 10년 지나고, 70년 지나고. 배상도 
이렇게 할아버지가 되어버렸어요. 바로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의 자손이에요. 사실이에요.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가지 못해서 일본에 남게 되었어요. 그런 사람들을 재일한국·
조선인이라고 해요. 꼭 기억해줘요. 재일... 일본에 있는, 조선인
한국인. 조선이라고 하는 건 대부분 북조선을 가리키며, 남을 지지
하는 걸 한국. 같은 민족이라는 것도 꼭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저는 어렸을 때 괴롭힘을 당했어요. 놀고 있었더니 싸우게 
되었다가. ‘야~ 조센징~ 돼지 아이, 너희들 마늘 냄새난다~’ 하면
서. 이렇게 바보 취급을 당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일본에 남게 되었어. 그리고 저는 어렸을 때 자주 괴롭힘을 당했어. 
‘야~ 조센징~ 돼지아이, 너희들 마늘 냄새난다~ 저리 가라’라고. 
작은 돌을 내던지진 일도 있어요. 어린 마음으로 나는 왜, 조선인이 
뭐가 나쁜 건가 했지만 몸은 작고, 싸우지도 못해서 항상 이렇게 
움츠러들고 있었어요. 마음이 약한 소년이었어요.
중학생 때도 괴롭힘이 심했어요. 집은 빈핍, 가난함. 그래서 신문
배달이나 우유배달이나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계를 도와
줬어. 그렇지 않으면 먹고 살아갈 수 없었어. 아버지는 노가다 일을 
했고, 나는 7남매. 7남매로 아이들이 7명이나... 아버지는 노가다 
일을 하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장남, 차남, 삼남, 사남. 배상은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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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D업종을 뜻하는 일본의 용어로, 힘들고(기츠이), 더럽고(기타나이), 
위험(기켄)한 기피업종을 의미함.
사남이었어. 이거 누나. 그리고 전쟁 끝나고, 남동생, 여동생이 생겨
서 7남매. 고생했어요. 매일 매일 고구마. 겨울에는 단고지루(だん
ご汁), 여름은 소면. 정말 극빈 생활을 했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아버지는 노가다 일을 하면서 
7남매를 키우셨어요. 그렇게 해서 저도 겨우 살아왔어요. 우리 조선
인의 일이라고 하면, 노가다 일, 육체노동, 고철, 폐품회수, 그리고 
호루몬야키(ホルモン焼き)라고 해서, 호르몬 알죠? 그걸 굽고... 소
주를 만들거나. 정말 사회의 저변의... 그런 힘든. 지금으로 말하자
면 3K36). 힘들다, 더럽다. 그런 일밖에 없었어요. 1950년대, 60년
대. 제가 중학생 때까지는. 정말 가난한 생활을 하고, 그런데도 아버
지, 어머니. 부모님은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이렇게 제대
로 성장했어요. 
고등학교부터는 오리오(折尾)에 있는 규슈조선학교라는 그 학교
에 가서 조선어를 배웠어요. 그리고 조선의 역사, 조선의 말, 조선의 
문화를 배우고, 나는 나쁘지 않다. 조선인이라도 나쁜 건 없다. 그런 
자각,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고, 저는 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도 
사회의... 사회는 손쉬운 것은 아니었어요. 차별은 있었지만.
 
▶ 이야기꾼 활동 
저는 40살 중반쯤에 좋은 일본인과 만났어요. 치쿠호에 ‘강제연
행을 생각하는 모임(強制連行を考える会)’이라는 게, 지금도 있어
98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요. 이런 사람들과 만나서 ‘배상~ 우리는 조선인이라고 해도 차별을 
안 해요’라고. ‘우리와 함께 차별과 싸우자’고. 이런 선생님들과 우
연히 만나게 되어서 같이 활동하는 그 안에서 배상도 여러 가지 
배웠고, 또는 배상이 가르쳐주기도 하고. 사이좋게 해 왔어요. 그런 
안에서 ‘배상~ 우리 학교에 와서 직원연수에서 이야기 좀 해주세
요’. 그래서 저는 어머니를 데리고 학교 강연을 했어요. 그리고 저와 
어머니는 이렇게... 약 25년 전 이야기. 저와 어머니. 이렇게 같이 
차별을 없애자고. 차별을 허용하지 않겠다. 그런 강연으로 어머니
와 함께 갔어요. 근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지금은 누나와 같이 
문화활동을 계속하고 있어요. 
벌써 24, 25년이 되었어요. 연간, 1년 간 약 50회에서 60회. 
20년만 해도 단순 계산해서 1,000회가 돼요. 그리고 지금 1,000회
가 넘었어요. 저는 일본에 살게 되어서 일본에서 죽을 거예요. 이 
일본, 일본의 땅에 묻혀갈 거예요. 그래도 가장 원하는 것은 남북이 
통일되고. 하나의 나라가 되어서... 이건 통일기라고 해요. 남북이 
통일되는 것을 기도하고 있고, 절대 전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
과 조선반도가 사이좋아지는 그런 마음을 담고, 이런 활동을 계속하
고 있어요. 
이 학교는 매년 저를 불러줘요. 3학년은 10월에, 6학년은 이 시
기나 1월에. 정말 대단한 학교입니다. 저는 정말 선생님한테 감사하
고 있습니다. 정말. 그리고 차별을 극복해 온 배상. 그런 차별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오늘 여러분과 만나게 되었어요.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99
▶ 누나인 배동선 이야기
누나 배동선의 이야기
 
지금 야하타 니시쿠 아노오에 문맹퇴치학교, ‘청춘학교’라는 학
교가 있어요. 이 문집인데요. 청춘학교. 여기서 우리 어머니도 배웠
는데 10년 다녔는데... 여러분 3학년 때 만났을 겁니다. 이 이야기
도 들었을 거 같은데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역시 어떤 시대라도 
우리 어머니도 학문을,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는 건 확실합니다. 
공부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밝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시대가 나빴던 건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하고, 그리고 오래된 전쟁 안에서 딱 학교 가는 나이였죠? 우리 
어머니가. 그래서 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가지 못하고. 그리고 휘
둘려서 휘둘려서 일본까지 왔다. 일본에 왔더니 일본은 또 전쟁을 
100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37)
 주민을 위한 회관(우리나라의 시민 회관·구민 회관·마을 회관 등에 
해당함). 
하고 있죠. B29는 날아와서 폭탄을 비처럼 투하하고, 음식이 없어
서 정말 멀리까지 걸어서 시골로 가서 야채의 궤지기를 받아왔어요. 
우리 어머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지금도 생각해요. 궤지기를 
받아와서 그걸 깨끗하게 씻고 그걸 우리한테 먹여주고, 그래서 우리
가 지금 살아있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부모님은 정말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하셨다는 걸... 저는 정말 부모 모두 존경하고 있습니
다. 그런 시대가 있었어요. 사실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학교에 못 갔으니까. 그리고 매일 이야기하신 건, 아이들
이 성장하면 시간이 생기잖아요? TV를 봐도 예고편이 있어도 
자막이 나오잖아요? 자막이. 뭐라고 적혀있는지 모르겠다. 글씨
를 알면 이건 뭐다, 저건 뭐다 하면서 즐길 수 있는데 글씨를 
모르니까 뭘 봐도 물건으로 보인다. 항상 분해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손자나 이웃사람들 오면 저거 무슨 글씨냐고, 저건 뭐라
고 하냐고. 항상 그렇게 물어보고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우리 어머
니도 조금 꿈이 이루어졌어요. 근처의 공민관37)에 문맹퇴치교실이 
생겼고. 어머니 배워볼래요? 이런 나이라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
다면 배워보고 싶다고. 그때 글씨 배우기를 만나게 된 것은 80살 
때. 80살이 되면 보통 배우려고는 안 하죠?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배우고 싶다! 그때부터 10년 동안 다녔어요. 밤에 주 1회, 목요일. 
10년 다녔고, 드디어 성취했냐 말하냐 했는데 그땐 나이가 많아져
서 93살 때 먼 나라로 가버렸지만... 이런 나의 어머니의 이야기. 
그런데 열심히 글을 쓰지만, 힘줘서 쓰려고 하지만... 본인이 보고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101
있는 글과 (직접) 쓴 글씨는... 그래도 못 써... ‘공부라는 게 어렵네
요? 정말 공부는 어렵네요?’ 그렇게 매일 말하면서도 많이 연습하고 
있었어요. 글씨를 알고 싶다. 신문을 읽고 싶다. 편지를 쓰고 고향에 
보내고 싶다. 그런 소원이 있었지만 글씨와의 만남이 늦어서 이루어
지지 못했어요. 여러분, 행복한 거예요, 제가 보기엔. 본인의 이름이
나 문장도 쓸 수 있죠? 그래서 그걸 살리고. 여러분이 뭔가 하나는 
특점(강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살리고 사회에 나가도, 사회에
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주세요.
문맹퇴치 학교인 청춘학교에 대한 설명
그리고 절대 이지메를 하지 않게! 본인의 친구, 소중한 친구를 
괴롭히고 죽을 경우도, 그런 나쁜 사람도 있잖아요, 때로는. 그런 
건 안 좋죠. 친구는 소중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말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으니까 말하고 있는 
102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거예요. 옛날에는 일본도 슬픈 역사가 있지만 지금은 평화스럽죠. 
전쟁이 없어서. 전쟁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여러분이에요. 여
러분은 이제 10년 후에는 사회로 나가잖아요? 사회로 나갔을 때 
전쟁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 모두 사이좋게 지내는 것. 어디 나라 
출신자라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 차별을 하지 않는다. 여러분, 그런 
사람이 되어주세요. 여러분과 2번이나 만나게 되어서 저는 정말 
기뻐요. 
그리고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아까 배상도 말했지만 일본은 
2군데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여러분, 6학
년이 되면 수학여행으로 가지 않아요? 나가사키 평화공원 갔었죠? 
합장했죠? 우리의 원폭의 위령비도 있어요. 공원 구석에 작게... 
보러 갔나요? 몰랐죠? 저는 그것은 차별이 아닐까라고... 저는 생각
하고 있어요. 일본인도 조선인도 죽었잖아요. 원자폭탄으로. 그래
서...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 큰 비 옆에 조선인의 
비도... 옆에 있으면 여러분도 ‘아, 이건 조선인의 비다’라고. 6학년
이 되면 조선인이 뭔지 알죠? 조선인의 비라고 생각해서 합장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모르는 채 성장하는 거죠. 우리 비도 
있는 거예요. 저도 조선인이지만 몰랐어요. 
지금부터 30년 전 시민운동의 모임에 들어가 있었어요. 그때 가
서 선생님이 알려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비도 보고, 기도하고 왔습니
다. 종이학도 많이 매달려 있었어요. 일본 사람도 좋은 사람은, 관계
없이, 차별 없이... 종이학을 일본인이 매달았는지, 조선인이 매달
았는지 거기까지는 못 들었지만 종이학이 많이 매달려 있었어요. 
이런 구석에 있구나 하면서 정말 슬펐어요. 이것도 차별이 아닐까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103
싶었어요. 일본의 비 옆에 있으면 여러분 언제든지 방문했을 때 
똑같이 기도할 수 있으니까. 합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베 수상. 
그 사람이 지금 총리대신이잖아요. 한 번이라도 우리 비까지 가본 
적이 있을까요? 매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간다며? 그래도 우리
의 비까지는 안 갔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 차별이라
고 생각해요. 차별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우리의 비가 일본 비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빌어서 말합니다. 간단한 이야
기였습니다. 끝입니다.
▶ 민족의상 체험과 촬영
마지막으로 그 의상을 입고 끝나겠지만. 그럼 지금부터 치마저고
리, 바지저고리의 패션쇼를 합니다. 남자는 왼쪽, 오른쪽 누나가 
있는 곳은 여학생들 가세요. 지금부터 치마저고리, 바지저고리 패
션쇼를 합니다. 여성이 입고 있는 이 스커트를 ‘치마’라고 해요. 
치마! 위 옷을 ‘저고리’! 저고리! 시작~! 합쳐서 ‘치마저고리’! 남자
들 거는 즈봉을 ‘바지’라고 해요. (일본어로도) ‘팟찌(パッチ, 잠방
이)’라고 하잖아? 조선에서 왔어. ‘바지저고리’! 이건 즉 일본의 ‘하
오리 하카마(羽織袴)’. 민족의상. 이건 일본의 기모노에 해당해요. 
그리고 보세요. 지금 급하게 했지만 1인당 대략 3분 정도 입을 
수 있어요. 일본의 기모노는 30분 정도 걸려요. 정말 컬러풀이죠? 
조금 두세 개 소감을 들어보자. 치마저고리 입은 감상은 어때요? 
조금 앞으로 나오세요. 소매를 좀 보세요. 이것은 색동저고리. 색동
저고리.
10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민족의상 체험을 위한 한복 준비
색동저고리라는 것은 무지갯빛을 말해요. 됐어요. 배상은 노
래 잘못하겠지만 노래를 하나 부를게요. 
“내가 입은 저고리~ 색동저고리~ 아롱다롱 무지개. 정말 고와
요~. 공장에서 돌아오신 아빠 앞에서~ 당실당실 춤을 추면 나비같
대요~. 私のチョゴリ、セットンチョゴリ。赤白虹色のきれいなチョゴ
リ。工場から帰った父さんにひらひら踊ればちょうちょのよう.” 나
비처럼 이쁘다는 색동저고리의 노래였습니다.
여러분~ 주목해주세요. 마치 그림책에서 나타난 공주님처럼 이
뻐요. 웃는 모습이 너무 이뻐요. 이 사람과 한국 사람은 절친이에
요~. 배상과도 절친이에요. 이 친구도 너무 이뻐요. 그럼 좀 이 
친구한테 주목해주세요. 이것은 우리 조선학교의 교복, 여성이 입
는. 중학생 이상은 이 교복을 입어요. 이거 우리 딸. 고등학생 때. 
배유향이라고. 우리 딸이 2명인데 이 옷을 입고 학교로 다녔습니다. 
지금 이 학교로 갈 때, 이걸 치마저고리를 입고 학교로 안 갑니다.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105
왜 그럴까? 이걸 입고 있으면 겨냥하게 된다고. 저게 조선인이다. 
조선인의 학생이다 하면서. 도쿄나 오사카, 야하타에서도 이걸 칼
로 치는 사건이, 버스 안에서라든가, 전차 안에서 그런 사건이 있어
서 이제 이 옷은 통학 시에는 입을 수 없어요. 억울해요. 즉 민족차
이에요. ‘너희들 조선인이지?’, ‘조선인은 일본에서 나가라.’, ‘조
선인은 북(조선)으로 돌아가라.’ 그렇게 말하면서 공격을 하는 사람
이 있어요. 이런 민족차별을 하면 안 돼요. 
아까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일본으로 데려오게 된 사람들의 자손
인데. 저도 결혼해서 아이들도 있는데 그 아이들이 이 옷을 입고... 
지금은 못 입어요. 왜! 차별로 인해 입을 수 없어요. 정말 억울해
요. 그러니까 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당당하게 학교로 갈 수 있는 
그런 사회, 미래를 만들어 나갑시다. 그리고 우리 딸은 가수를 하고 
있는데. ‘후꾸오까 조선가무단’.  
이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사진... 어머니
가 치마저고리 많이 가지고 있어서. 고생은 했는데 의외로 이런 
비싼 옷을 치마저고리를 사주셨어요. 당연히 한국에 가서. 이것을 
오늘 이토 선생님이 입으셔서 우리 어머니도 꼭 천국에서 기뻐하고 
계실 겁니다. 이 사진은 우리 어머니. 어머니는 항상 민족의상을 
입고 학교 강연을 가셨어요. 일본이라고 이렇게 우리를 이해해주는 
사람도 있어. 그래도 일부에서는 차별하는 사람도 있어. ‘너 조선인
은 떠나라’고 하는 사람. ‘아니. 안 돼요. 차별을 하지 마세요’라고 
하는 사람. 어느 쪽이 좋아요? 맞아요. 차별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으로 성장해주세요. 저도 목이 쉬게 하면서 이렇게 어머니와 
10년(동안) 돌아다녔고. 누나와 20년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어요. 
106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그런 차별을 하지 마세요~’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세요. 
그건 배상이 하라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제대로 
일본과 조선의 역사를 알고, 스스로 본인의 귀로 듣고, 물어보고. 
그리고 역시 차별하지 않는 것은 좋은 거라고 생각하게 되면 차별을 
하지 않는 사람과 같이 손을 잡아보세요. 배상들과 손을 잡아주세
요. 그렇게 하면 일본이 좋아질 겁니다. 
이거 좀 보세요. 이건 〇〇〇 선생님이 써주셨어요. 첫 번째. 
‘차이를 인정한다’, 두 번째, ‘차별이나 이지메를 하지 않는다’, 세 
번째, ‘전쟁이 없는 평화스러운 사회를 만들어서 세계 사람들과 이
렇게 손을 잡아간다’. 이건 중요해요. 전쟁하면 다 죽는 거다! 절대 
전쟁을 하면 안 돼! 우리 어머니가, 어머니가 울면서 매일 말하고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정리합니다. 오늘 배상은 열심히 말했죠. 이제 배상
은 비트적비트적.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말하는 건가? 전쟁이 무서
우니까요. 차별이 무서우니까. 차별이나 이지메를 극복해서 전쟁이 
없는 세계를 지켜가자고 선생님이 써주셨어요. 그것을 위해 저는 
목이 쉬어가면서도 이렇게 하고 있어요, 저는 오늘 4시 반에 일어났
어요.
오늘은 여러분에게 평화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쳐주려고 왔어. 
남북이 분단된 것도 일본 탓이에요. 남북 분단 전쟁이 끝났을 때, 
일본은 병사들이 많이 있었어요. ‘당신들은 본인의 나라에 돌아가
세요’라고. 남쪽에서 미군이 들어왔어요. 미군이 이쪽에서. 북쪽에
서는 소련군이 들어왔어. 지금은 러시아. 당시는 소련이라고 했었
어. 군대가 들어와서 무장 해제. ‘일본인은 모두 일본으로 가세요’라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107
고. 그렇게 해서 미군도 소련군도 들어왔어요. 그런데 그 대국의 
의도가 얽혀서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버렸다.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
더라도 도의적인 책임은 일본의 제국주의에 있어요. 여러분의 할아
버지들의 시대에. 식민지 지배를 했다. 식민지 지배를 안 했었으면 
미군도 소련군도 들어올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전쟁의 책임을 만든 
게 일본 제국주의. 여러분이 아니지만 여러분의 할아버지의 시대, 
제국주의, 군국주의가 전쟁의 불씨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남북이 통일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응원해야 하는 거
예요! 도의적으로 생각하면. 조선은 아무 나쁜 짓을 안 했는데도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와서, 지금도 미군은 눌러앉아 있고, 남(한국)
에 눌러앉고 전쟁 상태를 만들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린 
항상 통일, 통일을 기도하고 있어요. 
한반도기를 흔들며 통일기원 노래 선창
108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뭇 새들 자유로이 넘나
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
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이거 좀 보세요. 38도선이라고 군사분계선이 있어요. 임진강이
란 북쪽에서 내려와서 남쪽... 서울에 한강이라고 있어요. 거기에 
흘러들어와요. 이 38도선의 군사분단선에 새는 북쪽, 남쪽 자유롭
게 갈 수 있는데 왜 인간인 우린 못 가는 건가? 분단되어서 벌써 
70년 가까이가 지났어요. 생각을 좀 해주세요. 일본으로 인해 식민
지가 되고, 조선전쟁이 있고, 아직까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고, 
우리는 만날 수도 없어. 우리 어머니도 남에 있으면서도, 고향이 
있으면서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가고 ‘아이고~ 아이고~ 내 고향
으로 못가나.’ 우리 고향으로 못 가는 건가. 울면서, 울면서 원망스
럽게 말했었어요. 남북은 분단되어도 평창올림픽, 이렇게 만나서 
화해할 수 있어요. 화해해 주세요. 남북이 통일되면 좋아져요. 일본
과 한국도 지금까지 사이좋았어. 일본과 북조선은 최악이에요. 언
젠가 여러분이 어른이 되면 북조선과도 국교가 열리고, 왕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정말 마지막이다. 우리 어머니는 울면서 아리랑을 부르면서 이렇
게 말했어요. ‘전쟁하면 안 돼요. 전쟁하면 모두 죽어버려요. 조선 
사람도 일본 사람도 모두 같은 인간이니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사이좋게 지내라.’ (강연 때) 가장 앞에 앉았던 학생의 머리
를 쓰다듬으면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전쟁하면 안 돼요. 차별
하면 안 돼요.’ 저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어받고 이렇게 느려 빠진 
이야기꾼을 벌써 20여 년 해왔다. 이미 몸은 지쳐서 피폐해졌어요. 
제4장 어머니와 함께한 카타리베 활동   
109
곧 죽을 거예요. 여러분은 다음 세대를 짊어진다! 절대! 전쟁하지 
말아요! 차별을 하지 말아요! 같은 인간으로서 손을 잡고 사이좋게 
살아갑시다. 끝입니다. 감사합니다.
제5장 카티리베 및 평화운동가로 보내고 싶은 
노년기
국적변경과 북한에 대한 생각
시민운동과 카타리베 활동, 그리고 삶의 변화
평화운동과 기록 보존 희망
지역활동가로서의 삶 (2020년 2월 8일 촬영) 
제5장 카타리베 및 평화운동가로 보내고 싶은 노년기   
111
▮ 국적 변경과 북한에 대한 생각
한국으로 바꿨어요. 우리 마누라만 그 조선국적이었는데. 한국에 
가고 싶으면 조선 국적 그 안 된다고 그래서 내가 여권 갱신을 할 
때 영사관 오라고 했어요. 당신은 부부가, 나는 한국이고 마누라는 
조선적. 나는 그거 왜 했느냐 하면은 한국의 통역이라든가, 문화 
활동에서 일본 사람을 데리고 했는데 잘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했
어요. 그래서 나한테 같이 한국에 가자고. 그리고 통역도 좀 해주소
라든가. 그런 걸 자주 부탁받았어요. 내가 또 우리 어머니가 살아계
시니 우리 친척 만나러 한 번 가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1990년대. 
88올림픽 때. 오래됐다. 그때 바꿨어요. 아버지, 어머니랑 같이. 
한국 국적 없으면 못 간다 하니까 효도 마음으로, 그래서 내가 데리
고 가고 싶었지요.
우리 형님도 ‘우리학교’ 선생이고 못 가니까. 나는 조선대학교 
중간에 그만뒀지만도 나는 그때 구속은 안 되는 것이지요. 아버지, 
어머니 데리고 고향 방문하니까 구속은 안 당하지라고 믿어서 나는 
민단에서는 한국 국적으로 바꾸라고. 그래서 민단 가서 쭉~ 돈을 
많이 내게 되었어요. 단비라고 있어요. 한 달에 단비. 그럼 당신은 
15년분 내라고. 한 달 1,000엔이라도 만 오천 원인가. 15년분 내라
고. 그래서 15년분 내고 민단으로 가서, 그리고 한국 국적으로 교체
했어요.
90년대 들어가지고 아들딸,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 국적을 따라
112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가. 자동적으로 우리 넷이 전부 한국 국적 됐어요. 그런데 마누라는 
조선 국적, 끝까지 조선 국적 지킨다고. 그런데 우리 그 광주로 
갈 때, 어쩔 수 없이, 우리 딸아이가 가수였으니까 같이 가게 됐어
요. 딸이니까 마누라도 같이 가고 싶잖아요. 엄마 같이 갑시다. 
그런데 결국 국적 때문에 걸려요. 그래서 영사관에서 바꿔야 된다
고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변경할 때 〇〇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어요. 무
서웠어요. 2층으로 올라가 해서 왜 당신들 부부인데 왜 당신 마누라
는 조선 국적이냐고. 안 된다고. ‘한국 국적으로 바꾸세요’, 명령식
으로 위에서 말하는 식으로. ‘미안합니다. 다음 하겠습니다. 다음에 
하겠습니다.’ 마누라가 안 한다 하니까.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라요. 
아 답답했어요. 바꿔달라, 바꿔달라 했더니 ‘나는 국적 조선 국적. 
조선 사람입니다.’ 한국 국적으로 안 바꾼다고. 우리 마누라는 좀 
외골스러운 성격이었으니까. 그리고 좀 지나서... 광주 갈 때였나, 
우리 딸이 ‘엄마 (국적을) 바꾸자. 조선 사람이라는 자부심만 가지고 
있으면 좋지 않겠냐. 그 자부심만 있으면 좋아요’라고 했어요. 이거 
변경만 하면 된다고. 겨우 바꾸었지요.
우리 딸이 2006년도. ‘조선의 가희(歌姫)’라고 방송에서 1시간짜
리 다큐멘터리 나왔어요. 우리 딸이. 그 2년 뒤였나? 2008년인가 
9년인가. 근데 부산에서 10월 달에 노무현 대통령 때 문화의 달이
라고 10월 달에 부산에서 해운대에서 크게 그 행사가 있었어요. 
그때 일본에서 재일동포예술단하고 조선가무단은 인정을 했으니
까. 일본동포예술단이니까. 내가 일단 책임자가 돼가지고. 실력은 
없는데. 딸도 갔어요. 딸아하고 OB. OB가 세 명쯤 갔나? 초대받고. 
제5장 카타리베 및 평화운동가로 보내고 싶은 노년기   
113
코쿠라(小倉)의 애하고 같이 갔나? 아 그건 광주구나. 그리고 부산
에서는 가무단 우리 딸아하고, 우리 딸아는 현역이었으니까. OB하
고. 3명. 내하고. 아 4명인가. 같이 갔다. 그 때 우리 마누라 같이 
갔지요. 그때 갔어요. 국적 바꿔서. 
전남대 기념촬영
조선에 갈 생각은 없어요. 나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가보고 
이야기도 하고 성묘도 하고 하고 싶지만도 솔직히 가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간다!라는 마음은 없어요! 북한에 대해서는 잘... 찬바람이 
부는 어려움 속에서 벌벌 떨면서 기름도 없고 식량도 부족하고 국민
11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38)
 실제로는 국제 반전평화순례단 ‘2007 스톤워크 코리아(Stone Walk 
Korea)’라고 칭함.
들 생각하면 우리 동포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넉넉하게 먹고 
이래 이래 그 따시게 이래 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질적으로 
그런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요. 
특히 내가 아는 38선에 있는 거기... 38선에 있는 그런 속에서 
활동하는 사람들하고 연결이 있어요. 그 사람들도 마을에 2007년
도에 ‘스톤코리아(Stone Korea)38)’라고. 걸어서 50일 동안. 부산
에서 출발해가지고 그 합천을 지나서 진주 지나서, 광주를 지나서 
그 38선. 임진각! 임진각이라고 있어요. 거기까지 걸어서 행진했어
요. 이래 옷을 입고. 50일간. 2007년 4월 29일부터 그 도착이 6월 
12일 날. 
많은 양심적인 그 평화운동가들 만날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우리 
시민단체하고 한국시민단체가 많이 손잡게 됐어요. 획기적으로. 특
히 규슈지방에. 그런 속에서 나도 38선 DMZ. 정선홍씨, 그 사람들, 
전쟁 일어나면 피해를 입는 거는 38선 가까이 있는 사람들. 먼저 
피해를 입는다고. 그래서 우리는 만약에 저쪽에서 쳐들어오면 오지 
말라고 방위를 해야 된다고, 넘어올 때는 우리는 다 죽는다고, 전쟁 
일어나면 양쪽이. 그래서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평화스럽
게 지내고 기회가 있으면 스포츠도, 축구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윷놀이도 배우고 이런 거를 하고 싶다.
DMZ도 생명평화의 집이라고 있어요. 넓어요. 2만 평 있어요. 
2013년도에 포럼 있을 때, 우리 초대받아서 7명 정도. 이토 선생, 
우치오카 선생도. 그래서 그런 데서 일하고 싶어요. 비약한 이야기
제5장 카타리베 및 평화운동가로 보내고 싶은 노년기   
115
지만요. 그런 데서 38선에서 일하고, 긴장 상태로 만들지 말고. 
완화시키고, 서로서로 스포츠도 하고 관계자도 만날 수 있으면 만나
고. 그 이래 사이좋게 하자고. 전쟁 절대 하지 말고.
▮ 시민운동과 카타리베 활동, 그리고 삶의 변화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의 교우회 (2000년, 두 번째 줄 좌측) 
 
기본은 차별을, 차별과 식민지 시대의 억압 안에서 기어오르고, 
그런 운동, 반차별, 반전쟁. 전쟁을 절대로 하면 안 된다. 차별하면 
안 된다. 그건 기본으로 계속 머릿속에 있었어요. 마그마처럼. 그 
안에서 조선인도 일본인도 평등하다. 그런 것으로... 반전쟁운동, 
116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반차별운동. 내가 나섰어요. 
그런데 주변에 좋은 일본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과 
손잡고, 서로 도와주고 밀어주고 이래 하면서 나도 바뀌어졌어요. 
처음, 개인적인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이걸 내셔널적으로 넓은 국제
적인 의미로, 일본이나 조선만에 구애되지 않고, 세계적으로 반전
쟁. 미국이 베트남을, 조선전쟁을 해서 미국의 군산 체제는 돈을 
많이 벌었을 거잖아요. 그런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고. 그리고 식민
지 지배로 조선인들이 바보 취급을 당했던 일이 있었잖아요. 우리 
아버지들이, “이놈 새끼 우리들을 억지로 연행시켜놓고, 너희들. 
일만 시켜! 너희들. 조선, 조선인이라고 바보 취급하지마, 이놈 새
끼.” 침을 날리면서 아버지들이, 내가 어릴 때 생활 속에서 자주 
봤었어요. 조선인 그만두고 싶었었어요. 조선인이 싫어서. 그래도 
내가 고등학교 때, 우리학교에서 배우고, 역사를 배우고 우리말, 
우리 역사, 우리 문화를 배우고 나는 나쁘지 않다. 조선인으로 태어
났고, 자존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부모들의 
쓰라린 역사를 갖다가 후세에 알려야 한다. 그렇게 내 자신도 바뀌
어갔어요. 그건 오로지 우리 민족학교. 그리도 또 하나는 훌륭한 
일본 사람, 시민운동하는 그 양심적인 일본 사람. 그 속에서 같이 
손잡고 활동하면서 나는 각성이 됐어요. 
어머니도 그래요. 어머니도 가자 해도 가기 싫다. 옛날에도 얘기
했지만. ‘무슨 좋아하나. 싫어하기만 하지. 안 간다.’ 그런데 내가 
설득해서 내가 뭐 ‘어머니 갑시다, 갑시다.’ 그리고 억지로, 내가 
뭐 손잡고 데리고 갔어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의 사람들 만나가지고 어머니도 차차로 차차로 변하셨지요. 
제5장 카타리베 및 평화운동가로 보내고 싶은 노년기   
117
39)
 실제로는 5월 26일. 청춘학교는 1994년 5월 26일, 기타규슈시 야하
타 니시쿠 아오공민관에서 개교하였음. 청춘학교는 일본어 글씨를 이해
하지 못하며, 일본인 사회나 일본인화된 재일 2세, 3세로부터도 고립되
기 쉬운 재일한인 1세의 문자 학습을 지원하면서 친구 만들기와 교류
를 촉진하는 활동임. 개교 당초, 이 학교에 모인 사람들은 재일한인 여
성 15명 정도(50~80대 후반)였고, 이들이 학생으로서 참가하였음. 이 
청춘학교는 1994년 여름, NHK의 원더랜드규슈(ワンダーランド九州)라
는 프로그램에서 방송되었음. (참조: 福村昇平 “識字の経験的意味”, w
ww.hues.kyushu-u.ac.jp/education/) 
40)
 민단신문에서도 취재.
   https://www.mindan.org/old/shinbun/000906/topic/topic_j.html
어머니가 하는 말이 아니고, 그 일제시대 우리가 식민지 지배를 
받던 시대에 일본 사람들은 귀신같은 일본 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일본 사람도 좋은 사람이 있구만. 어머니도 각성 됐어요. 한이 맺힌 
인생이 조금씩 녹아가지고, 얼음이 녹는 것처럼, 어머니도 달라졌
어요. 그리고 어머니 학생들에게 좀 이야기해달라고, 처음에는 싫
어했지만 차차로 어머니가 아~리랑 아리랑 부르면서 전쟁하면 안 
된다. 전쟁하면 다 죽는다. 일본 사람도 조선 사람도 다 같은 사람이
니까 사이좋게 하라. 친구가 돼라. 이래 어머니도 말하게 됐어요. 
학교 선생님도 어머니 인정하고. 모자 이야기꾼 활동과 역사 증언자
가 됐어요. 
어머니도 1994년에 아노(穴生), 아노공민관에서 문예, 문예운동 
시작했어. 94년 5월 달. 5월 22일 날39). 학교가 태어났어. 개교를 
했어요. 그래 어머니도 거기 가서 NHK가 약 1년간 취재를 해가지
고 후쿠오카에서 야하타까지. 하나 만들어가지고 94년 7월 달에 
석 달 만에 ‘할머니들의 청춘학교(ハルモニたちの青春学校40))’랑 
30분짜리 방송을 했어요. 그래서 또 9월 달부터 (취재하러 왔어요). 
118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매년 3월 달 전국 졸업식... 아 수료식이라고 있어요. 수료식이 3월 
16일인가 있어요. 상장을 받았어. 그리고 그걸 NHK가 전국 방송에
서 했어요. 오~ 그 방영이 컸어요. 동경이나 다른 데서도 보러 왔어
요. 구경할 수 있냐고 NHK도 주식이 올라가고. 그 방송 때문에. 
아 좋은 방송이었다고. 칭찬받고 박수받고. 우리 어머니가 제일 나
이 많았어요. 아~ 강금순 강금순, 그렇게 유명하게 됐어요. 그리고 
제목이 두 번째로 “자기가 이름을 쓰고 싶었다(自分で名前を書きた
かった)”. 제목을 달았죠. 처음에는 할머니들의 청춘학교. 두 번째
는 자기가, 자기의 이름을 쓰고 싶었다. NHK 4월 초하룻날. 음... 
1994년에 첫 번째니까. 전국판은 다음 년인가 95년 사흘 초하룻날 
방영했지요.
청춘학교 수료식 (1995년 3월)
제5장 카타리베 및 평화운동가로 보내고 싶은 노년기   
119
어머니 강금순 청춘학교 수료식 축하 (1995년 3월)
제철소의 역사와 강제징용 이야기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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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현재 제철소 모습
▮평화운동과 기록보존 희망 
마지막에 목숨은 거기서 평화운동에 바치고 싶어요. 여기 내 테이
프에 있을 때도 카메라와 비디오. 소리가 나오는 테이프가 1만 개... 
귤 박스 10개쯤 있어요. 전부 다 내용은 우리학교 민족학교 입학식, 
여름방학, 문화재, 겨울방학, 무슨 행사 무슨 행사. 그 인권집회가. 
그런 거 다 기록해왔어요. 뭐 쓸데없지만도 만약에 관계자가 있으면 
도움이 돼요. 또 내가 찍어서, 찍어서 자료 해가지고 남겼어요. 아들
은 DVD로 정리하고 했는데 돈이 든다고. 나한테 욕소리하지만도 
제5장 카타리베 및 평화운동가로 보내고 싶은 노년기   
121
나는 목숨 걸고 여기에 기록해 왔어요. 
 
관련 행사 기록 DVD, ‘재일조선인사회, 가타리베 모자의 고뇌’ 
어머니 강금순 등 관련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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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엄청 많이 돈 드니까요. 현재는 못 하겠어요. 언제가 하고 싶지만 
지금은 뭐... 돈이 들고. 암튼 나는 문자로 남기는 걸 잘 못 해요. 
문장을 못 쓰니까. 부끄럽고 뭐 대학까지 갔지만도. 나는 책을 안 
읽었어요. 저기 말로서는, 입으로는... 말로는, 말로서는 그 설명을 
잘해요. 말하면 학생들은 배 할아버지 재미있다고 하지요. 어머니
가 살아계셨을 때는 배상과 둘이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하면 박진감 
있는 이야기 들을 수 있다고. 사람들 그렇게 말해요. 근데 문장으로
서 내가 이때까지 남기지 못했어요. 나중엔 제가 가진 자료로 기록
을 남기고 싶네요.
찾아보기
(ㄱ)
강금순 / 12, 18
강연 / 70, 79, 97
강제노동 / 17, 90
강제연행 / 13, 16, 56, 62
강제연행을 생각하는 모임 / 68, 
71, 73, 96, 115
강제이주 / 3
결혼 / 10, 12, 48, 50, 51
계몽운동 / 67
고향 / 10, 19, 54, 86, 107
국방저금 / 11, 17
국적 / 110, 111
귀국운동 / 38
규슈 / 81, 113
규슈조선고등학교 / 38
기타규슈 / 20, 87
(ㄷ)
동포 / 18, 20
(ㅁ)
마와타리 기념비 / 63, 69, 72
마와타리 사택 / 56, 63
마와타리 조선인 수용소 / 57, 68
마와타리 조선인수용소 / 56, 62
문예학교 / 68
미이케광업소 / 56, 58
민족차별 / 62, 70, 104
(ㅂ)
배동록 / 76, 85
배동선 / 98
보존하는 모임 / 56, 58
북한 / 110, 112
(ㅅ)
사택 / 3, 14, 25, 55, 62
석탄산업과학관 / 59
시모노세키 / 13, 48, 88
시민단체 / 55, 113
시민운동 / 54, 66, 68, 101, 
114
식민지 통치 / 20, 50
(ㅇ)
아리랑 / 70, 73, 116
야하타 제철소 / 12, 16, 31, 87
야하타공업고등학교 / 38
야하타대공습 / 93
오오무타시 / 56, 57, 58, 62, 72
요네오중학교 / 59
이산가족 / 29
(ㅈ)
전쟁 / 20, 25, 29, 81, 85, 87, 
90, 93, 101, 105, 113
제국주의 / 70, 86, 106
조선가무단 / 50, 104
조선대학교 / 39, 49
조선반도 / 19, 81, 85
조선인 / 19, 34, 38, 56, 62, 
87, 93, 95, 101, 104, 
115
찾아보기
조선전쟁 / 19, 29, 95
조선통신사 / 84
조센징 / 35, 95
조총련 / 42, 58
증산 / 16
지문반대운동 / 54
(ㅊ)
차별 / 11, 50, 62, 70, 97, 
102, 104, 115
창씨개명 / 34, 86
청춘학교 / 98
최창화 / 54
치쿠호 / 31, 55, 62, 69
(ㅋ)
카타리베 / 70
카타리베 활동 / 70, 75, 114
(ㅌ)
토로쿠 / 34, 35
(ㅍ)
평화 / 57, 84, 105
평화운동 / 119
(ㅎ)
하나오중학교 / 34
합천 / 10, 86, 87
호시하라 / 34, 86
히라노초등학교 / 34, 35, 41
An Oral Life History of Kataribe activist, Bae Dong-rok 
by Shinkyu Park, Hiroko ITO
Copyright ⓒ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Published by BookandWorld. Daegu, Korea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28
재외한인 구술생애사 총서 28
카타리베 활동가 배동록의 생애사
2020년 6월 20일 초판 발행
지은이 박신규 이토히로코 
펴낸이 김영모, 
펴낸곳 도서출판 책과 세계   등록 | 2007년 2월 2일, 제2010-000004호
주소 | 41565 대구광역시 북구 경대로 95(복현동)
전화 | 053-953-2417   전자우편 | bookandworld@naver.com
ⓒ경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인문사회연구소 
 
ISBN 978-89-87984-92-4  94330   ₩12,000
ISBN 978-89-94255-28-6  94330(세트)
*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책과 
세계 양측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 이 저서는 2019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9S1A5C2A02081987)
* 이 도서의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예정도서목록(CIP)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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